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지 태운 살얼음
살얼음은 바지를 태웠다. 신천 개울가는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다. 겨울이 지나갈 때즘 얇아진 살얼음에서 개구쟁이들은 담력을 내기하며 새봄을 맞이한다. 얼음이 깨어져 물에 빠져야 끝나는 놀이다. 얇아진 얼음은 바스락 소리를 내며 금이 간다. 돌아가고 싶은데 호기심은 더하다. 조금 더 조금 더 하다가 깨진다
들어갈 사람 없냐고 용기를 시험한다. 친구들이 ‘니 들어갈 수 있제’한다. 안가면 용기가 없는 겁쟁이가 된다. 울며 겨자 먹는 꼴이다. ‘그래 가보께’하면서 조심조심하며 걸어간다. 어김없이 물에 빠진다. 멀리 갔다고 자랑을 한다. 부들부들 떨면서도 허세를 부린다. 단지 골목대장이 된 것 같은 우쭐함이 보상이다. 좋아하는 여자아이 앞에서 잘난 척한 것은 덤이다.
꼬마들이 나뭇가지를 모아 모닥불을 지피고 추위를 녹인다. 양말과 옷을 말리고 화기를 온몸에 불어넣는다. 불똥이 튀는 줄도 모르고 엉덩이를 들이민다. 바지 태우지 말라고 한 것을 까마득하게 잊고 뜨거울수록 좋다. 겨울 바지 색깔이 탁해서 작은 구멍이 나도 잘 모른다. ‘우와’라는 함성과 박수를 받은 대가는 추워서 떠는 것과 새 바지를 사는 것이다.
어떤 날 어머니는 노란 골덴 바지를 사주셨다. ‘이거 좋은 기데이 태우지 마래이’하며 좋아했다. 자랑이 하고 싶어 개울가에 갔다. ‘야! 니 바지 좋네’라고 부러워한다. ‘우리 엄마가 억수로 좋은 기라고 카더라’며 우쭐거린다. 누군가 살얼음 이야기를 한다. 새로 산바지라 망설이다가 들어간다. 결국 빠져야 돌아올 수 있었다. 다음에는 누가 머래도 안해야지 다짐을 하면서 터벅터벅 걸어 나온다.
그날은 바람이 불어 모닥불이 활활 타올랐다. 친구들 앞에서 자랑하듯이 궁둥이를 더 내밀었다. 바지가 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옆에 친구가 ‘야 니 궁디 시커머타’. ‘야 너금마한테 마 죽는 데이’라고 걱정을 함께 해주었다. 병 주고 약주고 해도 고맙다. 궁둥이가 익지 않았으니 다행으로 생각했다. 아 ~ 오늘 처음 입은 새 바진데. 물렁한 빗자루 들고 다니는 모습을 떠올린다. 집에 가서 혼날 것을 상상하니 괴롭다. 자랑하려고 놀이터에 간 것이 후회되었다.
어머니가 언덕에서 큰소리로 ‘진수야 밥무래이’하신다. 용기를 내어 집으로 향했다. 엉덩이가 ‘시커먼스’다. 한 걸음 한 걸음 살얼음을 걷는다. 지금까지 태운 바지와는 다르다. 오늘 입은 노란 골덴바지는 엉덩이 전체로 뚜렷하다. 친구들이 걱정하면서 놀리면 가슴이 조여 온다. 집으로 가는 길에 사람들이 나만 보는 것 같다. 아주머니가 ‘쯧쯧’하며 혀를 찬다. 평소에 듣는 소리보다 크게 들린다. 동네 아저씨는 ‘궁디 안 익었나 니 오늘 죽는 데이’. 대문에 들어서려니 발이 딱 붙었다.
하지만 엄마는 새 바지를 입혀주시면서 ‘니 감기 걸리면 고생한 데이’라고 하신다. 나무라는 것이 없다. 바지보다 자식의 마음에 상처를 줄까 봐 전전긍긍했던 부모님이 고맙다. 마냥 즐겁게 사는 모습을 좋아했던 것 같다. 고통을 주기보다 생명을 만끽하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대구지역의 산과 들을 돌아다니기가 바쁘다. 우리 집에서 제일 바쁜 사람이었다. 아침밥을 먹고 나면 저녁쯤에 돌아오는 개구쟁이였다. 무엇이 그렇게 궁금한 것이 많았는지.
‘부자자효’(父慈子孝) 부모가 자비로워야 효자가 된다는 사자성어다. 만행의 근본인 효는 부모로부터 이루어진다는 의미이다. 효의 연장이 충이라면 좋은 정부가 되어야 좋은 국민이 된다는 이야기다. 절대 왕조시대 독재를 하면서도 백성에게 충을 강요한 것은 모순이다. 어릴 때 어리석음을 사랑으로 감사 준 부모님을 존경하게 된다. 부모의 자비는 나의 신념의 배경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는 관용의 정신으로 만들어져서 좋아한다. 인간 이성의 한계를 인정한 체제이다. 경제민주화를 동의하는 이유이다. 민주주의를 자비로운 체제로 생각하는 것은 부모의 영향인 것 같다.
공부하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성적도 묻지 않는다. 공부를 안 하면 어떻게 된다는 협박도 없다. 하루는 집에 들어오면서 아버지가 ‘에이 배운 놈이 더하다는 말이 다 맞네’ 하면서 방에 들어갔다. 인정머리도 없고, 상식도 통하지 않았던가 보다. 지식인의 도덕적 타락으로 인한 패망으로 민족이 종(노예)으로 살았던 일제 식민의 고통 때문일까? 공부가 필요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암시한 한마디가 삶을 해석하는 기준이 되었다. 바지 태운 살얼음은 부모의 따뜻함을 알게 한, 일등 공신이다.
상대의 성을 존중하며, 쌓아 가는 공공선은 적극적 복지사회를 만드는 원동력이 됩니다. Respect the sex of…
Part II. Human Dignity Chapter 1. The Age of Human Dignity The dictiona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