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나무
보호수 느티나무는 삼신과 소통하는 안테나다. 가야산 자락 상비계곡으로 가는 길에 웅장한 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고령 덕곡면 원송리 심어동 실개천다리를 건너, 마을 입구에 수문장처럼 우뚝 서 있다. 논밭의 한가운데 있어서 뚜렷하게 보인다. 언제나 보아도 지구처럼 동그란 모습은 신령하게 보인다.
여름에는 시원한 그늘을 마련해주고 가을에는 낙엽으로 운치를 더해주었다. 겨울에는 나뭇가지로 자태를 뽐내었다. 봄에는 새파란 잎사귀로 다시 태어났음을 보여주면서 매력을 발산했다. 사계절 달라지는 농촌풍경과 가로수는 조화를 이루었다. 차를 멈추고 심호흡을 하면서 눈을 부릅뜨고 풍광을 담았다. 자연의 경이로움에 감동하는 곳이다.
몇 해 전 궁금하여 가까이 가서 보았다. 수령이 몇백 년이 되는 느티나무 세 그루가 함께 하고 있었다. 세 그루를 한곳에 심은 느티나무는 처음 보았다. 천년에 걸쳐 만들어진 것 같은 웅장한 둥근 모양을 만들어낸 비밀을 알게 되었다. 주위에 살피 상과 제단이 있었다.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우람한 자태는 감동과 함께 오래전 관람한 동제가 떠올랐다.
어떤 마을 보호수 아래서 동제 굿을 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흥미진진하여 참관하고 나누어주는 떡을 먹으며 재미있게 구경하였다. 제사장 무당의 구슬픈 내용을 들으면서 눈시울을 적셨다. 자신이나 우리가 겪는 말 못 할 고통의 대다수가 비슷해서인지 공감을 가졌다. 메세이지를 전달하는 랩처럼 들렸다. 어떤 이는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면서 한을 풀어간다. 일제가 미신이라고 철저히 배격했던 이유가 우리들의 정체성으로 통합이 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었다. 좌우간 무당들은 슬픔과 환희심을 갖게 하며 치유하는 묘한 능력자들이다.
현실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행한 잘못의 반성을 몸으로 표현한다. 용서하고 노여움을 풀어가며 화해를 한다. 조직도 없는 원초적 신앙으로 우리를 위로한다. 협박도 없다. 나눔을 삶의 해법으로 제시한다. 군더더기가 없는 단순함은 감동으로 연결된다. 떡으로 나눔을 실천하는 것으로 행사는 막을 내린다. 볼거리가 별로 없었던 옛날에 요즘 연예인처럼 인기가 있었을 것이다. 다른 종교처럼 발달할 수 있었을 텐데. 진보가 중요함을 느꼈다. 자존심의 근원인 자아를 버리고 무아로 돌아간 시간은 행복했다.
그렇게 많은 한을 일시에 소멸하고 다시 시작하는 과정을 보았다. 자기로부터 시작한 원인이 결과로 나타난 것을 반성하고, 새로운 원인을 만들어 새 인생을 살고자 다짐을 한다. 우리의 민속신앙은 떡으로 나누며 배부르게 하고 애환을 노래해서 마음마저 정화한다. 오직 현재를 철저히 살고자 다짐한다. 수백 년 전 평균수명이 이십 대 중반이었음을 상기하니 한풀이는 생활 가운데 있었음을 알게 된다. 삼신이 언제나 우리들의 중심에 있었던 이유가 아닐까?
한그루 느티나무도 웅장한데 왜 세 그루를 심었나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모계사회의 유습인 서낭당을 오가며 자식들이 무병장수하길 어머니들이 빌었던 흔적으로 나타난다. 나무 심기를 주도한 사람이 모계 절대 존재인 삼신을 생각하며 세 그루를 심었다. 그는 민속학자로 우리들의 정체성을 생각하며 느티나무 세 그루를 심었을 것이다.
‘우리는 창조주 유일신을 믿은 최초의 민족이다. 위험할 때 부르는 “아이고 하느님”이 마고 삼신이다. 마고를 믿는 여러 민족이 모인 민족이 한민족이다. 모계 유일신으로서 마고 할머니의 후손이라고 믿는다. 우리들의 신앙체계는 만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마고 하나님의 두 딸 궁희와 소희를 합쳐서 삼신이다. 인간과 직접 소통하는 신은 중간 신으로 궁희와 소희는 여제사장과 소통을 한다.’
서낭당에서 제의할 때 떡과 과일 등을 놔두어 주위 생명이나 배고픈 이방인 등이 먹게 했다. 홍익인간으로 살고자 했던 우리는 까치밥을 남겨둔 것처럼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이다. 느티나무 잎사귀를 말려 가루 내어 만든 떡은 보관이 쉽고 나누어주기도 좋으며 맛도 좋다. 부인병에도 좋다고 한다. 모계사회와 함께한 느티나무는 여성의 몸과 마음을 도와 삼신과 교통하는 창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