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신분제 사회에서 상인의 지위는 낮았지만, 칭기스칸의 세계화로 동서양의 문물교류가 폭증하면서 대상인으로 변모하게 되어, 소위 자본가로서 영향력을 갖게 되었으며, 후일 자유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르네상스를 주도하면서 상업주의가 등장하게 되었고, 이어서 발전된 것이 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근대사회가 성립하게 된 배경에는 상업과 관련성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즉 유럽의 봉건영주들은 부와 명예와 권력의 상속으로 봉건귀족들은 전쟁과 같은 외부환경의 급격한 변화가 없는 한 절대적 위치였지만, 상업주의의 영향으로 인하여 귀족들은 대부호와 결탁하여 재산을 축적했고, 귀족의 재산을 차용하고, 재투자한 결과 거대상인이 되어 귀족의 토지를 소유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 대상인들은 사회적 지위를 획득할 수 있게 되면서, 신분제로써 봉건 체제는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하여 영원히 변치 않을 것만 같았던 절대 봉건의 신분제 사회가 서서히 변화하고 있는 가운데, 시민들은 자연법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근대사회를 성립할 수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즉 중산층으로, 지식인으로서 시민이 자연법사상을 더 많이 이해하고 토론함에 따라 세습을 하던 봉건귀족보다 상당한 실력을 갖춘 것이다. 당시의 자본가들은 이미 자산을 운용하는 능력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으며, 현실 생활에서는 상업주의가 보편화되어 있었다.
하여 자본의 축적이 쉬워진 만큼,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는 이윤의 증대가 금력으로 실질적인 힘으로 작용하면서부터 봉건귀족의 권력이 약화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로마제국이 멸망한 후 오랫동안 기독교에 의해 정치 공백이 있는 가운데, 형성된 자유주의 사조가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발전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하여 절대 봉건제 사회이면서도 종교적 입장에서 절대 유일신의 피조물로써 인간은 누구나 대등하다고 생각한 독특한 역사에서 자유주의가 발현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3세기 징기스칸의 세계화로 인하여 유럽이 암흑시대를 벗어날 수 있었으며, 징기스칸의 동서 문물교류와 상업 활성화 정책은 대상인의 정치적 영향력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게 한 결과 르네상스 시대를 열게 된 원인으로 작용했다.
그리고 산업혁명으로 인한 자본 수요의 증대는 토지 등의 고정자산을 자본으로 투자하게 됨에 따라 토지의 금융적 기능이 확대되었으며, 이는 금력과 권력이 분리되는 계기가 되면서 봉건귀족의 몰락을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하일브루너가 자본주의 성격에 대해서 “자본도 재산이지만 자본의 가치는 물리적 특성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양의 자본을 창조하기 위해 자본을 사용하는 데 있다”고 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106)(하일브루너, 43p)
초기 자본주의사회에서 자본가는 사용자로서 노동자를 노예 이하로 대우하며 가혹하게 부릴 수 있었다. 물론 당시의 기독교는 자본가의 기부에 의존해야만 하는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가혹한 착취에 대해서 도덕적 비판이 강력하지 못했다. 하여 사회적 책임을 전제한 권력의 지배보다, 사회적 책임이 없는 금력에 의한 지배가 가혹하였음을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절대 봉건제의 성격을 이은 배금주의로 형성되는 권력의 획득을 위해 착취가 심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하일 브루너 교수는 자본주의의 절대주의적인 성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자본주의는 항구적인 변화의 특징을 가진 사회일 뿐 아니라 고대의 군사적 위용과 개인적 위엄이 했던 것과 똑같은 무의식적 목적을 이제는 자본의 충족을 추구하는 사회로 보인다.” (107) (하일브루너, 45p)
이는 서구문화의 근간이 되는 기독교가 오랫동안 의식을 지배한 역사적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중앙집권의 로마제국이 멸망하기 전부터, 이미 절대 유일신 종교인 기독교가 교황체제로 권력이 유지되어 있었으며, 로마가 멸망한 후 봉건 도시국가로 분화된 유럽은 종교제국으로 있었지만, 13세기 칭기스칸의 세계화로 중세유럽의 암흑기(3세기~13세기)가 무너지고, 문물교류가 활발하게 전개되면서부터, 동양의 민본주의, 인문학, 과학기술과 지식, 문화 등은 서구지식인들을 자극하게 된 것이다.
이는 인본주의(상대주의)로써 경험주의가 발달케 되었고, 기독교가 불확실하게 된 가운데, 상업주의가 발달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기독교의 절대 존재를 숭배하면서 성립한 절대 봉건제에서 돈을 숭배하는 배금주의(물신주의)로 변모한 것이다.
하여 동양이 ‘존재의 삶’을 중시하여 자신을 연마하여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을 권장한 것과 서구가 ‘소유의 삶’을 중시하여 형성된 배금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름을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동양의 경우, 인간은 천지 만물의 주체임에 따라 만물 상호 간에 조화를 중시했던 반면, 서구는 창조주의 피조물로써 인간을 자연의 부분으로, 객체적인 존재로 생각한 사실에서도 차이를 알 수 있다.
하여 동양은 불가지(不可知) 세계에 대해서 단정적이지 않으며, 주체로써 인간은 상호 간 유대를 위해 이성의 한계를 인정하는 조심성 있는 사회였다고 할 수 있다. 즉 동양은 오래전부터 인본주의 전통이 있으며 진리 탐구를 중시하는 사회였다.
물론 동양철학은 절대 존재의 의지에 의한 삶을 산다고 생각한 서구의 부계 신본주의에 비해 불확실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서구가 중세암흑기를 벗어나면서 불확실한 사회가 되었던 것을 상기해본다면, 동양의 인본주의가 합리적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고대 동양에서는 극단적인 것을 불확실한 것으로 생각하면서 중용의 삶을 살았던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중세유럽은 불확실성의 시대가 형성되면서 유발된 아노미 현상으로 혼란함에 따라 공리주의자인 홉스는 제3자로써 전체주의 국가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를 억제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는 유럽이 부계 신본주의와 인본주의와 갈등을 겪었던 르네상스(문예부흥기) 시대를 상기한다면 이해할 수 있다. 이후 상업주의의 발달로 유발된 산업혁명을 뒷받침하기 위한 자본주의가 아담스미스에 의해 창안하게 되었다.
이어서 산업혁명이 사회체제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 가운데, 일어난 시민혁명이 성공함으로써, 성립된 근대사회가 자유경쟁(계약)을 위한 자본주의 체제를 만들었다. 즉 자본주의가 나폴레옹 민법전으로 명문화함으로써 공식화된 것이다. 하여 자본주의가 무한축적을 위한 탐욕을 법과 제도로써 정당성을 획득함에 따라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사회에서 경쟁기업을 시장에서 퇴출케 하거나, 적대적 합병을 통해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는 등 약육강식의 적자생존 논리로 여타의 합법을 가장한 부도덕한 일련의 일들이 많았다. 예를 들어 자유기업에서 최대이윤을 위해 노동자를 경쟁시키고, 갈등을 조장하며, 조기퇴직을 유도하는 등으로 착취를 하는 것은 오늘날에도 원칙으로 적용되고 있다. 따라서 부에 대한 도덕성 시비가 끓이지 않고 있지만, 자본주의 자체가 부를 이루기 위한 체제임에 따라 한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서 하일브루너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마르크스는 ‘한 명의 자본가는 늘 여러 명을 죽인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순전한 팽창의 기운 외에 부분적으로 공격적이면서도 부분적으로 방어적인 전쟁의 기운이 싹튼다”고 하였으며 (108) (하일브루너, 45p), 또한 “엄청난 재산이 있는 곳에는 어디에나 엄청난 불평등이 있다 … 풍요로운 부는 다수의 궁핍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것은 아담스미스의 말이다.” (109) (하일브루너, 39p)
이처럼 초기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외적으로는 가혹한 식민정책으로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수탈이 정당화되었고, 국내적으로는 고도로 착취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절대빈곤층의 양산, 인간에 대한 불신과 증오심, 절박감 등 불안정한 사회를 극복하려는 방편으로 외부에 핑계를 대고자 하거나, 이해관계의 충돌로 인한 갈등과 적개심 고취 등의 복합적 원인이 전쟁으로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
하여 돈을 숭배하는 배금주의에 기초한 자본주의가 적대적 정서를 만들고 있음을 다음 예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벼랑 끝에 몰린 자유기업가(자본가)들은 산업재해를 만들고, 산재를 당한 가정은 해체되었으며, 이어서 해체된 가정의 모성들은 자식들의 생계를 위한 매춘으로 인격 파멸에 이르렀던 사실을 베벨의 글에서 이해할 수 있다.
“1877년 뮌헨에서는 경찰의 장부에 등록되어 감독을 받는 매춘부들 중 노동자나 수공업자의 아내가 최소한 203명은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밖에 얼마나 많은 기혼여성이 경제적 궁핍 때문에 수치심과 인간의 존엄성을 깊이 손상당한 채 경찰의 감시를 피해가면서 몸을 팔고 있었다.”
이처럼 초기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모품으로 전락하게 된 사회적 약자는 기업이나 정부나 어디에도 기댈 수 없는 처지가 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자유주의가 자유경쟁을 방해하는 국가개입주의 거부하는 무정부 수준의 야경국가를 추구함에 따라 자본가가 노동자를 노예처럼 대우할지라도, 자유계약이라는 미명하에 국가는 방관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노동자는 조세나 병역 등을 위한 의무만 있었다. 따라서 국가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자유주의가 노동자의 경우 오히려 자본가로부터 억압을 당할지라도, 정부는 개입할 수 없음에 따라 오히려 대다수 사람이 상당한 곤경에 처하였음을 알 수 있다.
1.4 소극적 복지국가를 넘어
구시대 신분제 사회에서 상인은 비교적 낮은 신분이었지만, 시민혁명의 자금을 지원한 중소자본가는 시민혁명의 성공으로 주류가 될 수 있었다. 하여 사람들은 근대사회의 성립으로 자본주의가 공고화됨에 따라 권력보다 사회적 책임이 없는 부를 축적하여 자본가가 되고자 열망했다.
왜냐하면 갖가지 비열한 방법으로 도덕적 비난을 받을지라도 부를 이루려 한 것은 자본주의사회에서 금력이 현실적인 힘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무자비한 착취로 인한 빈곤과 과잉경쟁과 이해관계의 충돌 등으로 인한 민중들의 고단함으로 인한 저항이 상당함에 따라 사회권(노동 삼권)을 인정한, 바이마르 헌법이 복지국가를 천명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바이마르헌법에서 복지국가를 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소극적 복지국가를 시행한 것은, 공산주의가 소련을 중심으로 국제사회에서 확산이 된 가운데 제2차 세계대전 후 구체화 되었다. 그리고 70년대 후반 공산주의가 약화 될 무렵부터 선진국을 중심으로 한, 비 복지적인 자본주의의 본질에 충실하겠다는 신자유주의가 등장하였다.
이러한 이유에 대해 고 철기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첫째, 국제교역의 자유화 흐름 속에서 이들 선진국의 기업들 역시 국제경쟁의 높은 파도를 헤쳐나가야 하는 상황을 맞고 있어 생산시설의 자동화 및 해외이전, 중간재의 해외구매, 감량경영, 해외직접투자 등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둘째,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 이후 개인의 이기심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 경제이념이 마치 절대적으로 우수한 사상인 것처럼 인식되면서 기업들은 국내 고용의 확대나 건전한 투자 등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경시하는 반면에 이윤극대화의 목표는 그 어느 때보다 강조하고 있다.” (111) (고 철기, 22p)
이처럼 자본주의를 강화하는 신자유주의로 인하여 인류는 ‘경제적 동물’의 삶으로 단순해지는 가운데, 거대규모의 거래와 더불어 무한축적을 위한 무한 경쟁은 전쟁의 수준으로 과격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자본주의 속성인 상극의 삶은 전체가 불안케 되는 위험한 사회를 만들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야만성은 역사발전과 함께 퇴화가 되어야 함에도, 자본주의로 인하여 유발되는 사회병리 현상이나, 인간성 황폐화 유발 등의 결과를 볼 때, 오히려 야만성이 배양되고 있다는 뜻이다. 이는 오늘날 세계인구 70억이 부에 의한 서열화와 아울러 세계적인 절대적 양극화로 인한 결과인, 9.11테러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여 비복지적인 자유방임주의가 사회법을 수용한 국가자본주의로 발전하였다면, 지구촌 시대에 필요한 적극적 복지사회로 역사 발전해야 함에도, 탈 복지국가를 원칙으로 하는 세계자본주의로써 신자유주의가 등장한 것은 역리임에 따라 위험한 사회를 벗어나기 어려운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자본주의로 인하여 유발되는 극단적인 현상들은 위험한 사회를 공고화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탈 자본주의적 정치경제 제도가 성립되어야 적극적 복지사회가 가능하게 됨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지구촌 시대에 이르러 첨단 과학기술로 인하여 형성된 양극화로 고실업이 만연하고, 과소비, 환경오염, 투기자본의 글로벌, 개인 첨단무기 발달 등으로 볼 때, 분권적인 민주주의에 걸 멎는 새로운 분배양식을 준비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서구적가치에 대해서 인류의 위대한 유산인 근대사회의 성립과 과학기술문명을 이루어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은 긍정적이지만, 반면에 ‘소유의 삶’으로 인한 상극의 삶을 살게 된 결과인 제국주의로 피해를 본 피식민지는 해방 후에도 혼란과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한 점에서 부정적이다. 즉 양극화나 환경문제 등으로 형성된 위험한 사회의 원인 제공자로 그야말로 ‘병 주고 약 주고’하는 상태가 되게끔 한 서구적가치에 대해서 애증(愛憎)이 교차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하여 서구의 자본주의를 핑계로 하여 보상이 없는 사과나, 반성이 없는 합리화로 양극화를 정당화하거나, 공해로 인한 산성비, 지구온난화로 인한 생태계 파괴로 식량 감소 등으로 원망하는 마음을 갖게 하거나, 위험한 사회가 형성된 것 등에 대해서 선진국은 묶은 자가 풀어야 한다는 의미인 결자해지(結者解之)의 태도로 문제해결에 앞장서야 함을 알 수 있다.
이는 선진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를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 공고화함에 따라 이를 거부하는 세계 여러 지역에서 테러와 전쟁을 벌이는 새로운 위기가 유발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인간의 본질인 내면세계를 비경제적인 것으로 생각하여 무관심하며, 물욕을 배양함에 따라 때를 놓치는 경향이 있는 것이 문제이다.
즉 대량소비로 인한 천연자원의 고갈과 환경오염, 대자연 훼손의 복원 등을 위해 첨단 과학기술로 극복하고자 하는 만큼, 천문학적 비용으로 인플레를 유발하고 있음에 따라 경황이 없는 것이다. 또한 지난날 식민지배를 받은 국가의 경우, 서구의 기독교가 전 세계를 상대로 한 이단의 논리와 명분으로 수탈을 합리화한 배타적 종교로 인식함에 따라 오랫동안 기독교와 대립했던 이슬람교가 세계 제3의 주요 종교가 되었으며, 반자본주의적 사회가 되었다.
뿐만이 아니라 제삼세계 국가는 선진국 중심의 신자유주의를 신제국주의로 생각하며, 내심으로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이 되느냐’고 저의를 의심하고 있다. 이러한 반서구적 정서가 이슬람적인 세계동포주의와 제삼세계의 조직 원리가 되어 세계화함에 따라 세계 각 지역에서 테러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
물론 테러는 제삼세계와 더불어 어떠한 지역에서도 언제나 가능하며, 상당한 파괴력을 전 세계의 매체로 전달됨에 따라 이로 인한 불안심리가 매우 크게 작용하는 특징이 있다. 즉 첨단 개인 무기와 반자본주의 명분과 함께 서구인들에 대한 증오심을 조직원리로 한 테러는 신념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공포를 더 많이 느끼는 것이다.
이는 끝없는 테러의 공포가 전 세계에 걸쳐 천문학적 사회적 비용을 유발하는 원인이 되고 있으며, 이로 인한 조세부담과 양극화로 인한 복지 수요증대 등은 고비용 저효율의 사회가 되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뿐만이 아니라 자본주의사회는 갈등이 증폭할수록 비시장적인 군수산업의 확대나, 빈곤층의 양산이나, 경기부양책 등의 정책적 수요로 인한 지출이 비시장적인 부문에 진입한 자본가에게는 정경유착을 통해 오히려 자본을 획기적으로 축적했다.
물론 자본주의사회에서 자유기업은 최대이윤이 목적임에 따라 자본축적과정에서 유발되는 분쟁조차 이윤추구 수단으로 활용한 행위를 두고, 도덕적 비판을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가 정치, 종교, 내면세계 등 형이상학적인 부문까지 최대이윤을 추구하는 자유기업의 자본축적을 위해 사용될 수 있음을 정당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비인간적인 결정조차 면죄부를 받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음을 볼 때, 민주주의의 위기가 자본주의에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자본주의는 자유경쟁이 궁극적으로 사회발전에 견인하는 점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풍요 속의 빈곤’이라는 양극화를 공고화함에 따라 유발되는 빈곤층의 확대와 인간성 황폐화, 자원고갈, 환경파괴 등으로 볼 때, 오히려 위험한 사회를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자본주의는 자유경쟁으로 만들어지는 사회적 자산을 몇몇 자본가에게 집중케 함에 따라 유발되는 시장기능의 마비가 주기적으로 반복되고, 있음을 상기해볼 때, 인류에게 위기를 만드는 경제 제도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공황이 유발될 경우, 국가의 신용창조와 조세 등에 의한 경기부양책으로 시장기능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대자본가는 더 많은 부를 축적하고, 양극화를 가속화 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여 구시대 신분제에 의한 권력 양극화와 유사한 자본주의사회의 양극화를 벗어나기 위해 민주주의의 탈 양극화 본질에 충실한 모민주의의 ‘소유상하한제’를 근간으로 하는 적극적 복지사회로 진보해야 함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가 무한축적을 허용함에 따라 만들어진 위험한 사회를 극복하기 위해서 모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소유상하한제’의 성립을 위한 ‘모민주의’ 체제의 세계화를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모민주의’의 ‘소유상하한제’는 자유경쟁으로 획득한 개인의 소유가 어떠한 기준에 의해 잉여가 될 경우, 국가나 자치단체로 이전하여 인류의 적극적 복지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재원이나, 인류의 연구과제나 숙원사업 등에 사용되는 제도를 말하는 것이다. 물론 적극적 복지사회의 구현을 위한 생활 정치는 지역별 위원회가 분배에 참여할 것이다. 이는 지면 관계상 앞으로 출간 예정인 각론으로써 정치 편을 참고하길 바란다.
절대주의를 근간으로 했던 구시대가 퇴출이 되고, 상대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근대사회가 성립되었음에도, 무한한 축적을 정당화하는 자본주의로 인하여 인권선언은 선언적 의미로 머물러 있다. 즉 자본주의는 제국주의를 만들었고, 수많은 전쟁을 유발케 했으며, 냉전체제가 무너진 후 오히려 오늘날 대다수 사람은 빵을 얻기 위해 자유를 팔고 있다.
다시 말해서 철학적 상대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근대사회가 성립되었음에도, 구시대의 절대주의 유습은 배금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로 나타났음을 말하는 것이다. 즉 구시대 절대 유일신을 숭배한 것이 돈을 숭배하는 배금주의로 대체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 스스로 유일신의 피조물로써 인정함에 따라 정치의 주체가 유일신이 된 것처럼,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인간 스스로 돈을 숭배하여 돈의 노예가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하여 분권을 근간으로 하는 근대 민주주의 사회와 절대적 양극화를 만들어 가는 자본주의는 배치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문화적 존재로서 인간은 과당경쟁으로 삶을 극단화하는 논리나, 제도보다, 오히려 완만한 삶으로 ‘존재의 삶’을 넘어 만물과 화합하는 ‘관계의 삶’을 살 수 있는 체제를 만들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즉 인류의 이상인 적극적 복지사회를 구현할 수 있는 모계민주주의 체제를 말하는 것이다.
참고로 태고의 유습을 이은 모계 신본주의 사회가 인간은 신의 후손으로 순환 진보한다고 믿은 것은 영감을 통해 알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여 모계 신본주의 사회가 대우주 시스템에 의해 영혼과 육화를 반복하며 순환 진보한다고 믿음에 따라 ‘관계의 삶’을 추구한 사실을 믿는다면 손해는 없으며, 얻는 것은 무한할 것이다.
물론 인간이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첨단 과학기술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라는 믿음은 긍정할 수 있다. 또한 오늘날까지도 인간의 독특한 육감에 대해 과학자들도 근거가 없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실제로 인간의 뇌에 있다는 사실을 밝혀졌기 때문이다.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 소재 워싱턴大의 죠슈아 브라운은 어떤 상황을 처리하는 전두대피질(Anterior Cingulate Cortex: ACC)로 알려진 뇌 부분에 이런 육감이 존재하여 위험에 대해 경보를 울린다고 설명했다. ACC는 대뇌 전두엽의 위쪽 부근에 위치하고 있으며, 좌뇌 반구와 우뇌 반구를 가르는 벽을 따라 존재하는 부분으로 정신분열증과 강박 신경장애 등 심각한 정신질환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과학잡지 ‘사이언스’에서, 2005년 2월 18일자, 워싱턴 연합)
하여 문화적 존재로서 인간이 스스로 궁극적인 삶의 목표를 ‘해혹복본’으로 설정한 모계 신본주의 사회를 긍정할 수 있다. 따라서 부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 문제점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으며, 지구촌 시대에 부합되는 속성으로 인해, 유발되는 끝없는 갈등의 악순환을 단절하기 위해서 모계적 분배양식을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 정착하기 위한 부계와 모계가 균형을 이루는 정치경제 제도가 성립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인간은 생명의 경이로움에 감동하고, 무한한 상상력과 의문을 풀기 위한 탐구심으로 삶을 재창조하며 살아가는 영적 존재임을 긍정할 수 있습니다. 즉 모든 생명체가 독립적, 개체적임에 따라 영원히 살고자 하며, 굴복을 싫어하지만, 인간의 경우 스스로 창조한 문화(가치)에 복종하며, 주체로써 동식물을 비롯한 자연을 대상으로 하거나, 풍부한 상상력과 도구를 사용하여 재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점에서 신의 후손임을 긍정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내면세계는 굴복되지 않으며, 스스로 만든 전통에 복종하는 문화적 존재라는 점에서 모계 신본주의 사회가 믿었던 대모신 마고의 후손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은 창조적이며, 나눔으로 행복해한다거나, 종교적 심성을 갖고 있다는 점 등을 상기해본다면, 영적 존재임을 긍정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유일하게 문화를 가진 인간은 자신이 소속한 곳을 위해, 인류 역사발전을 위해, 때로는 가족을 위한 것, 등 이타적인 이유로 생명을 버렸던 살신성인의 정신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여 인간은 아무런 이유 없이 인간 상호 간에 지배받는 것을 본능적으로 싫어하지만, 사회협동이 필요한 정당한 이유가 있을 때, 스스로 복종한다는 사실에서 문화적 존재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전체주의 사회가 이기적인 목적에 의해 구성원을 강제하는 경우, 스스로 복종했다고 하기는 무리가 있겠지만, 공동체 존립의 정당성인 정체성이나, 오랜 전통으로 이루어진 문화적 풍토에 의해 적응해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사회는 돈이 인격이라는 등식을 설정한 배금주의가 순리임에 따라 만약 이를 거부하는 개인이 있다면 외로운 무인도에서 로빈슨 크루소처럼, 격리되어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절대 봉건제 사회가 퇴출이 된 후, 근대사회의 성립으로 자본주의가 공고화됨에 따라 형성된 배금주의는 인간이 지켜야 할 보편적 가치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서구의 독특한 역사적 배경에서 만들어진 자본주의가 태고부터 염원한 인간의 이상으로써 적극적 복지사회를 구현할 수 없음을 신자유주의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산업혁명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만들게 되었고, 이로 인한 생활양식의 변화는 근대사회를 성립하게 하였으며, 이후 학문과 과학기술 등은 획기적인 발전을 한 것은 자본주의의 긍정적인 측면이지만, 탐욕의 배양으로 주체할 수 없는 욕구 충돌이 대량 살상무기를 만들게 되었으며, 양극화, 환경오염, 지구온난화, 생태계 파괴 등으로 인해 불행한 인생을 살게 된 세상의 절대다수의 빈곤층으로부터 원성을 사고 있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초기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성립된 국가자본주의(복지국가)는 관료제를 비대케 했으며, 중앙집권의 강화로 의회정치가 위기를 맞거나, 절대적 양극화현상 등으로 인하여 여전히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고달픈 삶을 살고 있습니다.
즉 자유주의가 물질의 풍요로 행복한 인생을 살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마치 여러 사람이 먹는 일정한 양의 샘물을 펌프질하거나 독점한다면 샘물이 고갈되어 여러 사람이 곤경에 처하는 것처럼, 인간의 탐욕을 정당화한 자본주의는 결과적으로 수많은 사람이 빈곤하게 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이는 자본주의의 결과로 만들어진 배금주의가 의식을 지배하면서 위험한 사회가 만들어진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여 지구촌 시대를 사는 문명인 신인류는 한정된 자원으로 무한한 물욕을 채울 수 없다는 사실과 함께 평화가 행복한 삶을 살게 한다는 점을 알고 있음에 따라 ‘존재의 삶’과 아울러 ‘관계의 삶‘을 살 수 있는 새로운 체제가 성립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자본주의사회는 비인격적인 금력이 사회적 책임을 부담하지 않으면서 권력을 만드는 실질적인 힘이 있음에 따라 책임을 전제한 권력보다, 무책임한 금력을 선호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이는 일반의사에 의해서 형성되는 권력이나 인격에 복종하는 것이 아닌, 이해관계의 충돌로 비롯된 제국주의로 인한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빈번한 공황 등에서 자본주의사회 특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자본주의자가 중산층 중심의 다이야몬드형 사회구조로 발전한다고 예측한 것과 달리, 오늘날 현실은 절대적 양극화가 공고화되어 절대 봉건사회처럼 첨탑의 피라밋형으로 빠르게 변모한 사실에서도 자본주의가 비민주적임을 알 수 있다.
즉 무한축적을 정당화하여 탐욕을 배양하는 자본주의는 근본적으로 다이야몬드형 사회를 만들 수 없습니다. 이는 다른 어떠한 것이 혼합될 여지가 없는 강력한 원초적 본능을 자극하는 자본주의는 오늘날 비민주적인 1대 99라는 절대적 양극화로 위험한 사회가 형성된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소유의 삶’을 위한 체제로써 자본주의는 돈이 어른 노릇을 하는 경박한 사회가 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여 수만 년 동안 진보한 인간의 위대함을 파괴하는 위험한 자본주의는 막을 내리고, 모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적극적 복지사회가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 자리 잡아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첨단 과학기술을 이루었으며, 우주를 해석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임을 생각해볼 때, 완만한 성장으로 여유를 갖고, 내면세계를 탐구하기 위해 ‘관계의 삶’이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중세 유럽은 규모가 작은 지역경제 수준이었지만, 항해술의 발달로 교역과 식민개척이 확대됨과 아울러 신기술에 의한 발명품은 공급자 중심의 경제로 발전하여 대량생산이 필요함에 따라 일어난 제1차 산업혁명으로 인하여 만들어진 자유방임주의로써 아담스미스 자본주의는 소상공인으로 제한했습니다.
하지만 농노들에게 임금노동자가 된다는 새로운 희망과 자본가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과 더불어 신분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영지 탈출을 위한) 돈벌이에 올인(all in)함에 따라 아담스미스의 작은 자본주의는 의미를 잃고, 대규모 법인으로 이루어진 대 자본주의가 되었습니다.
이는 산업화로 인한 인구의 도시집중은 노동의 공급초과로 입에 풀칠하는 정도의 저임금으로 노예보다 힘든 생활을 한 사실에서 아담스미스의 뜻인 소 자본주의와 다른 사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당시의 조악한 방직기는 여성이나 청소년들의 노동력이 필요하였으며, 기계를 보조하는 소모품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물론 여성을 노예 수준의 저임금 노동자로 착취를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은, 오랫동안 여성 소외의 서구문화 영향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중세 암흑시대를 이어 17~18세기에 이르기까지 초야권이 있었던 사실에서 남녀가 10대 1의 극단적 차별이 이었던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서구는 부계 유일신이 지배하는 절대주의 사회로써 오랫동안 절대 존재의 피조물인 인간을 출산하는 모성을 수단으로 경시한 결과입니다.
하여 모계적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절대주의 사회에서 형성된 자본주의가 돈으로 돈을 버는 것이나, 무한축적을 정당화하는 등으로 유발된 위험한 사회를 멈추기 위해 자본주의 분배양식을 보편적 가치로 한다면 곤란함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자본주의가 경제 규모를 증대케 한 만큼, 경제가 삶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됨에 따라 인간이 ‘경제적 동물’로 살 수는 있지만, 영적 존재로서 인간에게는 가능한 ‘존재의 삶’을 근간으로 이루어지는 ‘관계의 삶’을 사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물론 철학적 상대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에 부합되는 모성의 구심력과 부성의 원심력이 균형을 이루는 모계 민주주의 분배양식으로 진보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세상의 반인 여성문제는 시효가 없는 인류의 문제로써 모계적 분배양식을 구현하는 체제의 성립은 보상의 의미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무한한 자본축적이나, 최대이윤이라는 자유기업의 궁극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경쟁한 결과, 양극화나, 인간성 황폐화, 환경오염 등으로 위험한 사회가 되었음에도, 자본주의가 인간의 이기심을 동기유발로 함에 따라 책임을 묻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절대주의적 풍토에 의해서 만들어진 자본주의는 ‘소유의 삶’을 우선하여 삶을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초기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들은 자본축적을 위해 노동자를 생산도구나 소모품처럼, 대우하거나, 혹독하게 착취하는 등 기고만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합법적이었던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국가 불개입을 원칙으로 하는 자본주의는 합법을 가장한 야만을 정당화한 제도였습니다. 하지만 주기적 공황으로 시장기능이 마비되면서 수많은 자유기업이 도산함에 따라 개입주의가 자유기업에 유리함을 알게 되면서부터 자본주의를 수정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아담스미스의 주장대로 개인 기업이나 소 법인으로 제한한 기업 등으로 경쟁을 한다면, 정부개입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즉 아담스미스의 경고를 무시한 대기업의 등장은 주기적으로 시장기능이 마비된 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정부의 개입을 수용해야만 했습니다. 따라서 대기업의 등장으로 국민이 부담하게 됨과 동시에 초국가적인 다국적기업의 시장진입은 세계평화에 악영향을 끼치는 원인이 됨을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신자유주의처럼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국제 분업화가 빠르게 형성됨과 동시에 어느 한 지역의 보호주의로 인하여 문제가 발생한다면, 전체에 상당한 파급이 있음에 따라 긴장 관계가 조성된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이해관계의 충돌로 인한 개인화기의 발달과 마치 채권자가 채권을 회수하기 위한 협박처럼, 실력행사를 위한 수단으로써 군수산업이 발달한 경우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초국가적인 거대기업 간의 무한경쟁으로 인한 중소기업의 감소로 고실업 사회가 됨에 따라 위험한 사회가 되었다. 따라서 탐욕을 정당화하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자유기업은 정경유착에만 관심이 있을 뿐, 정치나 세계평화 등에 대해서 무관심함을 알 수 있다.
즉 자본주의사회는 어른이 없는 사회로써, 마치 유아처럼 사회에 대해 무책임하고, 공익을 위한 정치 권력이 약화 되면서 사회통합을 이루기 어려운 사회인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는 정치를 무력하게 만들었음에도, 위기에 처했을 때는 정치적 결정으로 수습이 되고 있음을 생각해 볼 때, 이익을 위해 편리한 데로 해석하는 상업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자본주의의 자동조율기능이란 비현실적이라는 사실이 이미 증명되었다.
하여 상업적 속성을 본질로 하는 초기자본주의가 동일 문화권에서 사는 내국인에게도 자유계약이라는 명분으로 노예보다 더한 저임금이나 고리대금 등 착취의 정당화를 되풀이하는 신자유주의는 영적 존재임을 인식하게 된 신인류와 불합치함을 알 수 있다.
또한 초기자본주의의 무책임한 유아적 태도가 당시 유럽의 소규모경제에서 적합했지만, 지구촌 시대의 천문학적 규모에서는 자본주의가 부적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보화시대를 맞아 시장 자동조율을 위한 ‘소유상하한제’가 실현 가능함에 따라 신인류에게 적합한 새로운 분배양식이 세계화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민주주의의 공고화와 첨단 과학기술 시대를 이룬 자체가 모계 신본주의 사회가 인간 스스로 대모신의 후손으로 믿었던 사실을 긍정할 수 있다. 즉 인간이 삼라만상의 주체로써 무한한 상상력과 창조력이 있는 영적 존재임을 말하는 것이다. 하여 자본주의도 인류의 이상인 적극적 복지사회의 구현을 방해한다면 신인류에 의해 퇴출이 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이는 유럽의 경우 절대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적 가치에 의해 성립된 절대 봉건제가 영원히 존립할 줄 알았지만, 징기스칸의 세계화인 동서 문물교류로 불확실성이 만연하면서 형성된 르네상스는 상업주의를 만들었고, 이어서 자본주의가 태동한 후, 시민혁명으로 근대사회가 성립되었고, 이어서 20세기 초에 소극적 복지국가를 성립한 후 오늘날 지구촌 시대에 이르러 적극적 복지사회로 진보하기 위해 ‘모계적 분배양식’이 세계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구시대를 퇴출한 자본주의가 소극적 복지국가를 구현할 수 있지만, 지구촌 시대가 요구하는 적극적 복지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모계적 분배양식을 위한 새로운 체제가 성립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인류는 제3차 산업혁명인 지식정보산업으로 인프라가 구축되면서 모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적극적 복지사회로 진보가 가능해졌다.
아울러 유럽이 불확실성의 시대를 겪으면서 형성된 가치 혼란의 와중에 자본주의가 태동하면서 유발된 시민혁명으로 자연법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근대사회가 성립되었고, 20세기 초에 복지국가가 성립된 후 오늘날의 인류는 훌륭하게 되어 자연법사상의 확장이라 할 수 있는 적극적 복지사회를 구현할 수 있는 생활 정치로 역사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구시대의 농노는 대를 이어서도 갚을 수 없는 채무를 빌미로 영원히 노예로 만들고자 했던 것처럼, 초기자본주의에서도 절대주의 영향으로 무기한 채권확보를 위한 연대 보증제로 식민지 통치나 내국의 빈곤층을 노예화한 사실이다. 그리고 수정자본주의가 성립된 후부터 최근까지 선진국을 중심으로 연대 보증제를 자연법사상과 배치된다고 생각함에 따라 채무를 직계존비속에게 상속하게 하는 것을 제한하거나, 보증 액수나 기간을 제한하거나, 폐지하는 등의 탈자본주의적인 경향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식민통치 수단으로써나, 노예화를 위한 연좌제가 개인주의와 배치된다고 하여 퇴출이 된 것처럼, 인간의 기본권인 생존권에 배치되는 채권자의 지나친 권리확장이라 할 수 있는 연대 보증제가 퇴출이 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채권자가 이익을 바라고 빌려주는 만큼,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의미이다.
즉 연좌제와 더불어 연대 보증제는 인간을 노예화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만들어졌던 구시대의 유습으로, 인간 존엄을 구현하기 위해 성립한 근대사회가 20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유지되고 있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알고, 최근에 연좌제는 퇴출이 된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사회에서 개인의 사익을 위해서 성립된 계약임에도 불구하고, 채권 보전을 위한 방편으로 무한책임을 연대 보증인에게 전가한다는 것은 전체주의의 연좌제와 같음에 따라 근대정신과 배치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선진국의 경우 채무자가 실직하였거나, 사고, 재난 등의 이유로 채무변제를 할 능력이 없는 경우, 탕감하거나 소멸이 되며, 사회협동으로 이루어진 개인의 역량이나 지식 등은 사회적 자산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여 다시금 사회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거나, 취업을 통해 어느 정도 소득이 있을 때 수년에 걸쳐 채무변제를 한다거나, 사회적 약자를 위한 장학 우선이나 취업을 하여 빚을 갚을 수 있도록 하는 제도 등을 실시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완전고용을 전제한 복지국가의 기능의 일환이라기보다, 개인의 도덕적 책무를 고양하는 상생의 사회로 발전하고 있다. 하여 지구촌 시대는 인류가 상생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관용의 정신을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가 공고화될 수 있는 모계적 가치를 근간으로 하는 체제가 성립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짧은 인생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가혹하리만큼 채권 우선의 사회는 비인간적으로 악용할 소지가 다분함에 따라 이를 완화하여 인간의 기본권으로써 행복추구권을 구현하기 위한 모계적 가치를 근간으로 하는 ‘소유상하한제’가 성립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선한 면이 더 많은 인간은 성선설적인 인간으로 육성되기 위한, 상생의 삶을 위한 정치경제 제도를 만드는 삶이 인간의 도리를 다한 인간다운 삶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과잉경쟁을 부추기면서, 유발되는 복잡성의 증대와 끝없는 권리충돌로 인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법률제정의 폭발적 증대로 인하여 인간은 악한 존재로 오해받고 있다. 이는 자본주의 속성상 양보의 미덕은 약자의 변명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자본주의는 지정의(知情意)의 전인교육을 주변부로 전락하게 하며, 기능훈련과 같은 지식교육이나 돈벌이만 관심을 가지게 하는 체제임을 알 수 있다. 즉 배금주의가 인문학을 퇴조케 하여 지덕체(智德體)의 불균형으로 인한 인간성 황폐화와 함께 정서가 메말라 냉소적 인간으로 변모케 하였다.
예를 들어 과잉경쟁은 교육과 학문을 구별할 수 없을 만큼 청소년들에게 교육 낭비적인 잡동사니를 집어넣음에 따라 삶의 의미를 부여했던 인문학은 퇴조하였고, 이로 인해 막연히 세상을 두려워하는 경향으로 인해 유발된 공격적인 인성으로 변모해가는 현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신자유주의가 무한 경쟁을 원칙으로 함에 따라 체감하는 적자생존(適者生存)의 절박함으로 인하여 인간 상호 간에 적대 의식이 깊게 되었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가 만든 상극의 삶은 양극화로 나타났으며, 이로 인해 유발된 각종 범죄로 사회적 비용의 증가와 복지 수요의 증대 등은 재정의 부담을 가중케 하여 고비용 저효율사회가 되면서 구성원상호간에 원망이나 적대감이 형성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몇 사람은 거대한 부를 이룰지 모르지만, 과당경쟁으로 인한 사회 전체의 막대한 손실과 자원고갈이나, 환경오염 등을 생각해볼 때, 천문학적 손해임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이룬 것처럼, 역사 발전한 것으로 착각을 하는 것을 경계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동료로서 도덕성에 기초한 연대감을 가지고 상호 간 인권을 존중해서 최소한 물적 기초를 상호 간 보장하는 ‘상생의 삶’을 살게끔 하는 것이 역사발전이기 때문이다.
하여 탐욕은 99마리 양을 가진 사람이 한 마리의 양을 채우기 위해서 노력한다는 격언으로 주위 사람을 곤경에 빠트리게 된다는 사실을 고발하고 있지만, 탐욕을 정당화하는 자본주의가 인간성 황폐화, 지구온난화 등을 만들고 있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를 고집한다면, 작은 것을 탐하다가 큰 것을 잃는다는 ‘소탐대실’(小貪大失)하게 됨을 말하는 것이다.
하여 지구촌 시대는 ‘상생의 삶’을 위해 모계 민주주의 ‘소유상하한제’가 세계화한 가운데, 자유경쟁을 해야만 시장이 자동조율이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인간은 문화적 존재로서 스스로 공공선을 쌓도록 제도를 만들어가는 슬기로운 존재임에 따라 모민주의의 ‘소유상하한제’가 보편화될 것으로 예상이 된다.
강력한 욕구를 뒷받침하는 자본주의에 맞서 균형을 이루고자 했던 공산당의 몰락과 아울러 사회민주주의(사회주의)의 쇠퇴로 신자유주의가 등장하게 됨에 따라 선진국의 초국가적인 거대기업은 자본주의 틀에서 교섭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이는 후진국의 경우 견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됨에 따라 사회통합에 어려움을 겪는 원인이 되고 있다.
즉 공산당의 퇴출로 냉전체제가 무너지면서 신자유주의가 공고화됨에 따라 개입주의를 허용한 국가자본주의(행정국가)의 보호주의도 의미를 잃게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비복지적인 자유방임주의가 식민지나, 후진국에게 자유무역을 원칙으로 강제했던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선진국은 냉전체제의 퇴출로 약소국과 무역을 하는 데 있어서 정치적 배려가 필요 없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노조와 타협한 복지지출의 증대나, 노동시장의 경직성이나, 범죄증가로 인한 치안과 국방비 등 사회적 비용의 증가를 비롯해, 개도국의 자국의 산업 보호를 위한 높은 관세, 시장개방을 억제하는 노조, 자국의 산업 공동화(産業空洞化)현상 등을 이유로 방어를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즉 무정부적 불 개입주의, 세계 분업화, 자유무역, 무한경쟁, 복지축소 등 자본주의(자유기업주의) 속성에 충실히 하고자 하는 등 선진국 중심의 신자유주의 원칙을 후진국의 경우 지키기 어려움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국가자본주의 보호주의의 퇴출을 의미하는 신자유주의 원칙은 선진국의 초국가적인 거대기업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하여 신자유주의가 중진국이나 후진국을 힘들게 하고 있다.
한편 신자유주의는 선진국이 첨단 과학기술의 발달로 경쟁력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빈곤계층이 양산되는 양극화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진 선진국 중심의 이념으로써 실제로 선진국 자신이든, 후진국이든, 별로 덕이 없음을 최근에 알게 되었다.
이는 오늘날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 경제가 오랫동안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하여 신자유주의는 자유기업이 최대이윤을 획득하기 위한 안전한 곳으로 자본을 투자할 수 있게 함으로써 인류에게 실익(덕)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로 인하여 만들어진 제국주의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각 지역의 전통이나 생활양식과 상관없이,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존재처럼, 오직 경제적 이익만 챙기고, 환경오염을 유발하고 떠난다면, 오랫동안 적응하며 살아남아야 하는 지역민들은 곤경에 처하게 됨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초기자본주의 자본가들에 의해 민중들은 착취를 당하였고, 식민지에서 가혹한 착취나 수탈로 유발된 분쟁에 파병됨에 따라 나쁜 민족으로 기억되는 등 피해를 보았음에도, 보상은커녕 복지조차 스스로 책임졌던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식민지역의 정체성 파괴와 환경파괴 등이 오랫동안 상처로 남아 지역민을 괴롭히고 있다.
하여 선진국의 대다수 국민은 초기자본주의에서 상당한 고통을 받았으며, 더불어 수탈과 착취기술이 발달한 민족이라는 불명예와 역사적 책임까지 뒤집어쓰고 있는 가운데, 양극화로 고통까지 받게 됨에 따라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는가?’하고 불신하면서, 사회주의가 등장하게 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선진국이 부강한 만큼, 양극화의 심화와 인간성 황폐화, 유대감의 상실, 환경오염, 자원고갈 등 위험한 사회가 됨에 따라 유럽이 근대사회의 성립이라는 위대한 유산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색안경을 끼고 서구사람을 보게 되었다. 즉 자본주의의 속성에 충실하여 위험한 사회가 된 것을 두고, 선진자본주의국가의 책임으로 성토하고 있다.
특히 식민지 지역은 당시의 고통을 잊지 않고 있으며, 반 서구적이다. 이는 자본주의에서 살아가는 인류는 시간이 갈수록 인류가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가운데, 피 식민지역의 경우 상황이 나쁘게 되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자본주의는 수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양극화의 심화로 복지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결국 복지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면, 새로운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체제가 성립되어야 함에도, 오히려 자본주의 속성에 충실히 하고자 하는 신자유주의가 등장하였기 때문이다. 즉 대자본이 형성되는 만큼, 양극화의 가속화로, 국민은 국가의 부채가 되어 자율성을 잃게 된 상황을 세계시장 확대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영국이 1980년대에 초기자본주의와 같이 세율 인하를 단행하여 조세가 감소 되었으며, 반면에 공공지출은 확대됨으로써 정부부채의 증가로 인해, 정부투자로 경기부양을 할 수 없음을 알고, 제3의 길을 선택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통계를 보자면, “정부의 재정적자를 보면 선진국들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는 OECD의 총 공공부채(정부가 갖고 있는 자산을 감안하지 않는 빚)가 1974년에는 GNP 대비 35%에 불과했으나 1980년에는 42% 1994년에는 71%로 상승하였다. 특히 벨기에와 이탈리아의 경우 1995년 현재 각각 275%와 120%를 달하였다.” (112) (고철기, 41p)
이는 금융정책으로 경기부양을 시도한 결과, 오히려 인플레이션이 유발됨에 따라 정부가 국제금융시장에서 높은 금리로 자본을 조달하면서 국가부채가 증가케 된 결과, 초국가적 거대기업의 투자자들에 의해 국가정책이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던 이유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한국의 1997년 소위 IMF라는 국가부도는 국제투기자금의 유입과 공공재산이나 대기업지분을 헐값에 매각함으로써, 실로 엄청난 손실을 국민이 부담했으며, 국제자본이 경영권 지배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속성을 두고, 죽어서 부패한 고기를 폭식하는 맹수인 하이에나와 비교하기도 한다.
이처럼 자본주의가 세계화할수록 국제투기자본에 의해 투기장이 되거나, 경영간섭을 통해 정책에 영향을 끼치는 등으로 이윤만을 챙김에 따라 정부가 무력하게 되면서 사회통합이 힘들게 됨을 알 수 있다.
이는 자본주의에서 살아남으려면 배금주의에 적응해야 하고, 부를 축적하는 과정에서 도덕적 비판을 받는 행위를 할지라도, 합법적이면 문제가 없다는 법치주의로 정당화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공고화될수록 자연법사상은 표류하고, 유명무실하게 되면서 인간성 상실로 이어지게 됨을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지역사회의 전통적인 유대관계를 단절케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발 양극화의 폐해를 조율할 수 없는 반쪽민주주의임에 따라 민주적 권위조차 무시당하는 가운데, 사회통합의 주체가 되지 못하게 되면서, 스포츠나, 집단오락 등이 사회통합의 방편이 되고 있다.
즉 신자유주의가 추구하는 세계 분업화에 의한 무한경쟁으로 기업의 이윤감소로 한계기업이 퇴출하거나, 각 나라의 중소기업이 대기업에 합병되는 등으로 유발되는 높은 실업률로 인한 고비용 저효율의 구조로 고착화가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의 절차적 정의로써 민주정치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기업에 중소기업이 흡수되거나, 퇴출 등으로 인한 기업의 감소로 고실업 사회가 됨에 따라 복지비 등 폭발적으로 증대하는 감당하기 위해 사회적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각 지역은 다국적기업을 경쟁적으로 유치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서부터, 민주정치가 위기를 맞게 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뿐만이 아니라 자유무역으로 인한 자본의 급속한 이동은 환율을 방어하기에 급급하였으며, 높은 실업률은 인구의 도시집중을 가속화 하여 도시와 농촌 간의 불균형한 발전과 더불어 중앙정부와 지자체와의 불균형이 공고화되고, 분열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여 신자유주의는 여러 나라의 기업 간의 자유로운 무한 경쟁을 위해 정부개입을 원칙적으로 거부함에 따라 개입주의로 빈곤을 극복하고자 했던 후진국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고, 중진국은 샌드위치처럼,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구촌 시대를 맞이한 오늘날 국제 분업과 규모의 이익을 구현하기 위한 대기업의 해외투자가 상당한 성과를 이루고 있지만, 반면 내수시장에 기반을 두고 있는 중소기업은 몰락하고 있다. 즉 초국가적인 거대기업 간의 시장쟁탈전 등으로 인하여, 마치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속담처럼, 경쟁력이 없는 중소기업은 몰락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거대자본의 지배로 시장기능이 왜곡됨에 따라 고실업 상태가 고착되면서 경기침체와 동시에 양극화가 형성되어 위험한 사회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선진국은 냉전 시대를 벗어나게 되면서 실리를 추구하는 상황으로 선회할 수 있게 됨에 따라 개도국에는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고, 후진국에 대한 원조를 줄여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신자유주의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즉 냉전 종식으로 자본주의와 균형을 이루었던 공산주의가 퇴출이 되면서 공고화된 신자유주의는 국제 분업을 통해 경제문제를 해결코자 함에 따라 냉전체제로 인한 보호주의(개입주의)는 의미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여 대기업의 시장 확대와 더불어 원자재 조달이나, 우수한 노동력확보나, 생산비 절감을 위한 공장설비의 입지확충 등으로 각국이 상호의존도가 공고화되는 현상과 더불어 기업 감소로 인한 고실업 사회가 공고화되었음에도, 당분간 신자유주의를 수용할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국제정치의 중심역할을 했던 미국조차도 자본주의 주변국에도 상호주의원칙에 의해 경제적으로 대등한 관계를 요구한다는 사실로부터, 세계 경찰국가로써 초강대국인 미국 스스로 지도력을 포기하면서까지 신자유주의를 공고화하고 있다는 사실로 볼 때, 얼마나 절박한가를 이해할 수 있다.
즉 상위체계인 정치를 목적이라고 본다면, 하위체계인 경제는 정치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써 의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가 목적이 되고 정치가 수단이 된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가 가치 전도현상을 유발함에 따라 민주정치가 위기에 맞이하거나, 위험한 사회가 만들어지는 원인으로 볼 수 있다.
하여 정치가 경제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변모했던 공산주의가 퇴출이 된 것처럼, 오래지 않아 자본주의 역시 퇴출이 될 것을 예상할 수 있다. 물론 정치와 경제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할 수 있음에 따라 분리될 수 있는 성질은 아니지만, 정치는 인간의 이상을 구현하는 유일한 수단이며 목적임에 따라 민주정치가 공고화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하여 인류의 이상인 민주주의를 공고화하기 위해 사회적 합의로 어느 정도 소유를 제한할 수 있는 새로운 체제가 성립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즉 복지주의가 내재 된 민주적 분배양식으로써 경제민주화가 인류의 보편적 가치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없는 문화적 존재라는 사실과 아울러 정치와 경제가 인간적인 박애주의를 원칙으로 하여 해석하며 균형을 이루게 하는 ‘모민주의’ 정치경제 제도가 적합할 것이다.
이는 개인으로서 인간은 유한하지만, 전체로써 인류는 행복한 인생을 위해, 인간답게 살기 위해, 무한하게 역사발전하고 있음을 상기해 볼 때, 지구촌 시대를 사는 신인류에게 인간의 연대 의식을 훼손하는 자본주의 분배양식보다, 인간적인 연대감을 중시하는 모민주의 분배양식이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즉 무한축적을 허용하는 자유주의 분배양식과 복지주의를 내재한 민주주의와 상반됨에도 불구하고, 결합한 자본주의는 지구촌 시대에 이르러 요구되는 민주주의의 공고화와 어울리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소유의 삶’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역할은 지구촌 시대의 개막과 함께 끝을 내고, 다음 단계인 ‘관계의 삶’을 위한 경제민주화로 민주주의를 완성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 시대가 되면서부터 잦은 분쟁과 제국주의를 비롯해 짧은 기간 동안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과 전대미문의 천문학적 재산피해와 인명 살상 등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처참했던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포스트모더니즘이 발현되었다.
하여 배금주의로 인하여 무력해진 민주주의 정치를 냉소적으로 보며, 민주적 권위까지 무시하며 심지어 정치 무용론까지 등장한 사실을 상기해 볼 때, 모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모민주의 사회가 성립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오늘날은 정보통신과 이동 수단의 발달로 세계시장 확대와 아울러 자유로운 여행은 내국처럼 되었지만, 현실은 경제적으로 유익한 전문가나 과학기술자만 선진국으로 이동할 수 있음에 따라 국가 간 양극화가 공고화되고 있다. 뿐만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원칙을 각 나라에 권고함에 따라 기업에 대한 정부 지원의 축소로 경쟁력을 잃은 수많은 중소기업이 도산으로 이어지면서 고실업 사회가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상황에서 역할을 할 수 없게 된 기능 국가의 관료제를 부정하기에 이르렀으며, 국정을 책임지는 정치지도자의 민주적 권위까지 특정 관료나 일부 국민이 무시하는 경우가 빈번함에 따라 마치 어른이 없는 사회처럼 되었다.
즉 ‘경제적 동물’로 갈게끔 하는 신자유주의 영향으로 민주정치는 무력해짐에 따라 사회통합은커녕 불신으로 분열이 만성화되면서 민주적 권위까지 권위주의로 부정하는 냉소적인 사회로 변모한 것이다.
예를 들어 중소경제 규모였던 과거에는 환경문제를 국내에서 해결할 수 있었으나, 오늘날 지구촌 시대에서 대량소비와 전쟁수준의 과당경쟁으로 자원고갈, 온난화, 산성비, 핵(방사능) 공해, 환경오염 등으로 인한 생태계 파괴를 복원하는 데는 오랜 기간과 엄청난 경비가 소요됨에 따라 국제공조가 필요한 복잡한 정치적 해결이 요구되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체제에서 민주정치는 무력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 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첨단자동화시설에 의한 최고의 품질, 최대의 생산성, 품질에 비해 저렴한 가격 등으로 후진국 기업은 경쟁력을 잃었다. 뿐만이 아니라 무정부와 같은 수준의 간섭배제, 조세 부담축소 등을 요구할 만큼, 절박한 현실에서 중소기업의 감소로 인한 고실업을 해결할 수 없었다. 하여 비민주적인 양극화를 해결할 수 없는 정치를 불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를 선진국이 설정함에 따라 첨단 과학기술과 더불어 거대한 자본과 경험을 축적하고 동일 문화권에서 자유주의적 법치주의가 확립된 선진국은 유리하지만, 전통문화와 반자유주의적인 생존 양식을 가진 후발국의 경우 불리함에 따라 보호주의를 고수하려는 경향이 있다.
문제는 규모가 작았던 초기자본주의의 공급경제로 인해 형성된 제국주의에서 대다수 사람에게 가혹한 삶을 살게 했던 것보다, 신자유주의의 대규모 공급경제로 인한 세계적 양극화로 유발되는 각종 테러로 불안정한 사회가 되는 것이다.
뿐만이 아니라 오늘날 천문학적 거래 규모는 양극화를 가속화 하며, 과소비로 인한 환경오염이나, 지구온난화나, 가공할 무기체계, 고실업, 핵발전의 불안정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음에 따라 위험한 사회를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여 오늘날 지구촌 시대에 이르러 의식을 지배하는 각 지역의 정체성과 문화권이 다름으로 유발되는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탈 배금주의로써 존재의 삶을 중시하는 체제가 세계화되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까지 이어온 각 지역의 정체성이 다르며 동일 문화권의 관습이 정서로, 일반의사로 되어있음을 존중하여 상호 간에 한발씩 양보하는 모민주의 ‘소유상하한제’가 지구촌 시대에 적합함을 알 수 있다.
이는 ‘소유의 삶’을 중시하는 자본주의가 개인 무기의 첨단화와 동시에 양극화로 인한 테러가 쉬워진 위험한 사회를 극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인류의 이상인 적극적 복지사회로 ‘관계의 삶’을 살게끔 역사발전 해야 한다. 물론 인간의 이기심을 극대화하는 자본주의를 넘어 모계적 분배양식으로 역사 발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미 자본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는 무수히 많고, 정리되어 있음에 따라 제4차 산업혁명으로 신인류가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인간의 사회성이 무디어져서 정당한 민주적 권위도 무시당한다는 사실을 고철기의 글에서 잘 이해할 수 있다.
“신보수적 자본주의의 영향이 확산되면서 1990년대는 특이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선후진국 대부분이 국가경영마저 기업경영의 차원에서 이끌어 가려는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정부가 정부 조직 및 정부산하조직의 관리에 있어서 공익성 차원을 점차 경시하는 반면에 수익성은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일부 국가에서는 공무원을 대기업에 파견하여 민간 경영방식을 익히게 하는 일까지 벌이고 있다. 이러한 풍토에서는 기업인의 이윤극대화 사고방식이 공익 우선의 정서가 지배되어야 할 국가 의사결정 철학까지 스며들어 공무원이나 정치인들의 정책 결정 내용이 대기업에게 유리하게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신보수적 자본주의의 이념의 파급으로 대기업이나 자본가의 착취 대상이 소비자나 근로자의 수준을 뛰어넘어 이제는 공익의 마지막 보루라고 할 수 있는 공무원의 의식 속으로까지 파고들어 국가 전체를 착취의 대상으로 하게 되었다.” (113) (고철기, 58~59p)
하여 오늘날 신자유주의가 어떠한 특성을 내재하고 있는지를 잘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자본주의가 국가권력에 의한 억압을 오랫동안 받은 결과로 만들어진 사실에서 속성을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고대사회의 강대국의 경우 약소국을 수탈하여 무력하게 하거나, 강대 국으로써 전승국은 여성 약탈, 재산압수, 노예노동의 확보 등으로 유가족의 복지비와 전쟁 비용을 상계하는 등으로 피폐한 계층이 권력의 억압에서 해방코자 자유주의를 꿈꾸었던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근대사회가 성립된 후 자본주의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전체주의인 파시즘, 나치즘 등이 등장하였다. 하여 신자유주의가 복지를 명분으로 한 개입주의를 원칙적으로 거부하며, 자유무역을 방해하는 보호주의를 퇴출하고, 세계 분업화를 통해서 최대이윤을 획득하고자 하는 것은 서구문화에서 기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구시대 정치 권력에서 분리된 자본주의사회의 금력은 무책임하고, 무소불위의 힘을 갖게 되어 이를 획득하기 위한 치열한 자본축적 경쟁의 결과로 신자유주의가 등장하였다. 물론 신자유주의가 1대 99라는 세계적 양극화를 형성함에 따라 신자유주의를 패권주의로 보는 시각이 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가 내면세계가 없는 차가운 로봇처럼, 이익집단의 부품으로써 삶을 살아가는 영혼이 없는 단지 머리 좋은 ‘경제적 동물’로 살아가게끔 강제하고 있음을 우려하고 있다. 즉 초기 자유방임주의와 달리 오늘날 초국가적 거대기업들이 만들어지고, 복잡성의 증대와 함께 전문화된 무수한 집단이 경쟁하는 까닭에 조직 속의 개인으로 살아야 하는 구조가 되었기 때문이다.
즉 탈복지적인 신자유주의에서 만들어지는 고실업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은 스스로 복지를 위해 이익집단에 소속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신자유주의 세상을 천명한 미국이 다자간 협상보다 쌍방협정을 추진한다는 사실과 더불어 거대기업집단에 의해서 정책이 결정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서구는 전통적 가치나, 자본주의를 거부하는 사회주의 등에 의해서 상당한 진통이 있었던 반면, 자본주의에 충실하여 실리를 추구한 미국과 차이가 있다. 즉 유럽의 경우 국가 위신을 지키고, 각종 이익을 취하면서도 식민지 개척과 착취를 개인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이중적이었던 반면, 자본주의를 신념으로 성립한 미국은 개척정신과 실용주의로 자본가를 육성한 나라였다.
이처럼 미국은 전대미문의 초강대국으로 자본가가 세상을 움직이는 신자유주의를 펼칠 수 있는 국가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를 악으로 간주하며 보여준 911테러와 함께 2008년 하반기에 이르러 금융위기로 전 세계가 곤경에 처하게 되어 오늘날까지 회복하지 못함에 따라 미국발 신자유주의를 불신하기에 이르렀다.
즉 지구촌 시대는 자본주의 분배양식이 절대적 양극화를 빠르게 가속화 하면서 위험한 사회를 만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여 지구촌 시대에 세계시민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각 나라의 독특한 문화를 존중하기 위한 새로운 모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상호 간에 신뢰할 수 있는 ‘소유상하한제’가 세계화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선진국 중심의 신자유주의로 세상이 절대적 양극화로 공고화되어 대다수 인류가 빈곤층으로 전락 된다면, 제국주의시대의 전면전보다 더 큰 동시다발적인 국지적 저항인 테러로 인류는 파국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물질의 풍요를 통한 인간해방을 구현하겠다는 자유주의가 민주주의와 결합하여 성립한 자본주의가 ‘소유의 삶’에 집착하게 하여 인류의 이상인 적극적 복지사회의 구현이라는 역사발전을 멈추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새로운 모계적 분배양식으로써 경제민주화를 이루는 모민주의가 세계화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는 민주주의를 위기로 몰고 있으며, 양극화를 유발하여 자연법사상을 무색하게 한다는 점에서 근대정신(모더니즘)과 배치되고 있다. 특히 자본주의가 인간의 상품화를 가속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 존엄을 훼손하는 체제임을 알 수 있다.
아무튼 자본주의가 다윈의 진화론, 라마르크의 용불용설, 적자생존론(適者生存論) 등과 함께 발전하면서, 제국주의까지 만들면서 인류에게 가혹한 삶을 살게 했다는 점에서 극단적 속성이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이는 혹독한 착취를 합리화하기 위해 인간을 탐욕 존재라는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사람을 머리 좋은 동물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인간에게만 있는 영적 감응 장치에 의한 창조력을 갖고, 삶을 스스로 재창조하는 문화적 존재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애써 외면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영적 존재로서 인간이 주체이면서도 객체인 자연에 지배를 받기 때문일 것이다.
하여 인간은 동물도 신도 아닌 중간적 존재로서 제한적인 자연의 섭리와 부합도 되어야 하며, 영적인 존재로서 창조력이 있음을 고려해 볼 때, 영적 존재로서 육화된 인간의 행복한 인생을 위해 모계적 분배양식이 적합함을 알 수 있다.
물론 탐욕을 제한하지 않는 자본주의는 지구촌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분배문화가 형성되면 소멸이 될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한 단계 더 발전한 신자유주의보다, 탈 자본주의로써 모민주의 체제에 의한 적극적 복지사회가 성립되어야 좋을 것 같다.
즉 인간을 단지 머리 좋은 경제적 동물로 만들어가는 자본주의는 지구촌 시대의 개막과 함께 역할을 다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을 상품화하고, 배금주의가 만든 제국주의 등으로 인생의 쓴맛을 보게 한 자본주의는 지구촌 시대를 연 것으로 소임을 다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하여 오늘날 첨단 과학기술 시대를 만든 인간을 대모신의 후손으로 믿는다면, 연대성을 훼손하는 제도보다, 인간의 선한 면을 배양하는 제도를 확립해야 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임을 확신할 수 있다. 따라서 지구촌 시대를 사는 신인류에게 영적 존재로서 ‘존재의 삶’과 사람으로서 ‘소유의 삶’이 균형을 이루는 ‘모민주의’ 분배양식으로 ‘관계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적합함을 알 수 있다.
상대의 성을 존중하며, 쌓아 가는 공공선은 적극적 복지사회를 만드는 원동력이 됩니다. Respect the sex o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