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지름길
할머니가 다닌 소리 길을 좋아한다. 일면식도 없는 할머니의 모습을 생각나게 하는 아름다운 곳이다. 거창 모동리에서 성주 대가면을 가는 지름길이다. 거창 수도산 자락 인현황후 길과 연결된 소리길이다. 할머니에게는 생명을 지키기 위한 지름길이다.
거창은 풍광이 뛰어난 곳이다. 산수화의 소재가 되는 곳이다. 이에 걸맞게 질 좋은 한지를 모동리에서 많이 생산했다. 무명 화가로서 할아버지는 딸만 있는 전주이씨 가문에서 귀하게 자란 막내딸과 혼인하였다. 거창읍에서 주요 행사나 잔치 등에 쓰이는 병풍 가계를 하였다. 비밀연락책으로 적합한 업이다.
1920년대 초 거창읍 일제경찰서(헌병대)에 독립운동 일 세대 동료들이 구금되었다.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경찰서를 습격하였다. 일제에 발각이 되어 할아버지를 포함해 여러 사람이 총에 맞아 돌아가셨다. 일명 거창 경찰서 폭거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 아버지가 모동리 무월부락에서 태어 난지 칠 날이다.
동네 사람들이 소식을 전하면서 아버지의 형과 누나는 큰집에 두고 피하라고 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초라한 장례를 앞산 중턱 먼발치에서 보았다. 얼마나 비통했겠는가? 소리 길로 넘어가면서 보니 동네에 불이 나고 난리였다고 한다. 할머니는 갓 태어난 아버지를 업고 해산도 제대로 못한 채 큰길을 피해 소리 길로 성주에 갔다.
경남에서 역할을 했던 할아버지의 족적을 피해 종씨였던 경북 성주의 심산 김창숙의 집에서 잠깐 살았다. 친정집으로 갈 수도 없어 할아버지 동료의 도움으로 증산면 수도산 중턱 화전민으로 핏덩이를 키우며 살았다. 초라한 건물을 보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일제의 눈을 피해 막내아들을 보살펴야 한다는 일념으로 하루하루를 견뎠다.
아버지가 일곱 살 되던 해, 재가하려고 모동리 큰집에 데려다주고 나오면서 작별을 고했다. 눈치를 챈 아버지는 할머니를 따라 나서서 평생을 함께 했다. 할머니는 아버지의 형과 누나를 무척 그리워했지만 돌아가시는 날까지 보지 못했다. 언제나 대로가 아닌 소리 길로 피해 다녔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아버지가 무학이라는 사실로 입증이 된다. 지금은 작은 동네로 변한 사실에서도 이해된다. 할머니에게 소리 길은 생명을 살리는 지름길이다.
할머니는 내가 태어나기 칠 날 전에 돌아가셨다. 우연히도 할아버지와 같은 날 돌아가셨다. 얼마나 그리웠으면 같은 날 돌아가셨을까? 할아버지를 만났을까? 나라를 잃은 설움보다 삼십대에 청상과부가 되어 힘겨운 삶을 살았던 할머니는 해탈했을 것이다. 할머니 덕에 내가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어깨가 무거워진다. 녹색 생명 운동이나 여권신장에 관심을 가졌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이다. 고마운 마음으로 제삿날 인사를 한다. 할배 할매 고맙심더.
항상 새로움을 안겨주는 자연은 살아있음을 알게 한다. 나보다 오래 살아가면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자연은 우리에게 암시를 준다. 다시 오게 됨을 일러준다. 숲속의 나무에게 묻는다. 다시 올 때 그리운 너희들을 볼 수 있을까? 내세를 믿는 이유가 어떠한 형태로든 다시 만나고 싶다는 그리움에 있는 것 같다.
숲을 가꾸는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안고 간다. 할머니가 간 소리 길 풍광에서 위로를 받는다. 평민이 되어 청암사로 걸어갔던 인현왕후의 발자취를 함께한 할머니의 생명 길을 따라가 본다. 그 길을 걸으면서 해야만 하는 일을 방해받아 겪었던 어려움은 별거 아님을 일깨워준다. 국가의 미래를 위한 일로 인해 상당한 금전적 손실이 있었음에도 아깝지 않다.
우리들의 조급증은 인생을 힘들게 하고 있다. 학대 수준의 지나친 학업으로 우리의 젊은이들을 망치고 있다. 일제가 심어놓은 망조 바이러스가 대상포진처럼 나타나고 있다. 마치 신 카스트제도에서 사는 것처럼 변모한 사회가 낯설다. 우리가 당한 고통은 저력으로 남아있다. 이런 나라가 어떻게 망할 수 있는가. 새로운 분배양식을 구현하기 좋은 4차 산업혁명은 우리에게 좋은 것 같다. 풍부한 상상력과 도덕성을 가진 홍익인간은 4차 산업혁명의 방향성과 같기 때문이다.
해결해야 할 일이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가야산과 수도산 주변을 돌아보며 반성하고 다시 시작한다. 할머니가 생명을 지키고자 했던 소리 길을 천천히 걸으면서 이미 있는 해법을 검증해 본다.
맘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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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의 성을 존중하며, 쌓아 가는 공공선은 적극적 복지사회를 만드는 원동력이 됩니다. Respect the sex o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