고 이예람씨의 살신성인

고 이예람씨의 살신성인

얼마 전 극단적 선택을 한 공군 중사 고 이예람씨의 명복을 빕니다.

모두가 자신을 죽였다고 하는 말이 왜 그렇게 마음에 남는지~

여성 인권 문제를 오랫동안 다루어 왔지만, 아직도 변하지 못한 상황을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사실 변명 같지만, 이일은 인류문화의 변화에 관한 문제로, 풀어야 할 것이 많아 어렵습니다. 특히 여성계에 진입이 어려운 남성으로서 성평등을 다루는 데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하여 우리는 고대 여성들의 빽(백그라운드)이였던 마고삼신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 보는 것은, 여권신장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이 듭니다. 즉 수만 년을 이은 마고 신앙이 현대 종교로 성립된 것은 아니지만, 삼신을 체험하는 인류의 반인 여성들이 마고 삼신이 제1원인으로 절대 존재임을 믿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는 대모신의 후손으로 여신이나, 여성 진인, 여신선 같은 분들이 구원의 역사를 펼쳐갈 수 있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지요.

참고로 부계사회에서 여성을 남자보다 못한 존재로 무시하였습니다. 하지만 고조선의 여성들이 체격이 좋고 품위가 있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하여 고대사회에서 마고를 창조주로 믿은 것은 모계사회가 오랫동안 유지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부도지의 창세신화가 대모신 중심의 모계사회를 전한다는 것 입니다. 이는 모계사회가 없었다는 서구의 일부 학자들의 주장과 배치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아무튼 부도지의 모계 창세신화는 지구촌 시대를 맞이한 신인류에게 위기 극복을 위한 씨앗을 나누어 주고 있음을 느낍니다. 이는 마고 삼신이 인간은 나눔을 익혀 본향으로 되돌아오라고 당부한 것을, 오늘날 과학기술로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중앙집권이 아닌 분권과 네트워크, 관계의 삶을 제시한 것이 구현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여 할머니에게 부탁하듯이 마고 대모신에게 기도를 하면 여신이나 대행자가 도움을 줄 것으로 믿습니다. 물론 창교가 되지 않아 구체적이지 않지만, 우리 어머니들이 장독대에서 기도했던 것처럼, 할머니에게 부탁하듯이, 마고님과 대화하듯이 하면 될 것입니다. 물론 이웃의 도움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여 고 이예람씨가 마고의 도움을 받지 못한 것이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극단적 선택을 하면서까지 성차별을 고발한 사실은 여권신장에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보입니다. 그녀의 살신성인 정신을 여성들은 공감하리라 생각됩니다. 생명의 시작과 끝인 마고의 품에서 영면하길 바랍니다.


소금물은 이제 그만

소금물은 이제 그만

산업사회는 소금물 먹는 사람들로 만들고 있다. ‘풍요속의 빈곤’은 현대사회의 특징이다. 만족할 수 없는 소유의 삶을 산다.

사무실을 단장하기 위해 페인트업자를 불렀다. 깔끔하게 잘해서 만족했다. 평소 잘 아는 업자의 소개로 만난 사람이다. 마무리할 때 즈음해서 부탁 하나 덜어줄 수 있느냐고 했다. 순간 공사비의 일부를 받고 싶어서 그런가? ‘무슨 사연인지 어디 한번 풀어나 보이소’

씨름선수인 장남이 전국체전에서 고등부 2등을 하여 모 고등학교에 입학 될 것을 믿었는데 탈락이 되어 억울하다고 한다. 삼등은 입학했다고 한다. 이미 결정 난 일이니 참 난감하다. 얼마나 억울했으면 염치불구하고 부탁을 하나 싶었다. 사정은 이해했지만 잘 모르는 사람이라 부탁을 들어주기 어려워서 거절했다. 실제로 집단의 속사정을 모르는 일은 해결하기 어렵다.

갑자기 표정이 보기 민망할 정도로 굳어졌다. 그래도 일을 하면서 한 번 더 부탁하는 것이 아닌가. 아들의 장래를 위해 광주에서 대구로 이사를 왔다고 하며 눈물을 글썽인다. 체격도 좋은 사람이… 가능성 있는 아들 덕에 소금물의 목마름은 더했다. 이만기 같은 천하장사가 꿈이었던가 보다. 자식을 키우는 입장이라 이해를 못하는 것도 아니지만 하필이면 왜 나인가.

한 번도 힘자랑 돈 자랑한 일이 없어 상관이 없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푸라기도 잡고 싶은 심정이 있을 때가 있다. 세속에서 별꼴 다 보고 살은 사람이 왜 그것을 모르겠는가? 사정이 너무 딱한 것 같아서 ‘수일 내에 한번 알아 볼 테니 믿지 말고 기다려 보이소’라고 위로를 했다. 자식이 전 재산인 그에게 인간적으로 찡한 것을 느꼈다.

당시 여론조사 심의위원을 하던 때라 지역책임자를 불러 조사하고 알려주라 하였다. 지역감정으로 인한 것은 명분일 뿐 돈 문제임을 알았다. 실제로 지원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패쇄적일 수밖에 없다. 학교장을 만나 부당한 것을 시정하도록 부탁하니, 다음날 조처를 하였다고 연락을 받았다. 업자는 너무나 좋아하며 말보르 한 갑을 손에 쥐어주었다. 그의 수준에서 최고의 대우다.

양담배를 피우면 벌금을 매겼던 때라 부담이 되었다. 잘못하면 개망신을 당할 수도 있었는데 집에서만 피우니 별탈이 없었다. 숨어서 피우는 말보르 담배를 친구와 나누어 피우니 더 맛있다. 그의 갈증을 해결하니 나의 갈증도 해결된 듯했다.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꼭 잡는 두 손의 따뜻함은 아직까지 남아있다.

중앙정치에 진입하면서 욕구의 정점에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지구당에서 사무국장이 회의가 끝난 다음 독대를 청한다. 큰 식당을 하는 여사장이 만나자고 한다. 정치자금과 관련이 많은 사조직에 참여하길 바라는 것이다. 아들이 정치에 관심이 많다고 한다. 이권 개입이나 승진을 원하는 사람들보다 좋다.

단지 정치의 속살을 모르는 분이다. 정치공학적인 입장에서 평범하게 살 수 없는 사연을 잘 모른다. 장사를 하니, 정치인의 모습이 좋아 보였던 것 같다. 사극을 좋아하는 분이다. 자식이 권력자가 되길 바라는 갈증을 조금이나마 채워주었다. 정치는 주고받는 원칙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권력에 갈증을 느끼는 사람에게 충족시켜야 권력이 유지된다.

주변에는 권력이 필요한 사람으로 가득하다. 똥이 더럽다고 다 빼면 죽는다는 원리를 이해하는 사람들이다. 다양한 계층에서 활약하는 지도층들은 자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갈증을 해소시켜야 한다. 명분은 지역사회발전이지만 욕구 충족이 우선한다. 정치는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힘든 사회일수록 권력의 갈증은 심해진다. 탐욕을 부추기며 살아가는 사회는 위험하다.

권력과 욕구는 소금물을 닮았다. 갈증의 정점에서 마셨던 소금물을 거절하면서 인생이 달라졌다. 수수한 삶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정치는 힘든 과제이다. 소금물 먹은 사람들과 살아온 삶은 힘들었다. 훌륭한 정치지도자의 민주적 권위를 존중하고 그들의 노고에 감사하는 이유이다. 소금물을 끓고 관계의 삶을 살고자 하니 편하다.


바지태운 살얼음

바지 태운 살얼음

살얼음은 바지를 태웠다. 신천 개울가는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다. 겨울이 지나갈 때쯤 얇아진 살얼음에서 개구쟁이들은 담력을 내기하며 새봄을 맞이한다. 얼음이 깨어져 물에 빠져야 끝나는 놀이다. 얇아진 얼음은 바스락 소리를 내며 금이 간다. 돌아가고 싶은데 호기심은 더하다. 조금 더 조금 더 하다가 깨진다.

들어갈 사람 없냐고 용기를 시험한다. 친구들이 ‘니 들어갈 수 있제’한다. 안가면 용기가 없는 겁쟁이가 된다. 울며 겨자 먹는 꼴이다. ‘그래 가보께’하면서 조심조심하며 걸어간다. 어김없이 물에 빠진다. 멀리 갔다고 자랑을 한다. 부들부들 떨면서도 허세를 부린다. 단지 골목대장이 된 것 같은 우쭐함이 보상이다. 좋아하는 여자아이 앞에서 잘난 척한 것은 덤이다.

꼬마들이 나뭇가지를 모아 모닥불을 지피고 추위를 녹인다. 양말과 옷을 말리고 화기를 온몸에 불어넣는다. 불똥이 튀는 줄도 모르고 엉덩이를 들이민다. 바지 태우지 말라고 한 것을 까마득하게 잊고 뜨거울수록 좋다. 겨울 바지 색깔이 탁해서 작은 구멍이 나도 잘 모른다. ‘우와’라는 함성과 박수를 받은 대가는 추워서 떠는 것과 새 바지를 사는 것이다.

어떤 날 어머니는 노란 골덴 바지를 사주셨다. ‘이거 좋은 기데이 태우지 마래이’하며 좋아했다. 자랑이 하고 싶어 개울가에 갔다. ‘야! 니 바지 좋네’라고 부러워한다. ‘우리 엄마가 억수로 좋은 기라고 카더라’며 우쭐거린다. 누군가 살얼음 이야기를 한다. 새로 산바지라 망설이다가 들어간다. 결국 빠져야 돌아올 수 있었다. 다음에는 누가 머래도 안해야지 다짐을 하면서 터벅터벅 걸어 나온다.

그날은 바람이 불어 모닥불이 활활 타올랐다. 친구들 앞에서 자랑하듯이 궁둥이를 더 내밀었다. 바지가 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옆에 친구가 ‘야 니 궁디 시커머타’. ‘야 너금마한테 마 죽는 데이’라고 걱정을 함께 해주었다. 병 주고 약주고 해도 고맙다. 궁둥이가 익지 않았으니 다행으로 생각했다. 아 ~ 오늘 처음 입은 새 바진데. 물렁한 빗자루 들고 다니는 모습을 떠올린다. 집에 가서 혼날 것을 상상하니 괴롭다. 자랑하려고 놀이터에 간 것이 후회되었다.

어머니가 언덕에서 큰소리로 ‘진수야 밥무래이’하신다. 용기를 내어 집으로 향했다. 엉덩이가 ‘시커먼스’다. 한 걸음 한 걸음 살얼음을 걷는다. 지금까지 태운 바지와는 다르다. 오늘 입은 노란 골덴바지는 엉덩이 전체로 뚜렷하다. 친구들이 걱정하면서 놀리면 가슴이 조여 온다. 집으로 가는 길에 사람들이 나만 보는 것 같다. 아주머니가 ‘쯧쯧’하며 혀를 찬다. 평소에 듣는 소리보다 크게 들린다. 동네 아저씨는 ‘궁디 안 익었나 니 오늘 죽는 데이’. 대문에 들어서려니 발이 딱 붙었다.

하지만 엄마는 새 바지를 입혀주시면서 ‘니 감기 걸리면 고생한 데이’라고 하신다. 나무라는 것이 없다. 바지보다 자식의 마음에 상처를 줄까 봐 전전긍긍했던 부모님이 고맙다. 마냥 즐겁게 사는 모습을 좋아했던 것 같다. 고통을 주기보다 생명을 만끽하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대구지역의 산과 들을 돌아다니기가 바쁘다. 우리 집에서 제일 바쁜 사람이었다. 아침밥을 먹고 나면 저녁쯤에 돌아오는 개구쟁이였다. 무엇이 그렇게 궁금한 것이 많았는지.

‘부자자효’(父慈子孝) 부모가 자비로워야 효자가 된다는 사자성어다. 만행의 근본인 효는 부모로부터 이루어진다는 의미이다. 효의 연장이 충이라면 좋은 정부가 되어야 좋은 국민이 된다는 이야기다. 절대 왕조시대 독재를 하면서도 백성에게 충을 강요한 것은 모순이다. 어릴 때 어리석음을 사랑으로 감사 준 부모님을 존경하게 된다. 부모의 자비는 나의 신념의 배경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는 관용의 정신으로 만들어져서 좋아한다. 인간 이성의 한계를 인정한 체제이다. 경제민주화를 동의하는 이유이다. 민주주의를 자비로운 체제로 생각하는 것은 부모의 영향인 것 같다.

공부하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성적도 묻지 않는다. 공부를 안 하면 어떻게 된다는 협박도 없다. 하루는 집에 들어오면서 아버지가 ‘에이 배운 놈이 더하다는 말이 다 맞네’ 하면서 방에 들어갔다. 인정머리도 없고, 상식도 통하지 않았던가 보다. 지식인의 도덕적 타락으로 인한 패망으로 민족이 종(노예)으로 살았던 일제 식민의 고통 때문일까? 공부가 필요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암시한 한마디가 삶을 해석하는 기준이 되었다. 바지 태운 살얼음은 부모의 따뜻함을 알게 한, 일등 공신이다.


파도의 위력

파도의 위력

민중의 거대한 파도가 배를 침몰시켰다.

우르랑 쾅 우지직 퉁, 배가 풍랑을 맞으며 헤쳐나가는 소리다. 객실에서는 으악 어이구 웩하며 뒹굴고 있다. 배가 뒤집힐 것 같은 흔들림에서 아비규환이다. 충무 통영을 거쳐 부산항으로 가는 중에 일어난 일이다. 중학교 수학여행으로 큰 파도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토하지 않고 띵하지도 않은 자신을 발견했다. 마도로스 체질인가. 어릴 때 초등학교가 십리 길이어서 지각을 하더라도 밥을 꼭 챙겨 먹였던 어머니 덕분이다. 오로지 건강이 최고란다. 아버지가 일제 징용으로 가서 학대와 굶주림으로 얻은 골병으로 힘든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궁금하여 뒤뚱하며 갑판으로 올라갔다. 산더미 같은 파도는 배를 삼킬 듯했다. 갑자기 배가 웅덩이에 빠지듯이 빨려 들어간다. 마치 괴물 아가리 같은 파도 구덩이의 깊이는 놀라웠다. 으악 하는 외마디를 지르는 순간 파도가 뱃머리를 친다. 바닷물 세례를 받아 정신이 아득하다. 떨어지지 않기 위해 기둥을 힘껏 붙잡고 주위를 둘러본다. 파도를 따라 유유히 움직이는 놀라운 광경이 펼쳐진다.

선장의 항해술에 감탄했다. 자라는 학생들의 수학여행이라 애를 쓰신 것 같았다. 무서웠던 풍랑이 선장의 노련한 항해술 덕분에 편하게 느껴져 아래층으로 갔다. 친구들은 정신이 없는 가운데 연신 욕설과 원망을 한다. 정말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니 가족이 함께한 해수욕장에서 행복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

아침 일찍 포항 해수욕장에 가기 위해 열차를 탔다. 난생처음 타보는 기차라 얼마나 신이 났던가. 스팀과 검은 연기를 뿜어내면서 칙칙폭폭 소리를 내며 달렸다. 덜커덩덜커덩하면서 삑~ 기적소리와 함께 박자를 맞춘다.

열차에서 파는 달걀과 삼성사이다, 드롭스 등 없는 게 없었다. 달걀을 싸주셨다. 굴을 지날 때 창문을 미처 닫지 못해 검은 연기로 가득했다. 기침하면서도 먹는 달걀 맛은 일품이었다. 송도에 도착하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였는지 인산인해였다. 처음 바다를 보는 순간 놀랐다.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는 부서지고 이어지면서 시원한 소리를 들려주었다. 넘실대는 파도는 수와 소리를 내며 더위를 식혀주었다. 파도가 만든 동글한 예쁜 조약돌을 갖고 놀았다. 엄마에게 “엄마 우리 동네 돌보다 동그랐네”하니 “니 올 때 갖고 놀라고 파도가 오랫동안 일해서 이쁘게 만들어 논기다.” “우와 진짜가.” 부모님과 고무 튜브를 타고 파도를 즐기는 모습을 그리며 잠이 들었다.

갑자기 욱! 하는 소리에 잠이 깼다. 주변 친구들 얼굴이 노랗다. 멀미하고 토하여 더 토할 것도 없었다. 얼마를 지났는지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파도의 위력을 실감하고, 파도 타며 해쳐 나아가는 것을 본 수학여행은 좋은 추억으로 자리 잡고 있다.

뿐만이 아니라 요즘 집채만 한 파도를 슬기롭게 극복한 선장이 생각난다. 우리 앞에 다가온 격동의 시대를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먹고살기도 바빠 책 읽을 여유도 없이 허둥거리며 살아간다. 칠포시대, 헬조선이라는 신조어가 서서히 말라 죽는 사회임을 암시한다. 달콤한 말을 의심하는 시대가 되었다.

우리는 거센 파도를 견디며 살아왔다. 험난한 여정이 우리를 조약돌처럼 동글동글하게 만들었다. 파도를 넘는 지혜도 갖추었다. 몽골 인디언 등 모두가 흩어졌지만 동일 민족이 한반도에 팔천만 명이 있다는 사실이 증명한다. 몽골족의 중심을 이루는 단일 국가로 남아 한류를 일으키고 있다.

광화문에서 나라가 망하는 꼴은 볼 수 없다며 투쟁의 파도로 무너뜨렸다. 지난날 혹독한 경험이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기 좋게 만들어졌음을 증명했다. 우리 홍익인간들은 새로운 루트를 개척할 수 있는 저력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생명나무

생명나무

보호수 느티나무는 삼신과 소통하는 안테나다. 가야산 자락 상비계곡으로 가는 길에 웅장한 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고령 덕곡면 원송리 심어동 실개천다리를 건너, 마을 입구에 수문장처럼 우뚝 서 있다. 논밭의 한가운데 있어서 뚜렷하게 보인다. 언제나 보아도 지구처럼 동그란 모습은 신령하게 보인다.

여름에는 시원한 그늘을 마련해주고 가을에는 낙엽으로 운치를 더해주었다. 겨울에는 나뭇가지로 자태를 뽐내었다. 봄에는 새파란 잎사귀로 다시 태어났음을 보여주면서 매력을 발산했다. 사계절 달라지는 농촌풍경과 가로수는 조화를 이루었다. 차를 멈추고 심호흡을 하면서 눈을 부릅뜨고 풍광을 담았다. 자연의 경이로움에 감동하는 곳이다.

몇 해 전 궁금하여 가까이 가서 보았다. 수령이 몇백 년이 되는 느티나무 세 그루가 함께 하고 있었다. 세 그루를 한곳에 심은 느티나무는 처음 보았다. 천년에 걸쳐 만들어진 것 같은 웅장한 둥근 모양을 만들어낸 비밀을 알게 되었다. 주위에 살피 상과 제단이 있었다.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우람한 자태는 감동과 함께 오래전 관람한 동제가 떠올랐다.

어떤 마을 보호수 아래서 동제 굿을 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흥미진진하여 참관하고 나누어주는 떡을 먹으며 재미있게 구경하였다. 제사장 무당의 구슬픈 내용을 들으면서 눈시울을 적셨다. 자신이나 우리가 겪는 말 못 할 고통의 대다수가 비슷해서인지 공감을 가졌다. 메세이지를 전달하는 랩처럼 들렸다. 어떤 이는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면서 한을 풀어간다. 일제가 미신이라고 철저히 배격했던 이유가 우리들의 정체성으로 통합이 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었다. 좌우간 무당들은 슬픔과 환희심을 갖게 하며 치유하는 묘한 능력자들이다.

현실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행한 잘못의 반성을 몸으로 표현한다. 용서하고 노여움을 풀어가며 화해를 한다. 조직도 없는 원초적 신앙으로 우리를 위로한다. 협박도 없다. 나눔을 삶의 해법으로 제시한다. 군더더기가 없는 단순함은 감동으로 연결된다. 떡으로 나눔을 실천하는 것으로 행사는 막을 내린다. 볼거리가 별로 없었던 옛날에 요즘 연예인처럼 인기가 있었을 것이다. 다른 종교처럼 발달할 수 있었을 텐데. 진보가 중요함을 느꼈다. 자존심의 근원인 자아를 버리고 무아로 돌아간 시간은 행복했다.

그렇게 많은 한을 일시에 소멸하고 다시 시작하는 과정을 보았다. 자기로부터 시작한 원인이 결과로 나타난 것을 반성하고, 새로운 원인을 만들어 새 인생을 살고자 다짐을 한다. 우리의 민속신앙은 떡으로 나누며 배부르게 하고 애환을 노래해서 마음마저 정화한다. 오직 현재를 철저히 살고자 다짐한다. 수백 년 전 평균수명이 이십 대 중반이었음을 상기하니 한풀이는 생활 가운데 있었음을 알게 된다. 삼신이 언제나 우리들의 중심에 있었던 이유가 아닐까?

한그루 느티나무도 웅장한데 왜 세 그루를 심었나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모계사회의 유습인 서낭당을 오가며 자식들이 무병장수하길 어머니들이 빌었던 흔적으로 나타난다. 나무 심기를 주도한 사람이 모계 절대 존재인 삼신을 생각하며 세 그루를 심었다. 그는 민속학자로 우리들의 정체성을 생각하며 느티나무 세 그루를 심었을 것이다.

‘우리는 창조주 유일신을 믿은 최초의 민족이다. 위험할 때 부르는 “아이고 하느님”이 마고 삼신이다. 마고를 믿는 여러 민족이 모인 민족이 한민족이다. 모계 유일신으로서 마고 할머니의 후손이라고 믿는다. 우리들의 신앙체계는 만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마고 하나님의 두 딸 궁희와 소희를 합쳐서 삼신이다. 인간과 직접 소통하는 신은 중간 신으로 궁희와 소희는 여제사장과 소통을 한다.’

서낭당에서 제의할 때 떡과 과일 등을 놔두어 주위 생명이나 배고픈 이방인 등이 먹게 했다. 홍익인간으로 살고자 했던 우리는 까치밥을 남겨둔 것처럼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이다. 느티나무 잎사귀를 말려 가루 내어 만든 떡은 보관이 쉽고 나누어주기도 좋으며 맛도 좋다. 부인병에도 좋다고 한다. 모계사회와 함께한 느티나무는 여성의 몸과 마음을 도와 삼신과 교통하는 창구이다.


할머니의 지름길

할머니의 지름길

할머니가 다닌 소리 길을 좋아한다. 일면식도 없는 할머니의 모습을 생각나게 하는 아름다운 곳이다. 거창 모동리에서 성주 대가면을 가는 지름길이다. 거창 수도산 자락 인현황후 길과 연결된 소리길이다. 할머니에게는 생명을 지키기 위한 지름길이다.

거창은 풍광이 뛰어난 곳이다. 산수화의 소재가 되는 곳이다. 이에 걸맞게 질 좋은 한지를 모동리에서 많이 생산했다. 무명 화가로서 할아버지는 딸만 있는 전주이씨 가문에서 귀하게 자란 막내딸과 혼인하였다. 거창읍에서 주요 행사나 잔치 등에 쓰이는 병풍 가계를 하였다. 비밀연락책으로 적합한 업이다.

1920년대 초 거창읍 일제경찰서(헌병대)에 독립운동 일 세대 동료들이 구금되었다.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경찰서를 습격하였다. 일제에 발각이 되어 할아버지를 포함해 여러 사람이 총에 맞아 돌아가셨다. 일명 거창 경찰서 폭거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 아버지가 모동리 무월부락에서 태어 난지 칠 날이다.

동네 사람들이 소식을 전하면서 아버지의 형과 누나는 큰집에 두고 피하라고 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초라한 장례를 앞산 중턱 먼발치에서 보았다. 얼마나 비통했겠는가? 소리 길로 넘어가면서 보니 동네에 불이 나고 난리였다고 한다. 할머니는 갓 태어난 아버지를 업고 해산도 제대로 못한 채 큰길을 피해 소리 길로 성주에 갔다.

경남에서 역할을 했던 할아버지의 족적을 피해 종씨였던 경북 성주의 심산 김창숙의 집에서 잠깐 살았다. 친정집으로 갈 수도 없어 할아버지 동료의 도움으로 증산면 수도산 중턱 화전민으로 핏덩이를 키우며 살았다. 초라한 건물을 보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일제의 눈을 피해 막내아들을 보살펴야 한다는 일념으로 하루하루를 견뎠다.

아버지가 일곱 살 되던 해, 재가하려고 모동리 큰집에 데려다주고 나오면서 작별을 고했다. 눈치를 챈 아버지는 할머니를 따라 나서서 평생을 함께 했다. 할머니는 아버지의 형과 누나를 무척 그리워했지만 돌아가시는 날까지 보지 못했다. 언제나 대로가 아닌 소리 길로 피해 다녔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아버지가 무학이라는 사실로 입증이 된다. 지금은 작은 동네로 변한 사실에서도 이해된다. 할머니에게 소리 길은 생명을 살리는 지름길이다.

할머니는 내가 태어나기 칠 날 전에 돌아가셨다. 우연히도 할아버지와 같은 날 돌아가셨다. 얼마나 그리웠으면 같은 날 돌아가셨을까? 할아버지를 만났을까? 나라를 잃은 설움보다 삼십대에 청상과부가 되어 힘겨운 삶을 살았던 할머니는 해탈했을 것이다. 할머니 덕에 내가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어깨가 무거워진다. 녹색 생명 운동이나 여권신장에 관심을 가졌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이다. 고마운 마음으로 제삿날 인사를 한다. 할배 할매 고맙심더.

항상 새로움을 안겨주는 자연은 살아있음을 알게 한다. 나보다 오래 살아가면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자연은 우리에게 암시를 준다. 다시 오게 됨을 일러준다. 숲속의 나무에게 묻는다. 다시 올 때 그리운 너희들을 볼 수 있을까? 내세를 믿는 이유가 어떠한 형태로든 다시 만나고 싶다는 그리움에 있는 것 같다.

숲을 가꾸는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안고 간다. 할머니가 간 소리 길 풍광에서 위로를 받는다. 평민이 되어 청암사로 걸어갔던 인현왕후의 발자취를 함께한 할머니의 생명 길을 따라가 본다. 그 길을 걸으면서 해야만 하는 일을 방해받아 겪었던 어려움은 별거 아님을 일깨워준다. 국가의 미래를 위한 일로 인해 상당한 금전적 손실이 있었음에도 아깝지 않다.

우리들의 조급증은 인생을 힘들게 하고 있다. 학대 수준의 지나친 학업으로 우리의 젊은이들을 망치고 있다. 일제가 심어놓은 망조 바이러스가 대상포진처럼 나타나고 있다. 마치 신 카스트제도에서 사는 것처럼 변모한 사회가 낯설다. 우리가 당한 고통은 저력으로 남아있다. 이런 나라가 어떻게 망할 수 있는가. 새로운 분배양식을 구현하기 좋은 4차 산업혁명은 우리에게 좋은 것 같다. 풍부한 상상력과 도덕성을 가진 홍익인간은 4차 산업혁명의 방향성과 같기 때문이다.

해결해야 할 일이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가야산과 수도산 주변을 돌아보며 반성하고 다시 시작한다. 할머니가 생명을 지키고자 했던 소리 길을 천천히 걸으면서 이미 있는 해법을 검증해 본다.


토마스 금붕어

토마스의 금붕어

나이를 먹을수록 보이지 않는 세계를 체험하면서 세상을 알게 되는 만큼 철이 든다고 생각합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고 있음을 인식하고부터 겸손해지는 것 같습니다. 양심을 가진 인간이 본질적으로 선한 존재이기 때문에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인간성 황폐화로 느끼지 못하는 불행한 사람도 있지요. 하여 오늘은 금붕어 이야기가 새로운 세계관이 구현되길 바라는 마음이 있어서 그런지 새롭게 다가옵니다. 특히 해석 (3)에서 학습 능력을 키우라는 말이 가슴에 다가옵니다. 여러분도 느껴보세요.

할머니와 금붕어-이야기 해석(1)

<할머니와 금붕어> 이야기는 내가 초등학교 3학년에 다닐 때,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던 이야기이다. 우리 아이가 올해 초등학교 3학년이라서 관심을 가지고 보았는데 요즘 교과서에는 그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게르만족의 전래 동화라고도 하고, 러시아 지방의 이야기라고도 하는데, 할머니의 소원을 들어주었던 신기한 물고기를 어떤 이는 넙치라고 하고, 어떤 이는 가자미라고도 한다. 그 물고기가 넙치든 가자미든 금붕어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것이 어떤 물고기든 이야기의 본질에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다.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은 <할머니와 금붕어>의 원제목이 <어부와 그의 아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내 생각으로는, <어부와 그의 아내>보다는 <할머니와 금붕어>라는 제목이 더 낫다고 생각해서 이 제목으로 이야기를 하기로 한다.

이제부터 <할머니와 금붕어> 이야기를 들어보자.

옛날 아주 오랜 옛날에, 한 늙은 어부가 고기를 잡기 위해 바다에서 그물을 치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하루종일 그물을 치는 데도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였다. 어부는 한 번만 더 그물을 던져보고 가자고 생각하고 그물을 쳤다. 마지막 그물을 끌어 올리는 순간 온몸이 황금빛으로 반짝반짝하는 신기한 금붕어가 그물에 걸려 올라오는 것이었다.

“참 신기한 일도 다 있군!”

어부가 신기한 금붕어를 쳐다보고 있는데, 금붕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나 좀 살려주세요. 본래 나는 바다 용왕의 아들인데, 모처럼 나들이 나왔다가 이렇게 할아버지한테 잡히게 되었네요. 나를 놓아주신다면, 반드시 은혜를 갚겠습니다.” 할아버지가 그 말을 듣고, 금붕어를 보니 불쌍한 생각이 들어 금붕어를 놓아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서 금붕어에 대한 이야기를 할머니한테 했더니, 할머니가 노발대발하며 이렇게 소리치는 것이었다.

“바보 같은 늙은이, 왜 그냥 놓아주었어? 은혜를 갚겠다거든 헌 물동이 하나라도 달래지.”

할머니가 깨진 물동이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하자, 할아버지는 곧 바닷가로 달려갔다.

“금붕어야, 금붕어야!”

할아버지가 금붕어를 부르자, 기다렸다는 듯이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할아버지, 무슨일이예요?”

“금붕어야, 우리 집 물동이가 깨져서 말이야, 물동이가 하나 필요한데…”

“알았어요, 할아버지. 걱정 말고 돌아가세요.”

금붕어는 걱정말라고 했지만, 더 큰 걱정거리가 할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집에 돌아가 새 물동이를 보고 기뻐하고 있을 때, 할머니는 더 화가 나서 더 크게 소리치는 것이었다.

“은혜를 갚겠다는데 이까짓 물동이가 뭐야? 당신은 다 쓰러져가는 이 오두막집이 보이지도 않아요? 금붕어한테 다시 가서 말하세요.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우리가 부자가 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 아니에요?”

할머니의 말을 듣고, 할아버지는 다시 바닷가로 걸어갔다.

“금붕어야, 금붕어야!”

할아버지가 금붕어를 부르자, 조금 있다가 금붕어가 나왔다.

“할아버지, 무슨 일이세요?”

“금붕어야, 우리도 한번 부자로 살고 싶다. 우리를 부자로 만들어다오.”

“알았어요, 할아버지. 걱정말고 돌아가세요.”

할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와 보니, 다 쓰러져가는 할아버지의 오막집은 간 곳이 없고 그 곳에 엄청나게 크고 훓륭한 집이 있었고, 할머니가 아름답고 고운 옷을 입고 할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보, 이제 우리도 부자가 되었어요. 우리도 한번 남들처럼 호의호식하면서, 행복하게 살아봅시다.”

이렇게 두 사람은 생각지도 못한 복이 굴러들어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

이렇게 이야기가 끝났으면 좋으련만, 불행히도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얼마 동안 부자로 살던 할머니는 어느 날부턴가 또 다른 욕심이 생기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얼마 동안 할머니는 행복했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모든 것이 불만스러워지기 시작하였다. 할머니는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할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여보, 이제 나는 이 나라의 왕이 되고 싶어요. 한 번만 더 금붕어를 찾아가세요. 가서 나를 이 나라의 왕이 되게 해달라고 부탁하세요.”

할아버지는 마지못해 바닷가로 가서, 금붕어를 불렀다. 할아버지가 바다로 가자, 잔잔했던 바다에 큰 파도가 치면서 요동치고 있었다.

“금붕어야, 금붕어야!”

할아버지가 금붕어를 부르자, 한참 있다가 금붕어가 나왔다.

그리고 걱정스런 목소리로 할아버지에게 말하였다.

“할아버지, 무슨 일이세요?”

“금붕어야, 우리 할머니가 이제는 이 나라의 왕이 되고 싶다는구나.”

“알았어요, 할아버지. 걱정 말고 돌아가세요.”

할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와 보니, 그곳에 화려한 궁궐이 있었고, 문 앞에는 병사들이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할머니는 여왕이 되어, 화려한 옷을 입고 많은 시녀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할아버지는 궁 밖으로 쫓겨나 다시 물고기를 잡으며 살게 되었다.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여왕이 된 할머니가 오랜만에 할아버지를 불렀다.

“나는 이제 세상의 왕 노릇하는 것도 재미가 없어졌어요. 이제는 바다와 육지를 다스리는 왕중의 왕이 되고 싶어요. 가서 금붕어에게 말하세요. 내가 바다 속까지 다스리고 싶어한다고.”

금붕어가 그 소원만은 들어줄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말하였다.

“여보, 그것만은…,”

할아버지가 말리려고 했지만, 할머니는 그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뭐 해요? 어서 가지 않고?”

할 수 없이, 할아버지는 바다로 갔다.

갑자기 폭풍우라도 칠 것처럼, 하늘엔 먹구름이 몰려오고, 성난 파도가 할아버지를 삼킬 것처럼 넘실대고 있었다.

이제는 용왕님도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할아버지는 바다를 향해 소리쳤다.

“금붕어야, 금붕어야!”

몇 번을 불러봤지만, 금붕어는 나올 줄 몰랐다.

저 불쌍하고 눈치 없는 할아버지는 그래도 계속 금붕어를 불렀다.

“할아버지 무슨 일이세요?”

금붕어가 슬픈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이번에는 할아버지도 미안한 목소리로, 주저하면서 말했다.

“금붕어야, 어쩌면 좋으냐? 할머니가 이제는 용궁까지 다스리고 싶다는 구나…”

할아버지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금붕어는 물속으로 다시 들어가고 말았다.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할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올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염없이 바닷가에 앉아 있던 할아버지는 힘없는 발걸음을 집으로 옮겼다.

집에 돌아와 보니, 쓰러져가는 오막 집에, 깨진 물동이 옆에 초라한 할머니가 멍하니 앉아있는 것이었다.

어릴 때는 단순히 욕심 많은 할머니와 착한 할아버지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할머니의 지나친 욕심 때문에 마침내 불행한 결과를 얻게 된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그렇게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 이야기 속에는 인생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 들어있다.

[출처] 할머니와 금붕어 이야기 1 토마스 -<2편으로 계속>-

할머니와 금붕어-이야기 해석 (2)

이 이야기 속에 나오는 할머니는 심술궂고 욕심이 많죠. 할아버지는 아주 순진하고 착합니다. 욕심 많은 할머니는 끊임없이 착한 할아버지를 괴롭힙니다.

헌 물동이라도 달라고 해라, 부자가 되게 해 달라, 왕이 되게 해 달라, 용궁까지 다스리는 왕이 되게 해 달라, 끝없이 요구하고 또 요구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아저씨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맞아, 여자들은 정말 욕심이 많아. 주고, 주고, 또 주어도 도무지 만족할 줄 모른다니까! 치마를 입으면 바지를 입고 싶어 하고, 바지를 입으면 치마를 입고 싶어 해. 생머리 할 때는 파마머리 하고 싶고, 파마머리를 하면 생머리를 하고 싶어 하는 것이 여자들이야. 정말 여자들의 욕심은 끝이 없어.”

또 아줌마들은 이렇게 생각하지요.

“흥, 남자들은 정말 무능하고도 멍청해. 도무지 생각이 없이 산다니까. 집안이 다 쓰러져가는 판에 웬 오지랖은 그렇게 넓은지. 정치가 어떻고 사회가 어떻고. 세상이 자기가 없으면 어떻게 되는 줄 착각하며 산다니까. 남자들끼리 의리 지킨다, 사회생활 한다, 어쩐다 하는 핑계로 흥청대면서도 집안에 장독 깨지는 것은 모른다니까. 정말 대책 없는 족속 들이야.”

이렇게 같은 이야기를 듣고도 각자의 입장과 처지에 따라 받아들이는 것이 다르지요. 이렇게 이 이야기를 남자와 여자, 남편과 아내의 이야기로 알고 남녀 간의 갈등 문제로 해석하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 이야기를 남녀 간의 이야기로 해석하기보다는 우리 인생사의 깊은 비밀을 간직한 이야기로 해석했습니다.

세상에는 할아버지처럼 하루하루를 만족하며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할머니같이 오늘 하루의 삶에 만족하기보다는 더 나은 내일을 꿈꾸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오늘도 어제 같고 내일도 오늘같이 살기를 바라며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할아버지의 가장 큰 소망은 그저 아무 탈 없이 평범하고 평온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입니다.

한편 할머니는 어떻습니까?

할머니는 항상 더 나은 것, 더 좋은 것을 바라며 사는 사람입니다.

물동이를 얻으면, 집을 얻고 싶고, 집을 얻으면 부자가 되고 싶습니다. 부자가 되고 보니 왕이 되고 싶고, 왕이 되고 보니 용왕이 되고 싶습니다.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나은 내일을 바라고, 더 높은 것을 생각하며 사는 <이상주의적>인 인생이지요.

세상에는 할아버지처럼 현실에 만족하고 거기 안주하고 사는 인생이 있는가 하면, 항상 더 나은 내일을 꿈꾸며 사는 할머니와 같은 인생도 있는 법이지요. 이런 두 종류의 인간들이 서로 각축하며 사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지요.

당신은 이 두 사람 중에 어떤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어떤 인생을 살고 싶습니까?

할아버지와 같이 살면, 세상을 따라가면서 세상이 주는 것에 만족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누가 주도를 합니까? 당연히 할머니 같은 사람들이 세상을 이끌어 가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들이죠. 우리가 누리는 모든 문명의 혜택은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 살았던 할머니 같은 사람들 덕분입니다.

할아버지가 할머니가 요구하는 대로, 할머니가 시키는 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자기 뜻이 없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은 결국 뜻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의 종노릇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평소에는 이 두 사람이 똑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어떤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 말하자면 인생의 위기가 닥쳤을 때 사람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것이죠.

금붕어가 잡히기 전까지만 해도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사이좋게 잘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용왕의 아들이라는 신비한 금붕어가 할아버지의 그물에 걸린 것입니다. 이 사건이 일어난 뒤로, 두 사람의 인생은 크게 바뀌게 됩니다.

이러한 사건을 가리켜 인생의 분기점이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터닝 포인트’라고 하지요. 사소하고 아무것도 아닌 작은 원인이 나중에 큰 결과가 되어 나타났을 때, 이 작은 사건을 가리켜 ‘분기점’ 또는 ‘터닝 포인트’라고 하는 것입니다.

백두산 천지에 나뭇잎이 하나 떨어졌다고 합시다. 백두산 천지의 어느 한 지점에서 사소한 각도의 차이로 압록강으로 흘러가기도 하고 두만강으로 흘러가기도 합니다. 이 한 지점이 바로 ‘터닝 포인트’라는 것이죠.

오늘 당신이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도, 당신의 인생에서 사소한 사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당신이 이 이야기를 듣고 무언가 깨달음을 얻는다면 이 순간이 바로 당신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될 수 있다는 얘깁니다.

할아버지가 금붕어를 잡은 날이 바로 할아버지의 인생의 분기점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금붕어가 살려달라는 말을 했을 때, 그저 금붕어가 불쌍하다는 생각만으로 자기가 잡은 금붕어를 놓아주고 맙니다.

이렇게 평소에 바라는 것이 없이 사는 사람은 팔자를 바꿀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가 오더라도 그것을 잡지 못합니다. 그것이 기회인지 알지 못하고, 알았더라도 붙잡지 못합니다. 어쩌다가 붙잡은 기회라도 다시 놓치고 마는 것이죠. 이 할아버지처럼 말입니다.

할머니는 어떻습니까? 할머니는 기회가 왔을 때 그것을 재빨리 붙잡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이 놓쳐버린 기회라도 할 수만 있으면 내 것으로 만드는 사람이지요. 그래서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이미 놓아줘 버린 금붕어에게 당장 쫓아가서 요구하라고 합니다. 이렇게 인생의 기회는 준비된 사람에게만 오는 것입니다. 기다리는 사람만이 기회를 잡을 수가 있는 것이죠.

할아버지가 금붕어 이야기를 했을 때, 할머니가 뭐라고 했습니까?

“아이고, 영감 참 잘하셨소. 우리가 물고기를 잡고 사는 것도 다 용왕님의 은덕인데, 용왕님의 아들을 살려주셨다니 참 잘하셨구려. 용왕님을 화나게 하면 큰 해를 입지요.”

이렇게 말했습니까?

아니지요. 그 말을 듣자마자 할머니는 머리끝까지 화가 납니다.

“바보 같은 늙은이, 왜 그냥 놓아주었어? ‘은혜를 갚겠다.’ 거든 헌 물동이 하나라도 달래지.”

할머니의 말은 ‘왜 그런 좋은 기회를 잡지 못하고 그냥 빈손으로 왔느냐?’는 겁니다. 그러니까 ‘바보 같은 늙은이’라는 것이죠. -3편으로 계속-

할머니와 금붕어-이야기해석 (3)

세상을 살다보니까, 세상에는 정말 이 할아버지와 같은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이는 어리지만 마음은 벌써 늙은이가 되어 버린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꿈도 없고, 희망도 없이 그저 오늘도 무사하기만을 바라면서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어떤 소원을 가지고 삽니까? 그저 오늘도 무사히! 오늘도 평안하게 만 바라고 삽니까? 그런 사람에게는 결코 기회가 오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결코 오는 기회를 잡을 수가 없지요.

할머니 같은 사람만이 인생의 기회를 붙잡을 수 있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할머니를 보십시오. 할머니가 가난했을 때는 부자가 되고 싶어 합니다. 부자가 되고 나서는 왕이 되고 싶어 합니다. 왕이 되고 나서는 바닷속까지 다스리는 용왕이 되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듣고 단순히 ‘그래, 사람의 욕심은 정말 끝이 없어. 그렇게 끝없이 욕심을 부리다간 결국 망하고 말지.’하고 생각해 버리고 만다면 그 사람은 그만큼 생각이 짧은 것입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할머니의 욕심을 볼 것이 아니라, 할머니의 발전하는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헌 물동이 하나라도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쓸 만한 집이라도 한 채 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거기에서 다시 큰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으로, 큰 부자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왕으로, 왕에서 더 큰 세상을 다스리는 왕 중의 왕으로, 계속 발전해가는 할머니의 ‘저 높은 곳을 향하는 마음’을 보라는 얘깁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누리는 모든 문명의 혜택은 모두가 이런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 때문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무릇 사람이 어떤 소원을 가질 때 그것은 그저 우연히, 어쩌다 보니까 가지게 된 것이 아닙니다. 왜 똑같은 환경에서 어떤 이는 만족하며 사는 데 어떤 이는 불만을 갖습니까? 왜 어떤 사람은 오늘을 위해 살고, 어떤 사람은 내일을 위해 삽니까? 그것은 사람마다 그릇의 크기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그릇을 격(格)이라고 합니다.

인격(人格)이란 바로 이 그릇의 크기를 말하는 것이죠. 이 그릇에서 바로 소원이 나옵니다. 할머니가 가난했을 때는 헌 물동이 하나라도 얻었으면 하는 것이었죠. 물동이를 얻고 나니까 쓰러져가는 오막살이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오막살이를 벗어나니까 이제 부자가 되고 싶었지요. 이처럼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자신의 눈높이에 따라 거기에 걸 맞는 소원을 갖게 되는 것이죠.

여기에서 우리는 사람의 소원이 사람의 수준을 결정하고, 사람의 수준이 다시 사람의 소원을 결정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소원은 수준을 낳고, 수준은 다시 소원을 낳는 다는 얘기죠.

누가 할머니의 소원을 들어주었습니까? 물론 신기한 금붕어입니다. 금붕어가 할머니의 소원을 들어주었습니다. 할머니가 금붕어를 만났기 때문에 헌물동이도 얻을 수 있었고, 부자도 될 수 있었고, 여왕도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금붕어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금붕어에게 끊임없이 요구할 수 있는 할머니의 마음입니다.

할아버지는 자기가 직접 금붕어를 잡아 놓고도 다시 놓아줘 버리고 맙니다. 마음에 소원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놓아준 금붕어가 인생의 기회임을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한테 당장 바다로 달려가라고 했던 것입니다.

당신이 할아버지 같은 사람이라면, 이 이야기를 듣고도 아무런 느낌이 없을 것입니다. 그저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로 생각하고 말 것입니다. 아직 이 말을 받을 그릇이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할머니처럼 준비된 사람은 무언가 느끼는 바가 있을 줄 압니다.

이 금붕어가 무엇입니까? 바로 소원을 이룰 수 있는 능력입니다. 사람이 능력이 있으면 소원을 이룰 수 있습니다. 부자가 될 수도 있고, 세상의 왕도 될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열심히 일하고 저축하면 소원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좋은 집도 살 수가 있고, 부자가 될 수도 있었지요.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열심히 일하고 지독하게 저축하기만 하면, 정말 부자가 될 수 있습니까? 아니지요. 이제는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옛날에는 소원을 들어 주는 금붕어가 “근면과 저축”이었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지금 금붕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정보처리 능력입니다.

엄청나게 많은 정보가 엄청난 속도로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이 많은 정보 중에서 쓸 만한 것을 골라 내 것으로 삼는 능력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세상의 정보는 돈이 되고, 힘이 되고, 능력이 됩니다. 그래서 21세기는 지식 정보화 사회라고 합니다. 이때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고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무엇이겠습니까? 팔자를 바꿀 수 있고,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금붕어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세상의 정보를 재빨리 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학습 능력입니다.

말하자면 공부 잘하는 능력이라는 말입니다. 공부를 잘하는 것도 그냥 잘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보다 더 빠른 시간에 더 많은 공부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1년 동안 해야 할 공부를 6개월에 하면, 6개월이 절약되는 것이죠. 이는 엄청난 능력입니다. 이렇게 되면 남들보다 한 걸음, 아니 세 걸음 앞서 갈 수 있습니다. 세상은 앞서가는 자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꼴찌에게 박수를! 이라는 말은 동화책에나 나오는 헛된 공상일 뿐입니다. 세상에 모든 스포츠 경기나 퀴즈 풀이 대회 등에서 누가 과연 상을 받고 칭찬을 받습니까? 모든 영광은 1등에게! 그리고 모든 욕은 꼴찌에게! 이것이 바로 현실입니다.

좋은 것은 그뿐만이 아닙니다. 돈도 엄청나게 절약됩니다. 우리 앞집 아이들은 지금 중학생인데 학원에 매달 50만원씩 갖다 바치면서 보충수업을 받고 있습니다.

한 달 50만원이면, 1년 이면 600만원, 3년이면 1800만원이 듭니다. 그리고 6년이면 3600만원이나 듭니다. 학원 수업료뿐만 아니라 학원에 왔다 갔다 하는 교통비와 잡비 등을 합하면 중, 고등학교 6년 동안 적어도 4,000만 원 이상의 돈이 학원의 보충수업비로 날아갑니다. 아직 나이 어린 학생들은 이 돈의 크기가 실감나지 않겠지만, 학원 수업을 받지 않고도 혼자서도 공부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이 얼마나 큰 유익인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공부의 법칙을 깨닫고, 1년 걸릴 공부를 4개월 만에 끝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공부 방법들을 정리해서 <공부 시간을 1/3로 줄여주는 공부의 법칙>을 썼습니다. 요즈음 나는 교회에 강의 신청을 받아, 이 학습법에 대해서 강의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학습법에 대해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강의를 듣고 나면, 그때야 비로소 효과적인 공부 방법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것을 봅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왜 사람들이 블로그에 쓴 나의 글들을 보고는, <공부의 법칙>을 공부할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정말 나는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이야기에 대한 해석이 지식의 재창조 작업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또한 지식의 재창조야말로 가장 차원 높은 능력이라는 것을 잘 알지 못하는 듯합니다. (나는 공부의 궁극적인 목적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시간이 허락하는 한, 해석 작업을 계속해 나갈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나의 실력을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출처]할머니와 금붕어 3 토마스


수필의 문턱

수필의 문턱

붓 가는 대로 쓴다는 수필이 좋다. 누구나 쉽게 수필창작을 할 수 있다고 자신감을 준 표현은 일품이다. 수필창작의 문턱은 높지만 낮춘다. 수필은 우리들의 삶에 의미를 더해준다.

수필의 문턱이 낮아 진입을 쉽게 했는데 문턱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돌아갈 수도 없다. 할수록 높아지는 문턱을 알고 나니 도전해볼 만하다. 마치 원석을 캐어 보석으로 가공하여 아름다움을 펼치는 장인처럼 신난다. 수필은 평범했던 사람에게도 존재감을 느끼게 한다.

우리는 수많은 문턱을 넘어 결국 죽음의 문턱에서 도착한다. 때로는 죽음의 문턱을 몇 번이나 겪기도 한 사람으로 문턱의 의미를 잘 이해한다. 문턱을 높여 닫힌 사회로 가고자 하는 사람들과 싸우는 과정에서 기득권 문턱이 얼마나 높은가를 안다. 문턱을 넘기 위한 담합. 패거리, 이지매, 고약한 신고식, 편 가르기 등이 다수를 불행하게 한다. 하수들이 만든 문턱은 통과비를 내거나 시련을 겪게 하는 등으로 힘들게 한다.

프랑스대혁명은 신분제의 높은 문턱을 무너뜨렸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인권선언으로 인간 상호 간의 문턱을 제거했다. 훌륭한 사람들이 문턱을 낮추려고 1000년 동안 노력한 결과가 이루어진 것이다. 신분제로 무임 승차한 사람이나, 많이 배운 소인배는 문턱을 높였다. 신분의 문턱을 높인 국가는 폭 망했다. 패거리 문턱으로 부패하면서 다른 민족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얼마 전 TV에서 모 종교에서 자식과 부모가 서로 뺨을 때리는 과정을 방송했다. 여 목사가 신도를 때렸다. 오직 여 목사가 신도 때린다. 여 목사와 아들과도 때리는지 궁금했다. 낙원을 찾아 태평양 한가운데 섬나라에 무상으로 혹독한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서로 학대한 가족이 해체되어 오직 목사만 바라본다.

한국에 있는 교회는 허름하여 접근이 쉽다. 문턱이 낮아 실패한 인생에는 희망이었다. 문턱이 낮아 들어가긴 쉬웠지만 나올 수가 없는 곳이다. 믿는 만큼 대가를 치러야 한다. 배타적인 만큼 대가는 크다. 대다수 종교에서는 지도자 자신을 위한 세계를 만든다. 때로는 행복을 찾아 문턱을 낮춘 종교에 귀의하여 목숨을 걸거나, 광신으로 패가망신을 당하는 경우도 많다.

세종대왕은 한글로 글의 문턱을 낮추었다. 글을 몰라 당한 억울한 백성이 많음을 알고 있었다. 신분제 사회의 문턱인 글(한자)을 독점한 권문세족들의 횡포를 막는 데 한글은 최고였다. 세종대왕처럼 생각하는 훌륭한 문인들이 수필의 문턱을 낮추어 만인이 읽고 쓰면 행복해지리라고 믿었을 것이다. 수필이 사람에게 덕을 나눈다는 점을 알아 문턱을 낮추었을 것이다. ‘붓 가는 대로’라는 용기를 심어 높은 문턱을 넘어가기를 바라면서…

수필 창작과정에서 일상의 많은 것들이 새롭게 보이게 된다. 수필은 스스로 문턱을 낮추는 겸손함이 있다. 문학의 문턱은 높지만 낮추었다. 수필을 읽을 때 인간애를 느낀다. 수필창작을 할 때 도를 닦는 기분, 나만의 생각일까?


신자유주의 사차산업혁명

신자유주의의 사차 산업혁명

사차산업혁명기를 어떻게 견딜까? 노동의 기회가 없다. 희망이 없다. 기회가 없으니 자영업을 한다. 죽지 못해 하는 것이다. 우리가 분명히 열심히 살아왔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희망을 이야기할 때 뒤에서는 희망 고문이라고 웃는다.

요즘 뉴스에 사건 사고가 많이 나온다. 보기 싫은데 봐야 하는 상황에서 살아가니 힘이 든다. 우리는 자신과 상관없는 일에 흥분한다. 마치 독립투사처럼 난리를 친다. 천당행의 기회, 해탈의 기회 등의 홍보도 부쩍 많아진다. 힘들어하는 상대에게 위로하는 곳이 많아지고 있다. 위험한 기회도 많아지고 있다. 위로의 대가를 치르기도 한다.

사람에게 평생 세 번의 기회가 있다고 했다. 어른들의 덕담은 참으로 유익했다. 기회는 준비하는 자의 것이라고. 급부상하는 나라에서 기회가 늘려있었다. 취업 사업, 상업 등을 하는 데 성공률이 높았다. 60년대 봉제공장 큰 애기들이 서울로 몰렸다. 도시가 커지면서 아파트 투기를 하고 땅 부자를 만들고, 큰 애기들의 마중물이 거대도시를 만들었다. 봉제공장 가발공장 등을 돈을 벌어 만들어진 재벌들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투자를 많이 함으로써 급속한 경제발전을 하였다.

급속한 사회변화로 겪게 되는 후유증으로, 학창 시절 선배에게 ‘어떻게 하면 사람답게 살 수 있습니까? 고 물었다. 헌칠한 미남 선배 왈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고 사람으로 살 수 있게 해주라‘ 고 했다. 그의 멋진 목소리는 아직도 귓전에 울린다. 세상의 스승인 부처나 예수의 가르침도 아닌데도 말이다. 삶의 현장에서 들려오는 잔잔한 울림을 애써 외면하기도 했다. 자본주의에 충실했다고 변명을 해도 마음에 남는다.

다양성이 없는 우리 사회에서 선택할 것은 오직 돈밖에 없다. 삶이 너무 바빠서 정작 자신에 대한 성찰의 기회도 없다. 경제적 여유, 정신적 여유, 시간적 여유 등이 조화로울 때 사람답게 산다고 한다. 세월이 지나 실천할 만한 능력이 있을 때 작은 실천함으로써 그의 말은 진리가 된다. 사업이냐 사람이냐의 문제에 부닥쳤을 때 사람을 선택한 이유이다. 그나마 삶의 보람이 된다. 젊은 날의 고뇌가 발목을 잡았어도 후회되지 않는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사람답게 살다가 가야 하는데. 사람답게 살기가 어렵다. 지옥이 있어서 천당이 있어서 선한 삶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본래 선하기 때문이다. 지옥, 천당은 유익하니까 믿는다. 사람으로 지옥과 천당의 선택의 기회가 현재 뿐이다. 불가에서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잘못된 부분을 수정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제 선진국 중심의 사차 산업혁명은 우리에게 소비시장이 될 것을 주문하고 있다. 서구사람들은 80년대 실업을 이유로 컴퓨터를 거부했다. 자동화로 실직을 두려워했다. 오랜 연구를 통해 관광과 투자유치가 해법임을 알았다. 지속적인 투자유치와 첨단과학기술 투자로 실업률을 낮출 수 있었다. 선진국의 투자유치와 자국 기업의 인센티브 전략으로 중진국들이 산업공동화 현상을 겪게 되었다. 기회를 잃어가고 있다. 고학력의 소수의 사람에게 기회가 주어진다. 대자본과 첨단기술을 가진 선진국만 기회가 많다.

사회적 자산이 많이 축적되어 실업문제를 해결할 줄 믿었다. 그렇지 못함을 알게 되었다. 후배들이 원로와 사회를 원망하는 이유이다. 실업급여는 올해만 약5조 가량 된다. 우리는 투자할 기업이 없어 아파트에 투자한다. 우리 속담에 ‘남이 장에 가니까 거름지고 장에 간다’ 고 한다. 심지가 굳은 서구인들은 아파트에 몰려 물가를 올리지 않는다. 선진국처럼 다양성을 존중하여 거름지고 장에 가지 않은 사회가 되길 바란다.


귀동양 유감

귀동냥 유감

좋은 귀동냥 거리를 만나면 행복해진다. 얼마 전 주방기구 사장이 만나자마자 하소연을 한다. 경기가 IMF때보다 더 어렵다고 난리다. 전국 여러 곳을 거래하므로 귀동냥을 많이 얻는 결과라고 한다. 현장에서 들려오는 따끈한 소식이다. 신문 방송에서 듣는 것보다 심각하다. 펀드도 손해를 보고 있는 상태에서 실감이 났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가슴이 덜컥한다. 혹시나 세를 줄여달라고 하는 하소연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다른 집에서도 요즘 일거리가 줄었다고 하니 전세금을 올릴 수도 없다. 보수비용과 세금도 늘어나는데 어렵다.

정책결정자들은 장사 경험이 없어서 그렇다고 한다. 자신의 배가 부르니 남의 배가 고픈지를 모른다고 한다. 전 정부의 무능한 결과라도 한다. 험악한 이야기를 들으니 힘든데 계속한다. 정말로 괴로운 모양이다. 애로를 들어야 하니 힘이 든다. 이 괴로운 소식을 안 들으면 다른 세상 소식을 못 들까 봐 동조하며 계속 듣는다. 장사가 어렵다는 이야기뿐이다. 실제 그들은 열심히 산다.

전국규모의 거래처에서 말하는 것은 현실적이다. 탁상공론이 아니라 실제다. 정책의 결과물이란 뜻이다. 투자를 위한 귀동냥 거리로 좋은 재료들이다. 현장의 따끈한 소식을 들으니 얼마나 신선한지 실감이 난다. 상업에 충실한 그들의 잘못은 없다. 먹고살기 위한 업계정보는 밥줄이다. 방향을 잡기 위해 연일 시장 상황을 귀동냥한다. 그들은 책 읽을 시간이 없다. 방송으로 뉴스를 듣는 정도이다. 업자들 간에 정보를 교환하고 의기투합을 하여 무한경쟁에서 이겨야 한다.

민원 해결의 경험이 많아 현장의 목소리를 잘 아는 편이다. 그들의 귀동냥 정보는 포장되지 않아 투박하지만, 실감이 난다. 그도 중국산을 수입하여 장사하니 중국이 자신을 먹여 살리고 있다고 말한다. 반면에 제조업이 위축되고 있으니 타격을 많이 받는다고 한다.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제품으로 부자가 된 사람도 있지만 망한 사람도 많다고 한다.

걱정이 태산이란다. 내년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강좌도 방송도 매체도 대책이 있는 것처럼 말하니 더욱 답답하다고 한다. 참 난감하다. 돈 버는 데만 관심을 갖는다. 사차 산업혁명시대에서 살아남을 사람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일까? 세를 받는 입장에서 모른 척할 수도 없어서 열심히 듣고 한마디 해야 한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나.

수학을 공식만 외워서 풀려고 하니 못하는 것처럼 돈 버는데 인문학이 뿌리인 것을 모르는 사람에게 말하기 힘들다. 북한과 교류가 되면 주방 기구도 많이 팔리고 시설공사도 많이 할 것 같단다. 기초과학 기술을 보강하고 있으니 잘 될 것 같다. 사회분열을 일으키는 증오에 찬 말을 줄여야 장사도 잘된다. 등등 해답은 나와 있으니 조금 기다려보자고 했다. 혹시 잘못된 견해로 냄비 속의 개구리로 만들까 봐 조심스럽기도 하다.

 

요즘 ‘빌거’(빌라거지)라는 말을 아느냐고 물으니 안다고 했다. 아파트가 천만 호가 되었다. 포화상태라 잘 팔리지 않으니 ‘빌라거지’라는 신조어로 판촉을 하는가? 아파트보다 비싼 빌라나 고급주택에 사는 사람들은 ‘아거’(아파트거지)라고 하지 않으니 의도가 의심스럽다. 어릴 때 시계 장수가 아버지에게 벽시계도 없느냐고 약을 올려 사고 난 다음 후회하셨던 생각이 떠오른다. 차별과 과당경쟁을 조장하는 나쁜 귀동냥 거리를 어린이들에게 유포하는 것은 나쁘다.

 

불신과 분열을 위한 귀동냥 거리를 유포하여 영구지배하려던 일제 망령이 되살아나는 기분이다. 사회통합을 해치는 무책임한 신조어가 우리를 망하게 할 수 있음을 알면서도 퍼트리는 자가 있다면 응징해야 한다. 사차산업혁명시대에서 살아남으려면 나쁜 의도에 휘둘리지 않게 도와주는 인문학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좋은 귀동냥 거리를 가진 홍익인간을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