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
그릇은 사랑을 담는다. 초등시절 연탄제로 놋그릇을 닦는 어머니의 모습은 즐거움으로 가득했다. 광이 나는 놋그릇의 금빛 때문도 아닌 것 같다. 놋그릇에 담는 음식의 화려함도 아니다. 가족들이 깨끗한 그릇에 담긴 음식을 먹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다.
공기그릇보다 몇 배가 큰 밥그릇에 사랑을 꽉꽉 눌러 담는다. 밥을 다 먹고 빈 그릇을 보이면 함박웃음을 지으신다. 함박웃음 때문에 지각한 적도 있었다. 몸이 튼튼해야 총기가 있다고 했다. 굶지 말고, 밥 잘 먹어 건강하게 살라고 당부한다.
장모님도 큰 밥그릇에 밥을 가득 담는다. 다 먹지 못하여 미리 덜어 둔다. 예쁜 그릇에 정성을 다한 음식들은 맛도 좋다. 음식을 다 먹고 그릇이 예쁘다고 하면 그냥 주신다. 방문할 때마다 그릇 몇 개씩 주신다. 어머니들의 공통점은 일제강점기에 배고픔을 겪었다는 사실.
20세기 초엽 우리나라 인구가 1,200만 명 정도였다. 일제가 수탈한 양곡은 600 만석이었으니 600 만석이 부족하다. 부역자들의 착취로 인한 인플레로 민중들은 하루 한 끼 해결도 힘겨운 혹독한 시절이었다. 고대 한국부터 밥심으로 살아간 한민족이 40여 년간을 춥고 배고프게 살았다. 체형도 왜소해지고 인간성도 변형이 되었다. 본래 홍익인간 한민족은 밥을 많이 먹어 덩치가 크고 힘이 센 민족이라고 알려져 있다.
당시 프랑스의 어느 선교사가 ‘조선인은 왜인보다 훨씬 크고 피부가 희며 근엄하다’라고 전한다. 이폴리트 프랑댕은 ‘아리안족에게서는 흰 피부와 큰 키, 건장한 체형, 노란머리칼과 수염을 물려받았다. 한국인은 자신의 육체적 우수성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이런 자만심은 그들의 용기를 한층 자극한다. 날카로운 눈매, 유연한 몸동작은 몽골족으로부터 물려 받았다’고 했다.
‘장교들과 병사들은 그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에 감탄했고 우리는 이런 감탄사를 수없이 들었습니다. “얼마나 좋은 기후, 얼마나 풍요로운 나라인가! 우리가 코친차이나가 아닌 이곳에 자리를 잡았더라면….!’ —샤를르 달레의 ‘한국교회사’, 1874년 —
이 정도만 해도 큰 밥그릇을 사용한 민족임을 알 수 있다. 선조들이 쌀의 우수성을 어떻게 알고 농사를 지었을까.
배고픔을 겪은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이 학창 시절 하숙집의 공기밥그릇에서 나타났다. 처음에 배가 고파 세 그릇을 먹었지만, 눈치가 보여 두 그릇으로 줄었다. 밖에서 군 것 질을 하며 배를 채웠다. 하숙집 공기 밥과 어머니의 밥그릇의 크기에서 서울에 대한 기대는 실망으로 변했다. 조선왕조 시대의 속담인 ‘말이 나면 제주도로 사람이 나면 서울로 가라’는 말을 의심했다.
각박한 삶을 살려고 기를 쓴 결과가 일본에 지배를 받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흩어지라고 한다. 지금도 시대에 역행하는 삶으로 인해 천문학적인 돈을 찍어내고 있다. 빚이 없어야 살 수 있는 100시대에 빚으로 살고 있다.
각박해진 오늘날 밥그릇도 작아지고 쌀 소비도 적다. 마음의 그릇도 작아지는 것을 느낀다. 한민족은 큰 밥그릇처럼 마음의 그릇도 크다. 홍익인간으로 살고자 하는 신념이 말해주고 있다. 반만년 역사를 이어온 저력에서 밥 힘이 느껴진다. 빛나는 그릇에 밥을 꾹꾹 눌러 담으며 웃으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사랑을 담은 장모님 그릇들은 아름답고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