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시대2

함께 나누는 케이테마 입니다. 언제나 변화와 차별화, 창의적인 디자인을 향해 도전하고 있습니다.

맘시대2

인간 존엄

제1장 인간존엄시대

제2장 홍익인간과 인권

3. 수난을 극복한 홍익인간

 

구한말 나라가 위기에 처하게 되자, 가정에만 머물렀던 양반 규수들은 자발적으로 국립 여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찬양회(1898년)를 결성하였습니다. 이는 최초의 여성 구국운동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1907년 진명 부인회가 국채보상운동과 구국운동에 참여하였고, 1913년 여성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비밀결사 조직인 ‘송죽회’를 만들어서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습니다. 물론 3.1독립운동에도 참여하여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또한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상해 애국부인회’와 같은 단체들이 활약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헌장에 남녀평등조항을 명문화시킨 사실은 서구의 여성운동과 다른 국정을 공동운영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근대적 의미의 여성 인권운동을 본격적으로 활동한 것은 1927년 ‘근우회’가 성립되면서부터 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근우회’를 비롯해 여성단체들은 붕괴가 되면서 지하조직으로 활동하게 됨에 따라 1930년대부터 여성 구국 활동은 공개적으로 할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한민족 여성들의 독립운동은 이미 임진왜란 당시 행주산성이나, 논개 등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나라가 위기에 있을 때마다 스스로 일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한민족의 오랜 생활양식인 가족의 태양으로써 모성을 존중한 ‘안의 문화’나 모성의 출산 양육을 고려한 한민족의 온돌문화나, 신선도를 위한 사색과 수행하기 적합한 좌식문화 등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고조선을 ‘동방예의지국’ (東方禮義之國)이라 하여 공자가 흠모하였으며, 군자의 나라라는 의미인 ‘해동성국’(海東聖國)으로 알려진 이유로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녀를 ‘홍익인간’으로 키운, 율곡 선생의 어머니인 신사임당의 삶에서 또렷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한민족 여성의 구국운동은 나보다 가족과 후손이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 행복한 인생을 살기로 염원한 아름다운 마음씨에서 연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불안정한 사회

1.1 일제 상흔의 여파

홍익인간’ 한민족의 끝없는 독립투쟁은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가운데, 인간이 만든 것 중 가장 무서운 원폭에 의해 극적으로 일제가 패망하여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일제의 혹독함으로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만든 수많은 인적 희생과 자원고갈, 상공업의 파괴, 식민사관에 의한 역사 왜곡, 일제 특유의 계층 간의 이간질로 분열, 정체성 부정으로 인한 혼란, 인간성 황폐화 등으로 회복 불능의 초토화된 상태였습니다.

즉 노예 사슬에서 풀려났음에도 불구하고, 상처와 식민잔재로 인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처럼 일제는 한민족에게 지나치게 가혹하여 뼈에 사무치는 상처와 원한을 심었으며, 아시아인에게도 깊은 상처를 남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세상에서 가장 혹독한 시련을 겪은 한민족 여성들은 해방 후에도 가정폭력에 시달렸고, 사회는 폭력으로 얼룩져서, 마치 축생의 삶처럼, 비정상적인 삶을 경험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1904년 윤치호 외무대신 때의 일로써 멕시코의 유카탄 반도에서 애니깽(밧줄을 만드는 용설란으로써 억세다)농장으로 팔려 가서 노예 등급 7등급으로 돼지우리 옆에서 잠을 자야 했지만, 여성들은 노예 등급조차 없었던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험악한 삶을 산 모성은 모든 것을 빼앗기고 보릿고개의 지독한 가난과 병마와 싸워가면서도, 구심력을 잃지 않고 아름다운 마음의 씨를 뿌린 결과, 해방을 맞이할 수 있었으며, 다른 나라에서 벤치마킹하는 국가로 가능케 했습니다.

이는 정 비석 선생이 한민족의 특성을 은근과 끈기로 압축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한민족은 모계적 특성인 은근과 끈기를 갖고 조화를 이루는 삶을 중시하며, 극단적인 것을 싫어하는 민족입니다.

이러한 특징이 아름다운 한반도를 지키며 오늘날까지 독립 국가로써 남아 있게 된 이유로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민족 여성들이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스스로 앞장섰던 것처럼, 광복 후 초토화되어 있을 때, 여성들이 주도하여 정당을 만든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안동에서 초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임영신 전 의원은 1945년 ‘대한여자국민당’을 창당하여 여성참정권, 평등권 등 기본권 확대와 여성 생존권 등을 역설하였으며, 2대째는 충청북도 금산에서 지역구의원으로 당선되었습니다.

물론 여성들이 주체가 되어 모계적 가치를 근간으로 하는 여성 정권을 쟁취하기 위한 정당을 만들어 국정의 한 축을 담당하겠다는 의지 자체가 획기적입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세계 어느 국가도 여성이 주체가 되어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정당을 만들어서 활동한 사실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조선이 유학을 근간으로 성립된 가부장제 사회였다 할지라도, 한민족은 음양론의 근간인 도학(신선도)을 중시하였고, 남녀조화로 행복한 삶을 산다고 생각한 ‘안의 문화’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해방을 맞아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극단적 남녀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여성 주도의 정당을 만든 것은 한민족의 특성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1.2 혼돈의 시대

수천 년에 걸쳐 지역 환경에 맞게 형성된 전통적 가치체계에 적응하며 삶을 살았던 한민족은 갑작스러운 일제 식민지배라는 황당하고, 참담한 변화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부정하는 카오스적(혼돈)인 상태로 살아야 했습니다.

즉 한민족의 정체성인 ‘홍익인간사상’이나 ‘선비정신’ 등의 자부심으로 살아가는 문화민족의 긍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전통 가치는 비판의 대상이 됨에 따라 패배 의식으로 자학을 하며 노예처럼 초라한 삶을 산 것입니다. 인도의 시성(詩聖) 타고르가 전통 한국을 동방의 빛(등불),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고 한 것조차 부정하는 정도였습니다.

참고로 태고시대에 반인반수의 괴물의 모습으로 변모했던 사람들을 본래 모습으로 회복하기 위해 동이 틀 무렵 여제사장이 제의를 주관하였다고 부도지는 전하고 있습니다. 즉 동물을 섭취할 때 희생제를 하는 등 천 년간 ‘수증’한 결과, 현생인류처럼, 이목구비(耳目口鼻)나 마음이 반듯한 사람들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여 한민족은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조용한 아침을 여는 ‘홍익인간’으로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고대부터 물고기를 놔두고 새벽 제의를 한 나라라는 의미인 고조선(古朝鮮)이라는 국호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불교가 들어오기 전 여제사장들이 신선도를 하였던 한반도의 명산대찰이 있는 지역에서 오늘날까지 산신각으로 흔적이 남아 있음에 따라 긍정할 수 있습니다. 하여 한반도가 동료 인간들의 ‘해혹복본’을 위한 수도 장소였다고 추정해 볼 때, 시성 타고르의 영감은 적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기독교에서 물고기를 상징물로 한 것이나, 불교에서 목탁을 물고기를 모방하고 있는 것 등과 모계 신본주의를 주도했던 동이족이 물고기로 제의를 한 것과 같다는 점에서 유일신 원형종교의 발원지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여 원본 문화를 가진 한민족과 섬나라로써 여러 지역에서 도래한 문화를 짜깁기하여 중첩된 일본문화와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타인을 해치지 않는 소극적인 태도가 아니라, 타인을 돕겠다는 적극적 태도를 가진 고조선은 ‘동방예의지국’으로 오랫동안 동양에서 알려진 나라였습니다.

하여 타고르와 같은 영적인 사람들은 원본 문화를 인식하고 있음에 따라 일제 식민사관이 허구임을 알고 한민족을 ‘동방의 빛’이라고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식민사관은 오히려 일제의 정당성을 홍보한 내용으로 채워졌음에 따라 서구사람들은 전통 한국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는 미군정하에서도 일제의 잔재가 의식을 지배하였을 뿐만 아니라, 친일 세력은 유지된 가운데, 공산주의와 자유주의라는 이념으로 남과 북이 분단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즉 남에는 좌우익의 남남갈등으로 가난과 혼란은 일상화되어 무법천지였으며, 지독한 일제의 수탈로 산업화할 자본과 기술이 없는 세계 최빈국이었습니다. 하여 강대국들은 일제가 만든 식민사관대로 무능한 민족으로 식탁통치를 받아야 하는 것을 주문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영구지배를 위한 일제의 각본에 의해서 만들어진, 1907년 도쿄박람회에서 우리 속에 갇힌 조선인 남녀가 동물로 묘사되어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고대부터 미개한 민족임을 동물처럼 가두어 홍보한 것을 강대국들은 믿은 것입니다.

하여 당시 일제 식민지 상황에서 핵폭탄이 투하되지 않았다면, 해방을 맞이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아이러니하게도 ‘홍익인간’ 한민족에게는 핵폭탄의 도움을 받은 최초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1.3 난폭한 사회

일제가 영구지배를 위해 만든 식민지법을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이라 하였습니다. 이는 해방 후 자유당 시절에 법을 냉소적으로 보아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고 하는 정서가 만연했던 이유입니다. 즉 총독부가 만든 법은 헌병, 경찰, 관료 등에 의해 집행됨으로 법을 무시하려는 경향이 만연하게 된 것입니다. 다음 인용문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국민의 법의식은 박병호 교수가 지적한 바와 같이, ① 법의 도덕성, 정치성이 강조되고 형법적, 징벌적 측면이 강조되며, ② 법의 공정성, 타당성에 대한 회의로 말미암은 법에 대한 신뢰도가 낮고, ③ 준법정신이 결여되어 있고, 권리의식이 박약하며, ④ 법의 타당성 내지 공정성에 대한 회의로 인하여 재판을 경원하다는 것인 바, 이것은 법이 국민과 유리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80) (김철수 37P)

이처럼 한민족은 전통적으로 높은 도덕적 수준을 요구하는 엄정한 사회로써, 법 없어도 살 수 있을 만큼 온정주의적인 덕치주의로 평화로운 삶을 살았지만, 일제는 식민지법으로 혹독한 헌병통치를 함에 따라 법치주의를 나쁘게 생각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국민과 의사소통을 하면서 형성된 일반의사로 법을 만들거나, 정책 결정을 하거나, 비전을 제시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갖고, 사회통합을 구현하는 정치인의 부재로 인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일제의 일방적 식민통치법이 무자비한 것입니다.

물론 이웃 간에도 겉과 속을 달리하는 비굴한 태도를 형성하였고, 총독부를 불신하는 습속은 해방 후 민주주의 정부가 성립되었음에도, 정부를 총독부 정도로 불신할 만큼 두려워한 시절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식민잔재로 인하여 해방 초기에 법보다 주먹이라는 안하무인의 무질서 천국이었으며, 오늘날까지 사회통합에 어려움을 겪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홍익인간’ 한민족에게 없던 일로써, ‘태평양전쟁강제군위안부’라는, 성적 노예로서 일명 ‘정신대’라기도 하는 이십만 명 이상의 젊은 여성이 희생을 당하였습니다. 이는 해방 후에도 생계 수단으로써 인신매매, 매매춘 등이 만연했고, 여성을 극도로 폄하하는 풍조까지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심각한 상황은 1946년 ‘부녀자의 매매 또는 매매계약 금지법’을 만들게 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일제강점기에서 살아남기 위한 과정에서 유발된 인간성 황폐화의 결과는 여성에게 전가되어 힘든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전쟁, 수탈, 착취, 폭력, 탐욕 등으로 형성된 불안정한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가 낮아졌던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일제 식민통치의 결과 분열과 분단으로, 1950년 6.25라는 동족상잔으로 이어지면서 한반도는 초토화되었고, 과부와 고아의 폭발적인 증가로 나타났습니다. 또한 일제에 의한 역사 왜곡으로 ‘홍익인간’과 ‘선비정신’을 근간으로 하는 정체성이 의미를 잃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유발된 지역감정은 국론분열과 더불어 어진 성품을 잃게 되었으며, 생명을 경시하면서 여성을 무시하는 풍조로 이어졌습니다.

이처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근대국가의 기초를 확립했음에도 불구하고, 원상복구가 되지 못하고, 혼란만 가중되었던 원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후 일제 잔재와 정체성 혼란 등의 혼재로 유발된 3.15부정선거를 자행한 결과, 1960년 대구에서 벌어진 2.28의거를 시작으로 4.19혁명에 의해 이승만 정권이 막을 내렸습니다.

하여 한민족의 저력을 3.1독립운동에 이어 서구시민혁명과 같은 성격의 4.19혁명은 세계만방에 알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일제 식민과 6.25동란으로 인하여 초토화되어 있었던 한국의 잠재력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리고 4월 혁명은 한민족이 민본주의로 ‘홍익인간’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여 4월 혁명은 일제에 의해 훼손된 한민족의 정체성의 복원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분열을 획책하는 식민사관으로 인하여 오늘날까지 사람들을 과거에 살게 함에 따라 사회통합에 어려움을 겪는 것도 사실입니다.

2. 홍익인간의 저력

헌법학자 한상범은 그의 저서 ‘기본적 인권’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한국의 민권, 입헌사상과 그 뿌리 내리기의 운동에서 가장 획기적인 일은 4월 혁명이다. 또 다른 면은 민중의 결집된 의지가 행동으로 나타나서 반민주에 항거하였다고 하는 점에서 민중운동이기도 하다.

이 혁명을 총체적으로 어떻게 규정짓느냐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지만, 여기서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역사의 흐름 속에서 면면히 이어져 오는 민권, 입헌 사상이 구체적, 역사적 사실 속에서 열매를 맺게 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현대사를 419혁명 이전과 이후를 따져서 말하게 되는 것이고 우리의 민권 입헌사상과 그 운동을 앞으로 어떻게 바르게 이어나가느냐 하는 과제도 여기서 비롯되어야 한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81)(한상범, 기본적 인권, 76~77p)

이처럼 한국인의 정체성으로서 ‘홍익인간사상’이나 ‘선비정신’ 등을 잊지 않았기 때문에 1960년 4.19혁명이 가능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여 한국의 4.19혁명은 서구의 시민혁명과 유사하면서 유구한 한민족의 정체성을 되찾는 분깃 점이 된 사실에서 의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한국의 역사가 마고시대를 이어 고대 한국의 범상치 않은 역사를 이해한다면, 419혁명은 우연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즉 4.19혁명이 주권재민의 민주주의 사상을 확실하게 인식하게 된 결과라는 사실과 더불어 혁명을 통해 국민총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일제 잔재를 희석하고, 일제 악몽에서 깨어났으며, 일본과 대등한 국가관계가 정립된 중요한 혁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일본은 6.25동란을 통해서 경제를 회복했던 반면 대한민국은 6.25를 통해 초토화됨에 따라 일본은 과거처럼, 엉뚱한 생각을 품을 수 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일제 식민통치의 결과 자본과 기술이 부족하여 산업화를 이룰 수 없었으며, 더불어 사이비 자본주의로 인한 무원칙적 불안정성, 비민주적 생활양식, 산업인프라의 부족, 전쟁으로 초토화된 상태 등으로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구제 불능의 빈곤국으로 공인된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는 패망한 까닭에 ‘홍익인간’ 한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위대한 문화유산은 의미를 잃고, 스스로 자학하고, 냉소적인 정서가 만연한 자포자기 상태에서 빈곤을 극복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2.1 국운을 열다.

세계 최빈국으로 혼란을 지속하고 있었을 때, 박정희 장군이 주도한 1961년 5.16군사혁명은 부국강병을 기치로 군사정권을 출범시켰습니다. 그리고 박정희 정권은 경제적 기초가 없는 민주주의는 말 잔치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하여 오직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서 경제개발계획을 세워 한국적 산업혁명을 위한 기초를 확립하면서 총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세계에서 전례가 없는 기록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분단 상황과 냉전체제로 있었던 국제정세를 잘 읽어낼 수 있는 통찰력과 아울러 한민족의 정체성을 각성케 하여 잠재력을 일깨워 국민총화를 끌어낼 수 있는 비범한 지도자의 등장으로 가능하였다고 국제적으로 공인되었습니다. 즉 통계로 1973년부터 남한이 북한보다 약간 앞서기 시작함에 따라 공산주의보다 자본주의가 우월하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입증한 중요한 사례가 되면서부터, 세상을 놀라게 한 것입니다.

이는 후덕한 한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저력을 이해했던 혁명정부는 국민을 신뢰했고,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국가가 리더를 하여 ‘하면 된다’라는 긍정적인 태도를 배양하고, 실천한 결과 실제로 단기간에 놀라운 성과를 나타낸 사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즉 전 세계 사람들이 식민지 가운데 가장 혹독한 대우와 초토화된 불모지로 재기불능의 국가로 잊힌 나라였음에도 불구하고, 기사회생과 성장을 동시에 이룬 자체가 감동과 희망을 주기에 충분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수정자본주의보다 더 많은 개입주의를 허용하는 한국적 자본주의는 소위, 중도주의의 원조로써 모방할 가치가 있을 만큼, 성공적이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여 식민통치를 당한 나라치고 온전한 정신을 갖고 사는 나라가 없다는 것은 알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한국이 산업화, 민주화, 정보화를 기적같이 빠르게 성공한 사실을 두고, 식민지 상처를 어떻게 치유하고, 극복하여 인류 역사발전에 동참할 것인가 등에 대해서 참고할 수 있는 나라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모계 신본주의 사회의 중심역할을 이어 신선 사상(도학)의 풍토를 이어온 모성의 끈질긴 저력에서 연유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또한 일제 식민통치를 방해하였던 한민족의 선비정신을 소멸하기 위해, 식민사관은 선비를 사색당파의 주역들로 멸망의 원인으로 평가절하했던 사실도 알게 됩니다.

즉 서구의 시민혁명 후 만들어진 정부와 민중의 중간에서 시민단체로써 정당정치를 한 것보다 앞에 있었던 사실입니다. 물론 고대 한국의 여제사장의 선비정신을 이은 화백회의를 볼 때, 토론문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에 급성장으로 인하여 유발되는 ‘성장통’이라는 부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즉 복지를 전제로 한 국민총화를 이루기 위한 과정에서 인권유린을 당한 피해당사자의 경우에는 큰 상처가 되었습니다. 이는 수정자본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계획경제임에도 불구하고, 저임금으로 자본축적을 이루어 부국강병의 초석을 이루었지만, 양극화로 유발되는 갈등의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국민총화로 일군 성과에 의해 만들어진 국부가 근로자는 복지국가의 구현을 위한 인내의 결과로 생각하는 반면, 자본가는 양극화를 당연하게 생각함에 따라 형성된 불신이 사회통합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획기적인 결과에 적합한 탈 양극화를 위한 새로운 모계적 분배양식에 기초한 적극적 복지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새로운 체제가 성립되어야 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선진자본주의국가가 개인주의(자유주의)를 근간으로 하여 발전하였던 것과 다른, 콩 한 쪽도 나누어 먹는다는 우리들의 정서에 부합된 국민총화 계획경제로 성장을 했기 때문입니다. 즉 한국적 복지사회의 구현이라는 동기유발로 대기업 중심으로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다면, 콩 한 쪽도 나누어 먹는 모계적 분배양식인 적극적 복지사회를 구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개인의 희생을 전제로 하는 국민총화로 이룩한 국부라면, 양극화로 자본가만 유리한 배금주의적인 계급을 형성하게끔 방치하는 것은 일관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일관성의 부재로 유발된 불공평함으로 형성된, ‘자기팔 자기가 흔들어야 한다’라거나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다’라는 냉소적 태도가 만연하게 된 점을 상기해야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일제 식민관료주의와 사이비 자본주의를 뿌리 내려 모든 것이 초토화된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혁명정부가 엘리트주의적인 행정을 펼침으로써 다양성의 결여로 인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일제 망령과 정체성 혼란 등으로 아노미 현상을 겪는 가운데, 절대다수가 빈곤함에 따라 물적인 기초를 확보하기 위한 성과를 중시할 수밖에 없었던 다급한 사회였기 때문입니다.

즉 빵 공급이 최우선임에 따라 일제 잔재인 주종적 노사관계까지 수용한 것입니다. 이는 ‘대동아공영’이라는 구호 아래 아시아의 맹주가 되고자 하는 패권주의로 한민족을 전진 배치하고, 한반도를 영구지배하면서 대륙침략의 발판으로 삼고자 하여 만들어진 뿌리 깊게 박힌 일제 잔재를 제거하기 위한 전 단계가 경제발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제3세계를 상대로 한 서구의 제국주의와 달리, 동일 문화권을 침략한 일제 잔재는 상당한 기간 잔재함으로 묻어두고, 복지 국가구현으로 상처를 치료하기 위한 경제발전에 매진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일제가 동일 문화권에 있는 전통 한국을 일제의 침략과 수탈로 초토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경제개발을 성공시켰기 때문에 국제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경제발전을 통해 일제 망령의 극복이라는 매우 어려운 과정을 벗어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후유증으로써 양극화라는 위기에 봉착해 있습니다.

즉 빵만으로 살 수 없는 인간에게 적합한 분배양식을 위한 새로운 정치경제 제도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대다수 국민은 믿고 따랐으며, 기다려준 결과는 복지로써, 보상이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골고루 잘 살아야 한다는 염원을 이루기 위한 국민총화의 결과는 골고루 잘살 수 있는 분배양식이 성립되어야 합니다. 하여 지구촌 시대에 부합되는 ‘홍익인간’ 한민족의 정체성과 어울리는 새로운 모계적 분배양식을 위한 정치경제 제도로써 모민주의가 세계화되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2.2 한민족 여성의 저력

일제 식민잔재의 망령을 극복하기 위한 우선순위가 경제자립부터라는 슬로건으로 경제부흥에 매진하였습니다. 물론 자본주의사회에서 경제를 둘러싼 수많은 인적, 물적 시스템이 갖추어져야 하고, 법체계와 정치 등이 일정한 수준이 되어야 가능합니다. 하여 신생국으로써 한국의 경우 회생 불능상태로 인해 부작용도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자원 빈국으로서 한국의 산업화는 경공업을 일으키기 위해 수많은 저임의 젊은 여성 노동력이 필요함에 따라 그들의 희생이 상당했습니다. 그리고 60~70년대에 기업의 성장에 비해 저임금과 부당한 처우는 개선되지 않음에 따라 여성 근로자들이 불만을 나타내면서 결사할 때, 좌파로 매도하거나, 남자 노동자를 동원해 성폭력이나 폭력을 행사하는 등 별의별 방법으로 여성 노동자를 탄압하였습니다.

이처럼 인권 사각지대에서 여성 근로자의 춥고 배고픈 삶이 경제성장의 바탕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대다수 한국 여성은 성실하고, 우수함에 따라 산업의 기초를 이룩할 수 있었습니다. 하여 국민총화라는 슬로건 아래 전체주의적인 경향으로 인해 여성 근로자들의 희생에 대한 보상이 미약했던 것을 새로운 모계적 분배양식으로 보상이 되어야 정의 사회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복지사회라는 보상을 전제로 한 국민총화로 이룩한 국부로 인한 양극화의 유발로 오히려 비정규직과 절대빈곤층을 양산한 결과로 보게 됨에 따라 어떠한 비전을 제시해도 불신하는 사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민주적 권위조차 부정하는, 리더십 부재 현상으로 인한 고비용 저효율의 사회가 된 것입니다.

이는 기업의 극열한 노사분규로 나타나고 있는 데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정부 개입주의의 결과가 양극화로 나타나면서 형성된 불신으로 인해 만들어진 분규라 할지라도 방치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여 국가개입주의로 만든 국민총화 역량의 결과물인 부를 적극적 복지사회의 구현으로 분배해야 함이 합리적입니다.

다시 말해서 복지를 전제로 한 국민총화의 약속은 모계적 분배양식을 구현하여 개발독재의 후유증인 ‘제왕적 대통령제’로 인한 정경유착이나, 부정부패로 인한 도덕 불감증, 승자독식 문화로 인한 부패 등을 극복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정권교체가 쉽게 이루어져야 하는 민주주의의 주요특성과 모계적 분배양식은 어울립니다.

따라서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나눔을 위한 홍익인간의 삶, ‘선비정신’, ‘경천애인’ 등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전통적 가치에서 발현되었음을 상기해볼 때, 적극적 복지사회의 성립이 가능한 사회임을 알 수 있습니다.

3. 여권신장 시대

3.1 경제성장과 비례한 여권신장

여성 인권의 신장을 위한 방안으로 1977년에는 한국의 각 대학에서 여성학 강좌가 개설되었으며, 제5공화국 초기 정부 기관으로써 1982년 한국여성개발원의 설립과 여성정책 심의위원회를 설치하였습니다. 1980년대는 여성 권익향상을 위한 여성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어, 1983년 ‘여성평우회’와 ‘여성의 전화’가 개설되어 여권신장의 초석을 이루었습니다.

이어서 87년에는 한국여성단체연합이 6월 대통령직선제를 위한 민주화 투쟁에 참여하면서 남녀평등이 사회적 이슈가 되었습니다. 이어 1989년에는 전국 여성 농민위원회가 설립되어 여권신장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게 되었고, 1995년 국회 여성특위를 설치하여 여성 관련법을 제정하거나 정책을 개발하여 실효성을 갖출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80년대에 소비자운동이나 공해추방운동, 교육민주화운동 등을 통해 자본주의의 무책임과 무절제를 경고하였고, 신자유주의가 공고화된 90년대에 들어서는 무한경쟁으로 유발되는 환경오염이나 비정규직 문제, 복지사회구현, 녹색운동 등 생존권 차원이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여성운동으로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이는 자본주의의 세계화인 신자유주의 무한경쟁시대를 맞이하여 세계적 규모의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 지구온난화 등으로 지속 불가능한 위험한 사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역주의적인 부계주의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됨에 따라 지구촌 시대에 부합하는 개방적인 모계주의가 국제정치의 주류를 이루는 세계로 역사발전을 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1991년 6월 ‘천부인권’의 내용인 ‘천부소유권’을 보장하는 포스트 자본주의로써, 새로운 모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적극적 복지사회의 구현을 위한 정치경제 제도로써, ‘모민주의’(모계민주주의, Maternal Democracy, Maternalism)를 선거를 통해서 공식 선언하였습니다. 즉 모민주의의 ‘소유상하한제’를 주요 골자로 하여, 양성의 균형을 이루는 권력구조로써, 부계와 모계가 각각의 주체로써 권력을 갖는다는 의미인 국회의원의 반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탈 양극화로 위험한 사회를 극복하여 지속 가능한 세상을 만들고, 인간다운 삶을 위한 물질적 기초보장으로 남녀평등과 인종 차별금지의 실효성을 보장한다는 것입니다. 이후 러시아 대통령 고르바쵸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선언으로 세계 냉전 종식과 군사정권의 막이 내려지면서 여성운동의 활발한 전개로 여권신장이 확대되었습니다.

특히 90년대 초에 ‘태평양전쟁일본군종군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발족되어 진상규명과 보상 문제를 거론함에 따라 세상 사람들은 성차별과 여성 인권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즉 세계여성 NGO들은 각 정부에 여성 권익향상을 위한 입법과 실효성을 보장할 제도를 강력하게 요구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물론 일제에 의해서 저질러진 정신대 문제의 고발은 세계를 경악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일제의 혹독함을 세상 사람들이 재인식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90년대의 여성운동의 특징은 주로 가정폭력이나 성폭행, 임금 격차, 고용차별 등을 고발하였고, 성차별을 주요 이슈로 하여 여권신장을 위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면서 남녀평등의 실효성을 보장받기 위해 제도를 만든 시기였습니다.

예를 들어 전두환 정부에서 1982년 한국여성개발원과 여성 정책심의 위원회의 설치를 시작으로, 김영삼 정부에서 혼인한 딸자식에게도 상속권을 보장한 것은 여성에 대한 시각을 바뀌게 하면서, 여권신장이 빠르게 향상되었습니다. 그리고 김대중 정부에서 1998년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를 설치하여 여성 인권의 중요성을 부각함에 따라 남녀평등을 사회의 중요한 이슈로 되게 했습니다.

이어서 2001년 여성부의 설치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위한 정치지도자들의 이해와 노력의 결과로써, 여성 편견에 대한 인식을 획기적으로 바꾸어 호적법을 개정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여 여성운동이 인권신장과 민주주의를 공고화하고 있는 가운데, 오늘날 지구촌 시대에 필요한 녹색 생명 운동을 통해 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2 세계의 중심에 서다.

부계사회가 등장하고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모든 여성은 부계에 종속되어 있으면서 차별을 받았습니다. 물론 첨단 과학기술 시대를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10대 1의 차별지역을 제외하면 지역별로 정도의 차이나 형태는 다를 수 있지만 비슷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서구 여성들은 정치지도자로서 참여 비율이 높고 남녀 모두가 여성 정치지도자를 신뢰하며 지지하는 비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음에 따라 소액기부를 하는 여성 후원자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는 생활 정치의 주역인 여성 지도자들은 사회적 약자에게 생존권적 기본권과 행복추구권을 근간으로 유리한 정책 결정을 위해서, 그리고 입법으로 실효성을 보증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봉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선진국에서조차 부계 독점정치로 여성 지도자들은 권력의 반을 획득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아울러 자본주의 경제 제도에서 경제적 독립이 어려움에 따라 여성을 경시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복지축소를 지향하는 신자유주의시대는 양극화와 더불어 국가 경계 개념이 무의미해지고 있음에 따라 유발되는 불안정함은 생태적으로 복지적인 여성들이 힘들어지고 있다는 점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는 오늘날 고학력을 요구하는 전문적인 수월 주의 사회로 발전케 됨에 따라 실제로 여성이 서비스직으로 몰리는 현상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회적 약자가 비정규직이나 저임금 등 다양한 형태로 살아갈 가능성이 점증하고 있습니다.

이는 환경오염에 의해 질병의 치료, 먹이사슬의 변이, 온난화로 인한 농산물의 감축 등과 1대 99라는 절대적 양극화로 만들어지는 복지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워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무한경쟁과 무한축적을 위해 더 넓은 세계시장을 목표로 하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국가별로 나름대로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진 독특한 생활양식인 정체성의 훼손으로 사회통합을 이루기 어렵게 됩니다.

뿐만이 아니라 복지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여성의 삶이 고단하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비 복지적인 자본주의는 생태적으로 복지적인 여성과 불 합치함에 따라 인류의 반인 여성과 부합되는 탈 자유주의적인 분배양식을 성립해야 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지구촌 시대에 적합한 모계적 분배양식이 세계화되어야 세계 평화유지는 물론 실질적으로 남녀평등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연법사상을 근간으로 성립한 근대사회의 성립 취지와도 부합되는 것입니다.

특히 신자유주의 이념은 복지축소를 전제로 함에 따라 유발되는 폭발적인 복지 수요로 인하여 생태적으로 보살핌의 본능이 있는 여성들이 초기자본주의 때처럼, 지독한 어려움을 겪을 수 있음을 예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양극화로 사회적 약자가 증가함에 따라 요구되는 정치의 역할이 많아짐에도 불구하고, 정치 권력이 축소되는 현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자본주의에서 민주정치가 자유기업을 보조하는 정도의 반쪽민주주의로 인하여 정치적 의무를 다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초기자본주의가 예상과 달리 수많은 시행착오와 함께 인류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었으며, 제국주의로 인하여 유발된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을 겪었으며, 오늘날은 각종 테러가 빠르게 확산이 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자본주의가 발달하는 만큼, 정치 무관심, 민주적 권위의 부정, 냉소적 현상 등 정치 위기가 오래전부터 나타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구촌 시대를 살아가는 신인류에게 온전한 민주주의로써 모민주의 분배양식이 성립해야 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는 무한경쟁으로 인한 천문학적인 사회적 경비의 지출과 민주적 권위의 약화로 인한 사회통합의 리더십이 무너지고, 환경파괴와 자원고갈, 양극화로 인한 절대다수가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등으로 위험한 사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신자유주의가 공고화함에 따라 우려한 것들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는 대표적인 현상으로써, 지구온난화로 인한 생태계의 파괴나 각종 질병, 천재지변 등 재앙의 징조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는 각 지역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들임에 따라 세계가 공조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구촌 사회에서 적합한 정치경제 제도로써 경제적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모민주의가 필연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부계와 모계가 각 각의 한 축으로 존중하여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모계 민주주의가 인간에게 적합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날 헌법에서 명문화한 인권은 인간의 기본권으로써 법 적용의 해석기준이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차별금지법으로 실효성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다수 여성의 경우 빈곤하며, 의사결정의 위치에서 대다수 벗어나 피 지배적 위치에 머물러 있음에 따라 공허함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즉 현실에서 경제적 독립이 없는 여성에게 인권이란 의미가 없으며, 현실에서 불평등을 체감할 때마다, 경제적 기초가 없는 인권이란 말 잔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는 많은 여성이 헌법(국법)을 믿고서 남녀평등이 구현되도록 여성 인권운동을 한 경우 사회적 압력에 의해 개인적으로 희생 내지는 상당한 곤경에 처하게 되거나, 혹자 남성에 대한 적대감으로 인하여 유발된 불행한 삶을 살았던 사실 등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형식적으로 평등할 뿐 현실에서는 차별이 엄연히 존재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남녀평등의 인권선언을 믿고 여성들이 시민혁명에 동참했음에도 불구하고 근대헌법에서 권력의 반을 여성에게 보장한다는 명문이 없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여 남녀가 평등하기 위해서 구조적으로 권력의 반을 여성에게 보장해야 함에도, 지키지 않는 것은 정치적 수사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서구 민중의 실력행사로 쟁취한 근대사회에서 남녀가 인간적인 특성이 다르므로 역할도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여 권력의 반을 보장해야 함에도, 아직도 부계 일변도의 정치독점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근대사회를 열어 남녀평등을 구현코자 했던 서구 여성들이 흘린 피의 대가는 아직도 온전히 보상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여 인류의 반인 여성의 인권신장을 위해 다름을 존중하는 정치문화가 형성되어야 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은 서구자유민주주의 헌법 체계를 답습한 후발국임에도 불구하고, 여권신장운동이 비교적 빠르게 정치력으로 전환될 수 있는 것은, 태고의 모계 신본주의 사회를 이은 한민족의 습속에는 모계 유습이 유전화가 되어있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여 수 만 년에 걸쳐 이어온 한민족 여성이 아름다운 마음씨를 갖고 재창조로 여성의 의무를 다하였다고 볼 때 모민주의 체제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자격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권리에 대한 의무가 지킬 때 권리가 힘이 있는 것처럼, 한민족 여성이 인고의 세월을 선한 마음으로 견뎌온 사실 자체만으로도 권력의 반을 갖고 한민족의 운명을 결정할 자격(권리)이 있는 것입니다.

물론 자격이 있다 할지라도 조직에 참여하지 않은 개인 여성으로서 여권신장을 위한 몸부림은, 마치 바위 위에 달걀 치기처럼, 변화를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개인으로서 여성 인권의 의미보다 마치 노조 활동처럼, 세상의 여권신장과 연동(연대)되어야만, 여성 개인의 인권도 향상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여성 자신이 세상의 주체로써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가를 제대로 확인하고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부계의 틀을 넘은 세계를 어떻게 펼쳐갈 것인가를 연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구촌 시대의 신인류로써 여성은 모계와 부계의 균형으로 이루어지는 적극적 복지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생활 정치의 주역이 되어야 합니다.

. 지구촌 시대

 

1. 신인류의 삶의 방향

 

대자연은 햇빛, 공기, 물 그리고 어떤 생명체이든 공존하면서 나름대로 역할을 할 수 있는 먹이사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특히 대자연에서 생성 진보하는 인간은 스스로 세상의 주인공임을 알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경이로운 일입니다. 이는 사람이 지구에 어떠한 목적이 있어 출현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이유입니다.

물론 모계 신본주의 사회는 인간을 돕기 위해 출생했다고 합니다. 혹자는 하늘나라에서 죄를 지었다거나, 절대 존재에게 잘못한 결과 지구에 왔다고 하는 등의 신화들도 있습니다. 이는 최근에 생명체가 우주로부터 지구에 도달했다는 설이 과학자들에 의해 주장되고 있음에 따라 앞의 내용을 긍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모계 신본주의 사회가 믿었던 영혼 불멸 사상은 고대사회에서 신화나 구전으로 이어지고 있으나, 오늘날에는 연구를 통해 결과를 보고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이 때 배우지 않았던 몇 개의 외국어를 능통하게 한다는 등의 초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모계 신본주의 사회에서 동물을 섭취할 때 야만적인 동물령에 의한 해코지나, 순환 진보하라는 등의 이유로 희생제를 한 사실을 상기해 볼 때, 모든 생명체는 영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영혼의 순환 진보를 믿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종교 편에서 다시 한번 구체적으로 설명을 할 것입니다.

하여 인간이 우주 시간으로 볼 때 진화한다고 볼 수 있지만, 영적 존재로서 인간은 스스로 창조하는 존재라고 하는 편이 합리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마음의 시간이라 할 수 있는 찰나의 시간(수 만분의 1초)인 극소의 시간을 과학으로 밝히고 응용하여 실생활에 적용하고 있으며, 극대로써 억만 시간인 겁의 시간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상대성원리를 이해하여 만든 핵폭탄이라는 결과물을 통해 앞의 사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여 첨단 과학기술의 결과물을 볼 때, 인간은 삶과 죽음을 반복하며 진보하는 영적 존재라고 생각했던 모계 신본주의 사회의 인간관을 긍정할 수 있습니다. 즉 모계 신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신의 후손으로 스스로 창조하며 순환 진보하는 존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물론 문화적 존재로서 사람은 풍부한 상상력과 이를 구체화하는 우수한 두뇌로 첨단과학기술문명을 이룬 사실을 통해 출생목적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여 자의든 타의든 출생한 인간은 영적 존재로서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1. 부계적 성문화의 퇴출

1.1 과학적 근거

인간은 수만 년에 걸쳐 자연의 섭리를 깨닫고 활용하는 기술을 체득하면서 진보하고, 사회협동으로 더 많은 지혜와 지식을 축적한 결과, 스스로 가치를 규정할 수 있는 소위 ‘만물의 척도’가 되었습니다.

즉 인간은 기능의 측면에서 진화(진보)가 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행복한 인생을 위해서 스스로 창조한 문화로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재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하여 종교적 심성이 있는 인간은 궁극적 삶의 의미를 신앙에서 찾고,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 끝없이 진보하고 있음을 볼 때, 인간을 영적 존재로서 존중했던 모계 신본주의 사회의 믿음을 긍정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인간은 영리한 존재임에 따라 동물과 같은 신진대사를 하며 온갖 망상이 떠오를지라도 스스로 만든 문화에 의해 스스로 통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특성으로 모계 신본주의 사회가 인간 스스로 대모신의 후손으로서 피조물이 아닌 세상의 주체로 생각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즉 모성 중심의 인본주의 사회인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 과학기술에 의해 여성이 생태적으로 우수함이 밝혀짐에 따라 긍정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먼저 과학자들이 밝혀낸 남녀의 생리적 특성부터 보자면, 여성의 난자는 약 120~150㎛ 크기로써 남성의 정자보다 무려 5만 배 이상 크다고 합니다.

그리고 의학계의 보고에 의하면, 남자의 정자는 성교할 때 사정하면 1~2억 개 정도가 분출되고, 난관에 도달하는 것은 100개 미만으로 2만 번 이상 움직여서 그중 1개만 들어가서 수정을 하여 임신하게 된다는 사실에서 여성이 생명의 순환 창구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여 부계적 사고에서는 정자가 경쟁적으로 난자를 공격하여 수정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어떠한 면에서 난자의 선택으로 수정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신 중에서 난자가 선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이유는 체세포 정도의 정자가 형상화되지 않은 반물질적인 정도의 크기로 반 생명의 상태로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여성이 본능적으로 우수한 인간을 재창조하려는 본능과 환경에 적합한 자녀를 출산하려는 의지와 관련성이 있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영혼이 육화되는 신비한 원리로 볼 수 있습니다. 하여 체세포 정도의 정충이 생명으로 재창조되기 위해서는 5만 배 크기의 생명 재창조 시스템과 정서적으로 잘 부합되어야 육화된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는 모성의 결정력과 부합되는 정충만이 2억 대 1의 경쟁을 통과해야 육화되는 것이 실증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여 모계 신본주의 사회가 대자연의 순환을 통해서 불가지(不可知)의 세계를 추정한 가운데, 대모신의 후손으로 인간의 영혼이 불멸하며 순환 진보한다고 믿은 사실을 긍정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이러한 생명의 재창조 시스템을 이해할 수 있는 신인류는 인간 스스로 신의 후손임을 자각해야 지속 가능한 삶을 살 수 있는 시대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계 신본주의 사회의 영혼 불멸 사상은 생물의 기억장치와 흡사한 광학적 기억장치에 의한 3차원 영상인 홀로그램(Hologram)과 흡사함에 따라 긍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레이저로 넓은 범위를 기억시켜 놓으면 어떠한 부분이 손상이 있다고 해도 부분이나 전체가 서로 연관이 되며 레이저광선으로 1㎛ 크기의 작은 점에도 정보를 압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반물질인 빛의 성질을 이용한 광메모리는 그 자체로는 거의 무 제한적인 기억을 할 수 있습니다. 하여 소우주 인간과 대우주가 연동되어 상호작용을 한다는 믿음은 긍정할 수 있습니다.

물론 첨단과학기술문명에서 사는 신인류가 영혼의 문제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은 다행한 일입니다. 이는 삶의 결과를 압축한 영혼은 진보를 위해 육화한다고 생각한 모계 신본주의 사회의 믿음을 긍정하도록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다수 사람은 재생을 반복하며, 수많은 재생 진보를 통해서 신선이 되리라 믿었던 사실을 긍정할 수 있습니다. 하여 모든 생명체는 영원히 살고자 하는 본능에서 비롯된 자기 보존본능에 의한 성행위는 보상으로써 독특한 쾌감과 더불어 수억의 정충 중에 하나 정도가 육화되는 자체가 기적의 산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여 인간의 경우 남성이 사정할 때 1~2억 개의 정충을 방사하고 있음을 볼 때, 사람이 될 확률은 수십 억분의 일임에 따라 만물의 척도로써 사람이 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만큼, 쾌감을 동반하는 강력한 성욕을 억제하기가 힘들게 되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모든 종교에서 성욕을 탐하는 것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부과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2 식욕과 다른 성욕

부권사회의 등장으로 폭발적인 성욕과 부계혈통주의 등에 의해 여성의 지위가 급격히 추락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부계사회의 등장으로 형성된 남성 중심의 성문화로 성욕을 배양한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조선 시대에 이르러 사대부에서 축첩이 허용된 사실로 보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성욕은 문화적인 특징이 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일부 제3세계에서 오랫동안 일부다처제를 하거나, 티벳과 같은 곳은 일처다부제가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삶을 재창조하면서 살아가는 문화적 존재로서 인간은 스스로 만든 규범으로 성행위를 억제하고 조절하며 쾌감을 즐기는 존재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동물과 달리 음식을 맛있게 가공하고 즐기면서 먹는 것처럼, 섹스도 즐기는 존재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여 인간은 스스로 재창조한 문화로 스스로 성욕을 통제할 수 있는 영적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은 자연의 법칙으로 운행되는 삼라만상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성의 난소가 정자보다 5만 배나 크다는 사실과 처녀생식도 가능하다는 사실 등을 최근에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하여 부계사회가 모성의 재창조 능력을 무시한 것은 무지에서 비록 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부계사회가 인간을 동물의 범주에 두어 인간이 영적 존재임을 부정하는 비인간적인 사고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이는 중세 서구 부계사회에서 여성을 소유물처럼 소외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을 이영애의 다음 글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남성 폭력은 보이게, 또는 보이지 않게 여성에게 강제할 수 있도록 사회적으로 제도화된 힘이고, 이것이 강간을 일으키는 사회 구조적 변수라고 보고 있다. 강간을 단지 남성 소유권에 대한 침해만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강간의 발생 원인을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있다고 보는 이 견해에 의하면, 사유재산제 사회에서는 남성이 여성을 하나의 재산으로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강간은 남성의 소유권을 침해한 것이라는 주장을 계승하고 있다.” (82) (이영애 성, 권력, 정치 법문사 1995. 145p)

따라서 모계 신본주의 사회에서는 인간이 다른 성에게 종속되지 않았던 것과 달리, 서구 부계사회의 경우 여성이 남성의 재산으로 되었다는 것은 부계 유일신 종교의 영향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여성은 남성의 보조자에 지나지 않는 성적 존재로 전락 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성은 인간 동료라기보다 소외된 이방인이나, 소유물처럼, 살아야 했다. 예를 들어 전체주의 사회로써 부계사회는 여성을 전리품으로써 생각하여 반항하면 노예로 팔아버린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여 여성의 지위가 바닥임에 따라 남성 일변도의 성생활로 인해 여성 스스로 정조를 지키기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정조를 죄로 설정하여 이중 고통을 안고 살아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1.3 남성의 과잉성욕

고대 희랍의 절대주의 철학자였던 플라톤은 남자로 태어났음을 신께 감사했고, 유대인 남성들은 남자로 태어난 것을 유일신에게 감사하다는 의미인, 할렐루야! (여호와께 영광을) 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부계 우월종교에서 남성보다 무거운 죄로 인해서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등으로, 열등한 존재로 여성을 무시하였고, 동양에서 딸자식이 태어나면 섭섭하게 생각했던 사실에서 부계사회에서 여성의 지위가 어떠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베벨경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영어나 불어에서 남자와 인간은 동일어이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성서는 여러 곳에서 남자만을 유일한 인간으로 기록하고 있다. 뿐만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도 민중에 관해 논의할 때 남자만을 두고 말하는 경우가 보통임이 사실이다. 여성은 잊혀진 다수이며 남성이 모든 면에서 지배하고 있다. 남성들은 이를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여성들도 신의 섭리라고 받아들여 왔다.” (83) (베벨 109p)

이처럼 남성과 여성의 관계가 마치 종(種)이 다른 악어와 악어새의 공생관계처럼, 생각하거나, 동료 인간이면서 인간을 재창조하는 여성을 대상(객체)으로 생각한 것 등을 볼 때, 남성의 독단이 지나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은 동물과 달리 스스로 재창조한 가치(문화)에 의해서 규율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남녀 모두 모성의 태에서 10개월 동안 있다가 출생하며 동등하게 양육되고 있지만, 성장 후 인간이 설정한 가치에 지배되며, 현실과 타협하며 살아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지구환경의 변화로부터 만들어진 남성들의 성욕은 과도하게 발전하였던 만큼, 여성은 방어적으로 변모함에 따라 종속적인 삶으로 변모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부계사회가 등장이 되고부터 남성은 체력의 강화와 더불어 성욕이 강화되고, 출산하지 못하는 남성이 성적으로 유리하며, 여성은 왜소해지고 성적으로 불리하게 됨에 따라 남성에게 보호를 받아야만 하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계사회의 성문화는 남성의 과도한 성욕을 허용함에 따라 상대적으로 여성의 성은 방어적으로 변모케 되면서 사회적으로 소외가 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여 오늘날 모계적 성문화가 형성되어야만 실질적인 남녀평등이 구현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모계사회에서 ‘성교권’을 여성이 갖고 있음에 따라 평화로웠던 것처럼, 여성이 성의 주체가 되어야 위험한 사회를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성의 생태적 본능과 배치되는 부계적 성문화가 비인간적인 성문화로 발전함에 따라 이를 극복하기 위해 여성 주도의 모계적 성문화로 바뀌어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남성의 성욕이 극단적이라는 사실을 이영애의 글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최초 실시된 카네기 멜론 대학의 보고서를 보면 컴퓨터 통신을 통해 음란물의 전파가 상당한 정도로 공공의 안녕을 해친다는 결론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몇 가지 공통적인 사실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대단히 많은 양의 음란물이 통용된다는 점.

둘째. 사용자 계층이 다양하며, 분포가 전국적이라는 점.

셋째, 이미 거대한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

넷째. 국제적 통신망의 사용량이 증가한다는 점.

다섯째. 사용자의 98.9%가 남성이라는 점.

여섯째. 변태적 성행위의 적나라한 표현이 날로 증가한다는 점이다.” (84) (이영애 52p)

이처럼 오늘날 남성들의 과잉성욕을 여성들이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여 모계 신본주의 사회가 영혼을 육화하는 여성의 창조력을 신성하게 생각하면서 성교독점권(性交獨占權)을 보장한 가운데, 공유제 분배양식에서 분배권이 모성에게 분배권이 있었던 사실은 참고가 될 것입니다.

즉 성의 절제와 출산·양육을 하는 모성의 입장에서는 공유제 분배양식이 적합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여 모계 신본주의 사회의 성문화로 성욕이 조절된 사실을 근거해볼 때 모계주의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세상이 만들어진다면, 부계 편도의 과잉성욕으로 빗어진 위험한 사회를 극복할 수 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 존엄을 구현코자 하는 근대사회와 배치되는 비인간적인 성문화를 근절하기 위해 여성에게 권력의 반을 보장하여 여성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체제가 성립되어야 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1.4 모계사회 여성의 성교독점권

모계 신본주의 사회는 본능적으로 우수한 인간의 출생을 염원한 가운데, 원시 음양론, 천문학, 의학의 발달, 그릇 만드는 기술, 문자 발명 등으로 인류문명의 기초를 만들었으며, 더불어 농업혁명을 일으켜 정착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인구가 자연증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계 신본주의 사회는 우수한 사람의 출생을 위한 절제된 성문화를 갖고, 출산을 체험하였다. 아울러 여성은 생명의 경이로움을 체험하면서, 치료나 기아 해결 등을 위한 특별한 경우에 필요한 만큼 육식을 하였습니다.

또한 모계사회가 불을 사용하여 음식물을 익혀 먹을 수 있게 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농경 목축의 기술이 발달하면서 채취나 수렵을 하는 경우 보다 육식을 많이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두뇌의 발달과 함께 남성의 체력이 개선되어 생물학적으로 성 기능의 향상과 더불어 성욕이 증강되면서 부계사회가 등장할 수 있게 된 원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식생활이 바뀜에 따라 인간성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최근 오지에서 살아가는 부족의 습속 가운데, 동물을 섭취함으로써 동물의 생명을 얻는다고 생각하거나, 힘이 몸 안에서 생성되는 것으로 믿었던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여 육식의 과잉섭취로 인한 남성의 성욕은 왕성하여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데 비해 임신이나 수유기간 등으로 만성적으로 공급이 부족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모계사회가 염원했던 풍요와 다산을 농업혁명으로 가능케 함에 따라 절제된 성문화로 인구가 급증하게 된 결과, 부계사회가 등장하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이유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성욕은 본능이기도 하지만, 식욕과 달리 사회체계나 문화적인 영향에 의하여 조절이 가능한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생존을 위한 식욕은 개인적이지만, 성욕으로 인한 성행위의 경우 사회적인 성격이 있음에 따라 본능일지라도 문화에 의해 조절이 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모계사회의 절제된 성문화의 유습으로 볼 수 있는 섹스 종교는 섹스 자체를 영적 진보의 수단으로 믿고 있다는 사실에서 문화적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여 전체주의로써 부계사회는 잦은 전쟁이나, 노동력 등 여러 이유로 인구증가가 필요함에 따라 남성의 성욕을 배양하는 성문화로써 ‘생육과 번성문화’가 공고화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여 인구증가로 모성과 생명을 경시하여 여성이 성적 노예로 전락하고부터 인류는 불안정한 삶을 살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산술급수적으로 생산되는 식량보다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남에 따라 약탈이나 가축을 양산하는 생활방식으로 변화되었다고 주장한 멜더스의 인구론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모계적 분배양식을 구현할 수 있는 정치경제 제도를 세계화하여 무절제한 성교의 남용을 유발하는 부계 중심의 성문화에서 모계사회의 여성의 성교독점권을 보장하는 절제된 성문화가 형성되는 것이 바람직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2. 모계적 성문화

2.1 모계 신본주의 사회의 합리성

모계사회가 내면을 탐구하여 현실 세계를 이해하려 했던 반면, 부계사회에서는 외면의 물질세계를 통해 내면을 이해하려 했습니다. 즉 부계사회는 생명을 자연의 부분으로써 이해하고자 했던 반면, 모계 신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생명은 천지만물의 조화를 위한 원동력으로 이해함에 따라 ‘관계의 삶’을 중시했습니다.

물론 빙산의 일각인 현실 세계에서는 뉴턴에 의해서 밝혀졌으며, 후일 보이는 부분과 보이지 않는 세계와 연결되어 있음을 수학적으로 증명하였습니다. 즉 과학적으로 실증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나, 우주가 7차원으로 이루어졌음을 가설로 논변한 호킹박사와 같은 과학자들의 도움으로 생명의 근원으로써 영혼에 대해서 최근에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과학자들의 보고에 의하면, 인간은 현대과학에서 우주를 약 4% 정도 알고 있으며, 96%는 모른다고 함에 따라 우주 생성의 비밀을 풀고자 하여 ‘빅뱅’ 실험을 재연한 사실을 최근 2008년 9월 11일 제네바연합뉴스가 보도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간추려 보자면, “유럽입자물리학연구소(CERN)는 10일 제네바와 프랑스 국경의 지하100m, 길이 27Km의 원형터널에서 광속으로 발사된 두 개의 양성자 빔을 충돌케 하여 우주를 탄생시켰던 상황을 연출할 것으로 과학자들은 기대하고 있다.

그리고 실험의 목표는 신의 입자로 불리는 반물질인 ‘힉스입자’(Higgs Boson)를 찾고, 우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의 실체를 규명하여 모든 입자의 질량을 결정하는 힉스입자를 발견하면 물리학의 대변혁이 일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로베르 아이마르 CERN 사무총장은 ‘대형강입자충돌기(LHC)는 우주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바꾸게 될 것으로 예상되며, 어떠한 발견이 이루어지든 우리의 세계에 대한 인류의 이해는 풍부해 질것’이 라고 했으며,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우주의 종말은 있는지, 미래에 우주는 어디로 가는지 등에 관해 알고자 하는 욕구를 지니고 있다.’ 하면서 ‘이번 실험은 우주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꿀만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85) (2008년 9월 연합뉴스)

하여 직관적이고 입체적 사고를 했던 모계 신본주의 사회가 빙산의 일각으로 보이는 세계와 함께하는 보이지 않는 반물질적인 세계와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한 사실을 밝혀낼 수 있을 것입니다.

즉 모계사회에서 임신과 출산의 과정을 통해서 알게 된 0(무)과 있다는 1(유)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영혼 불멸의 개념을 소수의 비범한 사람들은 알고 있으며, 실제로 윤회(재생)된 사람이 다수임이 증명되었지만, 대다수 사람이 쉽게 알 수 있는 과학으로 증명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계 신본주의 사회가 영구적으로 순환하는 자연의 모습에서 영혼 불멸을 이해하면서 하나의 큰 흐름에서 연속적으로 마치 밤과 낮에 맞추어 인간은 자고 깨고 하는 것처럼, 삶과 죽음이 반복된다고 믿은 사실을 첨단과학으로 밝혀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계사회의 여성들은 남성들 보다 직관이 발달한 가운데 지혜나 체력 등 모든 면에서 우수하였으며, 무기를 다루는 실력도 뛰어나서 남성보다 더 강력했음을 앞의 사실에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인디아나 존스나 스파르타 여성의 예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피임법이 발달 되지 않았던 고대사회에서 성교는 임신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음에 따라 모계사회는 인구와 식량의 균형을 이루어 안정된 삶을 구현하기 위한 여성의 성교독점권을 수만 년을 유지한 안정된 사회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하여 인간을 재창조하는 여성은 입체적 균형 감각이 있으며, 더욱 완벽한 조건을 갖추고 있음에 따라, 출산이 가능한 것을 두고, 약육강식의 논리에 의해 열등한 자로 폄하되는 모순 속에서 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계사회가 등장한 후부터 시조나 영웅의 경우 모태가 아닌 알에서 태어나거나,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으로 전하고 있음을 볼 때, 여성을 폄하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아마도 출산의 경험이 없는 남성들이 부계사회를 만든 후, 남성 중심의 성문화가 형성되면서 여성이 성적 존재로 전락하였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계사회의 문란한 성으로 사회문제가 됨에 따라 가부장제를 만들어 여성에게 정조의무를 부과하거나, 전쟁에 승리한 병사에게 여성이 중요전리품으로 배분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부계의 약육강식 문화는 사람을 재창조하는 여성을 씨받이 정도의 열등한 존재로 폄하를 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전통 중국에서는 여성들에게 전족이라 하여 발을 주먹 크기 정도로 작게 만들어 성적쾌감을 배가하거나, 도망할 수 없도록 한 전통문화가 20세기 초엽까지 보편적이었던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현상들은 모성에 의해 태어난 남성과 여성은 이성으로서 서로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는 본능적 특성에서 이차적으로 변모한 결과일 것입니다. 이는 모계 신본주의 사회에서 남녀교제가 자연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즉 모계 신본주의 사회에서 서로가 다름을 이해하고 매력을 느끼며, 서로가 부족한 부분을 인정하면서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2.2 모계적 성문화를 형성하기 위한 체제성립

남성의 과도한 여성 편력이 사회문제의 원인으로써 불안정한 사회를 유발한다는 사실을 인류는 경험하였습니다. 이는 부계사회의 극단적인 여성 편력을 경고하고 있는 대부분의 부계 우월종교가 금욕생활을 중시하고 있으며, 윤리 도덕에서 탐욕의 근원을 성욕으로 지적하고 있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 사회가 성폭력 사건에 대해서 실과 바늘의 예를 들어 여성이 반항하면 성교가 되지 않는다고 판시를 한 적도 있었으며, 여성의 삶을 물 위에 떠다니는 부초와 같다고 하거나, 여성 자신의 몸까지도 마음대로 못하는 사실 등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여성에게는 정조를 지키기 어려운 상황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조를 지키지 못하는 여성을 사회적 매도나 타도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소외된 존재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정조를 지키기 위해 남성의 폭력과 위협에 반항하다가 죽는 것을, 사회적 미덕으로 간주한 것 등으로 동료 인간에게 못할 잣을 당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여성이 폭력에 시달렸으며, 만들어진 병으로 조용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예를 들어 부계적 성문화에서 배양된 성욕으로 인하여 만들어진 ‘정조죄’를 통해 여성에게 가혹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여 부계중심의 성문화는 성차별과 성적 타락, 모성애의 훼손 등으로 인하여 도덕 불감증이 형성케 되는 원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기적 욕구 충족을 정당화하는 자본주의가 성 탐욕을 자극하는 수많은 상술이나, 유혹하거나, 섹스산업 등을 육성케 한다는 사실과 더불어 증오심 배양의 결과인 세계대전이나 유대인 학살 등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구시대의 절대주의 토양에서 만들어진 자본주의가 탐욕을 배양하고 성욕을 자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오늘날 성의 상품화와 더불어 성도덕의 문란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인류는 근대사회로 역사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이 여전히 과거처럼 부계사회의 유습인 부계혈통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성문화가 여전한 곳이 많습니다.

물론 비록 20세기의 최고의 발명품인 피임약의 발명과 피임기술의 발달로 여성의 성이 획기적으로 개방되었습니다. 하지만 남성과 달리 미혼여성의 경우 정서적으로나 생태적으로 성교에 대해서 피해의식을 느끼고 있으며 방어적입니다.

하여 모계적 성문화를 형성하기 위해 탈 부계적인 새로운 정치경제 체제가 성립되어야 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태생적으로 여성들은 남성우월주의적인 성 문란에 대해서 굴욕적으로 느끼고 있음을 고려한 여성 주도의 새로운 성문화를 형성할 수 있는 체제가 필요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여성에게 성교독점권이 있었던 모계 신본주의 사회에서 성교에 대해서 긍정적인 생각을 했으며 성도덕을 만들어야 할 만큼 성생활이 난잡하지 않았던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모계 신본주의의 정통성을 이은 고조선 여성은 절제된 품위가 있었습니다.

하여 부계사회에서 성립한 절대 봉건제 사회에서 남성의 성 탐욕으로 여성에게 상처를 주거나, 남성도 파멸에 이르는 등의 수많은 사연을 상기해 볼 때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탈 양극화를 위해 모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적극적 복지사회가 구현된다면, 모계적 성문화가 형성될 수 있습니다.

 

2.3 탈 양극화 사회

인간의 성욕은 단순한 동물과 달리, 상호교감에 의한 쾌감을 배가하는 만큼, 책임을 부과하고 있습니다. 즉 혼인을 전제로 해야 합니다. 물론 이성적인 인간은 상호 간의 책임을 전제한 성생활이 적합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계 우월주의로 인해 배양되는 성 탐욕에서 만들어지는 가족해체로 반사회적 인격이 형성되거나, 에이즈의 확산 등 수많은 문제를 유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계 우월적인 성문화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문화가 필요할 만큼 성도덕이 무너졌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여 양극화로 인하여 형성되는 빈곤층의 확대가 매매춘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탈 부계적인 새로운 체제인 모계적 분배양식이 세계화되어 기본소득이 보편화되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자본주의사회는 경제적 차이의 비교로 인한 차별 극복을 위해 필요 이상의 과잉경쟁으로 위험한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타인이 불행할 때 행복을 느끼는 비정한 사회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1대 99라는 절대적 양극화로 인한 절대빈곤층의 확대, 매춘의 급증 등으로 자연법적인 인간 존엄은 이미 의미를 잃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오늘날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매춘수요를 넘어 폭발적인 수요는 현대의 개방적 성문화에 원인이 있다기보다, 인간의 상품화와 더불어 수요개발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근대사회의 인간 존엄은 자유경쟁을 위한 명분일 뿐 자연법사상의 인간 존엄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자본주의가 소비 촉진을 위한 유혹, 성적 자극 등 필요 이상의 자극으로 매춘수요가 무한히 증대하는 만큼, 인간의 상품화와 양극화로 인한 공급이 확대되어 감에 따라 인간을 타락하게 하여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통계청에서 2007년 7월에 발표한 ‘2007 통계로 본 근로 여성의 삶’에서 여성 가구주가 1975년 85만 명에서 2007년 현재 321만 명에 이르러 약 4배가 되었습니다. 이는 전체가구수의 약 20% (2010년 22%)에 이르는 가운데, 남성 대비 임금 차이는 63.4%이며, 고용은 50.3%가 되었으나 거의 서비스업이나 비정규직임을 통계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2022년 통계는 심각한 수준일 것입니다.

이는 선진자본주의 국가가 독점한 첨단 과학기술, 정보통신망, 초국가적인 다국적기업, 국제 금융자본의 운용 능력 등 지식정보 측면에서 우월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신자유주의가 냉전 시대의 고전적 자본시장의 투자와 달리 고수익을 위한 투기적 투자, 적대적 기업합병 등으로 세계의 수많은 기업이 합병이나 도산과 더불어 양극화가 가속화되면서 사회적 약자나, 여성은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이는 초기자본주의(자유방임주의)에서는 규모가 작은 공급자 중심의 경제임에 따라 경제성장과 함께 노동시장이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었지만, 오늘날 천문학적 경제 규모로 발전한 세상에서 기술적 우위에 있는 선진국을 중심으로 한 신자유주의가 노동시장의 붕괴를 가속화 한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원칙적으로 국가간섭을 배제하며 복지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는 신자유주의가 대안으로 등장한 데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자본주의는 시간이 경과 할수록 중산층을 몰락하게 만드는 양극화로 인한 고실업과 폭발적 복지 수요를 감당할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는 복지경쟁을 벌였던 냉전체제가 붕괴하게 됨에 따라 자본주의 속성에 충실한 신자유주의로 전환하게 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양극화로 인하여 증대된 국가의 복지부담은 한계에 이르게 됨에 따라, 비 복지적인 사회가 된 것입니다.

하여 자본주의가 세계화되고, 심화가 된 신자유주의는 생태적으로 복지적인 여성에게 매우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자본주의가 200년이라는 짧은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부의 양극화로 부패와 매춘의 폭발적 증가, 향락산업, 변태 등이 만연하는 가운데, 노골화된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절대주의적인 양극화를 유발하는 자본주의는 상대주의적 균형을 전제한 민주적 생활양식과 배치됨에 따라 역사발전에 역행하는 성도덕의 붕괴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여 오늘날 대량생산, 대량소비로 만들어지는 빠른 양극화와 ‘풍요 속의 빈곤’을 경험하면서 지구촌 시대와 부합되는 모계적 분배양식을 구현하는 새로운 정치체제가 세계화되는 것을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여성은 인간을 상품화하는 자본주의가 자신들에게 불리함을 경험하였으며, 과소비, 환경오염 등으로 인한 자연 재앙, 자원고갈, 인격 장애, 타락한 성문화, 비인간적 심성 배양, 인간성 황폐화 등으로 인한 위험한 사회를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진 녹색 환경운동에서 시작해서 녹색당까지 창당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매춘이 발달한다는 사실을 서진영의 다음 글은 참고가 될 것입니다. “매춘여성은 자본주의사회의 빈곤과 실업 돈의 지배 그리고 잘못된 성 윤리와 가부장적인 가족의 희생물이다.

이들 여성이 매춘을 하게 되는 가장 큰 동기는 빈곤이고, 그다음은 강간 등의 성폭행 경험과 가정불화로 인한 가출이며, 세 번째는 실연 등 남녀관계에서의 상처다. (대개는 육체관계로까지 발전했거나 임신까지 한 뒤 버림받은 경우) —

실직 저임금에 중노동, 가족부양의 부당 등으로 허덕이는 막다른 골목의 여성들, 노동력을 파는 것조차 거부당한 여성들이 이제 자기 몸을 파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가련한 희생물 위에서 타락한 포주들, 기둥서방들, 인신매매꾼들 뿐만이 아니라 그보다 조금도 덜 타락하지 않은 경찰을 비롯한 공적인 체계가 그 피를 빨고 있으며, 나아가 타락과 인간소외를 필수 불가결한 요소로 하고 있는 부르조아 사회체제 자체가 의존하고 있다.” (86) (서진영 267p)

“그러나 그들은 단지 자신이 매춘을 소비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이를 생산한다. 그것은 단순히 그들이 여자들을 실업으로 몰아넣어 몸을 팔지 않을 수 없게 한다는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여성의 성이 상품화되자 자본은 이것을 다시 돈벌이의 수단으로 삼는다. 섹스산업의 성장은 가부장제 속에서 소외된 성과 자본의 후안무치한 탐욕과 황금 숭배의 창작품이다.” (87) (서진영 282p)

3. 부계혈통주의의 퇴출

3.1 남녀 동일상속

태고로부터 오늘날까지 변함없이 이어지는 여성의 출산 양육은 현재를 있게 하는 재창조로써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이는 모권사회에서 여성이 우월적 지위에 있었던 이유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구가 많아지면서 복잡성의 증대로 부계사회가 등장하면서 생태적으로 복지적이며 가사노동을 해야 하는 여성의 지위는 추락하였습니다.

즉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의 경우 부계 동일체와 같은 상태로 여성을 억압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성은 원자화되어 모래알과 같은 상태로 부계에 종속되었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남성들의 군혼적인 욕망을 유발하게 됨에 따라 성문화를 문란하게 된 원인입니다.

아울러 여성에게 정조의 의무를 부담케 한 원인입니다. 이는 부계 동일체로써 하나의 지배 세력을 형성함에 따라 개별화된 여성은 조직화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피해자면서 벌까지 받는 모순의 삶을 살게 된 원인입니다.

즉 부계사회가 여성들이 정조를 지키기 어렵게 하면서 지키도록 강제한 것이다. 패잔병과 같은 처지에 있었습니다. 이는 남자들의 애정이 없는 과잉성욕을 빗댄 말로써 ‘치마만 두르면 여자’라고 하는 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여 여성의 수가 몇 배가 있어도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에게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나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성욕은 문화적인 배경에 의해 조절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체제를 개선할 의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소유와 성욕은 문화적인 바탕과 상관관계가 있음을 생각해볼 때, 바람직한 성문화를 조성하기 위한 탈 부계적인 여성 주도의 성문화로 토양을 바꾸기 위해 모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적극적 복지사회로 역사발전 하는 것이 바람직함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모계 신본주의 사회가 영적 진화를 위한 인간의 수련장으로써 생각한 지구에서 여성 고유의 일로써 종교와 관련된 문화, 예술품, 공연 등의 일이나 대가족의 복지, 제사에 관련된 일을 하면서 남녀평등을 이루었던 사실은 참고가 될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 자본주의사회가 인간의 상품화와 양극화의 심화로 인한 인간성 황폐화와 더불어 여성이 계속 불리하게 되는 가운데, 많은 여성이 강도강간, 성폭행, 폭력, 피살 등이 점증하는 위험한 사회를 극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인간의 구심력을 이루고 있는 모성성이 지나치게 훼손된다면, 모계적 가치로써 네트워크를 근간으로 하는 지구촌 사회를 살아야 하는 신인류는 과거와 달리 지속 불능의 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여 모계 신본주의 사회처럼, 여성이 성교독점권을 가졌던 것과 같은 바람직한 성문화를 정착하기 위해 도덕적 비판을 받는 성적 자극을 하면서까지 극단적 경쟁으로 자본축적을 할 필요가 없는 모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정치경제 제도가 세계화되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튼 가부장제 사회에서 대다수 여성은 생존을 위해 혼인함에 따라 혹자 남편의 외도나 가혹한 폭력에 시달려 억울했음에도 불구하고, 인내하며 살아야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조선 중기 여성은 혼인하면서부터 ‘출가외인’(出嫁外人)이라고 하였으며, ‘처가와 변소는 멀리할수록 좋다’고 한 격언에서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부계혈통주의에 의해 여성은 혼인함으로써 소속이 달라지는 현상을 두고, 여성의 삶은 부초(물에 떠다니는 풀)와 같다고 하여, 운명으로 생각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여성은 어떠한 의미에서 혈연에서 제외된 존재였습니다. 예를 들어 만약 여성이 이혼할 경우, 무소속으로 불행한 삶을 살았던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한민족의 전통 종교인 무교에서 여제사장이 제사를 주도한 것처럼, 조선 중기 이전에는 여성도 가족의 제사를 주관할 수 있었으며, 모권사회에서 비 혈통적인 모계 상속으로 이어졌던 것처럼, 여식에게도 유산을 물려준 사실로 볼 때, 조선 중기후 유교가 공고화되었을 때부터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여 한민족 여성의 경우 혼인 후에도 성씨(姓氏)를 갖고 있음에 따라 중기 이후 ‘출가외인’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3.2 정조의 상호주의

남성들의 씨 논리인 부계혈통주의의 공고화로 부계는 우월적 지위를 갖게 되면서 상속의 주체가 되었습니다. 반면에 여성은 자연의 부분처럼 대상이 됨에 따라 상속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이는 씨(씨앗) 논리를 근간으로 하는 부계혈통주의가 여성을 성적 존재로 전락하게끔 했기 때문입니다.

즉 부계사회의 등장으로 모권사회가 보증한 성교독점권을 잃었으며, 출산을 제외한 여성의 고유한 일들인 종교 등이 부계로 거의 전부가 이전되었을 때부터, 객체가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동료로서 남녀는 평등한 주체임에도 불구하고 부계혈통주의가 의식을 지배함에 따라 여성은 씨받이처럼, 객체로 변모하여 성교가 상호 간에 작용하는 자연법칙과 배치되는 지배 복종의 관계로 변질이 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부계사회는 비 혈통적인 모계적 자기 보존본능을 부계혈통주의로 대치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성이 부계혈통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종교사회였던 모계사회는 씨족 가운데 우수한 여성이 상속을 받았지만, 부계사회에서 여성은 부계혈통을 생산하는 수단이 됨에 따라 무능한 남성일지라도 상속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여성은 마치 자연물처럼, 대상이 되어 출산 양육의 의무만 있었습니다. 또한 독립적이고, 배타적인 부계혈통주의가 여성의 정조를 의무로 강제하였습니다. 이는 자신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여 몸과 마음이 방어적으로 변모하여 수동적 태도가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부계사회에서 여성들은 구조적으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는 성악설에 근거한 악의에 찬 억압을 위한 법과 제도를 생성하였던 구시대 나쁜 국가의 경우 여성을 불만이 많은 세력으로 표적을 만들었던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주차장을 확보하지 않은 상태에서 주차위반 딱지를 마음만 먹으면 붙일 수 있는 경우처럼, 남녀불평등을 공고화할수록 남성이 유리하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여 부계혈통주의가 여성의 삶을 곤경에 빠트리게 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위험한 사회를 형성하게 된 원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부계적 가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배양된 남성의 과도한 성욕으로 인해 만들어진 나쁜 결과를 고려해 볼 때, 부계주의의 종말을 준비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부계사회의 등장으로 인하여 형성된 과도한 성욕으로 인하여 여성이 정조를 지키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여성에게 책임을 부과한 일방적인 설정은 원천적으로 무효입니다. 즉 부계사회가 여성의 생태적 특성을 무시하고, 극단적 불평등의 결과로써 ‘정조 죄’를 만든 자체가 코미디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지키지도 않으면서 여성에게만 강요하는 것은, 마치 절대군주가 자신은 지키지도 않는 법을 만들고 집행하면서 법을 초월하였던 것처럼, 표리부동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덕을 말할 자격(권리)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하여 남성들은 출산을 제외하고 종교나 정치경제 등 모든 것을 독점함에 따라 남성은 여성의 생살여탈권을 갖게 되었고, 정조를 죄로써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근대 민주주의 사회가 성립된 후에도 정서로 남아 있었습니다.

하여 부계혈통주의가 오랫동안 공고화한 결과, 정치에서 소외된 여성들은 남성을 보조하는 성적 존재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인본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근대사회를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봉건제 시대처럼, 현실적으로 여성의 정조 문제에 대해서 아직도 민감한 문제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똥 묻은 개가 재 묻은 개를 나무란다고 하는 속담처럼, 인간의 정조의무를 남성이 더 많이 어기면서 여성의 정조에 대해서 민감한 것은 모순입니다. 즉 지구촌 사회를 살아가는 신인류의 정조의무는 상호주의로써 남녀가 다 같이 지켜야 하는 성질임에 따라 부계혈통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부계 편도의 성문화는 퇴출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여 구시대 부계 우월적인 성문화가 오늘날까지 여전한 가운데 자본주의가 부추기는 인간의 상품화로 인하여 여성이 불리함에 따라 모계 신본주의 사회처럼 모계 편도의 성문화가 정착되는 것이 요구됩니다.

2. 적극적 복지사회

 

1. 적극적 복지사회를 향하여

근대사회가 성립된 후 민주적 생활양식이 보편화되었음에도, 구시대처럼 학대를 받으면서 숨죽이고 살아가는 여성이 많았습니다. 이는 부계사회의 등장 후 오랫동안 소외된 결과입니다. 예를 들어 절대 유일신이 불확실한 존재로 생각함에 따라 형성된 르네상스 시대를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성 폄하는 여전하여 17~18세기까지 초야권이 있었던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산업혁명으로 소가족제도가 보편화되었으며, 시민혁명으로 자연법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근대사회가 성립되었음에도 여성은 여전히 10대 1 정도의 불평등과 가정폭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사실에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전통 한국의 경우, 대가족제도에 의해 집안 어른이나, 이웃들의 눈치를 살펴야 함에 따라 여성에 대해서 가혹행위나 폭력은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일제부터 인구의 도시집중으로 소가족제도가 보편화되면서 가정폭력이 증가하게 되었다. 물론 양반문화를 지향하였던 한민족은 난폭한 행동이나, 억지를 부리거나, 상스러운 욕을 하지 못하는 선량한 민족이었습니다.

이는 한민족 여성들이 양반문화에 의해 인권유린이나 폭력에 의한 학대를 받지 않았음을, 일제의 혹독한 헌병통치에서 살면서도 아름다운 마음씨로 후손의 행복한 인생을 위한 간절한 기도를 매일 새벽에 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제 헌병통치의 억압으로 공포가 일상화된 가운데, 수탈로 인한 절대빈곤층의 증가로 직업을 구하기 위해 도시로 왔던 가족들은 가정폭력으로 가정불화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해방 후 사회 혼란과 6.25 전쟁이나 자본주의의 심화 과정을 겪으면서 인구의 도시집중 현상 등으로 소가족제도가 보편화되면서, 가정폭력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습니다. 즉 한민족이 폭력적이고 무례한 사람을 쌍놈들이라 경멸하였지만, 일제의 무자비한 극단적 폭력을 경험하면서 폭력이 일상화된 것입니다.

이는 중용을 생활화하여 극단적인 것을 피하는 온순한 좋은 기질을 나약함으로 비하한 결과입니다. 그리고 해방 후 동족상잔이라는 끔찍한 일까지 겪었기 때문입니다. 하여 한민족의 고유한 특성이 사라지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1 인간의 상품화로 불행하게 된 여성

인류는 자본주의로 인하여 만들어진 제국주의시대를 겪으면서, 인류의 반인 여성들은 비 복지적인 자본주의의 위험성을 인식하여 탈 자본주의를 위한 결사를 하였습니다. 즉 자본주의가 인간을 상품화하면서 여성의 성이 가장 먼저 상품화되고, 폭력의 위협을 당했기 때문에 탈 자본주의를 요구한 것입니다.

이는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 여성이 어떤 처지에 있었는지를 다음의 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살인의 20~50%가 가정 안에서 일어나고 살인의 40%는 부부의 살인이며, 이들의 85%는 아내가 구타당해 살해된 경우라는 보고가 있고, 여자 피살자의 40%는 남편이 살해한 경우라고 한다.

독일에서도 여성 피살자의 22%가 남편의 폭행으로 죽었다 한다. 김광일의 조사에 따르면 구타당하는 아내의 61%가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적이 있는데, 골절이 41%, 탈구 21%, 안구 탈출 안구파열이 6% 칼등 예리한 물건에 찔린 상처가 21% 임신한 아내를 때려 유산한 경우가 29%나 되었고, 두개골절이 2명, 안구 파열에 의해 안구가 튀어 나온 경우도 있었다………

93%는 구타 이외에 말로 협박하고 욕을 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었는데 상스러운 욕에서부터 상대방의 체면과 자존심을 몹시 상하게 하는 말을 하고 죽으라고 저주하거나 죽인다고 협박하기도 한다.” (88) (서진영, 여자는 왜, 동녘 250~251p)

또한 “김광일의 연구대상 중 54%가 아내 구타 후 강간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는데 구타당한 후 공포와 모멸감 그리고 상처의 아픔 때문에 여성에게는 성교할 의사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남편이 폭력으로 성교를 감행하는 것이다.” (89) (서진영 251p)

이처럼 사고로 다치는 경우보다 가부장이나 남성들의 폭력에 의해서 다치는 경우가 더 많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남성이 출산할 수 없음에 따라 신체적으로 유리한 성충동이 강력한 만큼, 상대적으로 오늘날 여성들은 적극적으로 방어하고, 때로는 공격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충돌이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뿐만이 아니라 부계주의적인 자유주의와, 모계주의적인 민주주의를 혼합한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절차적 정의로서 수단에 머물게 한, 불완전한 민주주의가 남녀상호간의 충돌을 부추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모계적 가치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가 부계와 모계가 균형을 이루는 체제로 공고화되어야 함에도, 부계가 정치 권력을 독점한 데서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계와 모계의 두 축이 견제와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 지구촌 시대가 되었음에도, 부계 일변도의 권력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시대착오의 결과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부계 편도의 권력구조와 부합되는 신자유주의의 원칙을 고수함에 따라 생태적으로 복지적인 여성들에게 치명적이며, 양극화로 인하여 사회발전의 중추 역할을 하는 중산층이 희박해지면서, 인간의 연대성이 무너진 위험한 사회가 공고화된 것입니다.

뿐만이 아니라 부계주의의 경제 제도로써 자본주의가 만드는 절대적 양극화는 가족해체를 증가시키면서 결손가정의 자녀들로 인하여 유발되는 사회적비용이 폭발적으로 증대되고 있습니다.

하여 천부인권의 실효성을 보장하기 위한, 모계적 가치인 ‘천부소유권’을 근간으로 하는 새로운 모계적 분배양식을 위한 정치경제 제도가 성립되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여성이 적극적 복지사회의 구현을 위한 생활 정치의 주역이 되는 체제의 성립을 말하는 것입니다.

 

1.2. 생태적으로 복지적인 여성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으로 성립된 근대사회는 여성의 사회참여를 가능케 했습니다. 하지만 대다수 여성의 경우 저임금의 허드렛일이나, 비정규직 등으로 마치 문어가 자신의 꼬리를 먹는 것처럼, 소모적인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당시 여성 인권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지 못했지만, 구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신장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경공업 중심이었던 초기자본주의에서 여성은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즉 노예제도가 폐지되면서 여성 노동자가 노예 노동자를 대체한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제2차 산업혁명인 중화학 공업을 넘어 오늘날 제4차산업혁명인 첨단 과학기술을 근간으로 하는 정보화시대가 되면서 많은 여성이 형편이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즉 남성을 보조하는 고전적인 일자리조차도 기계로 대체되어 저임금조차 줄어가고 있습니다. 하여 경제적 독립도 어려워져가고 있음을 생각해 볼 때, 자본주의(물질주의)와 여성은 어울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따라서 부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사회는 여성이나 사회적 약자에게 불리하며, 사회적 약자를 양산하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첨단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한 양극화가 형성되면서 나타나는 높은 실업률이 복지축소를 지향하는 신자유주의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속성에 충실할수록 사회복지도 소홀해지면서 많은 여성이 서비스업으로 몰리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로 인해 도덕적 타락이나, 가족해체, 범죄증가 등으로 인해 요구되는 복지 수요와 치안 비용 등 사회적비용의 폭발적 증가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아무도 책임질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모계적 속성을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 정치가 부계적 속성을 내재한 경제적 자유주의를 통제할 수 없었던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여 자본주의 분배양식(물질주의)은 인간을 타락하게 함을 역사적 경험으로 알게 됨에 따라 존재의 삶, 관계의 살을 가능케 하는 모민주의 분배방식(정신주의)에서 사는 것이 바람직함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사회조직의 기초인 가족은 사회를 지탱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음에 따라 모성에게 정부가 가족복지를 위해 ‘소유상하한제’로 만들어지는 잉여가치를 모성에게 수당으로 지급하는 새로운 분배양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가정에서 모성이 배려, 보살핌, 출산, 양육, 건강 식탁, 청결 등 일정한 복지 노동을 인정하여 정부가 보상하는 체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두고 적극적 복지국가라고 합니다.

아무튼 신자유주의는 야경국가 수준의 국가를 구현코자 함에 따라 자본주의 속성에 충실했던 초기자본주의와 여러 면에서 흡사합니다. 물론 공산당의 퇴출로 인하여 인간의 배타적 소유욕인 탐욕을 배양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정당성은 더욱 확고해진 결과로 신자유주의가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부계적 분배양식으로써 자본주의는 세계적 양극화를 초고속으로 달성함에 따라 더욱 위험한 사회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를 시작한 지 약 200년 정도이지만 세계적 양극화와 더불어 오늘날 70억 인구 중 대다수가 빈곤층으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임을 포기해야 할 정도로 적나라한 향락산업과 더불어, 도덕적 타락을 유도하는 퇴폐적 문화가 보편화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섹스를 상품화한 산업은 날로 번창하고 있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자본주의를 거부하며 퇴출을 전제로 한 테러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합리적이며 지혜로운 존재임에 따라 테러로 문제해결을 하기보다 새로운 모계적 분배양식을 선택할 것입니다.

이는 인간은 스스로 인간다운 삶을 위한 새로운 가치를 끊임없이 창조하고, 사회협동을 한 결과, 오늘날의 고도 과학 문명을 이루어 지구촌 사회를 만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인간은 양심을 통해 형성된 인류의 각성으로 인하여 문명화된 것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한 모계 신본주의 사회의 믿음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 스스로 선하게 살 수 있는 적극적 복지사회의 세계화로 역사 발전케 하는 것이 인간의 출생목적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1.3 능력이 배양된 여성

부계혈통주의가 주류를 이루면서 남성은 세력을 형성하기 쉬웠던 반면, 여성은 부계혈통주의를 보조하는 처지로 세력을 형성할 수 없었습니다. 즉 부계혈통주의로 인하여 여성을 혈통 보존 수단으로 종속함에 따라 대다수 여성이 경제적 독립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인간이 상품화되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절대빈곤층의 여성의 경우 자녀부양과 생존을 위해 매춘을 했던 역사적 사실을 통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여성은 경제적 독립이 불가능함에 따라 남편의 외도나 굴욕적인 멸시, 수모 등을 겪게 된 것입니다. 하여 매춘의 발생을 근원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천부소유권’을 보장하는 적극적 복지국가가 성립되어야 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양극화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인간의 ‘천부소유권’을 사회적 합의로 인정하여 물적 기초를 보장하는 모민주의 분배양식인 ‘소유상하한제’로 적극적 복지사회를 구현한다면 매춘 자체가 소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뿐만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무제한 소유를 정당화하여 무한한 탐욕을 배양함에 따라 한정된 지구의 자원을 낭비하거나, 환경오염으로 새로운 질병 확산이나, 산재로 인한 노동력 상실 등으로 다수가 빈곤층으로 전락이 되는 가운데, 인간성 황폐화가 빠르게 진행되어 인류는 새로운 위기를 맞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적어도 수억 년에 걸친 경이로운 생명의 기적을 무시하며 우선 편리함이나 욕구 충족 등을 위한 삶을 추구한 결과로 재앙을 맞고 불행한 인생을 살 게 되는 것입니다. 하여 자본주의를 수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위험한 사회로 나빠졌다면, 탈 부계적인 새로운 모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모민주의의 성립을 위한 사회적 합의를 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부계적 가치가 주류를 형성한 사회에서 모계적 분배양식으로 진보하기 위해 모계와 부계가 균형을 이루는 모민주의 정치체제가 성립되어야 합니다. 이는 근대사회가 성립되었다 할지라도 여성이 정치력을 발휘할 수 없었던 사실을 상기한다면, 앞의 사실을 긍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부계적 가치가 일반의사로 되어 있는 척박한 환경에서 비교적 단기간에 정치세력을 형성하여 남녀평등이 차별금지법으로 어느 정도 실효성을 갖게 된 사실이나, 여권신장을 권고하거나, 여성 NGO가 국내 정치에 압력을 행사하거나, 녹색 생명 운동을 위한 국제적 NGO의 중심에서 독자적이고 조직화 된 힘을 갖추는 등을 통해 여성이 정치적 감각이 상당함이 입증되었습니다.

이는 법이 본질적으로 불문법처럼, 판례에 의존하고 있으며, 더불어 정서에 부합되는 판단을 함에 따라 여성에게 불리한 것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극복하고 있음을 볼 때, 실현 가능함을 알 수 있습니다. 하여 여성이 주도하는 생활 정치가 오래지 않아 활성화될 것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즉 부계사회가 등장한 후 가족복지만을 담당하고, 수천 년에 걸쳐 사회적 합의에 직접적인 참여를 하지 못했으며, 종속적인 지위에 머물러 있었음에도, 불과 100년 정도에 걸쳐 획기적인 여권신장을 이룩한 점을 상기해본다면, 여성이 민주정치에 적합함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현실적으로 자본주의사회에서 사는 인간의 삶은 급박한 문제가 많음에 따라 힘이 뒷받침되지 않는 인권은 선언적 의미로 머무르기 쉬운 것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인권운동과 더불어 인류의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한 생명 운동으로서 녹색 환경운동을 조직화한 비정부기구가 세계정부처럼, 각국에 권고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동등한 교육의 기회와 더불어 남녀평등을 익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부계혈통주의가 엄연하게 사회정서로 자리하고 있는 것은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는 여성의 경우 교육과 현실이 다른 표리부동한 상황을 인식하고 있음에 따라 여성은 내심 기존 질서에 대한 반항심으로 인하여 인격 장애를 겪기도 하거나, 더 나아가면 가정불화의 원인이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현실적으로 부계혈통주의가 엄연히 존재함에도, 남녀평등을 교육받는 여성의 경우 죽도 밥도 아닌 어중간한 입장에 표류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성들이 현재의 모순을 해결코자 하는 의지로써 페미니즘(여성 사회주의)이나, 녹색 생명 운동 NGO 등에 참여한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여 이러한 갈등은 여성들이 소외감을 느끼게 될 뿐만 아니라, 때에 따라서는 현실 적응을 위한 가부장의 노력을 원망이나 공격하게 되는 원인이 됩니다. 물론 남녀평등을 가르치는 학교 교육과 전혀 다른 불평등한 현실을 가르쳐야 하는 가정교육으로 인하여 가장은 이중고를 겪고 있습니다.

하여 가족부양 능력은 위축되고 있는 상황에서 가장은 권한보다 책임이 더 많은 빛 좋은 개살구로 전락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스스로 가부장제를 벗어 던져야 할 때가 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고강도의 경쟁이 일상적인 현대자본주의에서 원자화된 개인의 삶을 살게 함에 따라 중압감이 심각한 수준에 이른 수많은 가장이 삶을 포기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여 오늘날 가장은 대표성만 있을 뿐, 권위가 약화 되었음에도, 수천 년에 걸쳐 공고화된 가부장제로 가정의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은 불합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오늘날 무한경쟁을 지향하는 신자유주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남성의 능력은 양극화로 우열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는 가운데, 한 가족을 이끌만한 경쟁력을 갖춘 가장들조차, 신자유주의가 공고화될수록 전문성의 부족으로 다수가 경쟁에서 탈락이 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양극화로 대다수 가장이 힘겨운 삶을 살고 있음을 볼 때, 남성들이 모계적 분배양식의 성립을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오늘날 위험한 사회를 극복하기 위한 사회운동으로써 녹색생명운동의 정치화와 부계와 모계가 견제와 균형을 이루기 위한 각 각의 한 축으로 제도화하여 적극적 복지사회의 구현을 위한 것입니다.

물론 자본주의가 양극화를 빠르게 형성하면서 빈곤층의 확대로 가족해체나, 독신 증가 등 수많은 문제를 유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동등한 교육과 직업훈련 등으로 여성들의 개인적인 역량이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제4차산업혁명 시대를 맞이해서 대부분 여성이 초기 자본주의사회처럼 ‘생존을 위한 혼인’을 해야 할 상황이 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여 부계적 가치를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차가워진 결과로 성립한 소극적 복지국가를 넘어,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된 모계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적극적 복지사회로 역사 발전해야 할 상황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4 부계적 분배양식의 문제

오늘날 제4차산업혁명 시대를 맞이한 인류는 과소비, 높은 교육 수준, 전문화, 높은 실업률, 가족 내부의 욕구불만 폭발 등으로 가장이 부양책임을 다할 수 없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가장을 돈 버는 기계’라고 폄하를 하거나, 가장은 권위도 없이 부양의무와 가족 대표로서 책임만 있는 상황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가장은 ‘빛 좋은 개살구’인 것입니다. 하여 가부장제 사회에서 가장은 부양의 책임이 구조화되어 있음에 따라 적극적 복지사회와 같은 근본적인 변화가 없다면, 가부장은 샌드위치의 입장에서 해방될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부계 스스로 만든 자업자득의 결과임에 따라 여성에게 공동 주체로서 역할 분담을 요구하고, 그에 상응하는 적극적 복지사회로 모계적 분배양식을 구현해야 해방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4차산업혁명 시대에 이른 오늘날 고전적인 시간과 공간의 의미가 없어졌으며, 공룡기업군의 무한경쟁으로 인하여 형성된 세계적 양극화는 1대 99라는 절대 치에 이르게 되면서 대다수 가장은 몰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거대기업 공룡집단의 등장, 높은 실업률과 빈곤층의 확산, 과잉경쟁의 유발 등으로 가장은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여 부계는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여성과 함께 문제해결을 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은 채워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것처럼 욕구를 자극하는 ‘풍요 속의 빈곤’으로 인해 만들어진 자본주의 발 위험한 사회를 방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뿐만이 아니라 탐욕을 배양하는 자본주의가 인간을 ‘경제적 동물’로 변모케 함에 따라 인간다움의 하나인 나눔, 양보, 용서 등의 마음이 빈약하게 되면서, 인간성 황폐화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여 영적 존재로서 인간에게 적합한 새로운 모계적 분배양식으로 ‘존재의 삶’을 살 수 있게끔 역사 발전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오늘날 지구촌 시대는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라는 우리 속담처럼, 지속 가능한 사회가 되기 위해 다름을 존중한 협력이 필요한 시대가 된 것입니다.

아무튼 무한경쟁의 결과로써 중산층이 사라진, 파레토(Pareto: 1848-1923)가 주장한 20대 80의 양극화 사회가 근대사회의 인간 존엄 정신을 훼손하고 있습니다. 물론 오늘날은 1대 99라는 절대적 양극화로 근대정신(모더니즘)은 의미를 잃었음에 따라 포스트모더니즘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 존엄을 구현하기 위해서 성립한 근대사회는 인간의 사회성과 개인성이 균형을 이루기 위해 부의 균형도 어느 정도 이루어야 함을 전제로 하고 있음에 따라 이기심을 극대화하여 양극화를 유발하는 자본주의는 근대정신과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경향으로 인하여, 합법을 가장한 법의 잣대를 기만하여도 성공만 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할 경우, 자연법사상의 핵심의제인 인간의 사회성이 파괴된다는 점은 문제입니다. 하여 자연법사상을 근간으로 하여 일어난 시민혁명의 취지에 부합되는 적극적 복지사회로 역사발전이 되는 것이 순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구시대의 절대주의적인 양극화를 거부한 시민혁명의 인권선언이 복지사회의 구현을 위한 선언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절대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양극화는 이성적인 존재로서 인간과 불 합치함을 선언한 것입니다. 즉 시민혁명의 원동력인 철학적 상대주의(인본주의)가 절대 봉건제를 퇴출한 것입니다.

하여 배금주의의 양극화는 구시대의 절대주의 양극화와 동질적임에 따라 시민혁명 정신과 배치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시민혁명 정신은 온전한 민주주의로 적극적 복지사회의 구현에 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자본주의는 시민혁명의 뜻과 배치되는 양극화를 만들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본질인 관용성, 복지, 분권 등과 어울리지 않는 신자유주의로 발전하였습니다. 이는 자유, 평등, 박애의 인권선언을 근간으로 하여 근대 민주주의 사회가 성립되었음에도, 마치 자유주의를 위해 근대사회가 된 것처럼, 인류의 이상인 민주주의가 자유주의를 위한 형식적 민주주의로써 수단으로 머물게 하기 때문입니다.

즉 자유주의적 분배양식을 민주적 결정인 다수결로서 조절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유주의 원칙을 위한 절차적 정의로써 민주주의가 수단에 지나지 않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여 제국주의로 인한 참담한 역사적 경험이나, 이에 반동한 사회주의의 등장이나, 양극화 등을 통해서 민주주의는 경제적 자유주의를 위한 정치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과당경쟁을 유발한 부작용의 결과인 지구온난화, 천재지변, 환경오염 등의 자연 재앙이나, 양극화로 인한 범죄 유발, 치안 비용증대, 가족해체 등을 유발하는 경제적 자유주의를 넘어서 신인류에게 적합한 경제적 민주주의로 진보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오늘날 무언가 불행한 일들이 많이 유발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으로 인하여 만들어진 수많은 사회단체나, 건강 의료와 관련된 사업이 번창하거나, 보험과 같은 산업 등이 날로 번창하고 있을 상기해 볼 때, 자본주의가 처음 예상했던 우려보다 훨씬 빠르게 위험한 사회가 되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이 아니라 물질 풍요를 통해 인간해방을 구현하겠다는 자본주의는 독신이나, 가족해체, 환경오염, 온난화 등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여 구시대의 권력 양극화로 인한 부패를 시민혁명으로 타파하고, 근대사회를 성립했던 것처럼, 지구촌 시대를 살아야 하는 신인류는 부의 양극화로 인하여 위험한 사회를 타파하기 위해 모민주의 분배양식으로 진보해야 할 때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모성의 고유한 일자리인 복지를 주관하여 가족의 태양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 모계적 분배양식이 보편화되어야 할 때가 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1.5 ‘존재의 삶’(미니멀리즘) ‘관계의 삶을 위한 분배양식

첨단 과학기술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인류는 고학력이 요구되는 첨단기술이나 전문화 등을 근간으로 하는 무한경쟁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과부하가 걸려 있습니다.

특히 다수여성들은 우수한 남성들의 뒷바라지 수준의 비숙련, 저임금, 비정규직 등으로 삶의 질은 고사하고 생존하기도 어려울 정도의 저소득으로 연명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통계청에서 발표한 2004년도 여성 임금은 남성 대비 64.5%, 2009년도는 62.4% 2020년 67.7% 정도에서 알 수 있듯이 저임금이 개선되지 않고 있으며, 고용은 전체의 반 정도로 숙련도가 낮은 일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하여 모자가정의 경우 계속 가난하게 살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따라서 공업화로 여성들의 일자리가 많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내용 면에서 남성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저임금과 낮은 기술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양극화가 가속화됨에 따라 양산되는 사회적 약자의 보호를 위한 예산의 부족으로 인하여, 여성의 삶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이는 자유주의가 소유권 보장을 우선함에 따라 어디까지나 사회적 약자의 보호를 위한 복지는 후 순위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신자유주의 원칙에 충실한 무한경쟁으로 유발되는 충돌은 천문학적 사회적비용 부담이나 빈곤층의 양산에 따른 폭발적 복지비용 등으로 자본주의 정부는 감당하기 어려워진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설비 자동화와 모든 분야가 전문화함에 따라 만들어지는 고실업을 정부가 해결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는 오늘날 제4차산업혁명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학력, 첨단기술, 전문지식 등이 필요하게 됨에 따라 무한경쟁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 세계에서는 고실업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즉 실직과 비정규직의 증가와 더불어 청년실업률이 높아지는 이유입니다. 또한 오늘날 식탁은 공업화된 제품들로 가득하거나, 보살핌의 기업화나 양육의 외부의존 등 여성 고유의 대부분의 일이 기업화가 됨에 따라 대다수 여성은 저임금 노동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하여 요란한 선전과 높은 빌딩, 거대한 산업시설, 쇼핑천국 등으로 일자리가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노동 수요가 적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오늘날 빈곤층 여성들이 매춘을 선택한다 해도 도덕적으로 매도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상황에 있음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신자본주의에서 답을 찾으려는 태만함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매매춘에 대해서 단속만 할 뿐 생계형 매춘을 감소시키는 적극적 복지사회의 성립에는 관심이 없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여 절대빈곤층의 경우 생존을 위해 유일한 재산인 자신의 몸이라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근본적으로 매춘이 사라지는 새로운 모계적 분배양식이 세계화되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오늘날 자본주의 헌법이 자연법사상을 근간으로 해서 만들어졌지만, 양극화를 정당화하는 자본주의에서 빈곤자들 인권은 그림의 떡처럼 법적 실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천부인권’의 내용으로써, 자연법사상을 확장한 ‘천부소유권’을 보장하는 적극적 복지사회가 구현될 수 있는 정치경제 제도(체제)가 세계화(보편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미 모계 신본주의 사회가 인간 존엄을 위한 분배양식인 공유제와 여성의 성교독점권을 보장하여 매춘이 없었던 사실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모계 신본주의 사회가 인간 존엄을 위해 필요한 물적 기초를 보장한 모계적 분배 태도가 참고될 것입니다.

이는 지구촌 시대를 맞이한 인류는 ‘존재의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 인류가 위험한 사회로 퇴행할 수 없음에 따라 삶의 질 향상을 위한 분배양식으로 역사 발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태고부터 인간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으며’, ‘나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숙제를 풀기 위해 살아가는 존재임에 따라 ‘존재의 삶’이 적합할 것입니다.

하여 수많은 사회협동의 결과로써 제4차산업혁명 시대를 만든 사실과 더불어 미니멀리즘 트랜드 자체가 ‘존재의 삶’을 위한 준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구시대를 타파하여 성립한 근대사회를 넘어, 포스트 자본주의로써, 온전한 민주주의로써 ‘모민주의’로 역사 발전될 것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즉 오늘날 지구촌 시대에 맞는 자연법사상이 확장된 ‘천부소유권’을 보장하기 위한 새로운 모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적극적 복지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모민주의’의 ‘소유상하한제’가 보편화될 것입니다. 물론 태고로부터 있어 온 사회협동의 결과에 대한 보상의 의미도 있습니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인간의 탐욕을 배양하며, 필요 이상의 과잉경쟁을 유발하여 인간성 황폐화, 자원고갈, 환경오염, 먹이사슬 붕괴 등의 나쁜 결과를 만들었다고 볼 때, 새로운 모계적 분배양식으로 인간성이 회복되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2. 구심력의 배양(강화)

오늘날 신자유주의에서 살아가는 가장은 전통과 현실의 중간에 있는 마치 샌드위치와 같은 입장이 되었습니다. 이는 만성적으로 부족한 소수의 고급인력, 투자금융의 전문가, 거대기업의 경영진 등은 고소득자가 되는 가운데, 중소기업 경영자나, 중산층은 저소득층으로 전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동화로 어중간한 기술자나 다수의 일반 노동자는 공급과잉으로 저임금의 비정규직이 양산될 만큼, 고실업 사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제4차산업혁명 시대를 살아가는 가장은 부양의 책임을 다하기 힘든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부양책임을 전제로 한 남존여비의 사회정서는 여전함에 따라 현실적으로 사면초가에 있습니다.

또한 기업의 경쟁력을 위해 사무자동화나 공장자동화 등으로 남성이 했던 일을 저임금의 여성이 대신할 수 있음에 따라 산업 자동화가 가속화될수록 대다수 가장은 부양책임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는 첨단 과학기술, 자동화 기술, 정보통신, AI(인공지능) 등의 발달로 가능해진 무한경쟁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에서 자본의 축적이 가속화됨에 따라 낮은 단계의 기술자는 쓸모가 없어지고 있는 가운데, 저임금 여성의 사회진출은 확대되고 있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초국가적인 다국적 기업에 의한 산업 집중화로 양극화 사회가 가속화되면서 형성된 위험한 사회로 인하여 인류의 구심력인 모성성이 상실되는 위기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욕구 본능을 자극하고, 배양하는 자본주의에 의해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근대사회에서 모성에게 사회적 미덕으로써 모성애적 인내를 요구하면 받아드릴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있었지만, 고실업 사회가 된 오늘날 여성은 출산 양육과 생계까지 책임지는 경우가 증가하면서 모성애를 벗어던지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여 가부장제 사회이면서 모성의 사회적 미덕을 강조하는 것은 착취로 볼 수 있음에 따라 여성의 사회적 미덕에 대한 보상을 적극적 복지사회의 성립으로 대체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비복지적인 신자본주의는 가족이기주의를 정당화하는 구실이 되며, 이로 인한 과당경쟁이 가족 착취를 유발하게 되는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생태적으로 민주적이며, 복지적인 여성과 부합되는 새로운 정치경제 제도로써 탈자본주의적인 모계 민주주의가 적합함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오늘날 지구촌 시대를 살아가는 인류는 부계혈통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가부장제는 의미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하여 부성과 모성 중에 누구나 가장이 될 수 있는 공유제처럼, 부계와 모계와 함께 각 각의 한 축으로 존중하는 모민주의 체제가 요구됩니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에서 소득으로 인정하지 않는 가사노동이나, 봉사 등을 소득으로 인정하는 적극적 복지사회의 구현하기 위한 체제가 세계화되어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2.1 탈자본주의를 지향

자본주의적 양극화로 유발된 빈곤층의 경우 매춘이 생계 수단으로 되고 있습니다. 즉 인간을 상품화하는 자본주의가 인간의 탐욕을 배양함에 따라 매춘이나, 강간 등으로 나타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 스스로 부패와 타락을 즐기며, 흉물스럽게 퇴보하고 있습니다.

이는 절대 봉건제로부터 반동하여 형성된 자유주의가 인간의 사회성과 개인성의 균형을 무시하고, 인간의 개인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구시대의 절대주의 풍토에서 형성된 자유주의가 상대주의적인 평등주의나 박애주의, 복지주의보다 우선하는 것입니다.

하여 자유, 평등, 박애의 인권선언을 명분으로 하여 일으킨 시민혁명이 자유와 평등을 한발씩 양보케 하는 박애를 통해 조화로운 삶을 구현코자 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를 제1의 원칙으로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유주의는 인간의 사회성에 의해 인류 역사가 발전되고 있음을 간과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의 개인성에 중심을 두는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인간의 사회성 퇴보로 인한 위험한 사회를 만들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자본주의는 인간을 ‘경제적 동물’로 만들어 감에 따라 스스로 영적 존재임을 인식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여 영적 존재로서 인간은 민주주의 본질에 부합되는 모계적 분배양식이 적합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경제적 민주주의로써 경제민주화와 유사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오랫동안 절대주의 풍토에서 만들어진 자본주의는 상대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지구촌 시대가 요구하는 적극적 복지사회의 구현을 위해 요구되는 경제적 민주주의로 변모함에 따라 퇴출이 될 것입니다. 즉 지구촌 시대를 맞이한 신인류는 시민혁명 정신과 부합되는 적극적 복지사회를 구현하여 ‘존재의 삶’을 살 때가 된 것입니다.

하여 모계적인 민주주의가 절차적 정의라는 형식을 넘어 내용으로써 모계적 분배양식으로 온전한 민주주의가 되기 위해 여성들이 권력의 반을 갖는 모민주의의 세계화를 위한 결사가 필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민주주의 정치는 근본적으로 비폭력적이며, 말로 하는 정치임을 특징으로 하고 있음에 따라 여성들에게 유리한 정치제도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민주적 생활양식이 보편화된 세상이 되었음에도, 부계 일변도 현실에서 단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놓은 것일 뿐, 여성은 여전히 불리합니다. 이는 전체주의를 지향했던 부계사회에서 형성된 문화적, 사회적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수단으로 작용케 하는 반쪽민주주의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또한 여성들은 부계사회의 등장으로 비주류로 전락하면서 정치, 경제, 종교, 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소외되고부터 부, 권력, 기술, 지식, 조직, 육체적 힘 등을 갖출 수 없었습니다. 즉 부계사회의 등장으로 여성의 생태적 본능에 적합한 종교와 예술, 의료, 복지 등을 부계가 독점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계사회는 성의 특성에 따른 역할 분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여 근본적으로 다른 남녀의 특성을 상호 보완하는 사회가 아니라 모든 것을 남성이 독점하여 주체가 되고 여성은 객체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개인성에 중심을 둔 자본주의에서 생태적으로 복지적이며 사회성이 발달한 여성에게 불리한 것으로 나타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개인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는 인간의 이타심이나, 사회성을 근간으로 하는 평등, 박애, 복지 등과 배치되고 있습니다. 하여 인간의 이기심을 동기유발로 하는 자본주의는 양극화를 유발하며 소비를 자극하고, 부추긴 결과, 자원고갈, 환경오염뿐만 아니라 가족의 해체나, 독신 등의 증가로 불행한 인생을 양산하는 위험한 사회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2 여성들의 태도 변화

부계적 가치에서 발현된 자유주의가 인류의 반인 여성의 삶을 불행하게 한다면, 인간의 삶과 부적합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남녀가 생태적 기능과 심성이 다른 특성에 근거한 상호보완적이며 기하학적 남녀평등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부계주의의 연장선에 있는 자유주의가 남녀에게 산술적인 대등한 경쟁을 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남녀가 인간으로서는 같지만, 질적으로 다른 존재임에 따라 질적으로 다른 것을 존중하는 체제가 성립되어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여성은 스스로 국가의 보호와 배려를 받기 위한 권력의 반을 보장받는 새로운 정치경제 제도로 적극적 복지사회를 구현해야 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여권신장을 위해 근세에 이르러 여성과 자유주의가 부적합한 사실을 인식하는 여성들이 주도하는 여성 사회주의 정치사상으로써 페미니즘이 주의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즉 여성들이 근대 후 근세에 이르러 여성우월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페미니즘(여성사회주의)은 여성의 사회지배를 목적으로 투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여 여권신장이라는 측면에서는 같은 목표를 갖고 있지만, 완전한 민주주의로써 ‘모민주의’ 성평등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리고 1960년대 후반 미국에서 시작되었던 여성혁명(Women’s Revolation)론이나, 여성의 삶(Women Live)이라는 슬로건과 더불어 남성에 대한 적개심을 노골적으로 표현한 남적론(男敵論)을 내세우며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세계 각국에 전파되면서 세상의 반인 여성의 심금을 울렸을 뿐만이 아니라, 녹색 생명 운동으로써 국제여성 NGO가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여성운동은 자본주의를 수정한 소극적 복지국가를 성립할 수 있었으며, 제2차 대전 후 복지사회를 공고화하면서 중도주의의 원동력이 되었던 사실을 상기해 볼 때, 지구촌 시대가 요구하는 적극적 복지사회가 보편적 가치로써 자리 잡게 될 것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여성 지도자가 논리보다 감성에 호소하여 남성들의 반성과 참여를 끌어내었습니다. 하여 여성 자신들이 대단한 존재로 각성하게 되었으며, 가정에서 유발된 갈등 폭발로 인한 파괴력 등으로부터 제어가 가능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수많은 가족해체로 인한 이혼의 증가로 사회문제가 유발되었으며, 분노에 찬 용기 있는 여성들은 가정이나 사회에서 이중의 고통을 감수하며 빈곤한 삶을 대가로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여성은 후회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동료 여성에 대한 사명감으로 분연히 일어선 희생의 결과, 후일 대다수 여성은 자유로워졌고, 이혼할 때 상당한 위자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사회보장을 강화하게 됨에 따라 위기를 넘겼을 뿐만 아니라, 좋은 국가에 대한 기준을 제시한 중요한 사례로 남아 있습니다.

물론 미국이 당시의 세계인구의 6% 정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자원의 40% 이상을 소비하는 부국이었고, 2010년 세계 경제의 27%인 유럽연합보다 더 큰 세계 경제의 28%를 차지할 만큼 초강대국인 사실과 더불어 사회보장제도가 튼튼함에 따라 여성들은 위기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개도국이나 제3세계 국가에서 미국식 여성운동을 전개했다면, 여성들은 파멸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선진국을 제외한 대다수 국가에서 여성운동의 활동이 미약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은 복지축소를 근간으로 하는 신자본주의에서 전업주부를 권장하는 가부장제로써 신보수주의를 병행함에 따라 ‘남적론’처럼 부계주의 종말을 원하는 여성의 염원을 무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3 새로운 시대를 여는 여성들

유럽에서 전통적 가치와 충돌로 인하여 제대로 꽃을 피우지 못했던 자본주의를 미국의 개척정신이 활짝 피게 한 것이나, 미국 여성들의 여권신장운동 표어로써 ‘남적론’까지 제기한 것 등을 상기해 볼 때, 용기 있는 개척자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에 기초하여 행동으로 보여준 사실 자체가 세상 여인들에게는 자신감을 불러일으켰고, 여권신장을 위한 고난을 달갑게 받아드린 용맹한 결사는 여성이 주체가 된 혁명으로써 인류의 위대한 유산이 되었습니다. 하여 위험한 세상으로 변모한 오늘날 태생적으로 복지적이며, 민주적인 여성이 생활 정치의 주역이 되어 적극적 복지사회를 구현할 능력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모성의 출산과 양육을 통한 재창조의 결과 2022년 현재 세계인구가 79억 명에 달하게 된 사실에서도 여성이 주역이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79억 명에 이르는 규모의 인류는 궁극적인 삶의 의미와 더불어 수많은 의문을 이해할 수 있는, 무언가 목적한 바를 이룰 수 있는 규모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살이는 힘들어지고, 인간의 상품화로 생명 경시 풍조가 만연하고 있는 가운데, 자신에게 당면한 문제조차도 해결하기 힘든 것이 현실입니다. 하여 세상의 주체로써 인간은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는 새로운 분배양식을 위한 정치체제로 진보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인류는 적극적 복지사회의 구현을 위한 녹색 생명 운동과 부합되는 새로운 모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새로운 체제로 역사 발전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지혜로운 인간은 고통을 유발하는 제도를 합리화하며 고집하기보다 신속한 퇴출이 바람직함을 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인구가 많다고 해서 인간을 경시하거나 소모적인 존재로 만들어가는 제도는 퇴출이 되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여성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세력을 형성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정치 감각이 없는 것으로 오랫동안 오해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모계사회가 씨족연대사회로서 수만 년에 걸쳐 인류를 이끌 수 있었음을 상기해본다면, 정치적 감각이 우수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중기모계사회였던 모계 신본주의 사회가 네트워크적인 하나의 세계로써, 오늘날 NGO나, UN과 흡사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구촌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여성이 새로운 모계적 분배양식을 보편적 가치로 공고화할 수 있는 정치역량의 발휘를 기대해봅니다.

3. 모계적 분배양식의 보편화

닫힌 사회로써 구시대는 여성에 대한 편견으로 무시하였지만, 개방적인 지구촌 시대를 맞이한 인류는 문명화됨에 따라 남성들은 생태적으로 다른 여성을 상호보완적인 인생의 동반자로 뚜렷하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오늘날 선진국 중심으로 정당이나 의회에서 여성의 수가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는 가운데, 복지나 민원 해결을 위한 생활 정치의 주체가 되고 있음에 따라 여성 상호 간에도 신뢰가 쌓이고 있습니다. 이는 부계 편도의 사회에서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로 강화되면서 형성된 위험한 사회에 대한 반성의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부계 일변도의 정치문화에서 형성된 위험한 사회를 벗어나기 위해서, 여성이 권력의 반을 갖고, 여성 스스로 양적(산술적), 질적(기하학적) 평등을 구현할 수 있는 제도가 만들어져야 할 시점이 된 것입니다. 물론 ‘존재의 삶’을 살아야 하는 상황에 이른 인류는 모계적 분배양식을 선택하고 지킬 수 있는 능력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는 근대사회가 성립된 후, 여성이 단기간에 걸쳐 획기적인 여권신장과 실력을 갖추게 된 사실을 볼 때, 태생적으로 복지적이고, 민주적인 여성은 지구촌의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오늘날 대다수 여성은 구시대처럼, 고된 삶으로 인하여 현실 도피적인 경향이 있거나, 혹자는 신데렐라의 꿈을 이루기 위해 미모를 가꾸고 용의주도하게 부유층의 남성을 유혹하여 결혼을 꿈꾼다고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성은 적극적 복지사회가 생태적 특성과 부합되기 때문에 중심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3.1 부계적 분배양식의 퇴출

일반적으로 여성은 직관력과 입체적인 사고를 하는 경향이 있으며, 감성이 발달한 편인 반면, 남성은 관념적이며 가시적인 세계를 잘 이해하고, 이성이 발달한 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아마도 인간을 재창조하는 여성이 감성이 발달했지만 반면에 남성들은 각박한 현실의 모순을 극복해야만 하는 과정에서 이성이 발달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물론 모계 신본주의 사회가 농업혁명을 일으켜 잉여가치를 만들면서 늘어난 인구로 인하여, 형성된 부계사회부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잉여생산으로 인한 배타적 소유 관념이 형성된 결과, 모계사회의 공유제가 퇴출이 되고, 정교분리의 부계사회가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하여 운명론적 권한을 부여받은 자가 정치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절대주의적인 부계 신본주의 사회와 모계 신본주의 사회와는 출발부터 다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모계 신본주의 사회는 인간의 자율성과 개체성을 존중한 인본주의 사회였던 반면, 부계사회는 절대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전체주의 사회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모계 신본주의 사회는 인간을 세상의 주체로써 생각한 인본주의 사회였던 반면, 부계사회는 인간을 대자연의 부분으로나, 절대 존재의 피조물로 생각한 신본주의 사회였습니다. 이처럼 모계 신본주의 사회는 인간을 신의 후손으로, 스스로 시대에 맞는 문화를 창조하며 살아간 사실과 오늘날 지구촌 시대를 맞이한 신인류는 감성을 중시하며 개방적 사회로 발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함을 알 수 있습니다.

하여 대모신의 후손인 인간은 스스로 영적 존재임을 깨닫게 되면서 인류의 이상인 적극적 복지사회로 역사발전이 될 것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경제적 동물’로 변모하게 되는 부계적 분배양식보다, 첨단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이루어지는 성과를 인류가 골고루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모계적 분배양식으로 진보하게 됨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즉 인류공영을 위해 한발씩 양보를 하는 모계적 분배양식인 ‘소유상하한제’를 통해, 인류의 당면한 주요 과제인 탈 양극화, 소비 절약, 환경문제, 식량문제, 우주개발 등을 비롯해 인간성 회복, 영적 존재임을 각성하는 등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절대적 양극화가 형성되어 긴장감이 팽배한 가운데, 환경오염, 생태계 파괴 등 전대미문의 재앙과 각종 테러나 흉악범의 증가 등을 유발하는 위험한 사회를 극복하기 위해 중산층을 확대할 수 있는, 모계적 분배양식을 구현할 수 있는 체제의 성립이 필요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태고로부터 믿어온 순환 진보사상과 배치되고 있는 자본주의가 탐욕을 정당화하여 인간을 ‘경제적 동물’로 변모케 하는 사실은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태고 모계 신본주의 사회로부터 스스로 영적 존재임을 믿었던 인간은 합법을 가장한 착취나 이기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나쁜 일을 피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하여 마고 시대부터 인간을 영적 존재라고 믿었던 사실을 첨단시대를 통해 영적 존재임을 증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인류는 영적 존재로 삶을 살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따라서 인류가 문명인으로서 지속 가능한 삶을 살기 바란다면, 적극적 복지사회를 구현하는 것이 바람직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오늘날 첨단 과학기술의 도움으로 적극적 복지사회의 구현이 가능하게 됨에 따라 모계적 성질인 평등과 부계적 성질인 자유를 조화롭게 할 수 있는 박애를 최상위의 가치로 하는 새로운 모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정치경제 제도의 성립이 가능케 되었습니다.

즉 부계와 모계가 공존하는 체제로써 모민주의가 적합할 것입니다. 하여 인간 존엄을 위한 체제로써, 모민주의의 정당성을 관철할 수 있는 일정한 정치세력을 형성하는 것은 신인류의 소명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천부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물질적 기초인 ‘천부소유권’을 인정하는 모계적 분배양식을 성립케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절대빈곤층이나, 차상위계층, 모자가정 등 빈곤층 모성에게 기본수당을 지급하는 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 프랑스의 가족수당 제도보다 적극적입니다. 이는 인류의 유지 존속하기 위한 모성보호와 더불어 사회의 기초단위인 가족의 복지를 위한 모성 수당을 정부가 지급하여 모권을 강화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습니다.

물론 가족복지를 위한 수당을 빈곤층의 모성에게 지급할 수 있는 좋은 국가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UN과 함께해야 할 것입니다. 즉 국제여성 NGO처럼 인류의 반인 여성이 중심축을 이루어 진행한다면, 가능한 문제입니다.

이는 지구촌 시대는 존재의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이 증가함에 따라 적극적 복지사회를 위한 생활 정치를 수행하기 위해 여성의 역할 확대가 요구되고 있으며, 태생적으로 민주적인, 복지적인 여성이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근대사회가 성립했음에도 불구하고, 부계주의로 이루어진 오랜 관습이 유습으로 잔재하였으며, 근세까지 다수여성들은 빈곤과 가사노동 등으로 지식, 교양, 학문 등을 익힐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지구촌을 이끌 수 있을까? 라고 의심도 하고 있습니다.

즉 부계주의가 주류를 이룬 이후 만들어진 수천 년간에 걸쳐 쌓인 원한의 결과로써 형성된 위험한 사회를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태고로부터 여성들이 출산 양육을 통해서 인류가 오늘날까지 존속하여 고도 문명을 이룬 결과의 반을 인정하는 정치문화가 형성된다면, 가능할 것입니다.

물론 태고 모계사회가 농업혁명이나, 인류문명의 초석을 이루었음에도, 여성에게 가혹했던 지난날의 잘못을 마땅히 보상한다는 측면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주체로써 인간은 대자연과 잘 융화되고, 인간 상호 간에도 조화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개선할 수 있으며, 남녀가 서로 잘 보이려고 노력하는 본능과 부합하는 적극적 복지사회를 구현할 수 있는 ‘모민주의’의 보편화를 보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3.2 모계적 분배양식을 위한 체제성립

전체주의 사회였던 부계사회가 등장하고부터 수많은 분쟁으로 사람들은 원한과 증오심을 갖게 되었지만, 태고부터 오늘날까지 모성애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여 모성애에 기초한 모계사회는 성선설적인 사회였지만, 부계사회가 등장하면서 성악설적인 인간으로 변모했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즉 모권사회는 인간에 대한 연민이 많은 사회였다면, 부계사회는 일회적 삶으로 생각함에 따라 각박한 사회였습니다. 하여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이룩한 첨단과학기술문명은 모계적 가치에서 발현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첨단과학기술문명은 새로운 모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적극적 복지사회의 구현을 위한 수단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적극적 복지사회의 구현을 위한 전 단계로써 사회적 합의로 탈부계적 분배양식의 정착하기 위한 체제의 성립이 요구됩니다. 이는 모계가 부계와 대등한 권력을 갖지 못하는 기존의 부계 편도의 정치문화에 의해서 만들어진 정치경제 제도로써는 적극적 복지사회를 구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즉 지구촌 시대는 적극적 복지사회로 역사 발전해야 함에 따라 모계가 권력의 반을 갖고 부계와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새로운 체제가 성립되어야 합니다. 물론 어떠한 가치로써 정치이념을 구현코자 성립된 정치체계와 이를 관철하기 위한 실력을 정치 권력이라고 볼 때, 모계적 분배양식을 인류의 삶의 원칙으로 하는 정치이념에 대한 정당성을 동조하고 지지하는 세력을 형성해야 함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는 모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적극적 복지사회를 구현코자 할지라도, 적극적 봉사를 할 수 있는 일정한 세력이 없다면, 실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즉 양극화나, 테러, 환경오염, 생태계 파괴 등으로 유발되는 위험한 사회를 극복할 수 있는 세계 NGO가 존재해야 합니다.

물론 세계여성들이 주도하는 녹색생명운동 NGO는 자본주의와 충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탈 자본주의라는 근본적인 변화를 위해 녹색생명운동을 정치이념으로 한 정당이 만들어졌고, 조직화로 정치 권력이 형성되면서 세계화의 과정을 겪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구촌 시대를 살아가는 인류는 영적 존재임을 깨닫고 있는 가운데, ‘존재의 삶’에 눈을 뜨게 된 신인류로써 자유주의를 넘어 새로운 정치문화를 구현하기 위한 조직화 과정에 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민주주의는 인간의 이성을 존중하여, 말로 하는 정치로써, 모계주의를 근간으로 하고 있음에 따라 여성들과 부합되는 정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민주주의로 공고화되어야 하는 지구촌 시대와 어울리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근대사회가 성립된 후 남녀평등을 천명했으며, 제4차산업혁명의 첨단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조차, 2021년 현재 한국은 전체의원의 19% 세계 121위 정도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는 1995년 유엔의 ‘여성 의원 30% 할당’ 결의안 진전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여성의 표를 의식한 구색을 갖추는 액세서리 정도로 주변화에 머물러 있습니다.

하지만 수천 년에 걸쳐 전체주의 사회를 이끌었던 부계사회의 발전 속도보다, 모계적 가치를 조직 원리로 하는 정치세력이 빠르게 발전하고, 역량을 갖추게 된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오래지 않아 정치체계의 근본적인 변화로 이어질 것으로 예측할 수 있습니다.

즉 인권은 보편적인 가치가 되었으며, 대다수 사람은 평화가 가져다주는 이익이 훨씬 크다는 인식을 하게 됨에 따라 태생적으로 복지적, 평화적, 민주적인 여성이 생활 정치의 주체가 되기를 인류가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3 위험한 사회의 극복

자본주의가 과잉경쟁과 인간의 상품화, 절대적 양극화 등으로 삶의 의미를 잃게 함에 따라 자본주의에서 출산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현대 여성들은 여러 이유로 해서 혼인을 기피 하거나, 늦어지는 경향으로 출산율이 저하되는 등으로 인해 사회문제가 되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국내적인 초기자본주의에서 발전하여 보편화된 국가자본주의 시대는 어느 정도 각국의 문화적 차이나 정체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발전하였지만, 신자유주의는 인간 존엄과 배치되는 ‘경제적 동물’로써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자본주의에서 인간을 ‘경제적 동물’로 살게 함에 따라 만들어진 위험한 사회를 겪으면서 무의식중에 출산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실제 오늘날 세계시장 확대가 가능한 대량 정보처리 능력의 획기적 발달 등으로 무한축적이 가능함에 따라 만들어진 신자유주의 이념은 경영학, 회계학, 첨단 과학기술, 대자본 등을 축적하고 있는 선진국이 중심이 된 사상으로써 위험한 사회를 가속화하고 있습니다.

즉 신자유주의는 형이하학으로써 경제를 최고의 가치에 두는 ‘물신주의’의 심화로 인해 인간이 소외되면서 형성되는 위험한 사회를 만듭니다. 예를 들어 ‘소유의 삶’이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면서 형성된 제국주의로 인하여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유발된 것처럼, 오늘날 반자본주의를 위한 테러가 많아짐에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여 지구촌 시대 이전에는 배금주의에 의한 충돌은 어느 정도 조절이 가능했지만, 오늘날 양극화로 나타나는 위험성을 극복하길 바란다면 ‘존재의 삶’에 중심을 두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어떠한 가치를 설정하여 스스로가 복종하는 문화적 존재로서, 지역별로 수천 년에 걸쳐 형성된 독특한 생존 양식이 있음에 따라 유발되는 문화적 충돌을 피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다.

따라서 절대적 양극화로 해결하기보다 ‘존재의 삶’이 가능한 모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적극적 복지사회를 구현하는 체제의 세계화로 극복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선진국 중심의 신자유주의가 공고화되어 선진국이 유리하게 됨에 따라 후진국의 경우 불만이 폭발하기 때문에 사회통합을 위해 자국의 문화를 강화하여 서구적 가치를 배척하기 때문입니다.

하여 자본주의가 만들어가는 세계적 양극화로 인하여 유발되는 테러나, 과소비로 인한 환경오염, 과잉경쟁으로 인한 생태계 파괴 등의 부작용을 방치할 수 없음에 따라 인류는 새로운 모계적 분배양식으로 신인류의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또한 남녀평등의 차별금지법으로 실효성을 위해 규정하고 있지만, 신자유주의 발 절대적 양극화현상으로 인하여 현실적으로 실익이 없음에 따라 새로운 모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체제가 성립되어야 남녀평등의 실효성이 보장됨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에도 네팔에서 인도로 팔려나가는 여성이 남성의 10분의 1의 값으로 팔려나가는 것처럼, 여성은 경제원칙에 의해 가장 많은 이익을 창출하는 성이 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3.4 근대정신과 배치되는 자본주의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사람을 ‘경제적 동물’로 살아가게끔 하고 있습니다. 즉 자본주의는 인간의 궁극적인 삶의 목적이 소유에 있다고 전제함에 따라 인격 수양보다 탐욕을 배양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돈을 숭배하는 ‘배금주의’에 충실해야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음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자본주의가 수많은 사람을 인간성 황폐화하거나 환경의 파괴로 인하여 피해를 주고 있음에 따라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정치경제 제도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분권을 제1의 원칙으로 하는 근대사회와 배치되는 자본주의 발 절대적 양극화로 대다수 사람이 인간 존엄을 포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여 천문학적 거래 규모로 대량소비를 하며 살아가는 오늘날 경제가 삶의 목적으로 뚜렷하게 변모하게 되면서 등장한 신자유주의 사상은 근대정신의 제1의 원칙과 배치됨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공산당을 퇴출할 수 있을 만큼, 자본주의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강력하게 자극하기 때문에 신자유주의를 만들게 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영적 존재로서 인간과는 배치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태고부터 인간다운 삶은 ‘존재의 삶’에 무게를 두었고, 솔선수범한 성현의 가르침을 믿고, 실천한 비범한 사람들에 의해서 진보할 수 있었던 것을 상기해 볼 때, 과거로부터 평범한 사심으로 가득한 다수의 결정으로 역사발전이 된 것은 아닙니다.

즉 다수의 결정이라 할지라도 잘못된 것이 많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가 인간의 탐욕을 자극하고, 배양하여 위험한 사회를 만들어 감에 따라 인간의 선한 면을 배양하며, 존재의 삶을 살았던 세력은 사회적 약자로 살아가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여 자본주의는 소유를 궁극적 삶의 목표로 생각하는 평범한 다수의 결정에 부합하는 사상임에 따라 만들어진 신자유주의를 세계화한다는 것은 부적절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일회적 삶을 하는 인간을 별수 없는 속물로 생각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여 권력 양극화를 이루었던 구시대가 시민혁명으로 무너지고, 분권적인 근대사회가 성립된 것을 상기해 볼 때. 근대 시민정신과 배치되는 부의 양극화를 유발하는 자본주의로 인하여 모더니즘이 의미를 잃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이 형성된 이유입니다. 즉 ‘풍요 속의 빈곤’을 특징으로 하는 자본주의는 인간 존엄을 구현코자 했던 시민혁명 정신과 배치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권선언의 내용으로써 ‘천부소유권’을 인정하여 경제적 기초가 보장되는 체제를 성립해야만 시민혁명 정신과 부합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상대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근대사회에서 절대주의적인 양극화를 유발하는 자본주의는 퇴출이 되고, 근대정신에 충실한 모민주의가 세계화되어야 합니다. 이는 오늘날 근대 민주주의 사회가 성립되고부터 첨단 과학기술의 발달로 가능하게 된 제4차산업혁명 시대를 상기해볼 때, 경제민주화로써 탈 양극화가 과학적임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5 생활 정치 시대

지구촌 시대는 인류의 인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기 위해서 ‘천부소유권’을 근간으로 하는 적극적 복지사회로 역사 발전해야 함에도, 태만함으로 인하여 자본주의에 머문다면, 인류는 위험한 사회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는 프랑스 대혁명 당시 여성의 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희생의 대가를 치렀으며, 혁명이 성공한 후에도 자유민주주의 헌법에 인권선언은 명문화되어 있었음에도, ‘여성은 남자 아래이니 불평불만을 하지 말라’고 한 것은 배신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후일 전체주의로써 제국주의가 등장하면서 대가를 치렀습니다. 예를 들어 생태적으로 복지적인 여성은 신자본주의와 불합치함을, 비정한 모성이 자주 보도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복지축소로 인류의 구심력인 모성애가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습니다.

하여 지구촌 시대와 불합치한 반민주적인 양극화현상으로 인한 위험한 사회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모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적극적 복지사회의 구현을 위한 체제의 보편화를 위해 여성 NGO가 주도해야 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지구촌 시대는 상대주의(인본주의)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세계여성이 모계 동일체로서 주체적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근대사회는 인본주의 사회로써 모계적 가치를 근간으로 하고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근대사회가 성립된 후, 남녀평등문제는 인권신장을 위한 주요의제로 다루어짐에 따라 여성들의 실력도 획기적으로 배가되었습니다.

하여 모계사회에서 여제사장으로서, 인류를 이끌어간 것이나, 오늘날 녹색 생명, 환경운동 등을 통해 인류에게 ‘존재의 삶’을 깨닫게 하는 사실 등을 상기해볼 때, 지구촌 시대를 이끌어 갈 수 있는 능력이 상당함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과거에 여성 지도자들이 여권신장을 위해 적극적으로 정치참여를 하였을 때, 사회적 매장이나 희생된 경우가 많았던 역사적 경험으로 인하여 여성운동가를 여성들이 불신하는 경향이 아직도 잔재하고 있습니다.

이는 오랫동안 비주류로 있었던 여성들은 모계적 가치에서 발현된 민주적 생활양식이 보편화된 오늘날까지도 차별적 정서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즉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는 철학적 상대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절대주의적인 숙명처럼, 남녀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서구의 구시대가 10대 1의 가치로 여성을 소외한 것을 상기한다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국가가 보장하는 인권은 인간으로서 남녀 상호 간에 존엄성을 지켜주어야 할 의무가 있음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하여 ‘모민주의’와 같이 민주주의를 공고화하는 체제가 성립된다면, 인간 상호 간에 존엄성을 지켜서 실질적인 남녀평등이 구현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본주의 분배양식으로 인한 인권유린이 확대되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하여 자유주의를 위한 민주주의가 아니라, 온전한 민주주의로써 ‘천부인권’의 내용인 ‘천부소유권’을 인정하는 체제가 성립되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천부소유권’을 보장하는 모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모계 민주주의 체제는 남녀가 조화로운 관계가 될 수 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동양적 가족주의에서 가정을 인생의 시작과 끝으로 생로병사를 이루는 곳으로, 천륜에 의한 조상의 음덕을 기리는 성소(聖所)로 생각함에 따라 국가 존립의 정당성을 가족복지에 두고 있었습니다.

아무튼 초기자본주의의 부정적인 결과를 두고, 맑스, 엥겔스, 토인비를 비롯해 석학들은 비판하였으며, 이로써 등장한 사회주의는 공산주의를 등장케 하면서 공산주의 국가가 성립됨에 따라 자본주의가 수정되어 복지국가가 성립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생태적으로 복지적인 여성과 부합되는 복지국가를 구현하여 여권신장을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국가자본주의와 대립했던 공산주의가 퇴출이 되면서 국가자본주의는 세계자본주의로써 신자유주의 시대로 발전되었습니다.

이는 초기 자유방임주의 사회에서 여성이 힘들었던 사실을 상기해볼 때, 이와 흡사한 구조이면서 천문학적 규모의 세계 분업화를 추구하는 신자유주의에서 여성의 삶이 어려워질 것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에서 만들어지는 양극화로 인해 복지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대할지라도 대책이 없음을 천명하며 만든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 속성에 충실히 하는 것으로 문제해결을 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신자유주의는 비 복지적임에 따라 여성 상호 간의 양극화로 유대성이 약화 된다는 사실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구촌 사회를 살아가야 하는 신인류는 적극적 복지사회를 스스로 만들어야 함에 따라 이에 적합한 생태적으로 복지적, 민주적인 여성이 생활 정치를 이끌어가기 위해 모계 동일체와 같은 유대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3.6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분배양식

자본주의가 만드는 양극화현상으로 중산층이 몰락되면서 부유층과 빈곤층이 대립하는 위험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즉 반사회적인 인격의 형성을 완화해주며 사회의 중추적 기능을 하는 중산층이 약화 됨에 따라 갈등이 증대되면서 비정한 사회가 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중산층의 붕괴와 함께 새로운 방식의 테러인 인터넷의 악플, 야동, 소규모 테러, 냉소주의 등이 만연하고, 엄청난 파괴력으로 인해 불안정한 사회가 되었고, 인간이기를 포기한 흉악범죄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등의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이미 제2차 세계대전 후 인류의 위기에 대한 로마클럽의 보고서인 ‘성장의 한계’에서 탈 자본주의를 권고했으며, 로마클럽을 만든 이탈리아의 아우레리오 벳제이는 서양의 선민주의에 대해 경고하기를, 서구 문명이 인류를 구제할 지혜가 있는가? 라고 반문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여 ‘소유의 삶’을 지속한다면, 단지 머리 좋은 동물일 뿐, 사람의 도리를 할 수 없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구촌 시대를 살아야 하는 신인류에게 ‘존재의 삶’을 위한 탈자본주의적인 모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적극적 복지사회로 역사 발전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상극의 삶’에서 ‘상생의 삶’을 위한 새로운 체제가 세계화되어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태고부터 인류의 구심력으로써 변함없는 모성애는 복지주의의 근원이기 때문에 여성이 복지 주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참고로 고대 중국의 어느 황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황제는 백성이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 고민하여 유능한 대신들에게 답을 가져오라 하였더니, 책 10권 분량을 황제에게 바쳤지만, 황제가 대다수 백성이 무지하니 더 많이 줄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한 권으로 만들어 황제에게 제출하였다. 하지만 황제는 노발대발하면서 ‘먹고살기도 바쁜데 언제 책을 읽을 수 있느냐’라고 한 장의 종이에 적어오라 했지만, 아무도 제출하지 못하여 전부가 숙청을 당하였습니다. 이러한 와중에 평범한 농부가 ‘공짜는 없다’라고 적어 제출하였습니다. 이에 황제는 크게 기뻐하며 전국에 방을 부쳐 백성의 생활지침으로 삼으니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교훈에서, 인간답게 살 수 있다는 것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노력과 인간다운 삶을 위한 사회협동으로 진보해야 할 의무가 인간에게 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자연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돕고, 공존을 위해 아낌없이 주고 있는 햇빛, 공기, 물, 식물, 광물, 동물 등의 자원조차 결코 공짜일 수가 없음을 인식해야 하며, 먹이사슬의 최고의 위치에 있는 인간은 선의의 관리자로서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따라서 인간의 도리를 다하지 않거나, 과잉경쟁으로 인한 과소비나, 탐욕과 태만 등으로 자연환경을 파괴한다면,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오늘날 과학기술의 발달로 모계 유습을 이해할 수 있는 고고학적 가치가 있는 유물의 발견이나, 무형문화나, 서책 등으로 전해진 모계 신본주의 사회의 모계 유일신 종교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며 문화의 토대가 된 부계 우월종교의 신들은 모계 신본주의 사회에서 믿었던 ‘조상신’으로 추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모계 신본주의 사회에서 여제사장이 사회를 이끌어가면서, 모계와 부계의 조화를 이루게 한 복지사회로써 공유제 사회였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하여 손익을 계산하지도 않으면서 부족한 것을 보완하며 인류의 끝없는 재창조와 선한 목적을 이루는 기본단위로써 가족의 행복을 위해 모계적 가치가 구체화 된다는 사실은 바람직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가족의 의미는 약화 되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창조주의 피조물로써 개인의 절대성을 중시한 자유주의가 무정부적인 경향이 있으며, 가족의 연대를 약하게 하는 분배양식이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는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 아닌 이전투구를 하며 살아가는 ‘경제적 동물’로 만들어가는 것이 문제입니다.

아무튼 한정된 자원을 마음대로 사용하여 자원고갈과 원전 개발로 인한 방사능오염, 환경오염, 생태계 파괴, 먹이사슬의 붕괴 등을 유발케 하는 자본주의는 지구촌 시대를 만든 자체로 역할을 다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여 지구촌 시대로 진보한 인류는 모성애를 근간으로 이루어지는 가사노동, 출산, 양육 등을 비용으로 환산하는 적극적 복지사회로 진보해야 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여성이 인류의 한 축으로써 남성과 정치적 균형을 이루어 여성의 복지본능이 발휘되는 생활 정치 시대가 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민주주의가 공고화되어 완전한 민주주의 사회로 역사 발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행복한 인생을 위해 ‘소유의 삶’을 벗어나, 이상인 ‘존재의 삶’을 구현하는 모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적극적 복지사회로 진보해야 합니다.

하여 모계 신본주의 사회가 비록 단순하지만, 곡선적인 시간의 개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공유제로써 안정된 삶을 살았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아인슈타인에 의해서 곡선적인 시간의 개념이 입증되었습니다.

하여 입체적이고 곡선적인 시간개념을 이해했던 모계 신본주의 사회의 여성을 상기해볼 때, 위험한 사회를 극복하기 위해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는 뜻있는 여성들과 함께 무리 지어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능력이 잠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여성들이 적극적 복지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새로운 정치문화를 형성하여 인류의 위기를 극복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인류의 공동자산(자연환경, 공기, 물, 태양, 땅, 석유 자원 등)의 고갈로 극단적인 경쟁을 완화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자연 친화적인 ‘존재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물론 인류가 마음만 먹는다면 ‘소유상하한제’를 표준으로 한 상속세를 3대에 걸쳐 조정한다거나, 주식 배분을 통해서도 가능합니다. 아울러 기금도 많이 증가하고, 기술혁명으로 저렴한 생활용품의 구매와 저렴한 주거비 등으로 존재의 삶이 가능케 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다양한 방법이 연구될 것입니다.

따라서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해, 위험한 사회를 극복하기 위해, 제4차산업혁명이 모계적 가치를 근간으로 하는 새로운 분배양식을 구현하기 위한 초석을 다질 것으로 기대됩니다.

. 신인류

 

1. 자본주의

 

1. 자본주의의 태동

인본주의를 근간으로 성립한 근대사회의 서구자본주의는 오늘날 대다수 나라의 경제 제도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여 서구적 가치의 역사적 배경의 한 축을 이루는 고대 그리스의 역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이는 인류 최초의 대제국을 이룩한 알렉산더대왕(BC 356-323)은 자신을 신으로 숭배하도록 각 도시에 강요한 사실에서 고대 그리스가 인본주의 사회였음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고대 그리스의 헬레니즘(인본주의)은 로마제국의 성립과 건설까지 유럽, 중동, 인도 등에 300년에 걸쳐 영향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헬레니즘(그리스 인본주의)의 영향을 받아 성립한 로마제국은 후일 헤브라이즘(부계 신본주의)을 수용함에 따라 여성은 소외되었습니다. 이는 후일 로마가 부계 편도의 타락한 성문화로 부패가 만연하게 되면서 멸망하는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제국(BC 2C- AD5C)은 2세기경 부계 유일신을 숭배하는 기독교가 국교가 되면서 유럽은 3세기에서 13세기까지 기독교 제국이 된 소위 ‘중세 암흑시대’를 살게 되었습니다. 즉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교부 철학자들이 활동한 유일신 절대 봉건제 사회에서 살았습니다.

또한 5세기경 로마제국이 멸망한 다음 종교제국이 됨에 따라 노예거래와 교역 등을 자유롭게 하여 부를 축적한 대상은 봉건 도시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특히 1517년 마르틴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종교개혁은 자유주의 사상을 가속화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다음의 인용문에서 이러한 상황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국의 몰락이 시작된 지 400년이 지난 9세기 무렵 상인들의 대열이 장원에서 장원으로 이어졌으며 그 뒤에도 강도떼의 공격으로부터 이들을 보존하기 위한 무장 수행원들이 뒤따랐다. 이 상인들은 점점 장원 특히 내분의 일들에 참견하게 되었다……

유럽의 대상인은 14세기경부터 봉건 도시에서 정치적 권위를 가지기 시작하였고 새로운 발전의 시도와 함께 기존 질서와 충돌하면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환경을 확장하였다. 봉건영주는 통치를 위해 돈을 부자 상인에게 빌려야 할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영국에서는 17세기 말 부르조아가 정치 권력을 장악했으며, 프랑스는 브르조아 국가가 되었다. 19C에는 전 세계를 지배하는 정치세력이 되었다.” (90) (로버트 하일브르너, 강철규역, 21C 자본주의,·현대정보문화사, 1993, 48p) 이처럼 부계 유일신을 숭배한 절대주의 토양에서 벗어나고자 한 자유주의는 불확실한 유일신 대신에 확실한 배금주의로 대체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동양에서는 공자(BC 552-479)의 유교가 통치이념으로 확산이 된 가운데, 조나라의 대상인 여불위(呂不韋)의 도움으로 등극한 진시황(秦始皇:BC 247-210)은 로마제국과 비슷한 연대에 중국을 통일하였습니다.

이어서 동시대에 한나라(BC 206-AD 220)가 통일을 이루고 있었지만 멸망하면서 고대 중국은 분열되었다. 하지만 고대 중국은 여러 나라들로 분열되어 있었으며 민본주의를 근간으로 성립한 동양적 봉건제는 서구와 같은 자유주의적 토양을 조성할 수 없었습니다.

즉 동시대에 유럽은 기독교 교황체제의 등장과 함께 로마제국의 멸망으로 인하여 봉건 도시국가로 만들어지면서 자유주의가 태동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동양에서도 유럽처럼 상단에 무장 수행원을 두었지만, 서양과 달리 동양은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하는 중앙집권제였기 때문에, 낮은 신분의 상인들은 권력의 간섭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는 모계 신본주의 사회의 ‘신시’(神市)에서 여제사장이 상단의 주체가 되어 상호이익과 함께 문화교류를 한 사실을 앞으로 발간될 종교 편에서 참고하기 바랍니다. 이어서 동양의 징기스칸(1162-1227)이 아시아, 중동, 북유럽 등 동서양을 아우르는 거대제국을 건설함에 따라 서구는 갈브레이드가 주장한 불확실성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헬레니즘(인본주의)에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어 14세기 르네상스(문예부흥기) 시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는 동서양의 교류 확대로 상호 간의 문물에 매료되었고, 유럽의 상인들은 교역으로 부자가 되면서 봉건 영지에서 정치적 권위를 갖게 됨과 아울러 인본주의(상대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과학기술에 대한 믿음이 확실하였기 때문입니다.

반면 교황청은 동서 교류의 영향으로 불확실한 존재가 된 절대 존재의 종교적 권위가 약화 됨에 따라 지출은 증대하고, 수입은 감소한 재정적자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면죄부를 팔아야 했습니다.

이처럼 교권의 추락은 16세기 초엽 마르틴루터에 의해 종교개혁을 부르짖게 된 원인이 되었고, 동시에 대상들의 후원이 중요하게 됨에 따라 대상들은 자연히 권력의 핵심으로 다가설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절대 존재를 불신하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겪으면서 부계 유일신 종교의 권위와 절대 봉건제의 정치 권력이 동시에 약화 되면서, 중상주의가 등장하게 되었고, 이는 국가보다 개인을 우선하는 개인주의(자유주의)가 발현되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유럽의 종교지도자들은 대체로 낮은 계층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관계로 상인이나 생산자에게는 호의적이었던 반면, 정치 권력에 비판적이었던 것이나, 신 아래 만민평등을 설파한 마르틴 루터의 영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 되면서 자유주의가 구체화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상인들이나 시민의 자유가 확장되어 있었음에도, 여전히 여성은 소외되어 있었습니다. 하여 종교적으로 뛰어난 수만 명의 여성에게는 마녀라 하여 가혹한 형벌을 가했다는 사실에서 볼 때, 남성들만의 자유주의였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자유주의는 전체주의에 반동한 절대적 개인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사회성을 간과한 극단적, 편향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1.1. 자유기업주의

서구의 식문화는 동방의 후추나 향신료 등을 선호했습니다. 하지만 이슬람 제국에 의해 교역이 방해를 받게 됨에 따라 유럽은 새로운 교역로를 열기 위해, 16C 포르투갈의 항해를 시작으로 해서 스페인의 콜롬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하는 등 해양무역 시대를 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유럽은 새로운 문물의 교역 확대와 식민개척으로 소비시장의 확대로 공업화를 이룬 결과, 영국은 18세기 후반 방직공업과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산업혁명을 이루었다. 이어서 이에 걸맞은 생산양식인 자본주의 경제 제도를 아담스미스에 의해 창안되었습니다. 이처럼 자본주의는 자본의 경제적 세력을 가지고, 이득을 위해 이권이나, 상권 등의 패권을 가지려는 주의라고 한 사전적 의미에서도 특성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19세기 후반에 자리 잡은 자본주의라는 용어는 아놀드 토인비에 의해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어떤 학자는 자본주의의 얼룩진 과거와 예측할 수 없는 미래 때문에 산뜻한 의미로 ‘자유로운 사적기업제도’라고 부른다.” (91) (같은 책 50p) 이는 오늘날 ‘자유기업주의’로 이해할 수 있다.

하여 서구의 자유주의는 개인 상호 간의 자유경쟁을 위해 국가의 개입을 거부하며, 자유경쟁을 통해 만들어지는 물질 풍요만이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고 믿는 사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유주의 사상이 상업을 발달케 하였습니다. 그리고 대상인들의 정치후원은 정치참여를 가능케 하면서 사회적 지위를 높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상업주의를 발달케 하였으며, 부의 축적을 위한 해외시장의 교역확대나, 자원 확보와 소비를 위한 식민지개척 등이 활발하게 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산업혁명이 태동하였습니다. 즉 자유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상업주의는 산업혁명을 일으키고 이어서 자본주의가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이어서 자유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가 구시대의 부패를 눈뜨게 했습니다. 그리고 산업혁명으로 요구되는 새로운 체제의 필요성에 의해 시민혁명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또한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인구 도시집중과 더불어 소득이 발생하는 곳으로 이동함에 따라 각박한 사회를 형성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면 17세기 영국의 엔클로져 운동으로, 17세기 후반 농업보다 고수익의 양모무역은 농민을 몰아내고 축산을 하게 된 결과로 농민들이 150년간 유랑민 생활을 하여 엄청난 사회문제가 발생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엔클로져(enclosure)운동과 더불어 영국인들이 축산업을 시작하게 되자 많은 농노들이 농토를 잃고 도시로 나가게 되어 그들의 노동력을 팔게 되는, 즉 생산요소로서의 노동이라는 개념이 성립되게 되었다.” (92) (자본주의 성립과 발전, 강강화, 국민경제제도 연구원, 범신사, 1991.7p)

아무튼 자유기업 간의 경쟁은 생산성 향상과 규모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한 대자본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해외 교역에서 자연재해 등으로 인한 피해를 부담하기 위한 주식이나 채권 등으로 자본모집을 활성화함에 따라 자본의 이식을 위한 다양한 회사로써 금융과 법률 자문회사 등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는 우수한 품질의 공산품을 양산하기 위한 공업화는 대자본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일반시민에게도 투자의 길이 열렸던 놀라운 발전이었습니다. 하여 돈으로 돈을 버는 것을 귀족에게만 허용되었던 구시대 사고방식으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자본주의의 성립

2.1 산업혁명으로 성립한 자본주의

중세유럽에서 부는 대부분 권력자의 것이었고, 권력자와 결탁한 대부호의 것이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부를 축적한 대상은 정치적 영향력을 갖게 되었던 반면, 소상공인들은 정부의 간섭에 불만이 있었으나, 권력자에게 대항할만한 부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식민개척과 해외시장확장으로 폭발적 수요가 만들어낸 산업혁명에 적합한 제도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하여 아담스미스는 자신의 저서 ‘국부론’에서 자본주의 경제학을 체계화하였습니다. 하여 산업혁명이 체제변화를 요구하게 됨에 따라 자본주의를 만들었고 이어서 유발된 시민혁명은 구시대를 퇴출케 하여 근대사회가 성립될 수 있었다.

즉 명분보다 실리를 우선하는 개인주의(자유주의) 사회로, 자유방임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기능 국가 사회로 변모하였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존 로크의 자유주의(개인주의)로부터 구체화 되기 시작했습니다. 로크가 ‘시민의 정부에 관해 두 개의 논문(1760)’에서 자신의 노동은 자신의 것임에 따라 재화를 소유하기 위한 자유로운 노동을 할 수 있는 노동 권리의 중요성을 주장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노동이 재화를 소유할 수 있는 근원이기 때문에 개인은 권력으로부터 자유의 확장이 필요하다고 역설한 것입니다. 물론 당시 사회가 봉건왕조가 국가자산을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동자산으로써 자연물을 취득하기 위한 자유노동으로 개인소유가 가능하다고 주장한 것은 상당한 충격이었습니다. 이후 아담스미스가 인간의 자유노동을 신성불가침한 것이라고 하여 개인의 절대성을 근간으로 한 자유방임주의가 성립되었습니다.

아무튼 자유주의가 중세유럽의 르네상스부터 구체화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르네상스 시대의 중심적 역할을 했던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15~18세기까지 번영했던 대부호 메디치 가문(Medichi Family)의 금융업에서 이해됩니다.

즉 소유물과 화폐를 위탁받아 보관하고 보관료를 받거나, 자체 신용에 의해서 발행한 증서로써 매매나, 교환의 중개료를 받았습니다. 이는 당시의 경제 규모가 소규모로써 오늘날 창고업과 유사한 형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여 대규모 경제에서 만들어진 자본주의는 은행에 저축하여 이자를 받거나, 직접투자 방식인 유가증권을 취득하여 이식이나 배당을 받는 등, 돈이 돈을 버는 것을 공식화한 것과 달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르네상스 당시의 서구는 기독교문화를 근간으로 하였던 까닭에, 돈이 돈을 버는 형태인 이자나 이식을 불로소득이라 하여 금기시했습니다. 하지만 18세기 말에 산업혁명과 더불어 성립된 자본주의가 돈으로 돈을 벌 수 있게 도덕적 정당성을 갖게 함에 따라 인본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근대사회가 성립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즉 재산을 자본화할 수 있게 되었고, 임대료처럼 차용금에 대한 이자를 주는 현상이나, 직접투자로써 주식이나 채권 등의 유가증권을 통해 배당수익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리고 해외 교역의 위험부담을 분산하기 위해 투자모집을 하는 등으로 인하여 대규모 경제로 발전하면서 메디치가의 재화 중심사고가 막을 내리게 되었으며, 자연스럽게 자본(금융)이 중심이 되는 사회로 발전되었습니다.

따라서 공급경제로 유발된 산업혁명은 대량생산을 위한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만들고, 자본모집의 방식이 발달하면서 자연인과 법인의 개념이 확립되었으며, 더불어 과학, 경제학, 법학 등 여타 학문이 발달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산업혁명은 배금주의를 형성하게 됨에 따라 과학기술을 발달케 하면서 인본주의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었고, 상대주의로써 민주주의를 인류의 이상으로 신뢰를 가진 원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산업혁명은 노동자의 이동이 가능하게 되었고, 다수의 자본가가 실력자로 등장함에 따라 절대주의 체제가 붕괴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앙집권 현상으로 권력 양극화와 인구의 도시집중 현상으로 인한 인구감소 등을 극복하기 위해 봉건귀족들은 대상인들과 정경유착하면서 투자에 참여하고, 소상공인에 대해서 지나치게 간섭하는 등 부패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산업화로 절대 봉건제에서 억압을 받았던 농노가 정치 경제적 자유를 위해 탈출할 수 있게 됨에 따라 형성된 봉건영주의 재정 악화도 원인이었습니다. 따라서 절대 봉건제가 무너진 것은 봉건귀족과 대자본가의 결합으로 1대 99라는 절대적 양극화가 형성되어 절대빈곤층이 폭넓게 확대된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2.2 아담스미스 자본주의

산업혁명을 뒷받침하고 발전시킬 이론이 필요한 상황에서 아담스미스(1723-1790)가 당시 산재한 경제이론을 체계화하여 만든 것이 ‘국부론’(1776)입니다. 이는 인류 최초의 경제학으로써, 소위 자본주의 이론으로써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즉 개인의 이기적 목적을 위한 자유경쟁을 국가가 간섭하지 않을 때,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자동조절 되면서 전체가 조화롭게 된다고 주창하였습니다.

이는 ‘보이지 않는 손’의 의미가 시장원리로써 여러 가지의 복합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만, 시장에서 교환수단인 화폐의 힘이 자동조율의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는 의미로 볼 수 있음에 따라 화폐경제가 뚜렷하게 부각이 됩니다.

하지만 아담스미스가 개인의 중소기업을 역설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가는 법인을 활성화함에 따라 초기자본주의에서 부르주아가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마치 구시대의 귀족처럼, 민중 앞에 등장하였습니다.

즉 민중들이 예전에는 절대 봉건제라는 전통에 의한 지배를 받았지만, 부르주아의 금력에 의해 지배되고 착취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하여 자본주의에서 인간은 상품이나, 소모품처럼, 변모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초기자본주의가 착취를 정당화하는 빛 좋은 개살구였음을 하일브로너의 글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몇 가지에 불과한 작업을 수행하면서 생애를 보낸다.… 이해력을 발휘할 기회도 갖지 못하고 ······ 더할 수 없이 어리석고 무지한 상태가 되는 것이 보통이다 ······

19세기 초반까지 작은 규모였던 공장들은 여성과 소년들까지 동원하여 겨우 생존하는데 불과한 임금만을 지급하면서 혹독한 상황에서 노동을 시킨 ‘악마의 공장’에 밀려나기 시작했다. 디킨즈의 묘사를 통해 그러한 영국의 뒤안길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당시의 양심 있는 사람들을 경악케 했던 바로 그 공장들이 대규모 축적의 중심이었을 뿐더러 해외로까지 손을 뻗치는 1차 기지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별반 언급이 없다.” (93) (R 하일브로너, 57-58p)

이처럼 빈민 여성의 출산은 노동력 확보로 생각할 만큼, 혹독하고 부패했던 구시대를 타파하기 위해 쁘띠부르조아(소상공인)들의 자금과 자유주의 지식인 및 유산층으로서 시민과 함께 민중이 합류하여 시민혁명을 일으키는 것은 당연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당시의 신분제 사회에서 시민은 농노와 다른 중산층으로 볼 수 있으며, 일반 민중보다 상위그룹을 의미하지만, 구태여 시민과 민중을 구분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단지 시민혁명 후 정부와 민중 사이의 가교역할을 한 새로운 주체세력으로써 시민단체(정당)를 만들어 여론을 주도한 계층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오늘날 의미의 중산층인 시민이 중심이 되고, 하층민과 민중이 연대하여 자유, 평등, 박애라는 구호 아래 구체제를 퇴출케 하였습니다. 하지만 중산층이 혁명을 주도하여 근대사회를 열었음에도, 민중들은 굶어 죽을 자유밖에 없었습니다.

하여 경제적 자유주의로써 자본주의와 인간 존엄을 구현하고자 하는 근대 민주주의 사회는 배치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철학적 상대주의를 근간으로 하여 성립한 근대사회는 모계적 분배양식으로 역사 발전되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없는 문화적 존재이기 때입니다.

이는 오늘날 인류는 ‘경제적 동물’로써 살고자 하는 사람이 증가하는 만큼, 존재의 삶을 추구한 성현들의 삶을 따르는 사람도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신자유주의가 문화적 존재인 인간에게 ‘경제적 동물’로 변모하도록 강제하는 것은 역사퇴보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시민혁명으로 근대사회가 성립된 지 200년을 넘어 지구촌 시대가 된 오늘날, 시민 혁명정신으로써 자유, 평등, 박애의 인권선언과 부합되는 적극적 복지사회가 성립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자본주의사회가 만들어내는 과소비의 결과로써, 자원고갈과 생태계 파괴, 난개발, 환경오염이나, 인간성 황폐화 등으로 인한 위험한 사회를 벗어나기 위해서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모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체제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우리나라를 비롯해 미국 등 세계 일부 지역에 벌들이 폐사함에 따라 식물들이 수정할 수 없어서 유발된 농작물 감소로, 먹이사슬이 무너지고 있는 경우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위험을 예고하는 징조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계적 분배양식에서 벗어나야 인간이 살아갈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이 만약에 세상의 벌들이 전부 죽는다면 4년 이내 인류는 멸망한다고 하였던 주장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2011년 3월 일본 후쿠시마에서 있었던 대형 쓰나미, 지진 등으로 인한 원전 사고는 체르노빌보다 피해 범위가 훨씬 넓습니다.

이러한 현상으로 인하여 유발되는 천문학적 경비의 지출을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과 아울러 인류가 소탐대실한 사실을 깨닫게 될 때쯤, 이미 늦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부계적 분배양식의 종말을 의미하는 적극적 복지사회를 위한 근본적인 변화가 없이 임시방편에만 의존하려는 태만함의 결과를 감당할 수 없게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문화적 존재임에 따라 모계적 분배양식이 생태적으로 적합하다는 사실은 태고모계사회부터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애써 무시하며 탐욕을 배양한다면, 성현의 경고는 실제로 일어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여 모계 신본주의 사회가 내면세계와 외면세계의 균형을 이루고자 했던 것이나, 오늘날에도 인간의 사회성과 개인성이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 것처럼, 인간은 언제나 영육의 균형을 이루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지구촌 시대를 살아가는 신인류는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존재의 삶’을 위해 적극적 복지사회가 성립되도록 노력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모계 신본주의 사회가 대자연의 순환처럼 인간도 영적 존재로서 완숙한 인간이 되기 위해 순환 진보한다고 생각함에 따라 죽음을 삶의 일부분으로 생각하였으며 영혼과 물심양면(物心兩面)의 삼박자가 균형을 이루며 무한한 삶을 살아가는 이상적인 사회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즉 약간 부족한 삶을 만족하며 살아감으로써 풍요한 생활이 가능했고 행복 지수가 높은 사회였습니다. 또한 모계사회가 야만적이지 않았음을 모계 신본주의 사회는 모계 유일신을 숭배했다는 사실과 인간 스스로 대모신의 후손으로 믿었다는 점이나, 공유제로 복지사회를 구현한 사실 등으로부터 긍정할 수 있습니다.

물론 모계 신본주의 사회는 나눔으로 얻어지는 평화와 풍요한 자연에서 행복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이는 경제학자 하일브르너의 글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전통이 지배하는 사회라 해도 반드시 절망적인 빈곤의 수준에 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인류학자 마샬살린즈는 부족민들의 기대치를 충분히 채우는 방식이 확립되어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서 그러한 사회들을 ‘최초의 풍요한 사회’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94) (하일브르너, 28p)

하여 태고의 모계사회가 원시 부계사회보다 풍요한 사회였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부계사회에서도 행복한 삶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한 결과인 자본주의가 인간의 행복한 삶을 위해 봉사하고 있지만, 인간의 상품화로 세상의 반인 여성이 불리할 뿐만이 아니라, 1대 99라는 절대적 양극화와 과소비로 인한 위험한 사회를 벗어날 수 있는 체제를 성립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3. 자본주의의 공고화

절대 봉건제와 배치되는 자연법사상과 철학적 상대주의를 근간으로 경험주의, 자유주의 사상 등과 함께 만들어낸 결과물로써 영국의 산업혁명은 자본주의를 성립하게 했습니다. 이는 부정부패가 만연했던 프랑스 귀족을 퇴출한 프랑스 대혁명(1789년)을 유발케 한 원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산업혁명은 인본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근대민주주의 사회로 진보하게 했습니다. 물론 17세기 유럽 봉건영주들의 권위는 이탈리아에서 발현된 르네상스를 일으킨 대상(大商)들에 의해 약화 되었습니다.

그리고 경제적 부르조아가 쁘띠부르조아(정치적 부르조아)를 육성하기 위해 문화와 예술, 학문, 결사, 지적 활동 등을 돕거나, 자유주의(개인주의) 논리의 정당성을 위한 지식인의 집필활동이나, 새로운 정치문화에 대한 활발한 논의 등을 위한 중소 상인들의 후원도 근대사회를 여는 초석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경제적 부르조아들은 정부의 간섭을 싫어했지만, 절대 봉건제에서 달리 방법이 없음에 따라 정경유착을 근간으로 한 중상주의를 추구하였던 결과, 상호 간에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얻을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대상들은 이익을 위해 절대 봉건영주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으면서, 정치적 권위도 획득하여 노동자를 착취할 수 있었던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민중의 생활은 곤궁하여 정치 불신이 만연하게 되었고, 아울러 상인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정치적 부르조아를 통해 영주에게 압력을 행사하는 이중적 태도 등에 의해서 권력이 약화 되었습니다.

그리고 절대 봉건제 국가의 중상주의가 대부호를 만들었으며, 권력 유지를 위해 돈이 필요한 권력자는 대상과 결탁하면서 소상공인의 상행위를 지나치게 간섭하면서부터 시민과 민중은 봉건귀족에 대해서 적대 의식을 가졌습니다.

즉 경제적 부르조아는 부와 권력과 명예를 독점적으로 차지한 가운데, 대자본을 축적함에 따라 국가의 부는 총체적으로 향상되었지만, 민중은 궁핍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정치적 부르조아들과 유산층인 시민의 불만을 자극했고, 특히 유산층의 여성들은 사회의 주요 불만 세력으로, 토론과 좌담의 장소였던 살롱에 참여하여 논변하면서 사교계의 새로운 세력으로 급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는 서구의 유산층의 여성들이 사교계에 적극적이었던 이유는 중세 때 유산층 여성들조차 소외되어 있었으며, 서구 여성들의 한이 깊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봉건제에서 농기구조차 사지 못할 정도의 극빈 농노가족에 속한 여성은 노예보다 힘든 생활을 한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하여 소외된 여성들은 자유주의가 무르익어 가는 사회적 환경에서 여성해방과 더불어 여권신장의 꿈을 이루기 위해 적극적인 참여를 하였습니다. 물론 중국의 태평천국의 난에서 여성들이 남녀평등의 강령을 갖고, 탁월한 조직력과 맹렬하게 참여한 것만큼, 강력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유산층 여성들의 사회참여는 인류의 위대한 유산인 근대사회를 성립하게 한, 1789년 프랑스대혁명을 일으킨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혁명을 주도하고 전개했던 수많은 여성 지도자들의 생활은 비참했으며, 집권한 남성 지도자 아내들의 질투로 인해서, 탁월한 여성 지도자들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거나 파멸되었습니다.

즉 여성 지도자들이 토끼사냥을 하고 난 다음 사냥개를 잡아먹는다는 ‘토사구팽’을 당한 것입니다. 이는 시민사회가 성립된 후 여성 상호 간에 불신으로 여성이 여성의 적이 되었던 이유입니다. 즉 여성은 남편의 지위가 자신의 지위와 같은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가족이기주의적인 경향으로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는 것을 거부하는 이중성이 있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여성의 경우 여권신장이라는 공동의 목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양극화로 인한 여성 양극화로 인하여 유산층 여성들이 가족이기주의적이고, 진보로 이룬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보수적으로 변모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당시에 혁명 참여를 한 여성 중의 한 사람인 테로아뉴 드메리클의 삶에서 앞의 사실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잊지 않았다. 지주와 징세관이 집에 남아있는 마지막 빵 조각까지도 빼앗아가던 그때의 일들 … 테로아뉴는 그녀에게 돈을 탕진한 금전 숭배자들을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고 매정하게 파산시켰다.

그렇게 해서 그녀는 집과 보석과 훌륭한 마차를 가질 수 있었으며 하인도 부리고 저축도 할 수 있었다. 1789년 불란서 파리에서 그녀는 더 이상 방종한 고급 창녀가 아니었다. 테로아뉴는 가두의 대중과 함께 행진하고 혁명가를 불렀으며 귀족들을 매도했다. … 군중 속에서 그녀는 불행하게 학대받아온 몹시 의기소침한 여자들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 여성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 (95)(김성원 편역, 혁명기의 여성들, 한울림, 1985, 12-13p)

 

테로아뉴의 연설문에서,

“…프랑스의 여성이여! 다시 한 번 되풀이하지만 우리의 사명은 숭고합니다. 우리의 족쇄를 끊읍시다. 남자들의 불공평한 오만과 무지에 그토록 오랜 세월을 굴종해 온 여성, 그 여자들도 이제야말로 우리 몸을 붙잡고 있는 고정된 보잘 것 없는 세계에서 탈출할 수 있는 때입니다.

우리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는 갈리아족과 자랑스러운 게르만족의 여자들이 공공 집회에 참가하고 남편과 함께 투쟁하여 자유의 적을 격퇴했던 그 시대를 생각해 보십시오. … 포용력 있는 여성 여러분, 나의 말을 들어주신 여러분 우리들도 무장합시다. 군사훈련을 받고 프랑스여군 명부에 맨 먼저 등록합시다. 조국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모두 모여서 여성부대에 들어갑시다.” (96) (같은 책 20p)

간략히 살펴보자면, 테로아뉴는 1789.7.14 日 바스티유 감옥을 선두 진격했으며 남자들을 설득해서 베르사이유로 진격하여 국왕 루이 16세를 끌어내서 직접 규탄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재산을 거의 탕진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천 년간 억압을 받은 여성들은 새로운 변화에 능동적이지 못하여 가정으로 돌아갔습니다.

이처럼 테르아뉴는 여성해방운동에 선구적 역할을 하고 공헌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자코뱅 클럽의 회원이 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만든 부인클럽도 여성들이 가정으로 돌아갔으므로 폐쇄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자코뱅파의 온건 부르조아였던 지롱드파의 브릿소와 친하게 되었으며 여성해방과 뜻을 둔 그녀는 남성에게도 여성에게도 버림받는 처지가 되었고 자코뱅의 여성들은 그녀를 참혹하게 린치를 가했습니다. 그 후 그녀는 정신병자가 되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 시대의 또 다른 부류의 여성으로써 마농롤랑의 예를 들어 보자. “마농은 자신이 상인의 자녀이면서 평민으로서 있다는 사실을 어릴 때부터 싫어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평민을 싫어했고 자존심이 강한 여성이었다. 하지만 영특한 여성으로서 귀족의 여성과 친하고 싶어 해도 귀족들은 그녀를 싫어했다.

그래서 그녀는 신분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부르조아 철학자 늙은 롤랑과 결혼하여 롤랑부인이 된 후 노동자를 혹독히 부려야 한다고 하면서 동시에 귀족의 방만한 생활도 비난했던 것이다.

즉 1789년 롤랑은 리용의 공업검찰 장관으로 있으면서 귀족생활을 하였는데 돈은 있어도 배운 것이 없는 부르조아와 부인들에 대해 경멸하는 듯한 마농의 언동은 분노를 자아내게 했다.

이러한 마농의 권력욕을 이용하기 위해 지롱드파의 브릿소는 살롱을 개설하여 마농을 끌어드리려 했으나, 온건 부르조아적인 자유기업관을 갖고 있었던 브릿소를 신용할 수 없었던 까닭에 마농은 그를 피해 다녔던 반면 마농은 로비스피에르를 가까이 하고 싶었지만 거만한 마농을 멀리하였다.

그녀는 여성해방을 위해 행동하지 않았고 기회주의적인 처신을 하여 1772년 대신으로 임명되었고 소원대로 호화롭게 살게 되었다. 하지만 1789년 혁명과 함께 사임을 하였는데 그녀의 살롱은 상인을 옹호했던 지롱드파의 사령부가 되었으며 여성과 빈천한자를 무시함에 따라 여성과 빈곤자의 조직이 없었던 마농은 혁명의 말기에 이르러 민중의 적이 되어 있었다.

결국 지롱드파의 배후에서 조종하는 잔재주 많은 여성으로 기록되면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마농은 자유의 여신상을 향하여 ‘아! 자유여, 당신의 이름으로 어찌 이처럼 많은 범죄가 행해질 수 있단 말입니까?’라고 부르짖었다.“ (97) (같은 책 93p)

위의 두 여성만이 아니라 대다수 여성 지도자들은 부계주의를 극복할만한 축적된 지식이나 사상이 정립되지 못한 상태에서 불만을 터뜨리는 정도로 감정에 호소할 뿐, 논리적이지 못함에 따라 한계가 있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념체계나, 정치적 경험 부재, 훈련 부족 등과 조직화를 위한 핵심 동지가 없는 상태에서 세력을 형성할 수 없었다 할지라도, 이러한 일들로 인하여 여성들은 각성하고 내공을 쌓는 계기가 됨에 따라 후일 여성운동의 초석이 되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즉 여성 개인의 고달픈 영혼을 위로받기 위해 투쟁하였던 여성들로 구성되어 여성 인권운동을 전개한 것은, 서구 기독교문화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획기적인 일로써 여성들은 자신감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즉 근대사회가 성립되었음에도, 여성들은 마치 어린이와 같은 무지한 상태임에 따라 분열되었지만, 후일 많은 여성은 여권신장이 인류의 인권신장임을 이해하면서부터 여성의 결사로 사회참여가 본격화하게 된 것입니다. 이는 당시의 여성들이 어떠했는가를 알려주는 내용을 메리 울스톤 클라프트가 한 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남자들이 부정하든 긍정하든 권력과 명예를 향해 가는 길은 다양합니다. 그리고 남자들은 서로 충돌이 있을지라도 (왜냐하면 동일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친구인 경우는 좀처럼 없기 때문에) 혹 그럴지라도 결단코 충돌이 없는 사람의 수가 훨씬 많습니다. 그러나 여자들은 여자끼리의 관계에서 완전히 다른 생태에 있습니다. 여자들은 모두가 각각 서로 경쟁자인 것입니다.·······

여자들은 과대망상에 빠지지 않고 서로 질투하지 않는다면 여자들은 초인적인 미덕의 주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복장, 쾌락, 지배권에 대한 지나친 욕망은 미개인들에게는 특유한 정열입니다.

요컨대 이것을 오성의 범위를 넓힐 수 없고 또 주의를 도출하는 수미일관된 추상적 사상에 이르는데 필요한 사고능력에 아직 익숙지 못한 무지한 인간들을 조정하는 정열입니다. 따라서 여자들이 이러한 교육의 결과 문명사회의 현상에 있어서 다름 아닌 이러한 미개의 상태에 있다는 것은 논의의 여지없이 있을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라고 메리는 쓰고 있습니다. (98) (같은 책 249p)

 

3.1 착취의 정당화

여성들은 스스로 보호를 받을 수 없음에 따라 모래알 같았던 여성들은 이기심을 배양하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착취의 대상으로 손쉽게 전락 되어 노동의 변두리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이는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에는 노예나 여성이 별반 차이가 없었으나, 산업혁명 이후 노동시장의 수요급증과 더불어 인구가 도시로 집중함에 따라 말썽 많은 노예제도를 폐지하고, 오히려 빈곤층의 남성이나 여성으로부터 더 많은 착취가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당시 사회에서 자본가들은 물질의 풍요로 세상을 구제할 것처럼, 홍보함에 따라 봉건제에서 살았던 농노는 장밋빛 꿈에 젖어 도시로 도망하면서, 봉건 농노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했고, 동시에 도시인구집중으로 인하여 유발된 높은 실업률로 노동시장이 붕괴가 됨에 따라 아이들까지도 돈벌이에 나서야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민중들은 자유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러야 했으며, 도시빈민가에서는 인간성 황폐화로 인한 전대미문의 범죄와 더불어 엄청난 산업재해 등으로 노예보다 못한 비참한 생활을 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여 초기자본주의의 생활은 노예노동보다 합법적으로 가혹했던 생지옥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임신, 출산, 수유, 양육, 가족복지 등의 가사노동과 아울러 임금노동이라야 부업거리 반찬값 정도임에 따라 참담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가부장들은 노동시장의 경쟁으로 성과에 비해 턱없는 저임금과 열악한 환경으로 인한 많은 산업재해로 사망, 사고를 당한 경우가 많음에 따라 이를 감당하는 여성은 이중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하여 근대사회가 성립되었음에도, 여성들은 구시대보다 별로 나아진 것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자본가들의 혹독한 착취로 이익을 극대화하고, 자본을 축적하는 만큼, 여성의 삶은 고단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근대사회가 성립된 후 자본가의 지나친 착취를 간섭하지 않은 자본주의에 반등한 사회주의가 생성된 사실로 볼 때, 민중의 생활이 생지옥과 같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는 자유주의자들은 자유경쟁으로 물질을 풍요하게 할 때, 인간답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인하여, 인간의 내면세계에서 발현된 종교나, 관념적인 정치의 영역보다 형이하학의 경제적인 부문을 중시하기 때문입니다. 하여 실제로는 자유주의자들로서 자본가들만 풍요로웠을 뿐, 민중의 생활이 비참했던 사실로 볼 때, 부자를 위한 사상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3.2 여성에게 불리한 자본주의분배양식

시민혁명의 결과로 만들어진, 1804년 공포된 나폴레옹 민법전의 주요 골자인 사적자치(私的自治), 무주물선점(無主物 先占), 과실책임(果實責任), 계약자유원칙(契約自由原則) 등은 자연법사상(自然法思想)과 함께 경제적 자유주의를 근간으로 자유경쟁을 보장하기 위한 법전으로써 의미가 큽니다.

하지만 프랑스혁명의 인권선언의 핵심인 자유, 평등, 박애와 자유주의 사상은 민법전의 기초가 되었음에도, 가부장권의 강화라는 특이한 면이 있었던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즉 아내가 남편에게 종속됨에 따라 아내는 재산의 취득이나 매매를 할 수 없었다고 명문화한 것은 자연법사상과 배치되는 것입니다.

물론 시민혁명을 일으킨 명분이라 할 수 있는 인권선언의 취지와도 부합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주인이 없는 물건은 먼저 취득한 자가 임자라는 의미인 ‘무주물 선점’이라는 원칙으로 만든 일방적인 법에 근거해 등기함으로써 식민지의 자원을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즉 해외식민지를 마치 무인도와 같이 생각하여 서구적 사고로 일방적으로 설정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인디언의 전통적인 분배양식은 공유제임에 따라 누구나 개척 경작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서구는 경작을 하지 않아도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한 점에서 문화적 차이가 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원주민 나름대로 고유한 문화나 생활양식이나, 소유양식 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구는 일방적인 기독교적 세계동포주의로 문화적 차이를 무시하거나, 서구적 가치를 원칙으로 하여 지키도록 강제하며, 적자생존을 들먹이며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소유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이는 수천 년에 걸쳐 공고화된 각 지역의 생존 양식과 전통문화를 무시할 수 있을 만큼, 무기가 발달함과 동시에 지나치게 착취기술이 발달하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미개한 지역의 경우 먼저 도착해서 약간의 사례로 등기를 했던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먼저 본 자를 정부에서 기득권을 보장하였던 사실로부터 해외 식민개척을 활성화하기 위한 면이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 유일신의 허락을 받은 우월적 존재처럼,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자신들의 논리로 합리화하여 수탈했음을 묵인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아메리카는 사실상 인디언이 조상 대대로 수천 년에 걸쳐 이루어놓은 삶의 터전으로써, 사실상 공동소유를 근간으로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인소유를 위한 등기는 의미가 없었으며, 서구적 가치인 자유주의 사상을 이해할 필요가 없었던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서구인들이 만든 올무에 걸려 빼앗겼습니다.

이는 정복 전쟁을 통해서 지배하였다면 문제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경제원칙에 의해 최소의 경비로 최대의 이익을 낼 수 있는 식민지 개척을 하는 방편으로, 자신들도 불확실하게 생각하는 기독교를 내세워, 부계 유일신의 피조물로써 인간 동료를 위한다는 명분인 복음주의로 자연스럽게 접근함으로써, 경계심을 풀게 하였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미 오래전에 유럽의 기독교 성지를 되찾겠다는 십자군 전쟁의 이면에는 경제적인 이유가 있었다는 사실과 함께 계속 기독교 교리를 명분으로 이익을 취한 이율배반적인 역사적 경험한 나라들이 제3세계를 형성한 사실에서 그들을 감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와 대립하거나, 아메리카대륙의 약소 민족으로 전락한 인디언의 경우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역사적 경험으로 형성된 절대 존재의 불확실성은 가치체계에 상당한 변화를 일으킨 결과, 가치 부재로 인한 아노미 현상을 겪은 사람들은 소유를 위해 종교든, 정치든, 무엇을 이용하든 간에 상관없다고 하는 실용주의적인 사고가 팽배해진 결과로 볼 수 있는 제국주의에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불확실성의 시대를 겪으면서 만들어진 탐욕을 정당화한 초기자본주의는 부르주아의 탐욕을 양성화하여 착취기술이 도를 넘을 만큼, 발달함에 따라 사람들은 영혼을 팔아서라도 빵을 구해야 하는 상황으로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사람들은 장밋빛으로 보았던 자본주의를 불신하여 사회주의를 창안했으며, 공산당선언까지 한 사실로부터 초기 자유방임주의가 어느 정도였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시민혁명의 명분이었던 인류의 인권선언으로 시민혁명을 성공시킴에 따라 근대사회가 성립되었음에도 시민혁명의 인권선언과 배치되는 당시 자본가의 착취는 횡포 수준으로 도를 넘었으며, 대외적으로는 식민정책을 고수하면서 노동착취를 했습니다.

예를 들어 나폴레옹 민법전에서 가족의 결속은 국가의 결속이라고 함에 따라 가부장제국가로서 가부장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던 반면, 자연법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시민혁명으로 성립된 근대사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은 종속적이었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나폴레옹은 근대사회를 세계화하기 위해 인접한 절대군주제 국가를 공격해서 빠른 기간 내에 정착시킴에 따라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 발전하였던 것도 사실입니다.

아무튼 시민혁명의 성공으로 성립한 근대사회는 ‘국가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공언한 점과 국가권력이 총구에서 나왔던 절대 봉건제의 구시대와는 근본적으로 다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자연법사상을 근간으로 성립된 근대 민주주의 국가는 주권재민의 국가로서 국민에 의해 국민 스스로 꾸려가는 국가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여 인류는 인간 존엄을 구현하기 위해 성립한 근대사회를 스스로 만들면서,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는 토대를 준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서구가 부계 유일신에서 벗어남에 따라 여성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게 한 점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부르주아를 지향하는 자유주의와 복지주의를 내재한 민주주의는 상반됨에도 불구하고, 결합이 될 수 있는 것은 민주주의가 절차적 정의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류의 이상인 적극적 복지사회의 구현을 위해 민주주의가 절차적 정의에 머무르지 않고, 형식과 내용이 일치하는 온전한 민주주의로써 모계 민주주의가 성립되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분권을 본질로 하는 민주주의와 부합하는 적극적 복지사회를 구현하는 것이 근대정신으로 시민혁명 정신에 부합됨을 알 수 있습니다.

4. 자본주의의 한계

4.1 지구촌 시대에 부적합

서구의 독특한 역사발전에서 형성된 자유주의 사상은 산업혁명 당시 아담 스미스에 의해 자본주의로 구체화 되었습니다. 이는 갈브레이스 교수(1908-2006)는 자신의 저서 ‘불확실성의 시대’(1977)에서 서구사회는 르네상스를 맞이하여 기독교 유일신에 대한 불신으로 시작해서 기존의 모든 가치를 의심하는 과정을 겪으며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실존하는 자신의 개인성을 중시하는 자유주의(개인주의) 사상이 형성되면서 절대 봉건제를 부정하기에 이르렀다고 논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면서 가장 확실한 존재로서, 본질보다 앞서는 실존하는 자신의 삶에 의미를 두게 된 것입니다.

하여 자본주의는 형이상학적 관념의 세계보다 형이하학적인 현실에 존재하는 물질의 확실성을 통해 인간 문제를 해결코자 하는 경향에 의해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비록 자신이 고립무원의 개인으로 전락할지라도, 과거와 달리 인류가 문명화된 상태에서 실존하는 자신이 미개인으로 퇴보할 수 없을 것이라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하여 이기적 개인의 생존경쟁을 자유롭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체계화한 자본주의 생활양식은 분업과 협동으로 공공선을 이루고자 하는 인간의 심성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태고로부터 이기적인 면과 이타적인 면을 균형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음을 상기해 볼 때, 아담스미스 시대의 자본주의가 인간의 이기심을 배양하고, 양성화하여 탐욕을 정당화한 것 등은 경제 규모가 작은 사회에서 유용함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천문학적 경제 규모가 되면서 이기적 편향성으로 형성된 위험한 사회가 됨에 따라 인간의 이타심과 균형을 이루는 탈자본주의적인 정치경제 제도가 필요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오늘날 천문학적 경제 규모로 인하여 인간의 이기심을 극단화하는 자본주의는 신인류에게는 부적합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류의 대다수가 문명인이 된 지구촌 시대는 인간의 사회성이 우선하며, 개인성과 균형을 이루기 위한 새로운 모계적 분배양식을 세계화(보편화)할 수 있는 체제의 성립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무한경쟁과 절대적 양극화로 인하여 몰락한 중산층의 부재는 중산층이 감당했던 나눔이나 양보할 의사가 결핍되고, 무의식적으로 적대 의식을 갖게 되는 위험한 사회가 되었으며, 이로 인해 유발되는 사회적 비용의 폭발적으로 증가로 인하여 비효율적인 사회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또한 지구촌 시대의 자본주의 분배양식은 ‘풍요 속의 빈곤’을 만들고 있으며, 절대적 양극화로 대다수 사람은 좌절감과 자포자기 상태가 됨으로써, 공격적 태도로 변모케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유경쟁을 하는 만큼 불안정이라는 대가를 치르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경쟁은 증오심과 절대적 양극화로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더는 잃을 것도 없게 됨에 따라 자포자기 상태의 사람들이 점증하고 있습니다.

하여 자본주의가 상대적인 박탈감을 부추기는 ‘상극의 삶’을 살도록 강제하는 체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자유경쟁에 의해 사회 전체가 발전했다는 측면도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오늘날에 이르러 거대규모의 경제거래로 인한 충격도 엄청남에 따라 이에 걸맞은 상생의 삶을 살게 하는 새로운 체제가 필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자본주의가 지구촌 시대를 살아가는 신인류와 불 합치함에 따라 인류는 모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적극적 복지사회의 구현을 위한 모민주의 체제가 적합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행복한 인생을 위해 풍부한 상상력으로 만들어내는 창조력을 발휘할 수 있는 ‘관계의 삶“을 살 수 있는 적극적 복지사회를 구현할 수 있는 체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4.2 참담한 역사적 경험

“자유주의는 인간 내면생활을 발전시켜 나아가는데 필요한 외형적 전제조건들을 마련해주는 것만을 목표로 하고 있다.” (99)(이지순 역, 루드비히 폰 미제스, 자유주의, 한국경제연구원, 1990, 20p)고 함에 따라 자유주의는 경제적 자유를 통해 물질적 풍요를 이루는 것에 비중을 두며, 내면세계에 대해서는 이차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아마도 오랫동안 부계주의에서 형성된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충돌이 많은 부계사회는 부국강병을 해야 함에 따라 높은 세율이 적용되는 억압적인 사회로써, 대다수 사람은 내면세계를 생각할 여유가 없을 만큼 궁핍이 만성화된 상태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여 전체주의 사회로써 부계사회는 권력 양극화와 신분제로 인한 고통을 받은 민중은 자유주의 사상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는 수천 년에 걸친 전체주의 정치에서 시달려 빈곤했던 사람들은 억압에서 해방되기를 염원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후일 시민혁명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고, 혁명의 성공으로 근대사회가 성립된 후, 무정부적인 수준 정도의 간섭이 없는 기능 국가로서 야경국가를 요구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복지 책임이 개인에게 있음을 전제하는 초기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의 지나친 착취로 민중들은 구시대나 다름없는 빈곤한 생활을 하면서도, 어떤 누구에게도 원망할 수 없었습니다. 즉 근대민주주의 사회는 자유주의를 위한 형식적 민주주의(반쪽민주주의) 사회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실질적 민주주의를 위한 경제적 민주주의가 없었습니다.

이는 자본주의 속성에 충실했던 초기자본주의 사회에서 이해관계의 첨예한 대립과 지나친 경쟁을 유발하여 제국주의를 만들고, 이에 반동한 공산당의 출현과 더불어 세계 1차, 2차 대전이나, 냉전 시대 등이 만들어진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자본주의사회가 되면서 탐욕의 배양과 함께 대규모경제로 인하여 전대미문의 대부호가 등장하면서 더 많은 소유를 위한 의지 작용으로 인한 각축장이 된 것입니다. 이는 인간은 문화적 존재임에 따라 사회성과 개인성의 균형을 이루어야 함에도, 이기심을 동기유발로 하는 자본주의에서는 불균형을 정당화하기 때문입니다.

하여 자본주의는 인간의 이기심으로 인하여 유발되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방지하기 위해 제삼자인 국가의 간섭이 필요하다고 하며 전체주의 사회를 정당화했던 홉스의 논변과 상반됨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자유주의가 이기심을 극대화하는 삶을 정당화하면서 무정부를 이상으로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참담한 역사적 경험과 더불어 오늘날 위험한 사회를 만들어가며 관계를 단절하고 있다는 점에서 민주적 분배양식으로 보완해야 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전체주의에 반동하여 생성된 자유주의(개인주의)는 전체의 목적보다 개인이 중요하다는 절대적 개인을 강조한 사상입니다. 물론 자유주의자는 인간의 이기심에 의해서 인류의 총체적 이익을 증진케 됨에 따라 결과적으로 공공선을 이루게 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유주의자들은 개인의 이기적 역할이 인류의 물질적 풍요로 이어져서 인류가 번영할 것으로 믿음에 따라 인간성에 대해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헌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자유주의(개인주의)의 심리적 신조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가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 즉 인간을 이기적이고 냉정하게 계산하고, 본질적으로 무기력하고 원자적이다.” (100)(E. K Hunt, 자본주의 전개와 이데올로기, 정연주 역, 비봉출판사, 1986, 55p)

그리고 “자유주의 사고에서 만들어진 자본가적 사회를 자본주의라 한다.”(101)(같은 책 27p) 이처럼 자유주의에 대해서 헌트는 부정적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자유주의가 인류의 물질적 풍요를 위한다는 명분일 뿐, 실제로는 선진국의 경우 식민개척으로 형성한 자본축적으로 첨단 과학기술을 발달케 했으며, 이로 형성된 세계적 양극화로 대다수 사람이 빈곤층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자유주의가 인간 존엄을 위해 최소한 물적 기초를 보장하지 않고, 어떠한 개인이 독차지하고자 하는 것을 허용함에 따라 급속한 양극화와 환경오염 등으로 인류가 곤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하여 과거 소규모 경제에서 자유주의가 적합하였지만, 오늘날 천문학적 규모의 경제와 과소비로 인해 만들어진 자원고갈, 환경오염 등의 나쁜 결과를 볼 때, 자본주의가 지구촌 시대와 불합치함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초기자본주의에서 자본가만 풍요로웠을 뿐, 대다수 사람은 빈곤했으며, 오늘날에는 지역 간의 양극화로 인해서 테러가 만연하는 위험한 사회가 되었을 뿐입니다. 특히 복지축소를 근간으로 하는 신자유주의는 사회적 약자의 삶은 고단하며, 빈곤 여성은 성적 존재로 전락할 수 있다는 점에서 탈자유주의적인 새로운 분배양식이 세계화되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4.3 위험한 사회를 형성

자본주의가 등장하고부터 인류는 단기간에 많은 대가를 치렀습니다. 물론 첨단 과학기술을 만들어 하나의 지구촌으로 만든 원동력이었다는 점이나, 인류를 문명화한 점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자본주의가 지금까지 만든 결과로 만들어진, 앞으로 다가올 더 큰 위험을 극복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특히 장기적인 안목에서 볼 때, 자본주의의 속성에 의해 유발되는 양극화가 인간성 황폐화로 이어지고 있으며, 여성이 과거처럼 빵을 위해 자유를 버려야 하거나, 성적 존재로 전락하는 등의 상황이 전개되는 경우 회복 불능의 상태로 고착화가 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이미 자본주의 속성에 충실해지고자 하는 신자유주의가 절대적 양극화를 빠르게 가속하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자유주의 사상과 자본주의제도는 막스 베버가 지적하듯이 의도하지 못한 결과였다고 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대혁명의 정신인 자유, 평등, 박애를 이룩할 수도 없었고, 빈곤의 자유만 있다고 주장한 사실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여 모계적 가치를 근간으로 하는 새로운 분배양식을 위한 적극적 복지사회가 성립되어야만, 위험한 사회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류가 탈 양극화를 공존의 법칙으로 지적했던 절대주의 철학자 플라톤의 주장을 실천한다면 가능할 것입니다. 즉 “플라톤은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이르기를 어떤 조직에서든지 최고임금이 최저임금의 5배를 넘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102)(고철기, 자본주의 종말, 물병자리, 1998, 88p)

따라서 절대주의 철학자였던 플라톤이 행복한 인생을 살기 위한 법칙으로써 ‘소유상한제’를 제시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양극화를 플라톤은 부 정의한 것으로 생각했고, 불행한 인생을 만드는 원인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플라톤은 동료로서 인간 상호 간에 소유 제한으로 조화를 이루어야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는 종교사회였던 모계 신본주의 사회의 나눔(박애)을 생활화한 것과 부계 우월종교에서도 자비나, 사랑을 교리의 핵심으로 하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모계 신본주의 사회에서는 나눔을 진리로 알고, 공유제로 나눔을 실천하였던 반면, 사유제를 근간으로 하는 부계사회의 등장으로 만들어진 부계 우월종교에서 나눔이 명분으로 된 경우가 많습니다.

아무튼 부계적 가치에 바탕을 둔 경제적 자유주의로써 자본주의가 천재지변, 인간성 황폐화, 자원고갈, 환경문제, 양극화 등을 유발하며 위험한 사회를 고착화하고 있습니다. 즉 지구촌 시대를 맞이한 인류는 나눔을 실천하라는 성현의 가르침을 상기해서 위기를 극복해야 할 급박한 상황에 있는 것입니다.

즉 상상의 자유는 무제한일지 모르나, 행위규범으로써 자유주의는 제한적이어야 할 만큼 위기에 있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 인류가 행복한 인생을 위한 해답으로써 삶의 질 향상이나, 존재의 삶(관계의 삶)을 위한 방안을 다 각도로 연구를 하지만 자본주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한계를 맞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절대주의 철학자였던 플라톤은 행복을 위한 법칙으로써, 상한제를 제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지켜지지 않았던 것은 전체주의로써 부계주의와 상반되었기 때문에 구현하지 못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여 인류가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해 플라톤의 상한제를 수용하고자 한다면, 적극적 복지사회가 성립되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부계적 가치를 근간으로 하는 정치경제 제도를 퇴출하여 부계와 모계가 공존하는 탈 자유주의적인 새로운 체제가 성립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한정된 재화의 적정한 분배를 위한 새로운 모계적 분배양식인 ‘소유상하한제’로 적극적 복지사회를 구현할 수 있는 정치경제 제도가 보편화되어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2. 포스트 자본주의

 

1. 신인류 분배양식

1.1 경제민주화

시민혁명 후 자유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근대사회가 성립하였습니다. 이는 경제적 자유주의를 위한 절차적 정의로써, 민주주의와 결합한 형태인 자유민주주의 체제로써 소위 자본주의 체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연법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자유주의나, 철학적 상대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는 다 같이 인본주의이며 개인이 주체가 된다는 점에서 결합할 수 있지만, 복지에 대해 미온적이라는 점에서 불완전한 결합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모계적 가치를 내재하고 있는 민주주의는 복지적이지만, 부계적 가치를 내재하고 있는 비복지적인 자유주의(개인주의)와 이질적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모계적 가치로써 민주주의와 부계적 가치로써 자유주의는 근본적으로 상반됨에도 불구하고, 부계주의의 연장선에서 결합 됨에 따라 경제적 자유주의를 위한 민주주의로써, 반쪽민주주의에 머물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부계 민주주의가 민주주의 방향성인 복지사회구현을 위한 정치적 의무를 다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의 사회성을 근간으로 하는 정치적 민주주의보다, 인간의 개인성에 연유하는 경제적 자유주의가 우선하는 체제입니다.

따라서 무제한 소유를 허용하는 자본주의사회는 모계적 분배양식을 구현하기 곤란함을 알 수 있다. 즉 절차적 정의에 머물게 하는 자유주의를 위한 민주주의는 적극적 복지사회를 만들 정치적 의무가 없다는 의미이다.

즉 자유주의는 목적이 되고 민주주의는 수단이 되는 반쪽민주주의로써는 복지사회를 구현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사회민주주의가 국민을 위해 집산제로 복지사회를 구현할지라도, 민주주의가 목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국민에 의한 정치가 민주주의이기 때문입니다. 하여 1인 다주식 주의로써 경제적 자유주의와 1인 1표 주의인 민주적 생활양식과는 상반되는 것을 결합한 자본주의는 불안정한 체제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라는 두 개의 정치 시스템이 혼재하고 있습니다.

하여 국민에 의한 정치로써 민주주의가 자본주의 발 양극화를 극복하고자 한다면, 절차적 정의와 경제적 민주주의라는 형식과 내용이 일치하는 온전한 모계 민주주의가 성립되어야 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국민을 위한 적극적 복지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플라톤의 소유상한 사상을 대다수 사람이 공동체의 일반의사(규범)로 설정하기를 바란다면, 온전한 민주주의로써 모민주의가 성립되어야 ‘소유상하한제’라는 장치를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전 단계로써 복지사회의 구현을 위한 생활 정치가 보편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모민주의사회가 성립될 수 있음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1.2 모계적 분배양식

절대주의 철학자 플라톤의 소유 상한제 사상은 서구가 기독교 제국이 됨에 따라 실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즉 소유상한 사상을 제외한 플라톤의 절대주의 철학을 원용한 기독교는 플라톤의 주요 사상으로써 소유상한 사상을 제외했습니다.

즉 플라톤의 소유상한사상(평균소득의 5배수 격차금지)은 의미가 없었습니다. 이는 절대 존재를 중심으로 한, 무한소유를 정당화한 절대 봉건제와 상반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근대 상대주의 사회(민주주의)가 탈 양극화를 지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양극화를 공고화하고 있습니다.

즉 자유, 평등, 박애를 명분으로 한 시민혁명은 복지사회의 구현을 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로 인하여 혁명의 의미가 퇴색되었습니다. 즉 절대 봉건제를 타파하여 물심양면의 균형을 이루어 인간답게 살기 위한 혁명이 배금주의로 인하여 완성을 할 수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복지사회를 구현할 수 없는 인권선언은 선언에 머무르게 했습니다.

예를 들어 구시대는 사회적 약자가 시혜의 은전이라도 받을 수 있었지만, 초기자본주의에서는 자기팔 자기가 흔들면서 살아가는 사회로써 은전도 없음에 따라 굶어 죽을 자유밖에 없었던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구시대 사람들은 신분제의 지배를 받았으나, 근대사회가 성립하면서 복지 책임이 개인에게 있음에 따라 배금주의에 지배받게 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사회가 성립되면서 경쟁력을 갖추지 못했던 대다수 여성의 경우 오히려 복지적 시혜도 없어진 상태가 됨에 따라 구시대의 노예 등급 수준으로 추락 되었던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알맹이라 할 수 있는 복지사회구현을 간과하는 자본주의는 생태적으로 민주적이고, 복지적인 여성과 불합치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오늘날까지 대다수 나라에서 만민평등에 근거한 남녀평등을 규정하고 있지만, 부계 편향의 사회임에 따라 현실적으로 차별이 있다는 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헌법 제11조 1항에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 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제36조는 가족의 민주적 제도보장과 아울러 양성평등에 관한 규정들과 함께 ‘국가는 여성의 복지와 권익향상을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국가는 모성보호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라고 규정하였습니다. 최근 호주제 폐지와 함께 남녀평등을 위한 차별금지법을 규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법의 실효성을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여 인류의 구심력인 모성을 보호해야 할 만큼 위험한 사회가 됨에 따라 생태적으로 복지적인 여성과 부합되는 모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새로운 체제를 성립한 다음, 모성보호를 위한 물질적 기초를 입법으로 보장되어야 할 때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울러 비복지적인 신자유주의로 초국가적 거대기업의 위력이 지구촌 사회를 이끌게 되는 현상은 위험한 사회를 가속화 함에 따라 부계적 분배양식은 약화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모계가 부계를 견제하여 균형발전을 이룰 수 있는 권력의 반을 보장하는 정치경제 제도가 성립되어야 합니다.

이는 부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로 인하여 형성된 위험한 사회를 극복하기 위해 생태적으로 복지적이며 민주적인 여성이 적극적 복지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생활 정치에서 중심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실현 가능한지 의심을 할 수도 있겠지만, 인권선언을 명문화한 자체가 법의 실효성을 보장받기 위해 여성 스스로 정치적인 힘을 배양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어 있음에 따라 공은 여성에게 넘겨졌으며 조직화하여 체제성립이 될 때 국정의 주체가 되어 정치 권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구제할 수 없다.’라는 법치주의 명언처럼, 근대사회의 여성은 정치적 힘을 스스로 배양하여 스스로 도울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성들이 뭉쳐 탈 양극화 사회로써, 적극적 복지사회의 구현을 위한 온전한 민주주의인 모민주의 체제를 성립할 수 있는 사회가 준비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여 종이호랑이로서 머무는 남녀평등법이 실제 호랑이로서 실효성을 갖추려면 노동조합처럼, 여성들이 결사에 참여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1.3 지난 잘못에 대한 보상

부계사회의 등장으로 여성의 삶이 고단하였으며, 근대사회가 성립되어 차별금지법이 명문화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을 경시하는 사회풍토가 여전합니다. 이는 거의 모든 제도가 부계적 가치를 근간으로 하여 만들어졌고, 의식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즉 부계주의 정치문화에서 여성들이 정치적 토대를 형성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여 여성들은 정치역량을 키우기 위해 요구되는 모계적 분배양식의 성립을 위해 마치 노동조합처럼 조직화해야 합니다. 즉 적극적 복지사회가 성립될 때 남녀평등지수가 5대5 정도로 견제와 균형이 가능한 것입니다. 즉 모계를 정치의 한 축으로 인정하고, 권력의 반을 보장하여 부계와 견제와 균형을 이루며 남녀평등의 실효성이 보장되는 적극적 복지사회가 보편화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부계 정치지도자가 다수를 차지하는 정치 현실에서 부계주의로 세상의 문제가 해석되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음에 따라 사회정서로 공고화된 후진국 기준으로써 10대 1의 남녀차별을 대등한 수준으로 만들거나, 모계적인 체제를 보편화하는 등은 어려운 문제로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자본주의사회에서 자유경쟁을 위한 거래당사자가 평등을 전제로 한 대등한 입장으로 자유계약의 원칙을 지키기 어려우며, 남녀평등의 경우 법률로써는 평등하지만, 현실에서는 차별이 엄연히 실재한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서구 여성들은 시민혁명에 참여하여 자유, 평등, 박애를 위해 피 흘린 대가조차 받지 못했고, 후일 실효성이 없는 남녀평등 선언을 획득한 사실만으로도 만족했던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서구는 남성을 원자 개인으로, 여성은 원자에 종속되어있는 전자적 개인처럼, 생각한 기독교문화가 오랫동안 의식을 지배했기 때문입니다.

즉 희생과 봉사가 필요할 때는 평등을 말하고, 실제 분배에 있어서는 능력의 불평등을 들어 차별받았던 부정의 사회였습니다. 따라서 지구촌 시대를 살아야 하는 신인류는 오랫동안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생각하여 착취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게끔 하는 사상을 근절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민주주의가 한 단계 더 본질에 가깝게 발전하는 적극적 복지사회의 구현을 위한 새로운 정치문화가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지난날 잘못된 생각이나 제도에 의해 피해가 발생한 사실을 두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나칠 수는 없음에 따라 생태적으로 복지적인 여성과 부합되는 정치경제 제도의 성립을 보상으로 해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근로자와 사용자 간에 실제로 대등하지 않음에 따라 사회법을 첨가한 수정자본주의에서 인정한 노조로서 사용자와 대등한 입장에서 타협하게끔 사회적 합의를 이룬 사실을 상기해 볼 때 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모민주의의 ‘소유상하한제’로 적극적 복지사회를 구현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존재의 삶(관계의 삶)으로 진보

2.1 이성적 존재

서구의 경우 절대 존재의 계시로 남성우월주의가 정당화됨에 따라 남성들은 무임승차의 복을 누렸습니다. 반면에 여성이 소외되었으며, 착취하기 쉬운 대상으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근대 시민사회가 성립되었음에도, 태생적으로 복지적이고 민주적인 여성이 정치참여를 할 수 없었던 이유로 볼 수 있습니다.

즉 모계적 가치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는 부계가 주류를 이루는 사회에서 왜곡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말로 하는 민주주의 정치에서 폭력이 난무하는 이유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무한축적을 정당화하는 경제적 자유주의를 위한 절차적 정의로써 민주주의와 더불어 경제적 민주주의가 공고화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는 인간의 욕구 충족을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 분배양식에서는 과잉경쟁과 시장 확대가 필연적임에 따라 이해관계의 충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의 무국적성은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 해도, 자본가는 자본축적을 할 뿐이며, 국민은 동원의 대상이 됨에 따라 결과적으로 ‘곰이 재주를 부리고 돈은 사람이 가진다’라고 하는 속담처럼 자본가에게는 전쟁을 통해서 세 가지를 얻을 수 있었던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는 부를, 또 다른 하나는 권력을 얻었으며, 나머지는 명예까지 획득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권력자는 국민 희생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함에 따라 권력과 부와 명예까지 잃은 경우에도 자본가는 책임지지 않았던 사실에서 자본주의의 속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여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양극화가 형성되는 것이나, 구시대의 권력투쟁으로 권력 양극화를 이루고자 하는 것과 같은 성질이라 할지라도, 자본주의 발 양극화가 세계적이며, 1대 99로 훨씬 강력함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부의 양극화가 다른 분야까지 양극화하고 있음에 따라 결과적으로 철학적 상대주의를 근간으로 성립한 근대사회가 철학적 절대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구시대보다 위험한 사회로 공고화될 것으로 예측할 수 있습니다.

이는 구시대에서 권력의 유무에 따라 형벌의 정도가 부패했던 것처럼, 오늘날 자본주의사회의 실상을 압축하여 전하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속어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자본주의사회에서 자본가의 자본축적은 선이 되고, 도산은 악이 됨에 따라 우선 자신부터 살아남아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있는 것입니다.

하여 자본주의의 무정부적인 경향으로 사람들은 공동체를 위한 조세부담을 싫어할 뿐만 아니라, 손해는 무능, 이익은 유능의 결과로 의식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공공선을 지향하는 인간의 이상과는 거리가 먼 왜곡된 의식입니다.

따라서 초기자본주의에서 개인의 이기적 행동이 공동선을 이룬다고 했지만, 자본의 축적과정에서 유발되는 이해관계의 충돌로 일어난 공동 악의 결과인 세계대전을 볼 때, 오히려 악이 배양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쓰라린 역사적 경험으로 자본주의를 불신하게 되었지만, 인간의 탐욕을 동기유발로 하는 자본주의는 강력함에 따라 유발되는 나쁜 결과를 억제하기 위해 자본주의를 수정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수정자본주의 국가로서, 관료제가 비대해지고, 간섭주의가 뚜렷할수록 더 많은 문제를 유발하고, 정부가 무력하고, 시장의 한계에 이르러 자유기업 중심의 정책을 펴고자 하는 신자유주의를 만들었습니다.

즉 자본주의의 속성과 배치되는 소극적 복지국가로 변모했지만, 결국 비 복지적인 자유주의를 강화한 신자유주의로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이처럼 자본주의가 강력한 것은 사유제를 근간으로 하는 부계사회가 일회적 삶을 근간으로 하고 있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여 연속된 재생의 삶을 믿어 공유제를 하였던 모계사회의 분배양식은 참고가 될 것입니다. 물론 지구촌 시대를 살아야 하는 신인류를 위해 생태적으로 복지적이고, 민주적인 여성이 주류로 형성될 수 있는 체제로 진보해야 합니다.

 

2.2 과소비의 위험성

자본주의에 반동하여 나타난 사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진짜 민주주의를 구현한다고 주장함에 따라 자유주의 체제가 무너질 위기상태로 발전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하여 20세기 초 국가 존립의 정당성을 복지국가에 두어, 자본주의에서 사회법을 수용한 수정자본주의를 근간으로 한 바이마르헌법이 성립하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즉 자본주의가 부의 절대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 사회정의가 무너졌을 뿐만 아니라, 국가 존립의 위기를 맞이하게 됨에 따라 자본가의 횡포를 억제할 수 있는 노동 삼권의 보장과 사회적 약자를 위한 생활권이나 사회복지를 위한 제3자로써 국가의 간섭을 허용했습니다.

하지만 행정국가로써 관료제가 비대해짐에 따라 상대적으로 의회민주주의는 약화 되었습니다. 이는 초기 자유방임주의에서 수정한 국가자본주의로 변모하여, 마치 구시대의 전체주의 체제처럼, 정부가 적극적으로 간섭하기 때문입니다.

즉 지구촌 시대로 발전하면서 만들어진 복잡성이나, 폭발적 갈등, 대량소비로 인한 환경문제 등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문성을 가진 관료가 주체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유방임주의가 야경국가를 요구한 것처럼, 자본주의는 관료제를 축소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 속성에 충실한 신자유주의가 관료뿐만 아니라, 의회까지 무력하게 만들고 있는 현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여 자본주의의 속성에 충실하기 위한 신자유주의가 복지축소를 한다면, 초기자본주의가 제국주의를 형성했던 것처럼, 국제적 긴장 관계를 유발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강력한 욕구 본능을 배양하는 속성에 의해 만들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끓기 위해 근본적으로 다른 모계적 분배양식이 세계화되어야 앞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신자유주의가 추구하는 세계 분업화를 가능케 했던 석유 자원의 고갈이 빠른 속도로 진행됨에 따라 석유화학제품 등에 의존하는 생활의 전반을 붕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물류비용의 상승으로 지역 내 자급자족의 생활로 재편될 것을 예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자본주의의 성장성을 가능케 한 화석연료로써 석유 자원은 재생산이 되지 않음에 따라 자본주의가 한계를 맞이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특히 화석연료 에너지를 대체코자 원자력 개발을 할수록 방사능오염으로 인한 위험을 체르노빌이나, 2011년 후쿠시마에서 일어난 원전 사고로 인류가 공멸할 수 있음을 알게 됨에 따라 과소비를 유도하는 자본주의로 인류가 살 수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무한정 발전하여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고 세계화를 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 자본주의 발 착각을 벗어나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은 석유 자원이 남아 있으며, 다국적기업의 가공할 만한 자본축적과 더불어 확고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음에 따라 자본주의자(자유기업가)들은 신자유주의를 역설하며, 자본주의자가 세상을 이끄는 신자유주의 정치가 가능할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신자유주의들은 정보통신이나 과학기술의 발달로 세계 분업화가 가능한 것으로 보이겠지만, 대량소비로 인한 석유 고갈로 석유화학제품의 감산이나, 대다수 물류가 이동이 불능하게 된 극단적인 상황을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미 징조로써 고유가를 몇 차례 경험하여 에너지나 자원 확보에 국가의 명운이 걸려있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의 강화로써 신자유주의를 제3의 길로 생각하는 것은 남은 다 죽어도 자신은 죽지 않을 것이라는 아둔함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3 지구촌 시대는 존재의 삶’(관계의 삶)이 필수

석유 자원의 고갈과 환경파괴 등으로 인한 먹이사슬의 붕괴를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자들은 국제정치의 중심에서 각국의 정치에 직간접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신자유주의에 부합되는 제도 개편을 관철하기까지 합니다.

즉 자본주의가 엄청난 양의 에너지소비나 과소비 등을 부추김에 따라 만들어진 환경오염, 자원고갈, 생태계 파괴, 의존성의 증대 등으로 이미 국내외의 문제를 벗어나 국제적 공조를 해야만 지속 가능한 삶을 살 수 있는 상황이 되었음에도, 자유무역을 위한 세계시장 확대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하여 자본가가 세계를 하나의 정부처럼, 자유무역을 하고자 함에 따라 유발되는 각 나라의 문제로 인하여, 주권재민의 민주주의는 위기를 맞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국가자본주의와 달리 선진국 중심의 세계자본주의로써, 신자유주의는 자유무역을 활성화하기 위해 국내에서는 기업의 경쟁력제고로 인해 생성되는 복지축소 요구나, 양극화로 유발되는 사회적 경비부담의 증대나, 개방을 강제하는 국제적 압력 등으로 인하여 정부가 무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로 세계화된 오늘날은 상호 의존성의 증대로 인하여 국내의 민주주의 정치로써는 쉽게 풀 수 없는 상황이 됨에 따라 시민들이 민주적 권위까지 부정하게 되면서 사회통합을 이루기가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또한 자본주의의 분배양식으로 유발되는 양극화현상으로 나타나는 인권 무시의 경향은 일인일표주의인 민주주의가 위기를 맞는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즉 부계적 분배양식을 모계적인 민주주의가 통제하는 데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민주주의와 부계적 분배양식의 결합은 모순입니다.

따라서 인류에게 부담이 되는 자본주의를 넘어 민주주의와 모계적 분배양식이 결합한 체제로 세계화해야 할 때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서구의 식민통치를 받았던 자본주의 주변국들은 제국주의의 혹독했던 경험으로 아직도 혼란한 상황에 있으며, 이들 대부분이 반기독교적인 정서로 제3세계를 형성하여 반자본주의적 경향이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즉 시민혁명으로 이룩한 인간 존엄을 구현하기 위해 성립한 인류의 위대한 유산인, 근대 민주주의 사회까지 자본주의로 인하여 폄하되는 원인입니다. 그리고 서구 식민통치를 받은 지역 민중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전통문화를 부정하면서 형성된 경박한 출세주의, 이기주의 등의 식민찌꺼기를 제거하기 위해 반기독교적인 이슬람으로 서구적 가치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즉 전통 가치에 의한 사회목표와 식민지 통치를 위해 만들어진 제도는 근본적으로 이질적임에 따라 유발되는 가치 부재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하여 ‘존재의 삶’과 상생을 위해 연대를 중시하는 전통문화와 배치되는, ‘소유의 삶’을 위한 체제인 자본주의로 인해 이웃과 갈등이 깊어지면서 전통문화 파괴, 인간의 유대성 훼손 등으로 훼손된 것을 회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부계 유일신 주의인 이슬람교를 강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로버트 머튼(Robert K. Merton)이 1957년 ‘사회이론과 사회구조’에서 발표한 아노미 현상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입니다. 다시 말해서 억제할 수 없는 탐욕으로 배타적인 종교를 내세워 식민지지배를 위한 명분을 축적하면서, 수탈한 사실은 사회통합을 위해 반기독교적, 반자본주의로 아노미 현상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지역의 문화와 의식은 적어도 수백 년에 걸쳐 뿌리가 내려져 있음에 따라 토착민의 문화를 존중하여 점진적인 수교나 교류되어야 충격을 완화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탐욕을 정당화하는 자본주의는 이익을 위한 조급증으로 전통문화를 간과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오늘날의 경우 다국적 초거대기업이 석유 자원이 곧 고갈되기 전에 부를 축적하기 위한 조급성에서도 자본주의 속성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하일브르너의 다음 글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더 중요한 이유는 부가 저개발주변으로부터 발전된 중심으로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이미 오랜 역사를 지닌 강자에 의한 약자의 제국주의적 착취가 자본주의적으로 변형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점점 더 넓어지는 부국과 빈국간의 격차는 의심할 바 없이 자본주의 세계의 탁월한 성과를 입증하는 척도일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적 착취의 힘을 보여주는 징표이다.” (103) (하일브르너, 54p)

이처럼 자본주의로 인하여 만들어진 대량소비, 대량생산 시대를 살아야 하는 인간을 ‘경제적 동물’로 살게끔 강제함에 따라 각 지역의 전통적 가치로 이루어진 인간적 유대는 무너지고, 삶의 질을 떨어뜨려 인간을 경박하게 만든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자본주의가 이기적인 욕구를 동기유발로 함에 따라 배양되어 만들어지는 탐욕만큼, 과당경쟁으로 인한 자원고갈과 자연훼손이나, 비인간적이고 무자비한 측면 등으로 위험한 사회를 만들고 있습니다.

또한 태생적으로 종교적 심성이 있는 인간은 태고부터 선함을 목표로 진보해왔으며, 인류의 이상임에 따라 성악설적인 인간으로 만드는 환경이나, 제도는 퇴출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가 물질 풍요를 통해 인간다운 행복한 삶을 구현한다고 역설한 것을 위해 무한한 자원이 있다면, 믿을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유한한 자원으로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충족할 수 없음에 따라 새로운 분배양식이 필요합니다.

즉 탐욕의 배양을 부추겨 만들어지는 성악설적인 위험한 사회를 허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는 자본주의가 인간의 비교차별의식을 필요 이상으로 자극하거나, 양극화 등으로 인하여 배금주의가 의식을 지배함에 따라 유발되는 위험한 사회를 방치하면 회복 불능 상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삼라만상의 주체로써, 인간의 우수한 두뇌와 무한한 상상력을 경제에 국한한다는 자체가 위험한 것입니다. 하여 지구촌 시대를 사는 신인류는 모계 신본주의 사회가 독점하지 않음으로써, 풍요했던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착취기술을 발달케 하는 자본주의는 인간성 황폐화를 가져옴에 따라 새로운 모계적 분배양식이 요구됩니다.

3. 모계민주주의의 소유상하한제

3.1 신자유주의의 위험성

자본주의는 국가자본주의를 이어 무한경쟁을 근간으로 하는 신자유주의로 발전함에 따라 복지국가는 의미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즉 선진국의 다국적 거대기업은 초기자본주의가 수요개발을 하는 공급적 경제였던 것처럼, 첨단기술을 기반으로 한 경쟁력 있는 가격을 유지하기 위해 원가 부담으로 작용하는 복지를 축소하거나, 관료제의 축소 등을 지향하고, 원칙적으로 국가간섭을 배제하고 있습니다.

이는 선진국의 경우 유리하지만, 반면에 중진국의 경우 샌드위치의 입장이 되었으며, 후진국은 경제성장의 둔화로 복지국가 구현이 어렵게 되고 있습니다. 또한 대량소비로 인해 발생한 지구 환경오염은 온난화로 이어져서 생태계 파괴와 더불어 정화기능을 잃게 됨에 따라 환경복원을 위한 천문학적 비용부담을 누가 할 것인가, 등의 책임 공방으로 혼란한 세상이 되고 있습니다.

아울러 국제정치는 거대 자유기업의 상업활동을 위한 수단으로 변모하게 됨에 따라 조정 능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즉 지구는 소유의 삶을 위한 각축장으로 변모하여 만사를 경제적 가치로만 평가하려는 경향으로 위험한 사회가 되고 있습니다. 이는 경제는 행복한 인생을 위한 수단이었지만, 자본주의는 인류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전대미문의 천문학적 규모의 경제로 발전케 함에 따라 경제 자체가 목적으로 변모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 소유가 삶의 목적이 됨에 따라 유발된 아노미 현상이나, 허무주의나 아파시(Aparhy :무감동, 무관심) 등의 부정적인 현상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하여 이성적인 존재로서 인간은 근본적으로 사회적 동물임에 따라 무제한 소유를 정당화하는 자본주의 분배양식보다,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는 모계적 분배양식을 위한 정치경제 제도가 합리적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자본주의가 인간을 ‘경제적 동물’로 살아가게 하는 자체가 영적 존재임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문화적 존재로서 인간은 본래 ‘존재의 삶’을 살기에 적합한 존재이기 때문에 ‘소유의 삶’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자본주의 경제 제도가 오늘날 문명화된 신인류에게 부적합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영적 존재로서 인간은 존재를 위한 소유로써 균형 잡힌 삶을 살아야 하는 존재로 진보했기 때문입니다.

하여 각 지역이 존재의 삶을 위한 정체성으로서 고유한 문화와 ‘소유의 삶’을 본질로 하는 자본주의를 수용함으로써 혼란을 겪었던 것보다, 배금주의의 세계화와 같은 선진국 중심의 신자유주의로 인해 문화적 충돌이 더욱 격화될 것임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최대이윤추구 속성에 충실한 초국가적 거대기업은 무한경쟁을 방해되는 것을 제거하고자 하며, 국가조차 자본축적을 위한 수단으로까지 생각하는 극단적인 사고방식을 신인류는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초기자본주의 국가에서 활발한 거래로 이루어진 세수 증대로 국가의 부가 증대하였던 반면, 민중에서 실익이 없었던 사실이나, 초기자본주의에서 국내외착취로 이루어진 막대한 자본축적의 충돌로 인해 형성된 제국주의의 나쁜 경험 등을 신자유주의가 등장하면서부터 악순환될까 우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본주의가 등장하고부터 두 차례나 세계대전을 치렀다는 사실과 과당경쟁으로 인한 자원 낭비와 환경오염, 절대적 양극화, 테러 집단의 배양, 인간성 황폐화 등으로 이루어진 위험한 사회를 만든 사실 등에서 근거하고 있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선진국의 거대기업은 냉전체제가 무너지고 난 다음 후진국을 배려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 됨에 따라 복지축소로 기업의 조세부담을 완화하고, 우수한 기술력과 대자본으로 무한경쟁을 하겠다는 선진국주도의 신자유주의 원칙이 일방적으로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두려워합니다.

또한 1인 다주식 주의로써 자본주의가 주권재민(主權在民)의 1인 1표 주의인 민주주의와 부합되지도 않으며, 양극화로 위험한 사회를 만들었고, 탐욕을 배양한 결과, 인간성의 황폐화로 공공선이 무너지고 있는 사실을 보고 있습니다. 하여 부계 일변도의 내국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는 지구촌 시대와 부적합함에 따라 온전한 민주주의로써 모계 민주주의가 세계화되는 것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3.2 배금주의로 무너지는 복지

자본주의는 자유기업 주의로서, 원칙적으로 비 복지적이며 불 개입주의를 지향함에 따라 자본축적을 방해한다면, 자유주의 원칙을 제시하며 저항하거나, 수익이나 안전성이 보장되는 국내외의 지역에 투자합니다. 이는 사익추구를 위한 이익집단으로써 기업은 자본주의 속성에 충실해야 살아남기 때문입니다.

즉 배금주의에 충실한, 소유의 삶을 위한 ‘경제적 동물’로 충실해야 생존할 수 있는 사회로 발전된 것입니다. 따라서 지구촌 시대에서 자유기업이 살아남기 위해 치열한 무한 경쟁해야 함에 따라 국경은 의미가 없게 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여 이로 인하여 유발되는 세계적 양극화는 인류가 공황으로 인해 가혹한 대가를 주기적으로 치렀던 과거의 경험보다, 양극화 사회로 인하여 힘든 삶을 살게 될 것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이는 초기자본주의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자본주의 속성으로 인해 유발되는 갈등과 충돌로 야기되는 국방, 치안 문제나 사회복지 등에 소모되는 천문학적 경비나, 핵개발이나, 첨단 개인화기 등으로 나타난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본주의 속성에 의해서 발생하는 치안유지나, 복지부담 등 사회적 비용의 증대로 인해 유발되는 기업의 조세부담은 정부와 갈등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무한경쟁으로 인한 기업의 경쟁력 강화, 이윤감소 그리고 기업과 관련된 복잡한 법적 규제, 복지나 사회적 비용의 증가로 인한 조세부담 등으로 ‘고비용 저효율’사회가 됨에 따라 국가자본주의로써는 선진국의 거대기업이 경쟁력을 잃게 되면서부터 국가개입주의(보호주의)를 거부하며, 신자유주의를 창안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공산당의 퇴출로 선진국의 다국적 거대기업은 자본주의 속성에 충실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신자유주의 체제를 세계화할 수 있었습니다. 즉 자유기업이 무한한 자본축적을 위해 지나친 규제와 과중한 담세를 피하면서 유리한 곳을 찾아가는 속성을 충족하기 위해 신자유주의가 성립된 것입니다.

하여 초국가적인 무한경쟁으로 인하여 국가개입주의가 의미를 잃게 됨에 따라 사회통합을 구현하기 힘들게 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재화를 압축하는 화폐 기능을 넘어 무한히 압축할 수 있는 정보축적 능력으로 인하여 형성되는 금력은 책임지지 않는 현실적 권력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뿐만이 아니라 다국적기업은 해외시장 확대를 위한 방편으로 각 나라 정부에도 민주적 통제를 받지 않는 금력 등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유발되는 손해나 피해는 사회적 약자가 부담하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따라서 지구촌 시대는 경제적 자유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 분배양식보다 경제적 민주주의로써 모계 민주주의가 요구됨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앞으로 사회는 완전한 민주주의로써 모계 민주주의로 적극적 복지사회가 성립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분권을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와 소유 제한은 같은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3.3 행복 지수가 높은 사회로 진보

자신을 중시하는 만큼, 모든 행위의 결과도 책임져야 하는 ‘소유의 삶’을 위해 성립한 자본주의사회에서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었습니다. 이는 생지옥을 경험하면서 본질보다 존재가 우선 한다고 한 ‘실존주의’를 생성케 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이는 인간을 대우주와 연동된 소우주이며 독립적인 주체로 생각한 동양의 ‘천지인사상’과 흡사합니다.

이는 샤르트르의 ‘실존주의’가 자본주의의 인간 상품화에 대한 실망에서 비롯된 사상으로써, 인간의 본질을 신의 종으로서 설정한 것을 거부하며, 인간은 삼라만상의 주체로 소우주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같기 때문입니다.

하여 ‘소유의 삶’을 중시하는 자유주의보다 한 단계 발전한 ‘존재의 삶’은 인류가 이미 태고부터 염원했던 것으로, 4차산업혁명의 조건이 성숙 되었을 때 제도화됨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즉 지구촌 시대는 ‘존재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환경과 지적 능력이 갖추어지고 있음에 따라 모계적 분배양식의 세계화로 ‘존재의 삶’(관계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에리히프롬(Erich Fronm: 1900-1980)이 자신의 저서인 ‘소유냐 존재냐’(1976)에서 삶의 의미가 소유보다 존재에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탐욕을 양성화한 자본주의가 장구한 인류의 역사에 비해 짧은 기간 동안 인간성 황폐화를 유발하는 사실을 볼 때, 이성적 존재로서 인간은 ‘존재의 삶’을 사는 것이 합리적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존재의 삶’을 살기 위해 모계적 분배양식을 보편화할 수 있는 정치문화가 형성되도록 제도를 정비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자연계에서 공존하기 위한 구조화된 먹이사슬의 정점에 있는 인간 역시 인간 상호 간에도 약육강식의 삶을 살고 있지만, 동료로서 인간 상호 간에는 소유 제한을 통해 ‘존재의 삶’을 살도록 하는 새로운 정치문화를 창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성적 존재로서 인간은 대자연 속에서 육화되어 자연을 객체로 지배하고 있음에 따라 전쟁이나, 테러 등으로 인한 과소비나, 환경파괴가 없이 공존할 수 있는 환경조성과 자연을 가꾸어야 할 선의의 관리자로서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인간의 본성이 ‘존재의 삶’이 적합함에 따라 이상으로 삼고 있지만, 사실은 ‘소유의 삶’보다 실현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소유의 삶’을 넘어 자연 친화적인 ‘존재의 삶’을 산다면, 소우주 인간이 천지 만물과 조화로운 ‘관계의 삶’을 산다면, 삶의 궁극적 목적인 행복한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수만 년간 ‘생로병사’를 위해 ‘존재의 삶’을 살았던, 느림보 거북이 같은 모계사회에서 행복 지수가 높았던 사실은 참고가 될 것입니다.

하여 문화적 존재로서 인간은 ‘관계의 삶’을 살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은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존재의 삶’을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은 ‘소유의 삶’보다, 한 수 위인 ‘존재의 삶’을 실천하는 종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스스로 만든 돈을 숭배하며, 돈벌이 자체가 인생의 궁극적 목적이 되는 것은 대다수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었던 역사적 경험에서 근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욕구 경쟁을 동기유발로 하는 자본주의는 인간이 선을 지향하는 문화적 존재임을 간과하면서 형성된 위험한 사회를 극복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공고히 할 수 있는 모계적 분배양식이 세계화되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3.4 적극적 복지사회로 진보

인류의 이상인 적극적 복지사회와 비복지적인 무한소유를 제도로써 보장하는 자본주의는 상반됨에 따라 적극적 복지사회의 구현을 위한 소유 제한을 할 수 있는 체제가 세계화되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태고 모계 신본주의 사회의 신념인 ‘해혹복본’을 위한 나눔의 실천이나, 불교의 무소유와 기독교의 사랑, 회교의 나눔, 도교의 조화, 유교의 청빈, 무교의 상생 등이나, 동양철학의 중용, 전통 한국의 선비 사상, 플라톤의 소유 제한 등이 참고될 것입니다. 즉 모두가 탐욕을 악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점에서 물욕을 제한하여 공공선을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물욕으로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게 하는 ‘소유의 삶’보다, 스스로 존재 자체를 소중히 여겨 ‘존재의 삶’에서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게 돕는 정치경제 제도가 성립되어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가 만든 위험한 사회를 극복하고자 하여 등장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오히려 세상을 불안정하게 하거나, 테러, 자원고갈, 온난화, 환경오염 등으로 절망하는 가운데, 힘든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인류가 자본주의를 시작한 후 잦은 공항이나, 자원고갈, 풍요 속의 빈곤, 세계적 양극화, 온난화, 인간성 황폐화 등으로 이미 인류는 탈 자본주의를 위한 다양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잦은 공황에 대해서, “19C 전반만 하더라도 미국이 두 번(1819, 1837년), 영국은 네 번(1815, 1825, 1836, 1847년)의 경제위기를 겪었으며 19C 후반에는 미국은 다섯 번(1854, 1857, 1873, 1884, 1893년) 영국은 여섯 번(1857, 1866, 1873, 1882, 1890, 1900년)의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따라서 경기변동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외부적 요인에 의해서 설명하기보다는 자본주의 내부적 요인으로부터 찾아야 했다. 이와 같은 경제변동에 따른 경제적 불안정은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하는 자본주의의 약점으로 인식되었고 이를 시정하는 방법이 없다면 자본주의는 몰락하고 말 것이라는 견해를 나타나게 되었다.” (104) (김광현, 90p)

이처럼 자본주의로 인해 만들어지는 크고 작은 수많은 공황을 상기해볼 때, 시장기능에 의해 자동조절이 된다는 믿음은 설득력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자본주의사회에서 만들어지는 각박함은 빈곤층을 양산하게 됨에 따라 주기적으로 시장 자체가 형성될 수 없습니다.

하여 양극화현상으로 인하여, 시장의 자동조절기능은 무력하고, 비현실적임을 경험함에 따라 공평한 제3자로써 기능 국가가 시장기능의 정상화를 위한 역할이 필요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는 선진국은 성장과 분배의 균형이 중요함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어, 자본주의를 수정한 개입주의로 시장을 정상화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고용증대나 소득증대로 소비가 많아지게 하거나, 저소득층의 복지 소비를 위한 정부 보조금의 지급 등을 주도하여 경기를 조정한 사실입니다. 이는 초기자본주의에서 있었던 가혹한 착취로 형성되었던 반사회적인 정서가 만연하여 사회주의 사상이 등장하고, 이어서 공산당이 만들어지면서 자본주의가 퇴출이 될 위기에 있을 때, 복지사회의 구현을 위한 사회적 합의로 자본주의 원칙을 한발 양보한 소극적 복지국가가 성립되면서부터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인간의 탐욕과 부합되는 최대이윤을 본질로 함에 따라 시장을 정상화하기 위한 국책사업이나 사회간접자본투자 등에 편성한 정경유착으로 거대기업을 형성해서 양극화를 심화시켰습니다.

하여 비 복지적인 자본주의는 소극적 복지조차 제대로 구현할 수 없는 속성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는 상업주의에서 한 단계 더 발달한 자본주의는 양극화를 가속하여 사회적 약자를 양산함에 따라 복지사회의 구현이 불가능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여 수정자본주의 국가로서 행정(복지)국가는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다시금 자본주의 원칙으로 돌아온다는 뜻입니다. 이는 원초적 본능을 자극하는 자본주의로 인류는 혹독한 역사적 경험을 겪고 난 후, 자본주의가 수정되었음에도, 강력한 속성으로 인하여 오늘날 신자유주의가 등장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자본주의로 인하여 만들어진 양극화나, 환경오염과 파괴, 인간성 상실, 무한경쟁 등으로 인한 위험한 사회를 극복하지 못하고, 자본주의에 충실한 신자유주의가 등장한 것입니다. 물론 인간은 이성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자만과 자본주의 현상을 개선할 의지가 없는 태만의 결과일 것입니다.

하여 부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체제를 고수하는 한, 각종 테러와 환경재앙이 증대되면서 위험한 사회가 공고화됨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위험한 사회를 벗어나기 위해서 자본주의와 근본적으로 다른 분권적인 민주주의와 부합되는 모계적 분배양식의 보편적 가치가 되는 과도기 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참고로 전통 한국의 경우 조화로운 삶을 위해 개인이 99칸의 주택을 소유할 수 없게 한 소유 제한으로 양극화를 억제한 사회였습니다. 이는 동양의 민본주의에서 백성의 뜻은 하늘의 뜻임에 따라 백성을 노엽게 하는 수준의 양극화나, 분노를 일으키는 독재 등으로 백성이 힘들 때, 폭동이나, 자연 재앙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나눔에서 행복함을 느끼는 선함이 많은 존재임에 따라 선함을 배양하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었던 모계 신본주의 사회를 상기해본다면, 모계가 권력의 반을 갖는 모계 민주주의를 성립하여 적극적 복지사회로 역사 발전해야 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지구촌 시대를 맞이한 인류는 인류의 이상인 적극적 복지사회의 구현을 위해 민주주의를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한 완전한 민주주의로써 모계 민주주의 체제가 세계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자본주의를 더는 수정할 수 없음에 따라 모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 경제 제도로 근본적인 틀을 바꾸어야 적극적 복지사회를 구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자본주의에 반동하여 생성된 사회주의가 아직도 주류가 되지 못하고 있으며, 공산당이 퇴출이 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여 부계주의의 종말로부터 적극적 복지사회가 구현될 수 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포스트 자본주의를 위해 자본주의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중세 서구는 로마의 멸망으로 인하여 상업이 발달하면서 형성된 자유주의 사조는 14세기 르네상스(14세기~16세기)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유럽문화의 근간이 되는 기독교문화가 자유주의를 거부하였습니다.

이어서 16세기 초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영향으로 등장한 캘빈주의는 개인의 축재(蓄財)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결과임을 역설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하여 자유주의를 기독교가 승인함에 따라, 상업주의와 함께 본격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산업혁명으로 만들어진 초기자본주의는 국내에서도 가혹한 착취와 더불어 식민지에서 혹독한 수탈로 절대빈곤층을 확산케 하거나, 착취기술을 능력으로 평가하는 등 결코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조차 스스럼없이 하였습니다.

즉 식민지의 사람들에게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명분으로 하여 탄압을 하거나, 자본주의자들은 자신들만의 어떠한 기준이나 원칙에 의해 편리한 데로 해석하는 기고만장한 삶을 산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절대주의적인 토양에서 성립된 자본주의가 수천 년을 이은 피식민지의 고유한 문화를 일방적으로 무시함에 따라 이익을 취할 수 있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다른 지역의 금기를 깨트린 일이 당장에 증세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수십 년이나, 수백 년에 걸쳐 마치 방사능오염 피해가 대를 이어가는 것처럼, 회복하는 데는 오랜 기간이 소요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본주의가 짧은 기간 동안 탐욕의 배양으로 만들어진 증오심의 결과가 핵으로 나타난 사실 자체가 충격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가 위험하다는 사실은 변증법의 창시자인 포에르바하의 영향을 받은 헤겔의 변증법이 막스에게 이어지면서, 유물론적 변증법을 근간으로 하는 공산주의가 발현된 결과, 소련공산당이 성립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막스가 자본주의를 과격한 착취 수단으로 생각하여 사회민주주의(사회주의)로써는 근절할 수 없다고 생각함에 따라 상대적으로 과격성에 맞서는 한 단계 더 발전한 공산주의가 세상의 주류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 것이, 공산당으로 구체화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초기자본주의에서 가혹한 착취와 식민지 수탈로 자본을 축적하는 만큼, 비례하는 유사 폭력의 증가와 무기를 양산한 자본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폭력에 맞선 폭력으로 자본주의국가를 전복하여 프로레타리아 독재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즉 말로 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말이 통하지 않는 자본주의국가를 실력행사로 해체하겠다고 역설한 것입니다. 이는 최대이윤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본가는 식민지에 배타적인 기독교적 가치를 앞장세워 수탈과 착취를 하거나, 자본주의의 정당성을 허용한 기독교와 유착으로 인한 해악을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여 막스는 ‘종교는 마약이다.’라고까지 하였습니다.

또한 마르크스는 무한축적을 정당화하는 자본주의사회는 기업의 경쟁 결과 거대기업으로 발전함에 따라 중소기업의 자본가는 결국 노동자로 전락하게 된다고 예측하였던 것은 오늘날에 실증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막스의 ‘잉여가치론’에서, ‘일한 것보다 턱없이 적은 임금을 지급한 결과 만들어진 이윤 잉여금으로 자본이 축적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막스의 주장이 사회주의보다 공산주의의 극단적 과격성을 선호한 이유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1917년 소련공산당의 창당으로 공산당선언(1848년)이 구체화 됨에 따라 자본주의국가는 존립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여 수정자본주의로써 사회권을 명문화한 바이마르헌법(1919)에서 소극적 복지국가를 표방한 것은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세계 제1차 대전 중 무산층의 민중들에게도 민주주의 요건에 맞는 투표를 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주권재민의 민주국가가 본격화된 사실은 자유주의 진영을 위협할 만큼, 공산주의가 빠르게 확대된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3.5 인간 존엄을 위한 분배양식

20세기에 이르러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체제경쟁으로 인한 무기 개발 경쟁은 제2차 산업혁명인 중화학공업을 발달케 하였습니다. 이는 과학기술의 발달이라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개인화기의 첨단화로 테러가 많아진다는 점과 자본가에게는 비시장적인 정경유착으로 대자본을 형성하여 다국적 거대기업으로 만들어지면서 양극화를 세계화하는 원인이 된 사실 등은 부정적인 측면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힘의 경쟁은 대량의 살상 무기, 고성능 개인화기, 핵무기, 생화학무기 등을 개발하거나, 비시장적인 국가 수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거대기업의 등장으로 양극화가 가속화되면서 시장 질서가 무너지거나, 과소비로 인한 자원고갈, 환경오염, 파괴된 생태계의 복구불능 등의 결과는 절대다수의 사람이 피해를 받고 있습니다. 즉 인류의 공동자산을 동의도 없이 값싸게 마음대로 낭비하고 있습니다.

하여 실패한 자본주의를 벗어나기 위해 제3의 길로써 신자유주의가 새로운 대안으로써 등장하였으며, 이어서 공산주의는 퇴출이 되었지만, 오히려 양극화의 가속화나, 천재지변, 생태계 파괴 등은 증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로 인하여 인간 존엄이라는 근대정신이 제대로 발현되지 못한 결과 포스트모더니즘이 등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초기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가 반동적으로 생성된 것처럼, 반신자유주의적인 원한을 조직 원리로 하는 자포자기의 테러 세력이 배양되고 있음에 따라 근대사회를 넘어 새로운 가치가 생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여 이상으로써 이데올로기는 나름대로 삶에 의미를 심어주고 있지만, 서구의 이분법적인 사고에 의해 극단화된 이데올로기의 대립은 모순으로 인한 것으로 볼 수 있음에 따라 지구촌 시대정신과 부합되는 체제가 성립되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지구촌 시대에 맞는 이상으로써 세계민주주의 체제를 성립하지 않는다면, 만약에 테러 집단이 핵을 보유한 가운데 절대적 극한상황에 이르게 된다면, 마치 궁지에 몰린 쥐가 천적인 고양이를 물듯이, 같이 죽자고 한다면, 대안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자본주의가 제국주의를 만들었고, 주기적인 공항과 양극화, 환경오염 등을 유발하고, 재앙을 만드는 하책이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형이하학과 형이상학이 뒤바뀐 것처럼, 수단이 목적으로 변모하는, 가치 전도의 사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뿐만이 아니라 배금주의가 이해관계의 충돌을 극단화하고, 민주적 권위까지 부정케 하여 사회통합의 구심력을 무너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여 인간은 문화적 존재로서 이데올로기를 떠나서는 존재의 의미를 잃을 수 있음을 알고 있는 가운데, 스스로 이데올로기의 종말을 역설하는 것은 인간의 이상을 포기하는 것과 같은 위험한 것임에 따라 인류의 이상으로써 적극적 복지사회의 구현을 위한 새로운 체제가 만들어져야 할 시점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음양 철학에서 음양이 중간적인 제3의 충기(沖氣)의 장(場)에 의해 대립과 보완을 교차하며, 균형을 이루며 상호 교호 작용하여 조화를 이룬다고 역설한 것을 생각해 볼 때, 충기와 같은 의미인 이데올로기는 삶의 원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념의 궁극적인 목적이 조화에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모계 신본주의 사회에서 ‘해혹복본’의 신념을 위해 나눔의 실천으로 조화를 이루었던 것은 참고가 될 것입니다.

 

3.6 지구촌 시대에 적합한 체제

자본주의 초기에 식민지 확보 경쟁이나, 인종차별 등으로 유발된 천문학적 군비증강으로 인한 과중한 조세부담은 사회를 불안정하게 하였으며, 대다수 국민은 빈곤하여 소비할 수 없는 소비 부진으로 인한 잦은 공항을 겪었습니다. 즉 식민지에서 혹독하게 착취를 당한 식민지 사람들이 원한을 품으면서, 유발된 충돌을 제압하기 위해 가해자로서 열강들은 군사력을 증강했고, 서로 경쟁을 벌였던 것이 주요 원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시장원리를 적용받지 않는 방위산업과 같은 국가 수요를 선점하기 위해 정경유착을 한 기업은 대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던 반면, 방직이나 식품 등 경공업 중심의 기업은 시장에 의존하는 특성이 있는 기업은 공항이 있을 때마다 퇴출이 되었습니다. 하여 자본주의가 하책임에 따라 발달할수록 인간의 무한한 상상력과 능력을 경제에만 국한 시키며 민주주의를 위기에 몰아넣게 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음의 인용문을 예로 보자면, “1960년대 미국과 서유럽에서 나타난 신진, 지식인들의 움직임으로 신좌익이 있었다. 그것은 마르크스, 레닌주의와 새로운 과격사상이 혼합된 개념으로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자본주의 비판이론, 비스마르크주의자의 이론(갈브레이스, 허버트 마르쿠제), 모택동, 카스트로사상 그리고 무정부주의 등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 …

즉 현재 경제이론에 정통하고 마르크스의 용어를 회피하며,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실천 방법을 혐오한다. 또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부패 되었으며, 이것은 사회적 개혁의 수단으로는 구제될 수 없다. 따라서 근로자 계급과 기타 소외된 계급에 자본주의에서의 그들의 진실된 위치를 이해하도록 재교육시켜야 하며, 이 기능은 학생과 지식으로 구성된 새로운 혁명 정예가 담당하여야 한다.

그들이 비판하는 것은 정치 권력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나타난 불평등한 분배구조, 신제국주의 성향의 경제적 침략, 소외 및 비인격화 그리고 과도한 발전, 과도한 상업화 속에서의 생활의 질의 악화 등이 있다.” (105)(강광하, 26p)

이처럼 자본주의가 양극화를 가속화 할수록 상대적으로 반자본주의 세력이 저변을 이루면서 필요에 따라 조직화로 급속히 이루어질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여 자본주의가 만든 위험한 사회를 벗어나기를 바란다면, 모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적극적 복지사회의 구현을 위한 상책인 모민주의 체제로 근본적인 변화를 해야 할 시점이 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첨단 과학기술 시대를 사는 신인류는 ‘소유의 삶’을 넘어 ‘존재의 삶’(관계의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문명인에 걸맞은, 모계적 분배양식을 위한 정치경제 제도가 세계화되어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과학기술의 격차가 절대 치에 도달함에 따라 형성되는 양극화가 공고화된다면, 인류의 대다수를 이루는 절대빈곤층의 절망감은 무책임한 행동까지 자신을 합리화하는 등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미 사회병리 현상으로 불특정 다수에 대한 테러나, 전대미문의 잔혹한 범죄나, 각종 ‘뭇지마 범죄’ 등으로 나타나고 있음에 따라 예상할 수 있습니다.

하여 오늘날 고도 문명시대를 살아가는 인류가 마음만 먹는다면, 근본적인 변화를 할 수 있을 만큼 능력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음에 따라 적극적 복지사회의 구현을 위해 모계적 분배양식인 모민주의의 ‘소유상하한제’를 보편화하여 양극화를 극복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지속 가능한 사회

 

1. 탈 자본주의사회

1.1 상업주의에서 발현된 자본주의

유럽의 신분제 사회에서 상인의 지위는 낮았지만, 칭기스칸의 세계화로 동서양의 문물교류가 폭증하면서 대상인으로 변모하게 되어, 소위 자본가로서 영향력을 갖게 되었으며, 후일 자유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르네상스를 주도하면서 상업주의가 등장하게 되었고, 이어서 발전된 것이 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근대사회가 성립하게 된 배경에는 상업과 관련성이 많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유럽의 봉건영주들은 부와 명예와 권력의 상속으로 봉건귀족들은 전쟁과 같은 외부환경의 급격한 변화가 없는 한 절대적 위치였지만, 상업주의의 영향으로 인하여 귀족들은 대부호와 결탁하여 재산을 축적했고, 귀족의 재산을 차용하고, 재투자한 결과 거대상인이 되어 귀족의 토지를 소유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 대상인들은 사회적 지위를 획득할 수 있게 되면서, 신분제로써 봉건 체제는 무너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여 영원히 변치 않을 것만 같았던 절대 봉건의 신분제 사회가 서서히 변화하고 있는 가운데, 시민들은 자연법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근대사회를 성립할 수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즉 중산층으로, 지식인으로서 시민이 자연법사상을 더 많이 이해하고 토론함에 따라 세습을 하던 봉건귀족보다 상당한 실력을 갖춘 것입니다.

당시의 자본가들은 이미 자산을 운용하는 능력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으며, 현실 생활에서는 상업주의가 보편화되어 있었습니다. 하여 자본의 축적이 쉬워진 만큼,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는 이윤의 증대가 금력으로 실질적인 힘으로 작용하면서부터 봉건귀족의 권력이 약화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로마제국이 멸망한 후 오랫동안 기독교에 의해 정치 공백이 있는 가운데, 형성된 자유주의 사조가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발전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여 절대 봉건제 사회이면서도 종교적 입장에서 절대 유일신의 피조물로써 인간은 누구나 대등하다고 생각한 독특한 역사에서 자유주의가 발현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13세기 징기스칸의 세계화로 인하여 유럽이 암흑시대를 벗어날 수 있었으며, 징기스칸의 동서 문물교류와 상업 활성화 정책은 대상인의 정치적 영향력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게 한 결과 르네상스 시대를 열게 된 원인으로 작용했습니다.

그리고 산업혁명으로 인한 자본 수요의 증대는 토지 등의 고정자산을 자본으로 투자하게 됨에 따라 토지의 금융적 기능이 확대되었으며, 이는 금력과 권력이 분리되는 계기가 되면서 봉건귀족의 몰락을 가져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하일브루너가 자본주의 성격에 대해서 “자본도 재산이지만 자본의 가치는 물리적 특성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양의 자본을 창조하기 위해 자본을 사용하는 데 있다.”라고 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06)(하일브루너, 43p)

 

1.2 동양인이 본 자본주의

초기 자본주의사회에서 자본가는 사용자로서 노동자를 노예 이하로 대우하며 가혹하게 부릴 수 있었습니다. 물론 당시의 기독교는 자본가의 기부에 의존해야만 하는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가혹한 착취에 대해서 도덕적 비판이 강력하지 못했습니다. 하여 사회적 책임을 전제한 권력의 지배보다, 사회적 책임이 없는 금력에 의한 지배가 가혹하였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절대 봉건제의 성격을 이은 배금주의로 형성되는 권력의 획득을 위해 착취가 심하였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일 브루너 교수는 자본주의의 절대주의적인 성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항구적인 변화의 특징을 가진 사회일 뿐 아니라 고대의 군사적 위용과 개인적 위엄이 했던 것과 똑같은 무의식적 목적을 이제는 자본의 충족을 추구하는 사회로 보인다.” (107) (하일브루너, 45p)

이는 서구문화의 근간이 되는 기독교가 오랫동안 의식을 지배한 역사적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중앙집권의 로마제국이 멸망하기 전부터, 이미 절대 유일신 종교인 기독교가 교황체제로 권력이 유지되어 있었으며, 로마가 멸망한 후 봉건 도시국가로 분화된 유럽은 종교제국으로 있었지만, 13세기 칭기스칸의 세계화로 중세유럽의 암흑기(3세기~13세기)가 무너지고, 문물교류가 활발하게 전개되면서부터, 동양의 민본주의, 인문학, 과학기술과 지식, 문화 등은 서구지식인들을 자극하게 된 것입니다.

이는 인본주의(상대주의)로써 경험주의가 발달케 되었고, 기독교가 불확실하게 된 가운데, 상업주의가 발달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기독교의 절대 존재를 숭배하면서 성립한 절대 봉건제에서 돈을 숭배하는 배금주의(물신주의)로 변모한 것입니다.

하여 동양이 ‘존재의 삶’을 중시하여 자신을 연마하여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을 권장한 것과 서구가 ‘소유의 삶’을 중시하여 형성된 배금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동양의 경우, 인간은 천지 만물의 주체임에 따라 만물 상호 간에 조화를 중시했던 반면, 서구는 창조주의 피조물로써 인간을 자연의 부분으로, 객체적인 존재로 생각한 사실에서도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하여 동양은 불가지(不可知) 세계에 대해서 단정적이지 않으며, 주체로써 인간은 상호 간 유대를 위해 이성의 한계를 인정하는 조심성 있는 사회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동양은 오래전부터 인본주의 전통이 있으며 진리 탐구를 중시하는 사회였습니다.

물론 동양철학은 절대 존재의 의지에 의한 삶을 산다고 생각한 서구의 부계 신본주의에 비해 불확실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서구가 중세 암흑기를 벗어나면서 불확실한 사회가 되었던 것을 상기해본다면, 동양의 인본주의가 합리적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고대 동양에서는 극단적인 것을 불확실한 것으로 생각하면서 중용의 삶을 살았던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3 불확실성에 의해 만들어진 자본주의

중세유럽은 불확실성의 시대가 형성되면서 유발된 아노미 현상으로 혼란함에 따라 공리주의자인 홉스는 제3자로써 전체주의 국가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를 억제해야 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이는 유럽이 부계신본주의와 인본주의와 갈등을 겪었던 르네상스(문예부흥기) 시대를 상기한다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후 상업주의의 발달로 유발된 산업혁명을 뒷받침하기 위한 자본주의가 아담스미스에 의해 창안하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산업혁명이 사회체제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 가운데, 일어난 시민혁명이 성공함으로써, 성립된 근대사회가 자유경쟁(계약)을 위한 자본주의 체제를 만들었습니다. 즉 자본주의가 나폴레옹 민법전으로 명문화함으로써 공식화된 것입니다. 하여 자본주의가 무한축적을 위한 탐욕을 법과 제도로써 정당성을 획득함에 따라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사회에서 경쟁기업을 시장에서 퇴출케 하거나, 적대적 합병을 통해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는 등 약육강식의 적자생존 논리로 여타의 합법을 가장한 부도덕한 일련의 일들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자유기업에서 최대이윤을 위해 노동자를 경쟁시키고, 갈등을 조장하며, 조기퇴직을 유도하는 등으로 착취를 하는 것은 오늘날에도 원칙으로 적용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부에 대한 도덕성 시비가 끓이지 않고 있지만, 자본주의 자체가 부를 이루기 위한 체제임에 따라 한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하일브루너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한 명의 자본가는 늘 여러 명을 죽인다.’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순전한 팽창의 기운 외에 부분적으로 공격적이면서도 부분적으로 방어적인 전쟁의 기운이 싹튼다”라고 하였으며 (108) (하일브루너, 45p), 또한 “엄청난 재산이 있는 곳에는 어디에나 엄청난 불평등이 있다 … 풍요로운 부는 다수의 궁핍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것은 아담스미스의 말이다.” (109) (하일브루너, 39p)

이처럼 초기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외적으로는 가혹한 식민정책으로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수탈이 정당화되었고, 국내적으로는 고도로 착취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절대빈곤층의 양산, 인간에 대한 불신과 증오심, 절박감 등 불안정한 사회를 극복하려는 방편으로 외부에 핑계를 대고자 하거나, 이해관계의 충돌로 인한 갈등과 적개심 고취 등의 복합적 원인이 전쟁으로 나타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여 돈을 숭배하는 배금주의에 기초한 자본주의가 적대적 정서를 만들고 있음을 다음 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벼랑 끝에 몰린 자유기업가(자본가)들은 산업재해를 만들고, 산재를 당한 가정은 해체되었으며, 이어서 해체된 가정의 모성들은 자식들의 생계를 위한 매춘으로 인격 파멸에 이르렀던 사실을 베벨의 글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877년 뮌헨에서는 경찰의 장부에 등록되어 감독을 받는 매춘부들 중 노동자나 수공업자의 아내가 최소한 203명은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밖에 얼마나 많은 기혼여성이 경제적 궁핍 때문에 수치심과 인간의 존엄성을 깊이 손상당한 채 경찰의 감시를 피해가면서 몸을 팔고 있었다.”

이처럼 초기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모품으로 전락하게 된 사회적 약자는 기업이나 정부나 어디에도 기댈 수 없는 처지가 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자유주의가 자유경쟁을 방해하는 국가개입주의 거부하는 무정부 수준의 야경국가를 추구함에 따라 자본가가 노동자를 노예처럼 대우할지라도, 자유계약이라는 미명하에 국가는 방관하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노동자는 조세나 병역 등을 위한 의무만 있었습니다. 따라서 국가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자유주의가 노동자의 경우 오히려 자본가로부터 억압을 당할지라도, 정부는 개입할 수 없음에 따라 오히려 대다수 사람이 상당한 곤경에 처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1.4 소극적 복지국가를 넘어

구시대 신분제 사회에서 상인은 비교적 낮은 신분이었지만, 시민혁명의 자금을 지원한 중소자본가는 시민혁명의 성공으로 주류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여 사람들은 근대사회의 성립으로 자본주의가 공고화됨에 따라 권력보다 사회적 책임이 없는 부를 축적하여 자본가가 되고자 열망했습니다.

왜냐하면 갖가지 비열한 방법으로 도덕적 비난을 받을지라도 부를 이루려 한 것은 자본주의사회에서 금력이 현실적인 힘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무자비한 착취로 인한 빈곤과 과잉 경쟁과 이해관계의 충돌 등으로 인한 민중들의 고단함으로 인한 저항이 상당함에 따라 사회권(노동 삼권)을 인정한, 바이마르헌법이 복지국가를 천명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이마르헌법에서 복지국가를 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소극적 복지국가를 시행한 것은, 공산주의가 소련을 중심으로 국제사회에서 확산이 된 가운데 제2차 세계대전 후 구체화 되었습니다. 그리고 70년대 후반 공산주의가 약화 될 무렵부터 선진국을 중심으로 한, 비 복지적인 자본주의의 본질에 충실하겠다는 신자유주의가 등장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유에 대해 고 철기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첫째, 국제교역의 자유화 흐름 속에서 이들 선진국의 기업들 역시 국제경쟁의 높은 파도를 헤쳐나가야 하는 상황을 맞고 있어 생산시설의 자동화 및 해외이전, 중간재의 해외구매, 감량경영, 해외직접투자 등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둘째,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 이후 개인의 이기심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 경제이념이 마치 절대적으로 우수한 사상인 것처럼 인식되면서 기업들은 국내 고용의 확대나 건전한 투자 등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경시하는 반면에 이윤극대화의 목표는 그 어느 때보다 강조하고 있다.” (111) (고 철기, 22p)

이처럼 자본주의를 강화하는 신자유주의로 인하여 인류는 ‘경제적 동물’의 삶으로 단순해지는 가운데, 거대규모의 거래와 더불어 무한축적을 위한 무한경쟁은 전쟁의 수준으로 과격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자본주의 속성인 상극의 삶은 전체가 불안케 되는 위험한 사회를 만들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야만성은 역사발전과 함께 퇴화가 되어야 함에도, 자본주의로 인하여 유발되는 사회병리 현상이나, 인간성 황폐화 유발 등의 결과를 볼 때, 오히려 야만성이 배양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는 오늘날 세계인구 70억이 부에 의한 서열화와 아울러 세계적인 절대적 양극화로 인한 결과인, 9.11테러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여 비복지적인 자유방임주의가 사회법을 수용한 국가자본주의로 발전하였다면, 지구촌 시대에 필요한 적극적 복지사회로 역사 발전해야 함에도, 탈 복지국가를 원칙으로 하는 세계자본주의로써 신자유주의가 등장한 것은 역리임에 따라 위험한 사회를 벗어나기 어려운 사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자본주의로 인하여 유발되는 극단적인 현상들은 위험한 사회를 공고화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탈 자본주의적 정치경제 제도가 성립되어야 적극적 복지사회가 가능하게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지구촌 시대에 이르러 첨단 과학기술로 인하여 형성된 양극화로 고실업이 만연하고, 과소비, 환경오염, 투기자본의 글로벌, 개인 첨단무기 발달 등으로 볼 때, 분권적인 민주주의에 걸 멎는 새로운 분배양식을 준비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2. 존재의 삶을 넘어 관계의 삶을

2.1 소극적 복지사회를 넘어

서구적 가치에 대해서 인류의 위대한 유산인 근대사회의 성립과 과학기술문명을 이루어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은 긍정적이지만, 반면에 ‘소유의 삶’으로 인한 상극의 삶을 살게 된 결과인 제국주의로 피해를 본 피식민지는 해방 후에도 혼란과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한 점에서 부정적입니다.

즉 양극화나 환경문제 등으로 형성된 위험한 사회의 원인 제공자로 그야말로 ‘병주고 약주는’ 상태가 되게끔 한 서구적 가치에 대해서 애증(愛憎)이 교차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여 서구의 자본주의를 핑계로 하여 보상이 없는 사과나, 반성이 없는 합리화로 양극화를 정당화하거나, 공해로 인한 산성비, 지구온난화로 인한 생태계 파괴로 식량 감소 등으로 원망하는 마음을 갖게 하거나, 위험한 사회가 형성된 것 등에 대해서 선진국은 묶은 자가 풀어야 한다는 의미인 결자해지(結者解之)의 태도로 문제해결에 앞장서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선진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를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 공고화함에 따라 이를 거부하는 세계 여러 지역에서 테러와 전쟁을 벌이는 새로운 위기가 유발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인간의 본질인 내면세계를 비경제적인 것으로 생각하여 무관심하며, 물욕을 배양함에 따라 때를 놓치는 경향이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즉 대량소비로 인한 천연자원의 고갈과 환경오염, 대자연 훼손의 복원 등을 위해 첨단 과학기술로 극복하고자 하는 만큼, 천문학적 비용으로 인플레를 유발하고 있음에 따라 경황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지난날 식민지배를 받은 국가의 경우, 서구의 기독교가 전 세계를 상대로 한 이단의 논리와 명분으로 수탈을 합리화한 배타적 종교로 인식함에 따라 오랫동안 기독교와 대립했던 이슬람교가 세계 제3의 주요 종교가 되었으며, 반자본주의적 사회가 되었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제삼세계 국가는 선진국 중심의 신자유주의를 신제국주의로 생각하며, 내심으로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이 되느냐’고 저의를 의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반서구적 정서가 이슬람적인 세계동포주의와 제삼세계의 조직 원리가 되어 세계화함에 따라 세계 각 지역에서 테러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물론 테러는 제삼세계와 더불어 어떠한 지역에서도 언제나 가능하며, 상당한 파괴력을 전 세계의 매체로 전달됨에 따라 이로 인한 불안심리가 매우 크게 작용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즉 첨단 개인 무기와 반자본주의 명분과 함께 서구인들에 대한 증오심을 조직 원리로 한 테러는 신념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공포를 더 많이 느끼는 것입니다. 이는 끝없는 테러의 공포가 전 세계에 걸쳐 천문학적 사회적 비용을 유발하는 원인이 되고 있으며, 이로 인한 조세부담과 양극화로 인한 복지 수요증대 등은 고비용 저효율의 사회가 되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자본주의사회는 갈등이 증폭할수록 비시장적인 군수산업의 확대나, 빈곤층의 양산이나, 경기부양책 등의 정책적 수요로 인한 지출이 비시장적인 부문에 진입한 자본가에게는 정경유착을 통해 오히려 자본을 획기적으로 축적했습니다. 물론 자본주의사회에서 자유기업은 최대이윤이 목적임에 따라 자본축적과정에서 유발되는 분쟁조차 이윤추구 수단으로 활용한 행위를 두고, 도덕적 비판을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가 정치, 종교, 내면세계 등 형이상학적인 부문까지 최대이윤을 추구하는 자유기업의 자본축적을 위해 사용될 수 있음을 정당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비인간적인 결정조차 면죄부를 받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음을 볼 때, 민주주의의 위기가 자본주의에 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자본주의는 자유경쟁이 궁극적으로 사회발전에 견인하는 점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풍요 속의 빈곤’이라는 양극화를 공고화함에 따라 유발되는 빈곤층의 확대와 인간성 황폐화, 자원고갈, 환경파괴 등으로 볼 때, 오히려 위험한 사회를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자본주의는 자유경쟁으로 만들어지는 사회적 자산을 몇몇 자본가에게 집중케 함에 따라 유발되는 시장기능의 마비가 주기적으로 반복되고, 있음을 상기해볼 때, 인류에게 위기를 만드는 경제 제도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공황이 유발될 경우, 국가의 신용창조와 조세 등에 의한 경기부양책으로 시장기능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대자본가는 더 많은 부를 축적하고, 양극화를 가속화 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여 구시대 신분제에 의한 권력 양극화와 유사한 자본주의사회의 양극화를 벗어나기 위해 민주주의의 탈 양극화 본질에 충실한 모민주의의 ‘소유상하한제’를 근간으로 하는 적극적 복지사회로 진보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가 무한축적을 허용함에 따라 만들어진 위험한 사회를 극복하기 위해서 모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소유상하한제’의 성립을 위한 ‘모민주의’ 체제의 세계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모민주의’의 ‘소유상하한제’는 자유경쟁으로 획득한 개인의 소유가 어떠한 기준에 의해 남게 될 경우, 국가나 자치단체로 이전하여 인류의 적극적 복지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재원이나, 인류의 연구과제나 숙원사업 등에 사용되는 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적극적 복지사회의 구현을 위한 생활 정치는 지역별 위원회가 분배에 참여할 것입니다.

 

2.2 존재를 넘어 관계의 삶을 살았던 모계사회

절대주의를 근간으로 했던 구시대가 퇴출이 되고, 상대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근대사회가 성립되었음에도, 무한한 축적을 정당화하는 자본주의로 인하여 인권선언은 선언적 의미로 머물러 있었습니다. 즉 자본주의는 제국주의를 만들었고, 수많은 전쟁을 유발케 했으며, 냉전체제가 무너진 후 오히려 오늘날 대다수 사람은 빵을 얻기 위해 자유를 팔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철학적 상대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근대사회가 성립되었음에도, 구시대의 절대주의 유습은 배금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로 나타났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구시대 절대 유일신을 숭배한 것이 돈을 숭배하는 배금주의로 대체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 스스로 유일신의 피조물로써 인정함에 따라 정치의 주체가 유일신이 된 것처럼,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인간 스스로 돈을 숭배하여 돈의 노예가 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여 분권을 근간으로 하는 근대 민주주의 사회와 절대적 양극화를 만들어가는 자본주의는 배치됨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문화적 존재로서 인간은 과당경쟁으로 삶을 극단화하는 논리나, 제도보다, 오히려 완만한 삶으로 ‘존재의 삶’을 넘어 만물과 화합하는 ‘관계의 삶’을 살 수 있는 체제를 만들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인류의 이상인 적극적 복지사회를 구현할 수 있는 모계민주주의 체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참고로 태고의 유습을 이은 모계 신본주의 사회가 인간은 신의 후손으로 순환 진보한다고 믿은 것은 영감을 통해 알게 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여 모계 신본주의 사회가 대우주 시스템에 의해 영혼과 육화를 반복하며 순환 진보한다고 믿음에 따라 ‘관계의 삶’을 추구한 사실을 믿는다면 손해는 없으며, 얻는 것은 무한할 것입니다.

물론 인간이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첨단 과학기술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라는, 믿음은 긍정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오늘날까지도 인간의 독특한 육감에 대해 과학자들도 근거가 없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실제로 인간의 뇌에 있다는 사실을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 소재 워싱턴大의 죠슈아 브라운은 어떤 상황을 처리하는 전두대피질(Anterior Cingulate Cortex: ACC)로 알려진 뇌 부분에 이런 육감이 존재하여 위험에 대해 경보를 울린다고 설명했다. ACC는 대뇌 전두엽의 위쪽 부근에 위치하고 있으며, 좌뇌 반구와 우뇌 반구를 가르는 벽을 따라 존재하는 부분으로 정신분열증과 강박 신경장애 등 심각한 정신질환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과학잡지 ‘사이언스’에서, 2005년 2월 18일자, 워싱턴 연합)

하여 문화적 존재로서 인간이 스스로 궁극적인 삶의 목표를 ‘해혹복본’으로 설정한 모계 신본주의 사회를 긍정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부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 문제점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으며, 지구촌 시대에 부합되는 속성으로 인해, 유발되는 끝없는 갈등의 악순환을 단절하기 위해서 모계적 분배양식을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 정착하기 위한 부계와 모계가 균형을 이루는 정치경제 제도가 성립되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2.3 영적 존재로서 인간의 삶

인간은 생명의 경이로움에 감동하고, 무한한 상상력과 의문을 풀기 위한 탐구심으로 삶을 재창조하며 살아가는 영적 존재임을 긍정할 수 있습니다. 즉 모든 생명체가 독립적, 개체적임에 따라 영원히 살고자 하며, 굴복을 싫어하지만, 인간의 경우 스스로 창조한 문화(가치)에 복종하며, 주체로써 동식물을 비롯한 자연을 대상으로 하거나, 풍부한 상상력과 도구를 사용하여 재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점에서 신의 후손임을 긍정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내면세계는 굴복되지 않으며, 스스로 만든 전통에 복종하는 문화적 존재라는 점에서 모계 신본주의 사회가 믿었던 대모신 마고의 후손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은 창조적이며, 나눔으로 행복해한다거나, 종교적 심성을 갖고 있다는 점 등을 상기해본다면, 영적 존재임을 긍정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유일하게 문화를 가진 인간은 자신이 소속한 곳을 위해, 인류 역사발전을 위해, 때로는 가족을 위한 것, 등 이타적인 이유로 생명을 버렸던 살신성인의 정신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여 인간은 아무런 이유 없이 인간 상호 간에 지배받는 것을 본능적으로 싫어하지만, 사회협동이 필요한 정당한 이유가 있을 때, 스스로 복종한다는 사실에서 문화적 존재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전체주의 사회가 이기적인 목적에 의해 구성원을 강제하는 경우, 스스로 복종했다고 하기는 무리가 있겠지만, 공동체 존립의 정당성인 정체성이나, 오랜 전통으로 이루어진 문화적 풍토에 의해 적응해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사회는 돈이 인격이라는 등식을 설정한 배금주의가 순리임에 따라 만약 이를 거부하는 개인이 있다면 외로운 무인도에서 로빈슨 크루소처럼, 격리되어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절대 봉건제 사회가 퇴출이 된 후, 근대사회의 성립으로 자본주의가 공고화됨에 따라 형성된 배금주의는 인간이 지켜야 할 보편적 가치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서구의 독특한 역사적 배경에서 만들어진 자본주의가 태고부터 염원한 인간의 이상으로써 적극적 복지사회를 구현할 수 없음을 신자유주의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산업혁명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만들게 되었고, 이로 인한 생활양식의 변화는 근대사회를 성립하게 하였으며, 이후 학문과 과학기술 등은 획기적인 발전을 한 것은 자본주의의 긍정적인 측면이지만, 탐욕의 배양으로 주체할 수 없는 욕구 충돌이 대량살상무기를 만들게 되었으며, 양극화, 환경오염, 지구온난화, 생태계 파괴 등으로 인해 불행한 인생을 살게 된 세상의 절대다수의 빈곤층으로부터 원성을 사고 있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초기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성립된 국가자본주의(복지국가)는 관료제를 비대케 했으며, 중앙집권의 강화로 의회정치가 위기를 맞거나, 절대적 양극화현상 등으로 인하여 여전히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고달픈 삶을 살고 있습니다.

즉 자유주의가 물질의 풍요로 행복한 인생을 살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마치 여러 사람이 먹는 일정한 양의 샘물을 펌프질하거나 독점한다면 샘물이 고갈되어 여러 사람이 곤경에 처하는 것처럼, 인간의 탐욕을 정당화한 자본주의는 결과적으로 수많은 사람이 빈곤하게 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이는 자본주의의 결과로 만들어진 배금주의가 의식을 지배하면서 위험한 사회가 만들어진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여 지구촌 시대를 사는 문명인 신인류는 한정된 자원으로 무한한 물욕을 채울 수 없다는 사실과 함께 평화가 행복한 삶을 살게 한다는 점을 알고 있음에 따라 ‘존재의 삶’과 아울러 ‘관계의 삶‘을 살 수 있는 새로운 체제가 성립되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2.4 지구촌 시대가 요구하는 삶

자본주의사회는 비인격적인 금력이 사회적 책임을 부담하지 않으면서 권력을 만드는 실질적인 힘이 있음에 따라 책임을 전제한 권력보다, 무책임한 금력을 선호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이는 일반의사에 의해서 형성되는 권력이나 인격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관계의 충돌로 비롯된 제국주의로 인한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빈번한 공황 등에서 자본주의사회 특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자본주의자가 중산층 중심의 다이야몬드형 사회구조로 발전한다고 예측한 것과 달리, 오늘날 현실은 절대적 양극화가 공고화되어 절대 봉건사회처럼 첨탑의 피라밋형으로 빠르게 변모한 사실에서도 자본주의가 비민주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무한축적을 정당화하여 탐욕을 배양하는 자본주의는 근본적으로 다이야몬드형 사회를 만들 수 없습니다.

이는 다른 어떠한 것이 혼합될 여지가 없는 강력한 원초적 본능을 자극하는 자본주의는 오늘날 비민주적인 1대 99라는 절대적 양극화로 위험한 사회가 형성된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소유의 삶’을 위한 체제로써 자본주의는 돈이 어른 노릇을 하는 경박한 사회가 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여 수만 년 동안 진보한 인간의 위대함을 파괴하는 위험한 자본주의는 막을 내리고, 모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적극적 복지사회가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 자리 잡아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첨단 과학기술을 이루었으며, 우주를 해석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임을 생각해 볼 때, 완만한 성장으로 여유를 갖고, 내면세계를 탐구하기 위해 ‘관계의 삶’이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중세 유럽은 규모가 작은 지역경제 수준이었지만, 항해술의 발달로 교역과 식민개척이 확대됨과 아울러 신기술에 의한 발명품은 공급자 중심의 경제로 발전하여 대량생산이 필요함에 따라 일어난 제1차 산업혁명으로 인하여 만들어진 자유방임주의로써 아담스미스 자본주의는 소상공인으로 제한했습니다.

하지만 농노들에게 임금노동자가 된다는 새로운 희망과 자본가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과 더불어 신분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영지 탈출을 위한) 돈벌이에 올인(all in) 함에 따라 아담스미스의 작은 자본주의는 의미를 잃고, 대규모 법인으로 이루어진 대 자본주의가 되었습니다.

이는 산업화로 인한 인구의 도시집중은 노동의 공급초과로 입에 풀칠하는 정도의 저임금으로 노예보다 힘든 생활을 한 사실에서 아담스미스의 뜻인 소 자본주의와 다른 사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당시의 조악한 방직기는 여성이나 청소년들의 노동력이 필요하였으며, 기계를 보조하는 소모품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물론 여성을 노예 수준의 저임금 노동자로 착취를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은, 오랫동안 여성 소외의 서구문화 영향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중세 암흑시대를 이어 17~18세기에 이르기까지 초야권이 있었던 사실에서 남녀가 10대 1의 극단적 차별이 이었던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서구는 부계 유일신이 지배하는 절대주의 사회로써 오랫동안 절대 존재의 피조물인 인간을 출산하는 모성을 수단으로 경시한 결과입니다.

하여 모계적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절대주의 사회에서 형성된 자본주의가 돈으로 돈을 버는 것이나, 무한축적을 정당화하는 등으로 유발된 위험한 사회를 멈추기 위해 자본주의 분배양식을 보편적 가치로 한다면 곤란함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자본주의가 경제 규모를 증대케 한 만큼, 경제가 삶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됨에 따라 인간이 ‘경제적 동물’로 살 수는 있지만, 영적 존재로서 인간에게는 가능한 ‘존재의 삶’을 근간으로 이루어지는 ‘관계의 삶’을 사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물론 철학적 상대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에 부합되는 모성의 구심력과 부성의 원심력이 균형을 이루는 모계민주주의 분배양식으로 진보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세상의 반인 여성문제는 시효가 없는 인류의 문제로써 모계적 분배양식을 구현하는 체제의 성립은 보상의 의미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상생의 삶

3.1 긴장을 유발하는 상극의 삶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무한한 자본축적이나, 최대이윤이라는 자유기업의 궁극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경쟁한 결과, 양극화나, 인간성 황폐화, 환경오염 등으로 위험한 사회가 되었음에도, 자본주의가 인간의 이기심을 동기유발로 함에 따라 책임을 묻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절대주의적 풍토에 의해서 만들어진 자본주의는 ‘소유의 삶’을 우선하여 삶을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초기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들은 자본축적을 위해 노동자를 생산도구나 소모품처럼, 대우하거나, 혹독하게 착취하는 등 기고만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합법적이었던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국가 불개입을 원칙으로 하는 자본주의는 합법을 가장한 야만을 정당화한 제도였습니다. 하지만 주기적 공황으로 시장기능이 마비되면서 수많은 자유기업이 도산함에 따라 개입주의가 자유기업에 유리함을 알게 되면서부터 자본주의를 수정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아담스미스의 주장대로 개인 기업이나 소 법인으로 제한한 기업 등으로 경쟁을 한다면, 정부개입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즉 아담스미스의 경고를 무시한 대기업의 등장은 주기적으로 시장기능이 마비된 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정부의 개입을 수용해야만 했습니다. 따라서 대기업의 등장으로 국민이 부담하게 됨과 동시에 초국가적인 다국적기업의 시장진입은 세계평화에 악영향을 끼치는 원인이 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신자유주의처럼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국제 분업화가 빠르게 형성됨과 동시에 어느 한 지역의 보호주의로 인하여 문제가 발생한다면, 전체에 상당한 파급이 있음에 따라 긴장 관계가 조성된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이해관계의 충돌로 인한 개인화기의 발달과 마치 채권자가 채권을 회수하기 위한 협박처럼, 실력행사를 위한 수단으로써 군수산업이 발달한 경우에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초국가적인 거대기업 간의 무한경쟁으로 인한 중소기업의 감소로 고실업 사회가 됨에 따라 위험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탐욕을 정당화하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자유기업은 정경유착에만 관심이 있을 뿐, 정치나 세계평화 등에 대해서 무관심함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자본주의사회는 어른이 없는 사회로써, 마치 유아처럼 사회에 대해 무책임하고, 공익을 위한 정치 권력이 약화 되면서 사회통합을 이루기 어려운 사회인 것입니다. 이는 자본주의는 정치를 무력하게 만들었음에도, 위기에 처했을 때는 정치적 결정으로 수습이 되고 있음을 생각해 볼 때, 이익을 위해 편리한 데로 해석하는 상업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본주의의 자동조율기능이란 비현실적이라는 사실이 이미 증명되었습니다.

하여 상업적 속성을 본질로 하는 초기자본주의가 동일 문화권에서 사는 내국인에게도 자유계약이라는 명분으로 노예보다 더한 저임금이나 고리대금 등 착취의 정당화를 되풀이하는 신자유주의는 영적 존재임을 인식하게 된 신인류와 불합치함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초기자본주의의 무책임한 유아적 태도가 당시 유럽의 소규모 경제에서 적합했지만, 지구촌 시대의 천문학적 규모에서는 자본주의가 부적합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정보화시대를 맞아 시장 자동조율을 위한 ‘소유상하한제’가 실현 가능함에 따라 신인류에게 적합한 새로운 분배양식이 세계화되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3.2 ‘소유상하한제의 보편화

민주주의의 공고화와 첨단 과학기술 시대를 이룬 자체가 모계 신본주의 사회가 인간 스스로 대모신의 후손으로 믿었던 사실을 긍정할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이 삼라만상의 주체로써 무한한 상상력과 창조력이 있는 영적 존재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여 자본주의도 인류의 이상인 적극적 복지사회의 구현을 방해한다면 신인류에 의해 퇴출이 될 것으로 예상할 수 있습니다.

이는 유럽의 경우 절대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적 가치에 의해 성립된 절대 봉건제가 영원히 존립할 줄 알았지만, 징기스칸의 세계화인 동서 문물교류로 불확실성이 만연하면서 형성된 르네상스는 상업주의를 만들었고, 이어서 자본주의가 태동한 후, 시민혁명으로 근대사회가 성립되었고, 이어서 20세기 초에 소극적 복지국가를 성립한 후 오늘날 지구촌 시대에 이르러 적극적 복지사회로 진보하기 위해 ‘모계적 분배양식’이 세계화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구시대를 퇴출한 자본주의가 소극적 복지국가를 구현할 수 있지만, 지구촌 시대가 요구하는 적극적 복지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모계적 분배양식을 위한 새로운 체제가 성립되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인류는 제3차 산업혁명인 지식정보산업으로 인프라가 구축되면서 모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적극적 복지사회로 진보가 가능해졌습니다.

아울러 유럽이 불확실성의 시대를 겪으면서 형성된 가치 혼란의 와중에 자본주의가 태동하면서 유발된 시민혁명으로 자연법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근대사회가 성립되었고, 20세기 초에 복지국가가 성립된 후 오늘날의 인류는 훌륭하게 되어 자연법사상의 확장이라 할 수 있는 적극적 복지사회를 구현할 수 있는 생활 정치로 역사발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구시대의 농노는 대를 이어서도 갚을 수 없는 채무를 빌미로 영원히 노예로 만들고자 했던 것처럼, 초기자본주의에서도 절대주의 영향으로 무기한 채권확보를 위한 연대 보증제로 식민지 통치나 내국의 빈곤층을 노예화하였지만, 수정자본주의가 성립된 후부터 최근까지 선진국을 중심으로 연대 보증제를 자연법사상과 배치된다고 생각함에 따라 채무를 직계존비속에게 상속하게 하는 것을 제한하거나, 보증 액수나 기간을 제한하거나, 폐지하는 등의 탈자본주의적인 경향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식민통치 수단으로써나, 노예화를 위한 연좌제가 개인주의와 배치된다고 하여 퇴출이 된 것처럼, 인간의 기본권인 생존권에 배치되는 채권자의 지나친 권리확장이라 할 수 있는 연대 보증제가 퇴출이 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채권자가 이익을 바라고 빌려주는 만큼,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즉 연좌제와 더불어 연대 보증제는 인간을 노예화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만들어졌던 구시대의 유습으로, 인간 존엄을 구현하기 위해 성립한 근대사회가 20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유지되고 있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알고, 최근에 연좌제는 퇴출이 된 것입니다.

이는 자본주의사회에서 개인의 사익을 위해서 성립된 계약임에도 불구하고, 채권 보전을 위한 방편으로 무한책임을 연대 보증인에게 전가한다는 것은 전체주의의 연좌제와 같음에 따라 근대정신과 배치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선진국의 경우 채무자가 실직하였거나, 사고, 재난 등의 이유로 채무변제를 할 능력이 없는 경우, 탕감하거나 소멸이 되며, 사회협동으로 이루어진 개인의 역량이나 지식 등은 사회적 자산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다시금 사회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거나, 취업을 통해 어느 정도 소득이 있을 때 수년에 걸쳐 채무변제를 한다거나, 사회적 약자를 위한 장학 우선이나 취업을 하여 빚을 갚을 수 있도록 하는 제도 등을 실시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완전고용을 전제한 복지국가의 기능의 일환이라기보다, 개인의 도덕적 책무를 고양하는 상생의 사회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하여 지구촌 시대는 인류가 상생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관용의 정신을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가 공고화될 수 있는 모계적 가치를 근간으로 하는 체제가 성립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짧은 인생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가혹하리만큼 채권 우선의 사회는 비인간적으로 악용할 소지가 다분함에 따라 이를 완화하여 인간의 기본권으로써 행복추구권을 구현하기 위한 모계적 가치를 근간으로 하는 ‘소유상하한제’가 성립되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3.3 인간의 선한 면을 배양

선한 면이 더 많은 인간은 성선설적인 인간으로 육성되기 위한, 상생의 삶을 위한 정치경제 제도를 만드는 삶이 인간의 도리를 다한 인간다운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과잉경쟁을 부추기면서, 유발되는 복잡성의 증대와 끝없는 권리충돌로 인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법률제정의 폭발적 증대로 인하여 인간은 악한 존재로 오해받고 있습니다.

이는 자본주의 속성상 양보의 미덕은 약자의 변명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자본주의는 지정의(知情意)의 전인교육을 주변부로 전락하도록 하는, 기능훈련과 같은 지식교육이나 돈벌이만 관심을 가지게 하는 체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배금주의가 인문학을 퇴조케 하여 지덕체(智德體)의 불균형으로 인한 인간성 황폐화와 함께 정서가 메말라 냉소적 인간으로 변모케 하였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과잉경쟁은 교육과 학문을 구별할 수 없을 만큼 청소년들에게 교육 낭비적인 잡동사니를 집어넣음에 따라 삶의 의미를 부여했던 인문학은 퇴조하였으며, 이로 인해 막연히 세상을 두려워하는 경향으로 인해 유발된 공격적인 인성으로 변모해가는 현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신자유주의가 무한경쟁을 원칙으로 함에 따라 체감하는 적자생존(適者生存)의 절박함으로 인하여 인간 상호 간에 적대 의식이 깊어졌습니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가 만든 상극의 삶은 양극화로 나타났으며, 이로 인해 유발된 각종 범죄로 사회적 비용의 증가와 복지 수요의 증대 등은 재정의 부담을 가중케 하여 고비용 저효율사회가 되면서 구성원상호간에 원망이나 적대감이 형성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몇 사람은 거대한 부를 이룰지 모르지만, 과당경쟁으로 인한 사회 전체의 막대한 손실과 자원고갈이나, 환경오염 등을 생각해 볼 때, 천문학적 손해임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이룬 것처럼, 역사 발전한 것으로 착각을 하는 것을 경계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동료로서 도덕성에 기초한 연대감으로 상호 간 인권을 존중해서 최소한 물적 기초를 상호 간 보장하는 ‘상생의 삶’을 살게끔 하는 것이 역사발전이기 때문입니다. 하여 탐욕은 99마리 양을 가진 사람이 한 마리의 양을 채우기 위해서 탐욕을 부린다는 격언으로 주위 사람을 곤경에 빠트리게 된다는 사실을 고발하고 있지만, 탐욕을 정당화하는 자본주의가 인간성 황폐화, 지구온난화 등을 만들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를 고집한다면, 작은 것을 탐하다가 큰 것을 잃는다는 ‘소탐대실’(小貪大失)하게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여 지구촌 시대는 ‘상생의 삶’을 위해 ‘소유상하한제’가 세계화한 가운데, 자유경쟁을 해야만 시장이 자동조율이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인간은 문화적 존재로서 스스로 선행을 쌓도록 제도를 만들어가는 슬기로운 존재임에 따라 모민주의의 ‘소유상하한제’가 보편화될 것입니다.

4. 지속 가능한 삶

4.1 위험한 사회를 만드는 자본주의

강력한 욕구를 뒷받침하는 자본주의에 맞서 균형을 이루고자 했던 공산당의 몰락과 아울러 사회민주주의(사회주의)의 쇠퇴로 신자유주의가 등장하게 됨에 따라 선진국의 초국가적인 거대기업은 자본주의 틀 속에서 교섭 능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는 후진국의 경우 사회통합에 어려움을 겪는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즉 공산당의 퇴출로 냉전체제가 무너지면서 신자유주의가 공고화됨에 따라 개입주의를 허용한 국가자본주의(행정국가)의 보호주의도 의미를 잃게 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비복지적인 자유방임주의가 식민지나, 후진국에게 자유무역을 원칙으로 강제했던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선진국은 냉전체제의 퇴출로 약소국과 무역 거래를 하는 데 있어서 정치적 배려가 필요 없게 되었고, 노조와 타협한 복지지출의 증대나, 노동시장의 경직성이나, 범죄증가로 인한 치안과 국방비 등의 사회적 비용의 증가를 비롯해, 개도국의 자국의 산업 보호를 위한 높은 관세와 시장개방을 억제하는 노조와 자국의 산업공동화 현상 등으로 인하여 만든 신자유주의가 중진국이나 후진국을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무정부적 불 개입주의, 세계 분업화, 자유무역, 무한경쟁, 복지축소 등 자본주의(자유기업주의) 속성에 충실히 하고자 하는 등 선진국 중심의 신자유주의 원칙을 후진국의 경우 지키기 어려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국가자본주의의 보호주의를 파기하는 의미인 신자유주의 원칙은 선진국의 초국가적인 거대기업이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신자유주의는 선진국이 상당한 과학기술의 발달로 경쟁력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빈곤계층이 양산되는 양극화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진 선진국 중심의 이념으로써 실제로 선진국 자신이든, 후진국이든, 별로 덕이 없음을 최근에 알게 되었습니다.

이는 오늘날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 경제가 오랫동안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하여 신자유주의는 자유기업이 최대이윤을 획득하기 위한 안전한 곳으로 자본을 투자할 수 있게 함으로써 인류에게 실익(덕)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본주의로 인하여 만들어진 제국주의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각 지역의 전통이나 생활양식과 상관없이,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존재처럼, 오직 경제적 이익만 챙기고, 환경오염을 유발하고 떠난다면, 오랫동안 적응하며 살아남아야 하는 지역민들은 곤경에 처하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초기자본주의 시대 자본가들에 의해 민중들은 착취를 당하였고, 식민지에서 가혹한 착취나 수탈로 유발된 분쟁에 파병됨에 따라 나쁜 민족으로 기억되는 등의 피해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보상은커녕 복지조차 스스로 책임졌던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식민지역의 정체성 파괴와 환경파괴 등이 오랫동안 상처로 남아 지역민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하여 선진국의 대다수 국민은 초기자본주의에서 상당한 고통을 받았으며, 더불어 수탈과 착취기술이 발달한 민족이라는 불명예와 역사적 책임까지 뒤집어쓰고 있는 가운데, 양극화로 고통까지 받게 됨에 따라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는가?’하고 불신하면서, 사회주의가 등장하게 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선진국이 부강한 만큼, 양극화의 심화와 인간성 황폐화, 유대감의 상실, 환경오염, 자원고갈 등 위험한 사회가 됨에 따라, 유럽이 근대사회의 성립이라는 위대한 유산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색안경을 끼고 서구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즉 자본주의의 속성에 충실하여 위험한 사회가 된 것을 두고, 선진자본주의국가의 책임으로 성토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식민지로 피해당한 지역은 악을 기억하며 반 서구적입니다. 이는 자본주의에서 살아가는 인류는 시간이 갈수록 인류가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가운데, 피 식민지역의 경우 상황이 나빠지고 있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자본주의는 수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양극화의 심화로 복지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결국 복지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면, 새로운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체제가 성립되어야 함에도, 오히려 자본주의 속성에 충실히 하고자 하는 신자유주의가 등장하였기 때문입니다. 즉 대자본이 형성되는 만큼, 양극화가 가속화 할수록, 국민은 국가의 부채가 되어 자율성을 잃게 된 상황을 세계시장 확대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영국이 1980년대에 초기자본주의와 같이 세율 인하를 단행하여 조세가 감소 되었으며, 반면에 공공지출은 확대됨으로써 정부부채가 증가가 된 결과 정부투자로 경기부양을 할 수 없음을 알고, 제3의 길을 선택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통계를 보자면, “정부의 재적 적자를 보면 선진국들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는 OECD의 총 공공부채(정부가 갖고 있는 자산을 감안하지 않는 빚)가 1974년에는 GNP 대비 35%에 불과했으나 1980년에는 42% 1994년에는 71%로 상승하였다. 특히 벨기에와 이탈리아의 경우 1995년 현재 각각 275%와 120%를 달하였다.” (112) (고철기, 41p)

이는 금융정책으로 경기부양을 시도한 결과, 오히려 인플레이션이 유발됨에 따라 정부가 국제금융시장에서 높은 금리로 자본을 조달하면서 국가부채가 증가케 된 결과, 초국가적 거대기업의 투자자들에 의해 국가정책이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던 이유로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의 1997년 소위 IMF라는 국가부도는 국제투기자금의 유입과 공공재산이나 대기업지분을 헐값에 매각함으로써, 실로 엄청난 손실을 국민이 부담했으며, 국제자본이 경영권 지배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속성을 두고, 죽어서 부패한 고기를 폭식하는 맹수인 하이에나와 비교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자본주의가 세계화할수록 국제투기자본에 의해 투기장이 되거나, 경영간섭을 통해 정책에 영향을 끼치는 등으로 이윤만을 챙김에 따라 정부가 무력하게 되면서 사회 통합자체가 힘들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자본주의에서 살아남으려면 배금주의에 적응해야 하고, 부를 축적하는 과정에서 도덕적 비판을 받는 행위를 할지라도, 합법적이면 문제가 없다는 법치주의로 정당화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공고화 활 수록 자연법사상은 표류하고, 유명무실하게 되면서 인간성 상실로 이어지게 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지역사회의 전통적인 유대관계를 단절케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본주의 발 양극화의 폐해를 조율할 수 없는 반쪽민주주의임에 따라 민주적 권위조차 무시당하는 가운데, 사회통합의 주체가 되지 못하게 되면서, 스포츠나, 집단오락 등이 사회통합의 방편이 되고 있습니다.

즉 신자유주의 시대가 추구하는 세계 분업화에 의한 무한경쟁으로 기업의 이윤감소로 한계기업이 퇴출하거나, 각 나라의 중소기업이 대기업에 합병되는 등으로 유발되는 높은 실업률로 인한 고비용 저효율의 구조가 공고화됨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의 절차적 정의로써 민주정치는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대기업에 중소기업이 흡수되거나, 퇴출 등으로 인한 기업의 감소로 고실업 사회가 됨에 따라 복지비 등 폭발적으로 증대하는 감당하기 위해 사회적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각 지역은 다국적기업을 경쟁적으로 유치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서부터, 민주정치가 위기를 맞게 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자유무역으로 인한 자본의 급속한 이동은 환율을 방어하기에 급급하였으며, 높은 실업률은 인구의 도시집중이 가속화 하여 도시와 농촌 간의 불균형한 발전과 더불어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불균형으로 분열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여 신자유주의는 여러 나라의 기업 간의 자유로운 무한경쟁을 위해 정부개입을 원칙적으로 거부함에 따라 개입주의로 빈곤을 극복하고자 했던 후진국은 곤경에 처하게 되었고, 중진국은 샌드위치처럼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4.2 민주주의의 위기

지구촌 시대를 맞이한 오늘날 국제 분업과 규모의 이익을 구현하기 위한 대기업의 해외투자가 상당한 성과를 이루고 있습니다. 반면에 내수시장에 기반을 두고 있는 중소기업은 몰락하고 있습니다. 즉 초국가적인 거대 기업 간의 시장쟁탈전 등으로 인하여, 마치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속담처럼, 경쟁력이 없는 중소기업은 퇴출이 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거대자본의 지배로 시장기능이 왜곡됨에 따라 고실업 상태가 공고화하면서 경기침체와 동시에 양극화가 형성되어 위험한 사회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선진국은 냉전 시대를 벗어나게 되면서 실리를 추구하는 쪽으로 선회할 수 있게 됨에 따라 개도국에는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고, 후진국에 대한 원조를 줄여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신자유주의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즉 냉전 종식으로 자본주의와 균형을 이루었던 공산주의가 퇴출이 되면서 공고화된 신자유주의는 국제 분업을 통해 경제문제를 해결코자 함에 따라 냉전체제로 인한 보호주의(개입주의)는 더는 의미가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여 대기업의 시장 확대와 더불어 원자재 조달이나, 우수한 노동력 확보나, 생산비 절감을 위한 공장설비의 입지확충 등으로 각국이 상호의존도가 심화가 되는 현상과 더불어 기업 감소로 인한 고실업 사회가 공고화되었음에도, 당분간 신자유주의를 수용할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국제정치의 중심역할을 했던 미국조차도 자본주의 주변 나라에도 상호주의원칙에 의해 경제적으로 대등한 관계를 요구한다는 사실로부터, 세계경찰 국가로서 초강대국인 미국 스스로 지도력을 포기하면서까지 신자유주의를 공고화하고 있다는 사실로 볼 때, 얼마나 절박한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상위체계인 정치를 목적이라고 본다면, 하위체계인 경제는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써 의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가 목적이 되고 정치가 수단이 된 것입니다. 이는 자본주의가 가치 전도현상을 유발함에 따라 민주정치가 위기에 맞이하거나, 위험한 사회가 만들어지는 원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여 정치가 경제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변모했던 공산주의가 퇴출이 된 것처럼, 오래지 않아 자본주의 역시 퇴출이 될 것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정치와 경제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할 수 있음에 따라 분리될 수 있는 성질은 아니지만, 정치는 인간의 이상을 구현하는 유일한 수단이며 목적임에 따라 민주정치가 공고화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하여 인류의 이상인 민주주의를 공고화하기 위해 사회적 합의로 어느 정도 소유를 제한할 수 있는 새로운 체제가 성립되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복지주의를 내재한 민주적 분배양식으로써 경제민주화가 인류의 보편적 가치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없는 문화적 존재라는 사실과 아울러 정치와 경제가 인간적인 박애주의를 원칙으로 하여 해석하며 균형을 이루게 하는 ‘모민주의’ 정치경제 제도가 적합할 것입니다.

이는 개인으로서 인간은 유한하지만, 전체로써 인류는 행복한 인생을 위해, 인간답게 살기 위해, 무한하게 역사발전을 하고 있음을 상기해 볼 때, 지구촌 시대를 사는 신인류에게 인간의 연대 의식을 훼손하는 자본주의 분배양식보다, 인간적인 연대감을 중시하는 모민주의 분배양식이 합리적이기 때문입니다.

즉 무한축적을 허용하는 자유주의 분배양식과 복지주의를 내재한 민주주의와 상반됨에도 불구하고, 결합한 자본주의는 지구촌 시대에 이르러 요구되는 민주주의의 공고화와 어울리지 않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소유의 삶’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역할은 지구촌 시대의 개막과 함께 끝을 내고, 다음 단계인 ‘존재의 삶’ ‘관계의 삶’을 위한 경제민주화로 민주주의를 완성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자본주의 시대가 되면서부터 잦은 분쟁과 제국주의를 비롯해 짧은 기간 동안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과 전대미문의 천문학적 재산피해와 인명 살상 등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처참했던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포스트모더니즘이 발현되었습니다.

하여 배금주의로 인하여 무력해진 민주주의 정치를 냉소적으로 보며, 민주적 권위까지 무시하며 심지어 정치 무용론까지 등장한 사실을 상기해 볼 때, 모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모민주의사회가 성립되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4.3 무한경쟁에 내몰린 불행한 인생

오늘날은 정보통신과 이동 수단의 발달로 세계시장 확대와 아울러 자유로운 여행은 내국처럼 되었지만, 현실은 경제적으로 유익한 전문가나 과학기술자만 선진국으로 이동할 수 있음에 따라 국가 간 양극화가 공고화되고 있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원칙을 각 나라에 권고함에 따라 기업에 대한 정부 지원의 축소로 경쟁력을 잃은 수많은 중소기업이 도산으로 이어지면서 고실업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상황에서 역할을 할 수 없게 된 기능 국가의 관료제를 부정하기에 이르렀으며, 국정을 책임지는 정치지도자의 민주적 권위까지 특정 관료나 일부 국민이 무시하는 경우가 빈번함에 따라 마치 어른이 없는 사회처럼 되었습니다.

즉 ‘경제적 동물’로 갈게끔 하는 신자유주의 영향으로 민주정치는 무력해짐에 따라 사회통합은커녕 불신으로 분열이 만성화되면서 민주적 권위까지 권위주의로 부정하는 냉소적인 사회로 변모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중소경제 규모였던 과거에는 환경문제를 국내에서 해결할 수 있었으나, 오늘날 지구촌 시대에서 대량소비와 전쟁수준의 과당경쟁으로 자원고갈, 온난화, 산성비, 핵(방사능) 공해, 환경오염 등으로 인한 생태계 파괴를 복원하는 데는 오랜 기간과 엄청난 경비가 소요됨에 따라 국제공조가 필요한 복잡한 정치적 해결이 요구되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체제에서 민주정치는 무력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신자유주의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첨단자동화시설에 의한 최고의 품질, 최대의 생산성, 품질에 비해 저렴한 가격 등과 더불어 무정부와 같은 수준의 간섭배제나, 조세 부담축소 등을 요구할 만큼, 절박한 현실에서 중소기업의 감소로 인한 고실업을 해결할 수 없었으며, 반민주적인 양극화를 해결할 수 없는 정치를 불신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를 선진국이 설정함에 따라 첨단 과학기술과 더불어 거대한 자본과 경험을 축적하고 같은 문화권에서 자유주의적 법치주의가 확립된 선진국은 유리한, 반면에 전통문화와 반자유주의적인 생존 양식을 가진 자본주의 후발국의 경우 불리함에 따라 보호주의를 고수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문제는 규모가 작았던 초기자본주의의 공급경제로 인해 형성된 제국주의에서 대다수 사람에게 가혹한 삶을 살게 했던 것보다, 신자유주의의 대규모 공급경제로 인한 세계적 양극화로 유발되는 각종 테러로 불안정한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뿐만이 아니라 오늘날 천문학적 거래 규모는 양극화를 가속화 하며, 과소비로 인한 환경오염이나, 지구온난화나, 가공할 무기체계, 고실업, 핵발전의 불안정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음에 따라 위험한 사회에서 적합함을 알 수 있습니다.

하여 오늘날 지구촌 시대에 이르러 의식을 지배하는 각 지역의 정체성과 문화권이 다름으로 유발되는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탈 배금주의로써 존재의 삶을 중시하는 체제가 세계화되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까지 이어온 각 지역의 정체성이 다르며 동일 문화권의 관습이 정서로, 일반의사로 되어 있음을 존중하여 상호 간에 한발씩 양보하는 모민주의의 ‘소유상하한제’가 지구촌 시대에 적합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소유의 삶’을 중시하는 자본주의가 개인 무기의 첨단화와 동시에 양극화로 인한 테러 유발이 쉬워진 위험한 사회를 극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인류의 이상인 적극적 복지사회로 ‘존재의 삶’을 살게끔 역사 발전해야 합니다. 물론 인간의 이기심을 극대화하는 자본주의를 넘어 모계적 분배양식으로 역사 발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자본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는 무수히 많으며 정리되어 있음에 따라 제3차 산업혁명으로 만들어진 정보화시대를 맞이한 신인류가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인간의 사회성이 무디어져서 정당한 민주적 권위도 무시당한다는 사실을 고철기의 글에서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보수적 자본주의의 영향이 확산되면서 1990년대는 특이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선후진국 대부분이 국가경영마저 기업경영의 차원에서 이끌어 가려는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정부가 정부조직 및 정부산하조직의 관리에 있어서 공익성 차원을 점차 경시하는 반면에 수익성은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일부 국가에서는 공무원을 대기업에 파견하여 민간 경영방식을 익히게 하는 일까지 벌이고 있다. 이러한 풍토에서는 기업인의 이윤극대화 사고방식이 공익 우선의 정서가 지배되어야 할 국가 의사결정 철학까지 스며들어 공무원이나 정치인들의 정책결정 내용이 대기업에게 유리하게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신보수적 자본주의의 이념의 파급으로 대기업이나 자본가들의 착취의 대상이 소비자나 근로자의 수준을 뛰어넘어 이제는 공익의 마지막 보루라고 할 수 있는 공무원의 의식 속으로까지 파고들어 국가전체를 착취의 대상으로 하게 되었다.” (113) (고철기, 58-59p)

하여 오늘날 신자유주의가 어떠한 특성을 내재하고 있는지를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자본주의가 국가권력에 의한 억압을 오랫동안 받은 결과로 만들어진 사실에서 속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고대사회의 강대국의 경우 약소국을 수탈하여 무력하게 하거나, 강대국으로서 전승국은 여성 약탈, 재산압수, 노예노동의 확보 등으로 유가족의 복지비와 전쟁 비용을 상계하는 등으로 피폐한 계층이 권력의 억압에서 해방코자 자유주의를 꿈꾸었던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근대사회가 성립된 후 자본주의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전체주의인 파시즘, 나치즘 등이 등장하였습니다. 하여 신자유주의가 복지를 명분으로 한 개입주의를 원칙적으로 거부하며, 자유무역을 방해하는 보호주의를 퇴출하고, 세계 분업화를 통해서 최대이윤을 획득하고자 하는 것은 서구문화에서 기인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4.4 경제적 동물이 될 수 없는 인간

구시대 정치 권력에서 분리된 자본주의사회의 금력은 무책임하고, 무소불위의 힘을 갖게 되어 이를 획득하기 위한 치열한 자본축적 경쟁의 결과로 신자유주의가 등장하였습니다. 물론 신자유주의가 1대 99라는 세계적 양극화를 형성함에 따라 신자유주의를 패권주의(覇h權主義)로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가 내면세계가 없는 차가운 로봇처럼, 이익집단의 부품으로써 삶을 살아가는 영혼이 없는 단지 머리 좋은 ‘경제적 동물’로 살아가게끔 강제하고 있음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즉 초기 자유방임주의와 달리 오늘날 초국가적 거대기업들이 만들어지고, 복잡성의 증대와 함께 전문화된 무수한 집단이 경쟁하는 까닭에 조직 속의 개인으로 살아야 하는 구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비복지적인 신자유주의에서 만들어지는 고실업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은 스스로 복지를 위해 이익집단에 소속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게 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신자유주의 세상을 천명한 미국이 다자간 협상보다 쌍방협정을 추진한다는 사실과 더불어 거대기업집단에 의해서 정책이 결정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서구는 전통적 가치나, 자본주의를 거부하는 사회주의 등에 의해서 상당한 진통이 있었던 반면, 자본주의에 충실하여 실리를 추구한 미국과 차이가 있습니다. 즉 유럽의 경우 국가 위신을 지키고, 각종 이익을 취하면서도 식민지 개척과 착취를 개인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이중적이었던 반면, 자본주의를 신념으로 성립한 미국은 개척정신과 실용주의로 자본가를 육성한 나라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미국은 전대미문의 초강대국으로 자본가가 세상을 움직이는 신자유주의를 펼칠 수 있는 국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를 악으로 간주하며 보여준 911테러와 함께 2008년 하반기에 이르러 금융위기로 전 세계가 곤경에 처하게 되어 오늘날까지 회복하지 못함에 따라 미국발 신자유주의를 불신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즉 지구촌 시대는 자본주의 분배양식이 절대적 양극화를 빠르게 가속화 하면서 위험한 사회를 만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여 지구촌 시대에 세계시민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각 나라의 독특한 문화를 존중하기 위한 새로운 모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상호 간에 신뢰할 수 있는 모민주의 ‘소유상하한제’가 세계화되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선진국 중심의 신자유주의가 세상을 절대적 양극화로 공고화하여 대다수 인류가 빈곤층으로 전락 된다면, 제국주의시대의 전면전보다 더 큰 동시다발적인 국지적 저항인 테러로 인류는 파국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물질의 풍요를 통한 인간해방을 구현하겠다는 자유주의가 민주주의와 결합하여 성립한 자본주의가 ‘소유의 삶’으로 집착하게 하여 인류의 이상인 적극적 복지사회의 구현이라는 역사발전을 멈추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새로운 모계적 분배양식으로써 경제민주화를 이루는 모민주의가 세계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자본주의는 민주주의를 위기로 몰고 있으며, 양극화를 유발하여 자연법사상을 무색하게 한다는 점에서 근대정신(모더니즘)과 배치되고 있습니다. 특히 자본주의가 인간의 상품화를 가속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 존엄을 훼손하는 체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튼 자본주의가 다윈의 진화론, 라마르크의 용불용설, 적자생존론(適者生存論) 등과 함께 발전하면서, 제국주의까지 만들면서 인류에게 가혹한 삶을 살게 했다는 점에서 극단적 속성이 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혹독한 착취를 합리화하기 위해 인간을 탐욕의 존재라는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을 머리 좋은 동물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에게만 있는 영적감응장치에 의한 창조력을 갖고, 삶을 스스로 재창조하는 문화적 존재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애써 외면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영적 존재로서 인간이 주체이면서도 객체인 자연에 지배를 받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여 인간은 동물도 신도 아닌 중간적 존재로서 제한적인 자연의 섭리와 부합도 되어야 하며, 영적 존재로서 창조력이 있음을 고려해 볼 때, 영적 존재로서 육화된 인간의 행복한 인생을 위해 모계적 분배양식이 적합함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탐욕을 제한하지 않는 부자연한 자본주의는 지구촌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분배문화가 형성되면 소멸이 될 것임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한 단계 더 발전한 신자유주의보다, 탈 자본주의로써 모민주의 체제에 의한 적극적 복지사회가 세계화되는 것이, 합리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을 단지 머리 좋은 경제적 동물로 만들어가는 자본주의는 지구촌 시대의 개막과 함께 역할을 다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을 상품화하고, 배금주의가 만든 제국주의 등으로 인생의 쓴맛을 보게 한 자본주의는 지구촌 시대를 연 것으로, 소임을 다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여 오늘날 첨단 과학기술 시대를 만든 인간을 대모신의 후손으로 믿는다면, 연대성을 훼손하는 제도보다, 인간의 선한 면을 배양하는 제도를 확립해야 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구촌 시대를 사는 신인류에게 영적 존재로서 ‘관계의 삶’과 사람으로서 ‘소유의 삶’이 균형을 이루는 ‘모민주의’ 분배양식이 적합함을 알 수 있습니다.

. 신인류 분배양식

 

1. 지구촌 사회의 분배양식

 

1. 부계적 분배양식의 퇴출

인간은 행복한 인생을 위해 스스로 창조한 문화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궁금해하며, 사물을 탐구하면서, 선한 존재가 되기 위해 진보를 하고 있습니다. 이는 동물이 약육강식의 단순한 축생의 삶을 살아가는 반면, 인간은 선악시비분별(善惡是非分別)을 하는 복잡한 인생을 살고 있다는 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인간은 근본적으로 선한 존재이기 때문에 현실 세계에서 겪는 양심과 욕망의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지역 환경에 맞게 생존 양식(문화. 가치)을 설정한 사실로부터 지혜로운 존재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계 신본주의 사회가 인간을 신의 후손으로 선한 본성을 수련하기 위해 순환·진보한다고 믿었으며, 악은 일시적이며 선을 위한 악으로 생각하거나, 영혼에서 육화(肉化)되어 현실의 어려움을 통해 인간의 선한 본성을 나눔으로 배양하고 연마하여 인간의 본향으로 되돌아간다고 믿은 사실을 상기해볼 때, 스스로 행복한 인생을 만들어가는 문화적 존재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여 앞의 사실에 대해서 사실 여부를 떠나 인간이 이룩한 정신문화와 물질문명을 생각해볼 때, 인간은 선한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간은 근본적으로 선한 존재임을 인류가 근대사회를 성립한 것이나, 소극적 복지국가를 구현했으며, 이어서 인류의 이상인 적극적 복지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언제나 노력하고 있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여 인간이 문화로 삶을 재창조하며 이룩한 지구촌 사회를 만든 자신들의 노고를 생각한다면, 모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적극적 복지사회로 스스로 보상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물론 ‘소유의 삶’을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지구온난화나 생태계 파괴, 절대적 양극화 등 부정적인 여러 가지 징후들이 나타남에 따라 ‘존재의 삶’을 살아야 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하여 지혜로운 인간이 지식을 축적한 결과, 인류가 역사발전하고 있음을 생각해 볼 때, 자본주의가 인류를 위태롭게 한다면 마땅히 퇴출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연계는 제한된 약육강식의 먹이사슬 구조로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반면에 자연계에 속해 있으면서도 주체로써, 먹이사슬의 최고 위치에 있는 인간은 우수한 두뇌로 삶을 재창조하는 문화를 갖고 있으며, 우수한 육체를 갖고 행복한 삶을 위해 도구를 사용하며 각자 맞는 역할에 따라 사회협동으로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남는 생산물을 비축할 수 있음에 따라 인간은 자연계의 먹이사슬과 다른 인간 상호 간의 과당경쟁으로 불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는 부계사회가 등장하고부터 신분제로 극단적인 양극화를 정당화한 것이나, 근대사회가 성립된 오늘날 1대 99라는 절대적 양극화를 유발한 자본주의 분배양식에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자본주의가 만든 극단적인 불균형으로써 절대적 양극화로 인간 상호 간이나, 다른 생명체와 공존이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 과소비로 인한 부작용을 제거하기 위한 소비자운동이나 자연 친화적인 삶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만들어진 녹색 생명 운동이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각종 사회단체의 활동 등으로 자연계와 균형을 이루려 하는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은 창조력이 있음에 따라, 빵을 위해 살아가는 하이에나 (맹수가 먹다 남은 것과 부패한 동물까지 먹는 맹수)와 같은 미물처럼, ‘소유의 삶’을 살고자 한다면, 공멸하게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여 인간의 경우 ‘소유의 삶’을 위해 무엇을 이용하던, 어떠한 계략이던, 합법을 가장한 야만이나 부도덕한 짓을 하더라도 결과만 좋다면 된다고 하는 사고방식을 형성하는 자본주의제도는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절대적 양극화를 만들어 인간을 곤경에 빠트리게 하는 자본주의는 인간 상호 간에 대립과 반목으로 성악설적 인간형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물론 인류가 양극화를 공고화하는 부자연스러운 제도에서 살아간 구시대나, 근대자본주의사회에서 이전투구로 혹독한 대가를 치른 역사적 경험을 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적합한 새로운 모계적 분배양식을 위한 정치체제가 성립되어야 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1.1 문화적 존재로서 인간

사유제를 근간으로 하는 부계사회가 발전을 거듭한 끝에 생성한 자본주의가 인간의 유한한 인생에 비해 지나친 경쟁으로 소모적인 삶을 살아가게 함에 따라 왜 사는가? 라는 회의에 빠지는 경향이 많아졌습니다. 이는 자본주의가 행복한 삶을 살게 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자본주의가 등장한 지 불과 얼마 되지 않는 짧은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험악한 역사적 경험과 오늘날에는 위험한 사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자본주의가 욕구를 배양함에 따라 인간이 상품화되고, 소외된 결과입니다. 다시 말해서 물신주의(배금주의) 사회가 되어 인간이 생산을 위한 소모품이나, 수단이 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구시대의 억압에 반동하여 성립한 자본주의가 인간의 이기심(개인성)을 강조한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정부패한 구체제에서 착취를 당한 대다수 민중이 평균적으로 빈곤했던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인권선언에 기초한 근대사회가 성립되었음에도, 초기 자본주의사회는 착취로 인하여 대다수 민중은 빈곤했습니다. 이는 지나친 착취로 원성을 쌓게 된 결과, 근대정신인 복지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국가개입주의로써, 계획 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사회주의가 등장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자본주의가 근본적으로 인간의 이기심을 자극하고, 배양하는 사회로 발전되는 것을 정당화하였기 때문입니다. 즉 자본주의 생활양식이 이기심을 선 순위로 동정심은 후 순위로 설정함에 따라 무한축적 경쟁으로 인한 빈곤층의 양산이나 환경오염으로 인한 다수에게 피해를 입힐지라도 도덕적 책임을 망각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경우 이기심과 동정심의 균형이나, 개인성과 사회성 등이 균형을 이루어야 함에도, 자본주의는 개인성을 선 순위로 함에 따라 사회적(정치적) 동물이라는 인간의 특질을 왜곡시켜 인간의 연대성이 무너지게 되는 체제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슘페터가 자본주의의 파멸을 예상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 답은 경제학에 있지 않고 사회학에 있다. 즉 분석에 있지 않고 통찰에 있는 것이다. 슘페터는 자본주의의 문화가 가치를 부식시키는 성질을 갖고 있다고 본다.”라고 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14) (하일브루너, 121p)

다시 말해서 태생적으로 종교적 심성이 있는 인간이 영적 존재임을 부정하는 체제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서구적 가치인 자본주의는 인간은 피조물로써 마치 산업기계의 부품처럼, 단순한 소모적인 존재로 전락하게 한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이 삶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스스로 상품화되면서, 상품을 만드는 수단으로써 객체가 되어 소외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계사회가 하드웨어적인 유한한 것에 머물러 일회적인 소모적인 존재로 생각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여 모계 신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인 내가 신의 후손으로 순환·진보하는 재생의 삶을 사는 영적 존재라고 생각한 것과 근본적으로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회시스템에 의해 형성된 문화와 소프트웨어적인 정신과 하드웨어적인 몸이라는 3가지 요소로 구성된 인간은 스스로 재창조하고 규율하는 문화적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인간은 스스로 재창조한 문화로 행복한 삶을 살게 하는 탁월한 능력이 있음을 생각해 볼 때, 문화적 존재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1.2 과잉경쟁으로 지친 인류

물질의 풍요를 통해 행복한 인생을 구현코자 했던 자유주의의 의도와 달리, 구시대 신분제 사회의 계급투쟁처럼,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절대적 양극화를 구축하기 위한 과잉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오늘날 신자유주의 이념을 근간으로 하는 레이거노믹스의 ‘공급자 경제’처럼, 첨단 과학기술에 의한 생산성과 우수한 품질이나 가격 등에 의한 우월적 경쟁력으로 인한 소비 확대를 1대 99라는 양극화가 빠르게 공고화되고 있습니다.

이는 자본주의사회는 마치 멈추면 넘어지는 두발자전거가 끝없이 달려가야 하는 것처럼, 소비해야만 유지되는 체제이기 때문입니다. 하여 소비를 위한 유혹과 홍보 경쟁으로 인해 유발되는 만성적인 욕구불만을 배양함에 따라 누구나 ‘풍요 속의 빈곤’이라는 현상으로, 물신주의가 만연하게 되었고, 절대적 양극화로 대다수 사람은 빈곤층으로 전락하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무한한 상상력이 있는 내면세계와 달리 유한한 현실(외면) 세계에서 무한한 축적이 불가능함에도, 무한축적이 가능한 것처럼, 허용한 자본주의가 위험한 사회를 만들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자본주의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선의의 피해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짧은 인생살이를 하는 사람이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미지의 긴 여정을 준비할 자기성찰의 여유도 없는 가운데, 불행은 끝없이 발생하고 함정도 많아지는 등으로 인하여짐, 인간에게 꼭 필요한 여유를 갖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원형사회로써 내면세계를 탐구하는 기술이 발달한 모계 신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을 신의 후손으로 영원히 불멸하는 나로 믿은 사실은 인간에게 결코 손해가 아니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소유의 ’삶을 살기 위해 성립한 자본주의사회에서 클래식은 우수한 음악임에도 불구하고, 시장원리에만 내버려 둔다면 사장되기 때문에 장기적인 국가균형발전을 위한 전략으로써, 큰 비용이 소요되는 클래식에 투자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기업은 최대이윤을 위해, 시장의 원리에 의해 수요가 많고 돈벌이가 되는 재즈, 유행가 등에 투자가 집중됨에 따라 메말라가는 정서를 보완하기 위해 비시장적인 필수 불가결의 공공재로써 클래식을 정부가 투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지구의 물질적 요소가 근본적으로 부족함에 따라 무의식중에 부를 축적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고 앞에서 언급한 것을 상기해볼 때, 주체로써 인간은 부족한 물질을 정신문화로 채워야 하는 상황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조선 중기 거상 임상옥의 일대기를 그린 최인호의 소설 ‘상도’(商道)에서 아무리 부어도 칠부 안에 머무르는 술잔으로 소개한바 있는, 전통 한국의 계영배(戒盈盃)는 7부 이하만 채울 수 있는 컵으로써, 컵에 가득 채우는 것을 금기로 한 사실을 교훈 삼아 욕망을 항상 자제한 결과 위기를 모면하고, 조선 중기 최고의 대상이 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전통 한국의 삶의 지혜를 알려주고 있는 술잔 내지는 찻잔으로써 계영배(戒盈杯)는 내부에 구멍이 나 있어 술을 아무리 채우려 해도 70% 이상 채울 수 없는 전통 한국의 성배(聖杯)였던 것입니다. 하여 현실 세계에서 3분의 2 정도가 한계이며, 이성의 한계로 알 수 없는 세계를 위해 3분의 1은 남겨둘 것을 권고하는 선조들의 상징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박애 정신을 내재하고 있는 중용의 실천적, 구체적인 기준을 계영배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할 것입니다. 즉 인간의 물욕은 무한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원천적으로 30% 정도 부족함에 따라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과당경쟁을 하여 자타가 곤경에 처하게 되는 것보다 무릇 사람은 30% 정도 부족한 것을 당연히 받아드려, 타인이나 다른 생명체와 공존해야 하는 주체로써 사회적 책임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최근에 영국의 천체물리학자인 호킹박사가 우주가 만들어질 때부터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질이 30%가량 부족하다고 하며, 우주는 7차원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가설을 제시한 것과 한민족의 계영배철학과 부합하고 있다는 것은 흥미롭기까지 합니다. 이는 모계 신본주의 사회가 인간이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물질과 정신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 공유제로 순환 진보를 원만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이유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계영배의 의미를 실천한 거상 임상옥은 사농공상의 가치체계의 상인이었음에도, 후일 고위 관료가 되었던 사실에서, 전통 한국의 반상 제가 개인의 사회공헌도에 따라 결정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계영배는 나눔의 법칙을 무언으로 가르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약점인 탐욕을 스스로 경계하는 상징물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스스로 자신을 닦아 타인에게 본을 보인다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삶과 일치함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타인에게 관용적이지만 자신에게 엄격한 삶을 사는 것을, 인간의 도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여 동양은 사농공상의 질서에서 살아감에 따라 상업주의에서 진보한 자본주의를 낮은 단계의 경박한 사상으로 생각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동양의 경우 인간의 사회성과 개인성이 균형을 이루는 사회를 좋은 사회로 생각했음을 중용을 중시한 사실로부터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조화를 중시한 동양은 자본주의가 극단적임에 따라 사람을 경박하게 만들고, 불안정한 사회가 형성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더불어 인간의 강력한 본능으로써 이기심을 구태여 자본주의로 물욕을 배양하는 제도까지 만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물론 인간의 끝없는 지적 욕구로 인류는 인문학적인 성과를 이룰 수 있었고, 질적인 변화를 가져온 사실을 상기한다면, 구태여 탐욕을 배양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동양의 생활 태도는 사리사욕으로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경계하는 사자성어로서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라는 ‘과유불급’(過猶不及)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동양은 서구자본주의를 수용할만한 토양이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타인에게 인색하고 자신에게 관대하며, 만족할 줄 모르는 상극의 삶으로 극단화하는 자본주의를 경멸했던 것입니다. 즉 인간은 주체로써 마땅히 공존을 위한 사회적 책임이 있다고 본 동양의 분배문화가 서구의 분배문화에서 만들어진 자본주의와 상충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전통 한국에서는 사회를 개인의 수양(수기치인)을 쌓아 실현하는 곳으로 생각하여 나눔을 최고의 덕목으로 생각함에 따라 타인에게 나누지 못할망정 피해를 주지 않겠다는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청빈한 삶을 근간으로 하는 사회였으며. 개인과 사회가 도덕적 기준에 의해 조화를 이룬 선비가 지배하는 국가로서, 전통 한국은 서구적 가치로써 개인주의를 소인배 주의라 하여 배격한 국가였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 조선 중기 거상 임상옥이 상인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벼슬도 하여 신분 변화를 하였던 것은 누구나 ‘수기치인’의 덕을 갖추면, 신분 상승과 아울러 벼슬길을 열었던 사실에서 인격이 지배하는 개방적인 사회였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여 전통 한국이 도덕성을 근간으로 한 ‘사농공상’의 가치체계와 자본주의의 체제와 배치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1.3 소외된 인간

자유기업 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사회는 많은 일자리를 제공하였지만, 중화학공업을 위한 제2차 산업혁명 이후 공장자동화에 의해 과당경쟁으로 수많은 기업이 퇴출하면서, 미국발 세계 대공황을 겪게 되었고, 이후 제3차 산업혁명인 정보화시대를 맞이해 지식정보통신과 첨단 과학기술 등으로 획기적인 생산성 향상과 더불어 고실업 사회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또한 대자본은 인플레로 인한 자산가치의 감소를 극복하고자 하거나, 무한경쟁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금융투기나 적대적 M&A(기업합병), 고용축소 등을 함에 따라 양극화의 속도는 가파르고, 고비용 저효율사회로 변모하였습니다. 물론 자본주의사회가 적자생존을 위한 자유경쟁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있음에 따라 무한축적을 위한 과잉경쟁의 결과일 것입니다.

이는 구조적으로 자본가, 노동자, 소비자나 다 같이 자신에게만 관대해야 하는 자본주의 정서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자본주의는 인간의 이기심과 동정심이 균형을 이루며 살아야 하는 독특한 존재임을 간과하며 이기심을 편향적으로 배양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즉 자본주의가 인간의 이기적 동기에 의해 물질적 풍요를 이루어 공동선을 이룬다고 하였지만, 실제로는 1대99라는 극단적 양극화로 위험한 사회를 만드는 체제입니다. 이는 공동선은 일차적으로 자신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게 어느 정도 양보할 수 있는 관대함이 전제되어 있음에 따라 결과적으로 다수가 균형을 이루어야 함에도, 실제로는 극단적 불균형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본주의가 이기심을 배양함에 따라 치른 혹독한 경험은 인간 상호 간에 동료가 아닌 적대적 먹이사슬의 개체로 각인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과잉경쟁을 유발케 하여 환경오염과 인간성 황폐화가 가속화되는 원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자본주의를 부분 수정하거나, 사회적 환경의 변화에 따라 부분 개혁 등을 한다고 할지라도, 결과에 있어서 마찬가지입니다.

하여 자신에게 관대한 이기적인 삶을 정당화하는 자본주의가 세상 문제를 해결한답시고 부분을 땜질하는 위험을 자초하기보다, 모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체제가 세계화되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위기가 자본주의로 인한 결과로 볼 수 있음에 따라 자본주의 분배양식은 퇴출이 되어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들이 자본주의사회에서 살면서 사회성의 근원인 이타심의 약화로 위험한 사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이기심보다 이타심이 더 많은 인간의 특성을 간과하는 자본주의가 위기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아무도 책임질 수 없는 상황까지 이르게 되는 지속 불능의 사회가 될 수 있음을 과학자들의 예측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하여 소우주로써 인간이 대우주와 연동되어 순환 진보를 한다고 생각한 모계 신본주의 사회의 공유제처럼, 모계적 분배양식을 세계화하기 위한 모민주의 정치경제 제도를 성립되는 것은 시대적 요청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튼 오늘날 자본주의사회에서 인간이 상품화됨에 따라, 상품이 주체가 되고 인간은 객체로 소외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삶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물욕을 충족하기 위한 객체로써 살아가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지구촌 시대는 개인이나, 기업, 국가 간에 양극화가 형성되는 가운데, 상호 의존성의 증대로 인하여 동시에 세계가 위험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또한 과거와 달리 세계공황의 늪은 깊고 넓어지는 현상이 있음에 따라 무한경쟁의 다른 의미인 ‘경제전쟁’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에서 살아남기 위해 경제적 동물로 살아야 하는 부담이 있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오직 경제적 억압을 벗어나기 위해 경쟁적으로 무자비한 도축과 무분별한 채취와 채굴 등으로 자연생태계의 질서가 무너져 자정능력을 잃게 되었음에도, 신제품 개발 경쟁과 신상품개발이나, 과소비 등으로 유발된 환경오염이나, 지구온난화로 인한 생태계 파괴 등으로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더불어 전 세계가 산성비에 의한 식량 감소, 오염된 농수축산물로 인한 질병 증가 등으로 인한 의료비의 부담증가와 노동력 상실 등으로 인한 유효수요의 감소 등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사회가 정착되고부터 과거처럼, 지역사회에서 스스로 남획을 방지하는 자율규제에 의한 생존 양식은 의미를 잃었으며, 빈자로 추락하지 않기 위해서 경쟁적으로 남획한 결과, 생태계 파괴와 자원고갈로 인한 피해가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불과 200년 정도에 이르는 자본주의가 제국주의를 비롯해 인재, 천재지변이나 생태계 파괴 등으로 인한 재앙의 규모가 크며, 위험한 사회가 됨에 따라 탈자본주의 정서가 확산이 되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이 살아가는 지구에서 인간의 욕망을 충족할 만큼 충분한 재화도 없을 뿐만 아니라, 수백 년을 장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특수한 물질도 없고, 환경도 그렇지 못함을 알게 된 인류는 과당경쟁으로 인한 공멸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본주의가 상대주의를 근간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주의적인 양극화를 정당화하거나, 인간을 상품화하는 것 등으로 인하여 유발되는 인간성 황폐화는 도를 넘고 있습니다. 물론 제3세계가 자본주의를 악의 축으로 생각하여 퇴출을 선언한 2001년 911테러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선진국과 후진국 간의 자본과 기술의 차이에 대해서 과거 착취의 결과로 보는 제3세계가 신자유주의를 신제국주의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여 기독교와 같은 절대 유일신으로부터 마호메트가 계시를 받아 6세기에 창립한 마호메트교와 기독교 간의 종교전쟁인 7세기경 일명 십자군 전쟁에서부터 제국주의에 이르기까지 피해를 본 중동지역의 경우, 자본주의를 타파하는 것을 이슬람교 신자들의 의무로 생각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여 지구촌 시대는 부계적 가치를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 체제가 세계통합을 구현할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본축적 경쟁으로 형성되는 1대99라는 절대적 양극화로 인한 고실업과 더불어 유발되는 수만 명의 자살은 전쟁의 규모보다 커지고 있으며, 불안정성에 취약한 여성의 삶이 힘들어지는 등 위기를 맞고 있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여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 세계에서는 원천적으로 물질이 부족하며, 완벽하지 못한 가운데, 누구나 빈손으로 돌아가며 마음만 갖고 간다고 한 사실을 생각해 볼 때, ‘관계의 삶’을 위한 ‘존재의 삶’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게 하는 ‘모민주의’ 체제를 세계화되는 것이 바람직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근간으로 하는 적극적 복지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부계적 분배양식을 퇴출하고, 모민주의 체제가 글로벌 (지구촌) 시대에 부합됨을 알 수 있습니다.

2. ‘관계의 삶을 위한 분배양식

대다수 사람은 생명이 있는 한 재화와 용역의 교환수단으로써 화폐를 갖고 싶어 하며, 부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는 인간에게 있어서 돈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필요하며, 돈은 원하는 것을 얻거나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돈은 삶의 궁극적인 목적인 행복한 삶을 위한 수단 이상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풍부한 인간성이나 도덕성 등을 갖추기 위한 교양이나, 인격 연마 등을 하고 있지만, 대다수 사람은 돈벌이 자체를 삶의 목적으로 생각하며, 오직 부자로 사는 것을 행복한 인생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행복한 인생을 모계 신본주의 사회에서 공유제로 구현했던 것과 ‘소유의 삶’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 것으로 생각한 자본주의와 사고방식(문화적)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여 인간이 행복한 인생을 위해 태고부터 염원했던 ‘존재의 삶’이 지구촌 시대를 맞아 모계적 분배양식이 가능함에 따라 모민주의가 보편화되어 대다수 사람이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도록 사회협동을 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2.1 양극화를 유발하는 소유의 삶

든 생명체는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써 무생물과 동식물 등 다른 생명체와 유기적인 관계를 갖고서 유지계승이 되고 있다는 사실은 경이로운 것입니다. 뿐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생명 유지를 위한 자유 본능과 영원히 살고자 하는 본능을 갖고 있습니다. 더구나 인간은 지역의 환경과 체험으로 형성된 생존 양식으로서 문화에 의해 스스로 복종하는 선한 존재라는 점은 특기할만합니다.

물론 인류의 원형사회로써 모계사회가 종교사회였으며, 인간의 종교적 심성이 태고부터 오늘날까지 변치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영적 존재로서 인간은 선한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창조적인 우수한 인간은 삶의 궁극적인 목적을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로 죽음을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 오늘날 문명 세계를 이룩하게 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유 본능으로 인한 충돌 방지와 안전 등을 위한 전통적 금기사항을 지켜야 하거나, 인간은 집단적 결정인 정치적 이유나 종교적 신념, 강제규범에 의해서 전쟁에 동원되는 등으로 인하여 성악설적 존재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즉 부계사회의 등장으로 유발된 폭발적인 갈등으로 인하여 선한 면이 줄어들고, 성악설적인 측면이 배양되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은 생명 유지본능으로 죽음을 두려워하며, 기아와 폭력에 대해서 두려움 갖고 있음에 따라 이를 악용한 부계사회가 수천 년에 걸쳐 생명 경시와 폭력을 정당화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생명의 순환 진보를 믿은 모계 신본주의 사회에서 모성의 재창조 능력을 인류의 구심력으로 신성하게 생각했던 반면, 부계사회가 등장하고부터 출산 양육을 하는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폄하를 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모성은 잉태와 출산으로 인간을 재창조하고 있으며, 오랫동안 수유, 양육, 가정교육 등을 통해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게 하는 실재적인 것을 부계사회가 무시하였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모성의 경우 사람다운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한 아이의 보호와 양육의 시기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가장 힘든 시기로서, 외부와의 접촉은 제한적이고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조차 약점으로 변모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부계사회의 등장과 함께 생명 경시 풍조가 만연하면서 인간은 소모적 존재로 전락함에 따라 아이를 낳고 기르는 자체가 약점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여 모권사회가 공유제 사회로써 정치와 종교를 통합한 미분화된 상태에 있을 때는 자연스럽게 인간을 모신의 후손으로 믿고, 인간의 생명을 존귀하게 여겼지만, 부권사회의 등장으로 모계는 종교를, 부계가 정치를 전담하면서 생명을 경시하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는 여성의 지위가 어떻게 변천하였는지를 모계 신본주의 사회였던 마고 시대에서 고대 한국으로, 고조선을 이은 삼한시대의 신라로 이어지는 과정을 서술한 종교 편에서 서술할 것입니다. 참고로 일만 년 전 절대 존재로서 모계 유일신을 숭배한 시대를 마고 시대라 하며, 마고(麻姑)는 모계 하나님의 별명입니다.

 

2.2 자본주의 역할종료

부계사회가 등장하고부터 부계혈통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신분제가 공고화되면서 남녀차별이 뚜렷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권력과 소유가 비례한 구시대의 절대주의 사회에서 민중은 권력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지만, 권력에 의한 수탈, 횡포, 체벌, 협박 등으로 뼈에 사무치는 억압을 받은 민중들은 과중한 조세나 여러 종류의 준조세부담으로 항상 빈곤했지만. 권력자는 모든 것을 갖는 권력 양극화에서 부계혈통주의의 속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금권일체시대’의 절대 권력의 횡포에 반동하여 만들어진 자본주의는 ‘금권분리’를 원칙으로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양극화로 ‘금권일체시대’가 되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부계혈통주의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구시대의 전제군주의 권력 확장 의지나 자본가의 자본축적 욕구가 절대주의적인 양극화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같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구시대의 부계 유일신 주의가 근대사회에서 배금주의로 대체된 것입니다. 하여 무제한 소유를 정당화하는 자본주의는 구시대가 권력으로 착취를 했던 것처럼, 자본에 의한 합법적 착취와 흡사함을 알 수 있습니다. 하여 분권을 근간으로 하는 근대 민주주의 사회가 성립되었음에도, 자본주의가 구시대 권력 양극화처럼, 부의 양극화를 유발하는 것은 근대 시민정신과 배치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튼 인류는 제1차 산업혁명으로 획기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으며, 이를 뒷받침한 자본주의제도는 오늘날 천문학적 규모의 경제로 발전케 함에 따라 경제가 목적이 되고, 정치는 수단으로 변모하였습니다. 하여 태고의 모계사회는 종교사회였으며, 부계사회가 정치사회라 한다면, 근대사회는 자본주의사회로써 경제가 중심이 되는 사회로 변모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상업주의에서 연유한 자유주의와 주권재민을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자본주의사회로써 배금주의 사회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돈이 돈을 버는 것을, 특징으로 함에 따라 머니게임으로 발전케 하는 속성으로 실물경제를 불안정하게 만들어가고 있으며, 물신주의나 배금주의로 인하여 유발되는 1대 99라는 절대적 양극화로 인하여 국내 정치가 무력하게 되는 문제를 낳고 있습니다.

이는 자본주의가 경제적 자유주의를 근간으로 함에 따라 민주주의는 자유주의를 위한 형식적 민주주의로써 절차적 정의에 지나지 않음에 따라 양극화를 억제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의 속성에 충실해질수록 금력은 절대화됨과 동시에 민주주의의 정치적 의무인 사회통합기능이나 국가의 복지기능을 무력화시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상대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 정치와 절대주의적인 양극화를 정당화하는 자본주의 분배양식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여 인류의 이상으로 민주주의는 탈 양극화를 지향함에 따라 모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새로운 체제가 세계화되어야 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지구촌 시대는 생태적으로 민주적이고, 복지적인 여성이 분배의 중심에서 역할을 하는 적극적 복지사회로 진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자본주의로 유발된 위험한 사회를 극복하기 위해 태고로부터 오늘날까지 인류의 구심력을 이루고 있는 여성이 복지 주체가 되어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지구촌 시대를 사는 신인류는 자연법사상과 합치되는 사회로 발전하게끔 생활 정치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계 신본주의 사회가 일원론적 사회로써 정신노동이나 육체노동을 같은 가치로 생각하여 공유제를 한 것은 참고가 됩니다. 하여 모권사회에서 모성이 중심이 되어 남녀가 균형을 이루었던 것처럼, 지구촌 시대는 모계적인 민주주의와 부계적인 자유주의가 균형을 이루기 위해 온전한 민주주의로써 ‘모계민주주의’ 정치경제 제도가 세계화되는 것이, 바람직함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튼 성장과 효율을 중시하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여성 자신의 복지적 성향으로 인해 불평등하게 되었다고 볼 때, 인류의 반인 여성의 행복한 삶을 위한 체제의 성립으로 역사발전 하는 것이 바람직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양성평등 원칙을 천명한 자연법사상과도 합치되기 때문입니다. 하여 자연법사상을 근간으로 한 근대사회에서, 남녀가 근본적으로 다름을 인정한 기하학적인 평등을 이루기 위한 분배양식이 세계화되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모계 신본주의 사회가 양성의 양육을 위해 모성이 분배권을 가지고, 공유제로 물질적 기초를 보장한 사실에서 기하학적인 평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부계주의가 주류를 이룬 현실에서 산술적, 양적으로 대등한 관계로 생각한 근대사회에서 실질적 남녀평등이 구현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여 부계사회의 등장으로 모성애, 성실성과 인내심, 여성성이나 인간을 재창조하여 현재를 있게 한 사실 등을 재평가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생태적으로 복지적인 우수한 특성이 약점이 되어 남성에게 종속된 사실이나, 가사노동, 보살핌, 출산 양육 등이 저평가되고 있음을 고려할 때, 질적으로 다름을 존중하는 기하학적인 평등으로 관점이 변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부계 유일신 종교인 기독교는 온순하고 유익한 여성을 10대 1로 차별함에 따라 사람들은 출산 양육의 고통을 벌로서 믿었으며, 인간은 부계 유일신의 피조물로써 전락하게 되면서 인간을 재창조하는 여성은 성적 노예나, 씨받이로 전락한 사실을 상기해볼 때, 기하학적 평등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기독교가 발현된 중동에서 살았던 유목민은 내면세계를 탐구할만한 여유가 없을 만큼, 척박한 환경에서 오직 생존을 위해 형성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는 인본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근대사회가 성립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여전히 부계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대다수 여성이 경제적 독립을 이루기 어려운 이유로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유주의에서 임금이 없는 가사노동은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는 가운데, 임금노동을 하는 여성의 경우 대다수 보조 노동에 머물러 있으며, 오늘날 양극화의 직접적인 피해를 보고 있다는 사실 등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오랫동안 여성을 소외하고 무시한 서구 부계사회의 사고방식에서 만들어진 자본주의는 남성에게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하여 대다수 여성이 자본주의의 내용인 금력을 획득하지 못함에 따라 실질적으로 불평등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법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근대사회는 여성에게 사회참여라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계기가 됨에 따라 스스로 유리한 체제를 성립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인권선언에 기초한 근대사회가 성립된 후 20세기 초 여성이 선거권을 쟁취함으로써 생태적으로 복지적이고, 민주적인 여성에게 적합한 복지국가가 이루어진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여 자본주의는 모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적극적 복지사회의 구현을 위한 전 단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모계적 가치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 정치와 경제적 자유주의와 불 합치함에도, 결합한 자본주의는 지구촌 시대의 도래와 함께 역할이 끝났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반동으로 생성된 사회주의를 통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모계주의를 내재한 민주주의와 배치되는 자본주의는 모계적 분배양식을 위한 과도기 체제입니다.

하여 비복지적인 자본주의가 소극적 복지를 구현하고자 하는 수정자본주의로 진보한 사실을 상기해 볼 때 적극적 복지사회로 역사 발전함이 순리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이기 때문에 요구되는 기하학적인 평등을 구현하기 위해 새로운 모계적 분배양식이 보편화되어야 합니다.

 

2.3 아담스미스의 뜻과 다르게 발전한 자본주의

18세기 말에 시민혁명으로 성립한 근대사회는 민주주의 정치와 경제적 자유주의를 결합한 자본주의 체제를 성립하였습니다. 물론 아담스미스가 시장기능을 무력화할 수 있는 법인 대기업을 거부하여 제한되기를 주장했으며, 자본가의 양심과 자율을 통한 경쟁을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법인 대기업으로 대자본을 축적하거나, 근대 시민사회에서 자본가는 국가정책에 지나치게 개입하여 국정을 주도한 것 등을 참고해 볼 때, 아담스미스의 자본주의와 다릅니다.

그리고 구체제의 정치 권력의 억압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운 경쟁을 통한 풍요한 삶을 생각했던 아담스미스는 자유방임주의의 한계와 조건을 제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본가는 이러한 점을 간과했을 뿐만 아니라, 전통사회의 도덕적 간섭마저 거부하고 착취를 정당화했다는 점에서 아담스미스의 의도와는 다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아담스미스의 자유방임주의는 중소규모로써 상대주의적이고 소박한 면이 있음에 따라 민주주의의 본질인 모계적 가치에 충실코자했던 반면, 자본가 중심의 자본주의는 대기업을 지향하고 있음에 따라 절대주의적이고 계급 투쟁적인 면이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절대주의(전체주의)가 권력 양극화를 유발하는 것처럼, 자본주의에서 대 법인을 허용한다면, 부의 양극화로 불안정한 사회가 됨을 알았던 아담스미스의 자유방임주의는 자본가들의 공격으로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즉 상생을 위한 분권적인 민주주의와 무정부적이며 집권적인 경제적 자유주의는 근본적으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편의로 결합하여 만든 자본주의가 근대사회의 정신인 분권화와 배치되었던 것입니다. 하여 아담스미스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시장이 자동으로 조정된다고 주장한 것은 부계적 분배양식에서 불가능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무제한 소유를 허용하는 부계적 분배양식이 보편화된 세상에서는 이전투구에 몰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자본주의사회가 가치지향적인 사회가 아니라, 자본에 의한 가치를 부여하는 사회로서 가치 전도로 인하여 유발된 혼돈(카오스적 상황)에 빠진 역사적 경험에서 자본주의 속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성적 존재인 인간은 동료로서 인간에 대한 연민과 박애 정신이 있는 존재임에 따라 ‘상생의 삶’을 살고자 할 때 행복한 인생을 즐길 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근대사회가 성립되어 국가로부터 억압을 벗어났으나, 마치 늑대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 것처럼, 거대법인기업 간의 자본축적을 위한 착취가 보편화되었으며, 이해관계의 충돌로 만들어진 제국주의에서 사람들의 삶이 고단했던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중소기업이나, 신생기업의 경우 국가의 간섭과 규제가 많아 시장진입이 곤란했던 반면, 관료 출신과 함께 경영한 대기업의 경우 국가정책과 부합되는 방향으로 자본축적을 함에 따라 패해가 많았습니다. 즉 국가가 소비하는 비시장적인 부분을 결탁한 정경유착으로 축적한 대자본으로 시장적인 부분을 압도함에 따라 시장 질서를 왜곡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근대사회는 자본가가 주류를 이루게 되면서부터 여성이나 무산층의 민중은 선거권이 없었고, 유산층인 시민에게만 투표권이 있었습니다. 물론 착취로 인해 민중이 빈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탓으로 전가한 결과 투표권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자본주의의 비정함에 반동하여 만들어진 사회주의는 자신들이 진짜 민주주의라고 주장하고 자유민주주의를 반쪽(형식적)민주주의라고 하면서 자본주의의 표리부동함을 역설했던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즉 자본주의가 민주주의의 복지 본질을 왜곡하였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계적 가치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의 본질인 복지에 충실해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여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소위 부계 민주주의로써 불 완전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자유주의가 내용이 되고 민주주의가 형식적인 절차적 정의로 구조화되어 있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자유주의가 목적이며, 민주주의는 수단이 되기 때문입니다.

즉 자유주의 원칙을 고수해야 하는 부계 민주주의입니다. 하여 자본주의의 가치 전도현상으로 인한 인류의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타심을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가 우선하고, 이기심을 근간으로 하는 자유주의가 한발 양보하는 경제적 민주주의(경제민주화)를 구현할 수 있는 모계 민주주의의 ‘소유상하한제’가 성립되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천부소유권’을 보장하는 모계적 분배양식에 근거한 ‘소유상하한제’가 논란의 여지를 갖고 있음에 따라 새로운 체제인 모계민주주의(모민주의)의 성립을 위한 풍토조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한편으로 실질적으로 경제적 평등을 이루어야만 진짜 민주주의라고 주장하는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를 결합한 형태로써, 사회민주주의(사민주의)와 자유민주주의로써 자본주의가 다 같이 편향적이라는 점에서 이분법적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개인성에 편향적인 자본주의와 인간의 사회성에 편향적인 사회주의도 극단적이라는 점에서 같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여 오늘날에 이르러 두 체제를 혼합한 ‘중도주의’(中度主義)를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오늘날 양극화로 인한 경제적 불평등은 심각한 상황에 이르게 한 자본주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정자본주의를 넘어 사회주의의 부분을 수용하는 체제수렴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중도주의나, 사회주의, 자본주의 등 각각의 체제가 다 같이 이분법적이며, 부계적 가치를 근간으로 함에 따라 반쪽민주주의로써 한계가 있습니다. 하여 근대민주주의는 부계 민주주의로서 인간의 개인성과 사회성의 조화를 이루지 못함에 따라 형성된 위험한 사회를 극복하기 위해 온전한 민주주의인 ‘모계 민주주의’로 민주주의를 공고화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인간은 독립된 주체로써 ‘존재의 삶’을 염원한 결과로써, 모계적 가치를 근간으로 하는 인류의 이상인 민주주의가 성립되었음을 상기해 볼 때, 민주주의의 복지 본질인 복지사회가 공고화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본주의적인 논리로 착취를 정당화하기보다 인간 동료로서 ‘상생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모계적 분배양식인 ‘소유상하한제’를 성립할 수 있는 모계 민주주의가 적합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눔으로써 서로가 상생된다는 사실을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는 성경의 마가복음에 있는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당시의 사회는 사람들은 먹을 것을 가지고 다녔으며, 예수의 산상수훈을 듣고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나눔(사랑)에 있다는 사실을 진리로 깨달으면서 실천한 것입니다. 하여 탐욕을 합리화하기 위해 문화적 존재인 인간을 편리한 데로 해석하여 상품화하거나, 양극화로 대다수 사람을 빈곤하게 만들어가는 무한한 탐욕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며,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모성의 미덕의 경우 자본주의의 부의 양극화로 인하여 오늘날 사회적 미덕으로 포장된 착취에 대해서 위로의 구호는 무의미해지고 있으며, 현실적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대다수 여성이 빈곤함에 따라 자긍심이나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여 모성의 보살핌, 출산 양육 등을 사회적 미덕으로 강조하는 만큼, 현실화하기 위해 국가에 의해서 실질적으로 보장되는 적극적 복지사회가 세계화되는 것이 바람직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부계주의에 의한 과거의 잘못을 체제변화로 보상을 할 수 있을 만큼, 세상이 문명화되어 있으며, ‘관계의 삶’을 위한 ‘존재의 삶’을 추구하고자 하는 의지와 더불어 첨단과학기술문명으로 실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사회협동으로 이루어진 세상이 공존을 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상극의 삶을 유발하는 부계적 분배양식으로 양극화를 공고화한다면, 전쟁, 테러, 민란 등으로 상당한 대가를 치렀던 역사적 경험에서 알 수 있듯이 위기를 넘기기가 힘들 것입니다. 예를 들어 로마제국은 과도한 부계 독점의 결과로써 유발된 성문화가 타락하여 쾌락을 위한 부정부패와 천재지변이나, 질병 등으로 인하여 멸망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2.4 9·11테러의 의미

자본주의가 ‘풍요 속의 빈곤’을 특징으로 하며 양극화를 유발함에 따라 위험한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개입주의(보호주의)를 허용한 수정자본주의(소극적 복지국가)는 통상마찰의 원인이 됨에 따라 자유방임주의를 세계화한 선진국 중심의 신자유주의가 등장하였습니다.

하지만 세계 경제의 침체로 선진국조차 신자유주의 사상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가 점증하고 있습니다. 즉 서구적 가치인 신자유주의가 동일 문화권에서는 부합될 수 있지만, 이질적 문화권으로써 반서구적인 후발국의 경우, 수천 년에 걸쳐 형성된 각 지역의 독특한 문화(정체성)를 통해 사회통합을 구현하고자 함에 따라 상호 간 문화적 차이로 인한 충돌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슬람교가 특정한 지도자가 없이 연구한 사람이 집도하며, 생활 자체로서 회교는 수입의 40분의 1을 테러단체나, 주고 싶은 아무에게나 나누는 종교이며, 조직도 자금도 없는 것에 비해, 기독교는 십일조를 헌금해야 하며 조직과 자금이 많다는 점에서 상반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서구적 가치로써 발현된 자본주의 생활양식이 보편화되어 있을지라도, 자본주의 후발국의 경우 지난날의 상처로 인하여, 형성된 빈곤과 혼란 등으로 반서구적인 정서를 배양하여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코자 하기 때문입니다. 즉 서구적 가치와 자신들의 정체성과 불 합치되는 가운데, 자본주의에 의한 혹독한 역사적 경험과 더불어 현재의 혼돈으로 인한 빈곤한 상황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아울러 유럽의 식민지였던 나라들은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로 성립된 제국주의의 혹독함을 상기하면서, 첨단 과학기술로 막강한 생산성이 있는 선진국의 수요개발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선진국 중심의 신자유주의를 퇴출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한 21세기 2001년 911테러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근대사회를 성립한 인류는 자연법사상과 자유주의 사상, 경험주의를 근간으로 한 실증주의, 민주주의 정치, 자본주의, 과학기술의 발달 등을 체험했으며, 지구촌 시대가 된 오늘날 제3차 산업혁명으로 정보화 사회까지 도달했지만, 환경오염이나, 양극화, 인간성 황폐화 등으로 위험한 사회가 됨에 따라 고민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하여 인류는 ‘소유의 삶’으로 인한 결과가 어두움에 따라 ‘존재의 삶’이 인간에게 적합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즉 인류는 찬란한 문명과 더불어 인문학적 성과나 첨단과학기술문명을 이룩한 사실로부터 소우주 인간임을 알아차렸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류가 사회협동을 이룩한 첨단과학기술문명을 통해 인간은 영적 존재로서 ‘존재의 삶’이 적합함을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신자유주의로 지구촌 시대를 살게 된다면, 1대99라는 절대적 양극화의 속도가 빠르게 진행되어 전체주의(절대주의)였던 구시대보다 훨씬 힘들게 될 것입니다. 이는 서구가 불확실성의 시대를 겪으면서 만들어진 초기자본주의에서 고도의 착취 방법을 계속 개발하여 마치 양의 탈을 쓴 늑대처럼, 부도덕한 것조차 합리화한 제국주의에서 이미 경험한 바 있습니다.

이는 서구적 가치가 식민지, 제국주의, 세계 제1차 2차 대전을 비롯해 거대한 무기체계와 냉전체제와 환경문제, 세계적 양극화 등으로 나타난 사실에서 이분법적인 ‘상극의 삶’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여 구시대 전체주의에 의한 억압을 부정하면서 개인이 없는 국가는 의미가 없다고 등장한 자유주의는 ‘상생의 삶’이 요구되는 지구촌 시대와 불 합치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의 개인성을 중심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자유주의(개인주의)가 인간의 사회성과 조화가 중시되는 지구촌 시대와 맞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구촌 시대는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적극적 복지사회가 구현되어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무정부적인 속성이 있는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절대적 양극화와 더불어 초국가적인 다자주의적인 새로운 형태의 사회가 만들어지면서 형성된 불안정한 사회를 극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제정일치(祭政一致)의 모계 신본주의 사회를 이은 부계사회에서 모계가 종교를, 부계는 정치로 정교분리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정치에서 소외된 여성은 부계사회의 공고화로 부계 우월종교가 성립하면서부터 종교에서도 주류를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근대 민주주의 사회가 성립된 후, 약 100년이 지난 20세기 초에 여성의 결사로 선거권을 획득함으로써, 정치참여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즉 제1차 산업혁명으로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근대 시민사회가 성립되면서, 남성은 획기적인 변화를 했지만, 여성은 완만한 변화를 했던 것입니다. 이는 준비되지 않았던 자에게 권투 시합에 투입되는 것과 같다 할 수 있습니다. 하여 여성과 남성이 각각 권력의 반을 갖고, 균형을 이루는 모민주의 체제가 성립되어야 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자본주의사회에서 사적이익을 추구하는 자유기업이 자신에게 유리한 근시안적인 정치적 결정이나 권력구조에 영향을 끼치는 경향이 없어질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새로운 정치경제 제도인 모민주의의 세계화로 자본주의 발 위험한 사회를 극복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무제한 축적을 정당화하는 자본주의 분배양식으로 유발된 양극화는 수많은 문제를 만드는 원인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에서는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여 여성에게 정치 권력의 반을 보장하는 체제인 모민주의를 성립하여 적극적 복지사회를 구현하는 것은 당연함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지구촌 시대를 맞이한 인류는 환경문제나, 세계적 양극화나, 문화적 충돌 등으로 형성된 위험한 사회를 극복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물론 인류의 구심력인 모성애를 근간으로 한 모계 신본주의 사회가 수만 년을 평화로운 가운데 원형문화를 창조한 사실을 상기해 볼 때, 모계적 분배양식을 세계화한다면,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부계사회의 등장으로 소외되었던 여성들에게 보상이라는 측면과 ‘천부소유권’을 보장하는 장치로써 ‘소유상하한제’의 세계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성의 경우 부계에 종속된 극단적으로 불공평했던 제도, 사상, 관행, 사회적 정서, 복지본능 등으로 인한 결과, 오늘날까지 빈곤의 원인이 되었다고 볼 때, 지구촌 시대에 부응하는 정의로운 사회라면, 마땅히 모민주의 ‘소유상하한제’로 적극적 복지사회라는 보상을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인간 존엄을 구현코자 성립된 근대사회였지만, 제국주의로 인한 수많은 전쟁, 식민화, 도를 넘은 양극화, 생태계 파괴 등으로 인한 인간 경시라는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 물적 기초를 보장하는 모계적 분배양식이 세계화되어야 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이는 지구촌 시대를 살아가는 신인류 스스로 ‘경제적 동물’로 살아갈 수 없음을 인식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구촌 시대는 ‘존재의 삶’을 가능케 하는 모민주의 체제가 세계화되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