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으로 돈을 버는 것을 정당화한 자본주의사회에서 자본이 주체가 됨에 따라 안전하고 최대이윤이 가능한 곳으로 옮겨지는 현상에 대해서 하일브로너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부가 저개발 주변부로부터 발전된 중심으로 빠져나가는 것이다. 이미 오래된 역사를 지닌 강자에 의한 약자의 제국주의적 착취가 자본주의적으로 변형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점점 더 넓어지는 부국과 빈국간의 격차는 의심할 바 없이 자본주의 세계의 탁월한 성과를 입증하는 척도일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적 착취의 힘을 보여주는 징표이다. (119) (하일브로너, 54p)
이는 자본주의를 근간으로 성립된 근대 기능 국가에서 국가이익과 부합하는 자유방임주의적인 자본축적 경쟁이 제국주의를 등장케 하여 결국 공산주의가 등장하게 되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른 사실에서 잘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충돌은 오히려 자본가에게는 비시장적인 군수산업의 확대와 국가재건의 확대로 이어지면서 정경유착에 의한 대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으며, 오늘날 다국적 거대자본을 형성함에 따라 무한경쟁을 전제로 한 신자유주의가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컴퓨터와 정보통신의 발달로 인하여 대기업 간의 경쟁은 초고속으로 자본이동이 가능하게 되면서 천문학적인 규모의 자본축적이 가능하게 됨에 따라 신자유주의가 성립하게 된 것이다. 하여 거대한 국제투기성 자금이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됨에 따라 배금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초국가적인 거대자본이 세상을 지배하는 사회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문제는 비복지적인 세계자본주의(신자유주의)로 금융에 의한 합법적 착취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자본이 안전하고 이윤을 내는 곳에 머무르게 되고, 국경의 의미는 없어지게 됨에 따라 후진국의 경우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점일 것이다. 즉 자본주의가 이윤추구라는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갖고 있음에 따라, 합법을 가장한 야만적인 심성으로 자본을 축적할지라도, 후진국이 방어하기 곤란한 세상이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착취기술이 발달할수록, 경박한 인간관을 근간으로 탐욕을 배양하는 것을 당연히 여겼던 식민시대를 이어, 제국주의 시대에 착취기술의 눈부신 발달로 형성된 선진국 대자본은 눈덩이처럼, 기하급수적으로 거대하게 불어남에 따라 빈곤한 후진국은 신자유주의를 수용할 수밖에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하여 후진국은 울며 겨자 먹기를 해야 하고, 반면에 선진국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상황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제삼세계나, 일부 지역에서 자본주의에 의한 착취의 상처로 인하여 서구적 가치를 거부하는 현상을 두고 문화적 충돌로 이해코자 하는 것은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오늘날 제삼세계라 일컫는 국가들이 서구식민지로써, 가혹한 수탈과 착취를 당했기 때문에 반자본주의적이며 반기독교적인 이슬람교가 성행하는 것이다. 또한 과거사 문제로 인한 종족 갈등으로 사회통합에 어려움을 겪고 있음에 따라 정치경제가 취약하고 사회가 불안정함으로 서구적 가치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는 식민지교역의 확대로 일어난 산업혁명은 공급경제를 위한 공업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막대한 자본이 필요하게 됨에 따라 토지 등의 자산을 자본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성립되면서 원자재확보와 소비시장으로써 식민지를 개척했기 때문이다.
물론 시민혁명 전 당시 사회는 중세의 봉건귀족이 국토 대부분을 독점하고, 소수 대상은 정경유착으로 부를 축적하여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고 있었던 반면, 일반상인들은 국가통제를 받고 있었고, 민중들은 대다수 빈곤층이었다.
그리고 초기자본주의는 자유경쟁이라는 명분으로 착취를 합리화함에 따라 자연법사상에 반하는 노예제보다 더 많은 이익과 자유경쟁에 의한 거래의 활성화로 조세가 증가할 뿐만 아니라, 식민지교역으로 인한 관세 증가나, 고용증대와 더불어 국가의 복지부담 감소, 중산층의 증대 등으로 국부(國富)를 창출할 수 있었다.
이처럼 자본주의가 절대 봉건제의 부패에 반동하여 성립한 자본주의가 착취를 정당화한 모순으로 인하여 사회주의가 등장했음을 알 수 있다. 하여 점차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부합되는 새로운 체제가 필요하게 되면서, 후일 시민혁명으로 근대민주주의 사회가 성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지착취가 여전했다는 점에서 식민 상흔을 가진 지역들은 자본주의를 부정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아담스미스의 자본주의는 시장의 안정성을 위해서 대 법인을 만드는 것을 금기로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한 자본가들에 의한 대법인의 등장은 대자본을 축적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는 후일 제국주의까지 만들게 된 원인이 되었다.
즉 탐욕을 배양하는 자본주의의 속성이 소 법인에 만족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담스미스는 이해하지 못했다. 또한 초기 자본주의사회는 노동 경쟁으로 노예보다 더한 착취를 하여 대다수 민중은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식민지에는 자국민보다 훨씬 가혹했다.
하여 국부론의 저자인 아담스미스가 ‘큰 부자는 큰 불평등을 낳고 풍요로운 부는 다수의 궁핍을 전제로 한다’라고 한 사실에서 현행자본주의가 아담스미스의 자본주의와 다르게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무제한 소유를 정당화한 결과 형성된 배금주의로 양극화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아담스미스가 예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질 풍요를 통해 인간의 문제를 해결코자 하는 자유주의 사상은 자유경쟁을 국가가 방해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거부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정부적인 경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다민족으로 구성된 로마제국은 5세기경 멸망하고, 기독교가 성립된 후, 중세암흑기(3세기~13세기)를 거쳤기 때문이다.
즉 서구는 13세기 징기스칸의 세계화에 의해 동서 간의 활발한 문화교류와 상거래의 발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 자유주의 사상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불확실성의 시대를 겪으면서 태동한 르네상스시대(Reneissance, 14C~17C, 문예 부흥기)를 맞아 절대 봉건제의 부패를 혐오하여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즉 부계 유일신 주의를 근간으로 하여 성립한 절대 봉건제에 의한 착취와 만연한 부패는 체제혐오로 이어지면서 오직 실존하는 개인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며 스스로 구원하는 사회로 진보하였다. 다시 말해서 아무것도 믿을 수 없는 혼돈의 상황에서 배금주의가 싹트게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참고로 민본주의에 근거하여 율곡선생이 사기(史記)의 ‘민이식위천’(民以食僞天)이라는 고사성어보다 확장된 개념인 ‘군주는 백성을 하늘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라고 한 민본주의와 자유주의(개인주의)와는 경제적 측면에서 유사함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서구자본주의는 ‘풍요 속의 빈곤’ 현상으로 증오를 낳고, 양극화와 환경오염, 자원고갈, 지구온난화 등을 유발함에 따라, 자신을 갈고닦는 ‘수기치인’을 중시하는 동양의 민본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자본주의가 등장한 후, 제3자로써 인간의 갈등을 조정하고 군림했던 국가권력으로부터 해방된 금력이 제3의 위치에서 사람을 지배하게 되었다. 즉 인간이 국가를 만들어 스스로 복종하고 안정을 얻었던 것처럼, 스스로 만든 돈에 의한 질서로써, 배금주의에 의해 스스로 복종하고 살아감을 말하는 것이다.
하여 자본주의국가의 존립 정당성은 자유경쟁을 통해 획득한 개인의 사유재산을 지켜주기 위한 데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상황은 단절되지 않는 인류 역사의 연속선상에서 복합적으로 작용 되고 있음에 따라 딱 부러지게 말할 수 있는 성질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배금주의가 보편적 가치가 된 오늘날 세상은 돈에 의한 정치, 돈을 위한, 돈의 정치가 전개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즉 자본주의 체제의 성립으로 권력에서 독립한 금력이 우선하는 사회로 변모한 것이다. 문제는 자본주의 발 양극화로 대다수 사람이 물질적 기초를 확보하지 못함에 따라 기본권으로써 행복권이 침해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중산층은 엷어지면서 불안정한 사회가 되었으며, 실업의 만성화와 비정규직의 증가 등을 해결할 수 없는 민주정치에 대한 실망으로 민주적 권위조차 무시당하거나 정치 무용론까지 난무하고 있다.
이는 자본주의가 무제한 소유를 허용함에 따라 오늘날 초국가적인 다국적기업이 만들어진 사실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거대자본은 최소비용으로 최대이윤을 획득하기 위해 공장자동화를 하거나, M&A 기업합병으로 수많은 기업을 퇴출케 하는 등으로 경쟁력의 원천이 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여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내는 비정규직의 양산, 환경오염, 생태계 파괴, 무분별한 자원개발과 과소비, 국제투기성 자금의 난무, 절대적 양극화 등은 무한축적을 정당화한 자본주의 분배양식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자본주의사회에서 거대기업의 자본, 기술, 경영기법의 우위뿐만 아니라, 시장 점유 확대 기술인 적대적 기업합병(M&A)이나, 국제금융투기자본에 의한 절대적 양극화로 피해가 유발될지라도 도덕성을 따질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분권을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권력의 근간인 금력 또한 정치처럼 분권(분산)이 되어야 하지만 실제는 자본주의 발 절대적 양극화라는 표리부동함을 체험함에 따라, 소득에만 관심을 가질 뿐 정치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오늘날 무수한 기업이 과거보다 훨씬 빠르게 대기업에 합병되거나, 시장에서 퇴출이 되면서 고실업 사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금력 앞에서 무력한 민주정치에 대해서 냉소적 태도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가 인간의 탐욕을 부추기고, 배양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즉 행복한 인생을 자본주의가 억제하기 어려운 소유욕을 배가하는 ‘소유의 삶’에 둠에 따라 비경제적인 정치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된 것이다.
이는 인류가 세계동포주의를 명분으로 한 알렉산더 제국에 이어 고대 로마제국이나 몽골제국 등이 수많은 나라를 정복하여 주체할 수 없는 권력 집중의 결과 도덕적 타락으로 인하여 붕괴가 된 것처럼, 신자유주의 발 절대적 양극화를 세계화한다면 희망을 잃게 되는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경제민주화를 위해 1%와 대립하기 때문이다.
물론 부계적 가치를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모계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소유상하한제’로 인간의 개인성과 사회성이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적극적 복지사회로 역사 발전한다면,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즉 3차원의 현실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인간이 비록 몸은 동물처럼 신진대사를 하지만, 인간의 특별한 두뇌는 영적 감응 장치가 있으며, 정신은 다차원을 이해하면서, 마음은 소우주처럼 무한함에 따라 경제민주화로 지구촌 시대를 살아야 하는 신인류에게 영육 간의 균형을 이루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하여 지구촌 시대는 중기모계사회가 인간을 신의 후손으로 믿으면서 순환 진보를 위해 ‘관계의 삶’을 추구했던 모계주의와 ‘소유의 삶’을 추구했던 부계주의와 균형을 이루는 적극적 복지사회의 구현을 위해 새로운 모민주의 사회가 성립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물론 인간이 문화로 삶을 재창조할 수 있는 특별한 두뇌로써, 다른 생명체의 뇌가 생식기능을 위한 간뇌와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후뇌로써 변연계가 있지만, 인간은 포유류의 뇌와 달리 이성과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있는 전두엽으로 구성되어 3개의 뇌를 가진 완벽한 두뇌를 갖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적극적 복지사회로 진보해야 할 것이다.
즉 모성에 의해 재창조되고 있는 인간이 죽음에 임해서 생존한 사람에게 제행무상(諸行無常)의 교훈을 남겨주고, 영혼으로 미지의 세계로 갈 때, 욕망의 덧없음을 알게 된 후회와 더불어 보살펴준 따스한 햇살, 싱그러운 바람, 위대한 자연풍광과 사랑했던 사람들과의 행복했던 순간들을 회상하며,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미련이 남아 되돌아오기를 열망하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물론 모성의 태에서 육화된 인간은 태어났을 때 빈손으로 왔다가 죽을 때, 빈손으로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 가지만 사랑만이 남는다고 한 사실을 상기해볼 때, 인간의 삶의 궁극적 목적이 지구를 행복한 인생을 누리는 곳으로 만들어가는 데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여 운명론적이고 절대주의적인 사고를 하는 기독교문화에서 피조물인 인간이 낙원에서 쫓겨난 원인이 여성에 의한 원죄로 인한 결과라고 하며, 남녀차별을 정당화한 토양(서구문화)에서 만들어진 자본주의가 위험한 사회를 형성한 것은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자본주의는 ‘소유의 삶’을 살 때, 행복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풍요 속의 빈곤’이라는 현실과 절대적 양극화로 대다수 사람이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양에서 인간이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고등한 존재로서 이해하여 부분을 따지기보다, 인간 전체를 배려한 덕치주의와 인간 상호 간에는 예로써 조화를 이루고자 한 중용의 삶이 새롭게 부각이 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서구가 시민혁명을 통해 성립한 근대사회는 인류의 자랑스러운 유산임에 틀림이 없다. 또한 서구가 실증주의적인 풍토를 조성하면서 과학기술과 학문이 발달하게 된 것도 훌륭한 유산이다. 이는 인간의 궁금증을 해소와 더불어 과학기술에 의한 물질풍 요로 인간해방을 구현하고자 하는 인류애의 발현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심화할수록 유발되는 이해관계의 충돌이 군수산업을 발달케 한 점은 부정적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산업혁명을 일으켜 자본주의가 만들어졌고, 이후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과학기술 경쟁으로 이어지면서, 과학의 본질적 가치인 행복한 삶과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있는 것은 문제이다.
이는 과학기술문명이 상업주의와 함께 발달하면서 형성된 물신주의로 사람이 소외되고 있는 가운데, 양극화로 인한 갈등과 과소비 등으로 인한 위험한 사회가 형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중세유럽이 J.K. 갈브레이스(John K. Galbraith(1908-2006)가 정의한 ‘불확실성의 시대’를 거치면서, 과학의 발달과 소유개념의 발달로 상업주의에서 한 단계 발전한 자본주의가 성립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가 물질과 정신의 균형이 필요함을 간과한 결과, 물신주의 사회가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즉 사람의 비교본능에 의한 허영심을 자극하여 유발되는 과소비로 인하여 자원고갈, 환경오염, 양극화, 개인화기의 발달로 테러가 증가하는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뿐만이 아니라 자본주의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스스로 상품화가 되어 인명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 문제가 되고 있다. 하여 소비를 미덕으로 하는 자본주의는 자원고갈, 환경오염, 생태계 파괴 등을 유발함에 따라 얻는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잃고 있으며, 미래의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자유기업이 최대이윤의 목적달성을 위해 경쟁하면서 만들어지는 나쁜 결과에 대해서 사회적 책임이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경쟁으로 경기가 과열되거나 침체로 시장이 마비된 공황을 발생할 경우, 시장적인 중소기업은 한계기업으로써 퇴출이 되지만, 대기업의 경우 공황 극복을 위한 정부개입으로 오히려 부실한 시장적 기업을 헐값에 매입하거나, 적대적 기업합병 등 상대의 어려운 상황을 기회로 삼아 부를 축적하게 되었고, 정부의 경기부양책과 정부투자에 의한 시장경기가 활성화될 때 고수익을 만들어간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1920년대 미국발 공황에서 참고할 수 있다. “1929년에 비교된 1932년의 미국 공업생산액은 47%, 민간 국내 총 투자는 94%, 외국무역은 70% 감소하였다. 실업 또한 1,200만 명에 달하였으며 일반 물가의 하락은 약 30%이고 특히 농산물 가격은 60~70% 하락하였다. 이것은 부농과 대기업의 이익을 옹호하는 결과가 되었는바, 1935년 루즈벨트 대통령은 연두교서에서 불평등과 특권계급의 존재를 시인하고 정책 전환을 표명하게 되었으며 임시 전국경제조사위원회를 설치하여 반 트러스트 활동을 강화하였다.” (120) (강강화, 98p)
이처럼 초기자본주의가 비복지적인 자유방임주의를 근간으로 할지라도 공황을 방치하면 너무 많은 희생이 발생 됨에 따라 기능 국가로서 경기회복을 위해 토목건설, 방위산업 등 정부 수요에 대한 투자와 개입할 때 비시장적인 대기업이 가장 큰 수익자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자본주의사회에서 자연재해나, 경기침체 때, 대자본가들은 축적의 기회가 되었던 반면, 빈곤층은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하여 수정자본주의에서 조세권이 있는 국가가 시장을 정상화하고자 개입할수록 양극화가 가속화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다이아몬드형의 사회구조를 형성할 것으로 믿었지만, 공황이 발생할 때마다, 빈부격차를 심화시켰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개입주의로 경기 조절한 결과가 오늘날 1대99라는 절대적 양극화가 되어 첨탑형 사회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무제한 자본축적의 정당성을 역설하거나, 국제금융투기를 투자라고 하거나, 고리사채업자가 사회공헌을 운운하는 등 자신들의 부도덕함을 합리화하는 자체가 인간의 양심을 저버린 것으로 아무도 도움이 되지 않음을 상기해 볼 때, 새로운 모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체제가 세계화되어야 할 때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자본주의가 공고화될수록 천문학적 경제 규모와 세계적 양극화, 복잡성 등으로 인하여 기계 부속품처럼, 소모적인 존재로 전락하고 있으며, 과잉경쟁의 결과가 상처로 남아 인간 상호 간의 연대성 약화나 불신 등으로 인한 위험한 사회를 벗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인간의 가장 강력한 본능인 소유욕을 배양하기 때문에 퇴출이 힘든 것도 사실이다. 이는 위험한 사회를 만들어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로 자본주의를 강화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자본주의가 인간의 이기심을 동기유발로 하여 만드는 물질 풍요로 인간의 행복을 구현코자 하기 때문이다.
즉 자본주의는 인간이 이타심과 이기심의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 문화적 존재임을 간과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창조력은 ‘상생의 삶’을 위한 능력임을 간과하여 ‘상극의 삶’을 살게 하는 자본주의는 인간미가 없는 체제임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구시대의 권력의 양극화보다 훨씬 강력한 배금주의에 의한 세계적 규모의 절대적 양극화로 인하여 테러가 일상화되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오늘날 초국가적 거대자본은 책임을 전제로 한 구시대의 절대 권력보다, 무책임한 실권으로써 금력은 훨씬 더 위력적임에 따라 위험한 사회가 되었음을 말한다.
하여 구시대는 돈과 권력은 비례했지만, 근대사회가 성립되고부터 권력에서 독립한 금력은 자유경쟁을 통해 획득할 수 있음에 따라 자본축적 경쟁은 권력투쟁보다 치열하게 됨을 이해할 수 있다.
뿐만이 아니라 자본주의는 이기적 경쟁이 공공선을 이룬다고 역설했지만,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소비나 저축보다 이식을 위한 투자를 선호하는 경향으로 인하여, 경기과열과 동시에 소비감소로 인한 경기가 둔화로 공황이 유발된 사실을 상기해 볼 때, 현실적으로 공공선을 이룰 수 없는 체제임을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는 사회를 단지 사적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공공선을 이룰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사회가 사익을 지나치게 강조함에 따라, 사용자와 근로자, 자본가와 정부 간의 갈등이 많을 뿐만 아니라, 이해관계로 양보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서 대립적 관계가 형성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노동자들의 결사로 획득한 사회권을 인간의 기본권으로써 헌법에 명문화하면서, 노사관계가 사회권을 보장받은 노동과 자본이 대립하는 정치적 관계로 변모하면서 어느 정도 완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인간의 개인성과 사회성이 균형을 이루어야 건강한 사회가 되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완전고용을 전제로 하는 수정자본주의(국가자본주의)에서 양극화로 인한 복지부담은 한계에 이르게 되었으며, 신자유주의로 인하여 자유주의적 유연성이 강화된 자본은 노동보다 우월적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다. 즉 자본주의 속성에 부합되는 복지축소를 근간으로 하는 세계자본주의인 신자유주의가 인간의 기본권으로써 생존권(사회권)의 의미를 축소 시키고 있다.
하여 초국가적인 신자유주의가 사회권의 실효성을 무력화함에 따라 이를 극복하기 위해 다수의 사람은 다양한 비정부기구(NGO)에서 활동하는 원인으로 볼 수 있다. 즉 고실업 문제나, 절대빈곤층의 양산 등으로 인한 사회적 경비의 지출 확대로 인한 경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초국가적인 다국적기업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게 되었다.
하여 정부를 불신하면서 형성된 자본의 우월적 지위에 의해 지구를 병들게 하거나, 노동시장의 붕괴 등으로 인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비정부기구가 거대기업과 투쟁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신자유주의가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요구하며, 복지축소, 자본축적이 쉬운 곳으로 이동, 세계 분업화, 불간섭주의 등 자본주의 속성에 충실히 하고자 함에 따라 위험한 사회가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초국가적인 거대기업의 영향으로 유발되는 심각한 경제문제로 인하여 정부는 환경오염이나 인권침해 문제 등을 소홀히 다루게 됨에 따라 여성이 주류를 이루고, 조직한 녹색생명운동 NGO가 거대자본과 투쟁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보호주의가 내포된 수정자본주의에서 자유주의에 충실히 하고자 하는 신자유주의 발 절대적 양극화로 고비용 저효율의 심각한 경제문제와 더불어 각종 테러, 생태계 파괴 등 총체적으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저항이다.
물론 지구촌 사회를 살아야 하는 신인류는 일방적 부계주의의 종말을 고하고, 동시에 새로운 모계적 분배양식으로 ‘존재의 삶’을 살 수 있는 모민주의 사회에서 살아야 할 것이다. 즉 부계사회의 등장으로부터 오늘날까지 무한 소유의 꿈을 키우고 발전한 부계주의의 결실인 자본주의는 역할이 종료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수많은 사람의 불행한 삶과 인간성 황폐화와 비례해서 자연재해가 증가하고 있음을 역설하는 비범한 사람들의 고언을 상기해 볼 때, 비록 성장이 늦더라도 다수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모계적 분배양식을 선택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양성구유 시대를 넘어 수만 년에 이은 모계사회가 문명화된 모계 신본주의 사회가 대우주와 소우주 인간은 연동되어 있다고 생각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자원이 부족한 지구에서 부족한 부분을 창조하고, 나눔으로 보충하여 원만한 순횐·진보할 것을 모계 유일신이 권고했던 사실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항구적으로 살아가는 영혼의 양식이 나눔이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하여 사람의 개성과 능력이 차이에 의해 소유 정도의 차이나 인격의 차이로 나타나지만, ‘소유상하한제’로 각자의 삶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다양한 결과에 이르도록 하는 적극적 복지사회가 보편화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참고로 모성애를 근간으로 하였던 모계 신본주의 사회가 농업을 위한 천문학이나, 문자, 농기계 등을 발명했다고 전하고 있으며, 공유제로 적극적 복지사회를 구현하였다. 또한 모계 신본주의 사회는 현실 세계(양)에서는 다른 성질로 상호보완하고 의지하며 균형을 이룬다고 생각했다.
즉 음은 사후세계(음)로 생각하며, 음양이 제3의 기운(충기, 사랑)에 의해서 연속교차하며, 순환 진보한다고 믿었으며, 모계 유일신의 유시인 ‘해혹복본’을 수증(修證)하기 위한 삶을 궁극적인 목표로 하는 사회였다.
이는 낮과 밤의 운행 질서나, 볼록함과 오목함의 형태나, 뿌리와 줄기의 다른 성질이나, 하늘과 땅, 남성과 여성 등을 통해 입체적으로 이해하여 중용의 조화로운 삶을 주문하고 있는 음양 사상의 근원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사물을 해석하는 출발점이 모성에 있다는 점은 차이가 있다.
그리고 15,000년 전 해빙기 이후 10,000년경부터 모계 유일신의 유시를 실천하는 신앙공동체 사회였던 모계 신본주의 사회는 원시적이나마 적극적 복지사회였다는 점이 인간의 역사발전 방향이 ‘관계의 삶’에 있었음을 예상할 수 있다.
물론 우주를 탐사하는 과학 문명 속에서도 아직도 미개한 삶을 하는 종족이 많음을 생각해 볼 때, 10,000년 전의 세계도 이와 흡사하다고 볼 수 있음에 따라 열등한 지역도 있었을 것이다. 이는 인류학자가 모계사회는 원시공산제 사회로써, 풍요했음을 최근에 보고하고 있음을 참고해 볼 때, 우수한 모성이 중심이 된 적극적 복지사회가 구현되었음을 통찰력으로 알 수 있다.
즉 모권사회에서 수만 년간 가정교육과 사회적응 훈련, 채취, 수렵, 약초채취 등을 모아 모성이 분배하였으며, 모계 신본주의 사회가 인간을 대모신의 후손으로 생각하며, 자율성을 존중하여 어떠한 행위의 결과에 대해서 스스로가 상이나 벌을 받는다고 생각한 사회였다.
하여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없으며 항상 변하고 있음을 말하는, ‘달도 차면 기운다’라는 격언처럼, 자유민주주의를 이어 민주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모계 민주주의 사회로 역사 발전하는 것이 순리임을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종교 편에서 다시 한번 논변이 있을 것이다.
과학적 실증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근대사회가 가시적 현실 세계만을 확실한 것으로 생각하면서 형성된 사고방식으로써 일회적 삶이 ‘소유의 삶’을 살게 하였다. 이는 ‘소유의 삶’은 탐욕을 배양함에 따라 두뇌의 영적 감응 장치가 퇴화를 하면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이해할 역량이 훼손하게 되었고, 인간을 인간답게 육성해주는 사회에 대한 무관심한 현상이 형성되는 원인으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강력한 소유욕이 오로지 받고자 만 하는 권리의식을 지나치게 발달케 함에 따라 인간의 사회협동으로 만들어진 인권을 발전해야 하는 사회적 의무를 간과하게 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자본주의는 이기심을 편향적으로 배양한 결과, 양극화로 인한 대다수 빈곤층은 절망감이 생활화되어 자포자기 상태로 인한 증오심으로 반사회적 인격이 형성되고 있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사회에서 대다수 사람은 자신의 이익에만 관심을 가질 뿐이며, 집단이기주의 경향으로 민주정치의 민주적 권위조차 부정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자본주의가 무정부적 성향을 내재하고 있음에 따라 사회통합을 위한 권력 작용을 무력하게 만든 데도 원인이 있다.
이는 자원고갈이나 환경오염으로 인한 온난화와 산성비 등을 유발함에 따라 전체에게 피해를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없다면 상관없다는 무책임한 태도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 하여 자본주의는 인간의 이기심을 동기유발로 하는 체제임에 따라 신자유주의로 위험한 사회를 극복하고자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지구환경의 빠른 악화는 더는 방치할 수 없을 만큼 긴박한 상황에 이른 사실을 수많은 재앙과 더욱 분명해지는 징조를 통해서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도주의를 넘어 신자유주의적인 세계를 대안으로 생각하는 자체가 시대착오적임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상 자본주의가 인간의 본성에서 잠재하는 유혹, 탐욕, 증오를 응용할 수 있는 시술을 심화하고 있는 가운데, 과학기술, 경영기법, 이익 창출 기법, 금융투자기술 등의 발달로 양극화가 빠르게 1대 99에 이르게 된 것은 역사퇴보라 볼 수 있다.
즉 자본주의사회가 자원의 고갈은 더 비싼 것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공해를 유발하는 산업화는 공해방지를 위한 설비가 필요함에 따라 돈벌이가 된다거나, 문제를 발생함으로써 만들어지는 고용증대를 통해 완전고용을 생각한다거나, 통합보다는 분열을 통해 자본축적이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등은 구시대적이다.
또한 1대99라는 절대적 양극화로 희망을 잃은 절대다수 빈곤층은 과거와 달리 엄청난 반발로써 다양한 테러에 동참하고 있음을 볼 때, 신자유주의는 현실적인 대안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기독교문화에서 파생된 자본주의가 인간이 살아가는 지구에서 생육과 번성하라는 부계 절대 존재의 명문처럼, 자연을 파괴하며, 상극의 삶을 당연히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살아가는 지구는 물질 이상의 가치가 있음에 따라 공존을 위해 가꾸어야 하는 곳으로 생각하는 ‘상생의 삶’을 살게 하는 체제가 성립되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오늘날 인류는 획기적으로 변모한 신인류로써, 네트워크적인 새로운 체제인 모민주의를 세계화해서 인간적 유대를 강화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뿐만이 아니라 부계사회가 등장하고부터 계급투쟁을 위한 폭력을 정당화하거나, 수탈로 자체 문제를 해결하거나, 종교적 명분으로 침공을 하였지만, 수탈을 위한 것임이 오늘날 문명사회에서 투명하게 밝혀졌기 때문이다.
아울러 전체주의 사회였던 부계사회가 양극화를 추구하며, 민중을 억압하고 강제하여 소모적인 존재로 만들거나, 서구의 경우 인류의 원죄인으로서 여성을 낙인찍어 노예화하거나, 가난을 개인의 게으름으로 탓하는 등의 유습을 이은 자본주의가 절대적 양극화를 형성하여 위험한 사회로 진입했기 때문이다.
하여 지구촌 시대를 살아야 하는 신인류의 경우 영육의 균형을 이루기 위한 새로운 모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체제가 성립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구시대가 절대적 양극화를 지향한 결과 근대사회가 성립된 것처럼, 자본주의 발 절대적 양극화가 합법적이라 할지라도 불합리함에 따라 상대주의적인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모민주의가 세계화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모계 신본주의 사회는 수억의 무수한 영혼 중에 수많은 순환 진보 과정을 거치고 육화되었다고 생각했으며, 자신을 수정하기 위해 출생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인간의 궁극적 목적으로써 행복한 인생은 ‘해혹복본’을 이루기 위해 나눔을 실천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예를 들어, 모계 신본주의 사회가 하늘의 시장인 ‘천시“(天市)와 땅의 시장인 ’신시‘(神市)가 연동되어 있다고 생각하면서 나눔을 수행으로 믿은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사회적 자산을 만드는 것은 하늘에 자산을 만드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저승과 이승과는 별개가 아닌 하나의 틀에서 연속되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모계 신본주의 사회는 신과 인간은 다른 차원에서 다른 형태로 같은 영역에 있지만, 사회적 자산인 문화로 상호 교류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즉 투명 인간을 인간이 볼 수 없듯이 투명인간 또한 망막이 없어 서로가 볼 수 없는 것처럼, 신과 인간은 차원이 다름으로 서로가 볼 수가 없음에 따라 문화로 소통한 것이다.
물론 모계 신본주의 사회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는 직감이 발달한 일원론적 사회였기 때문에 신과 인간은 상호보완적이며 사랑의 끈으로 연결되어 교감하는 가운데, 육화된 인간 영혼의 진보를 돕고 있음을 입체적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이는 아마도 물속에서 물고기가 물을 느낄 뿐, 보이지 않는 것과 흡사할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것들은 고대 한국의 모계 신본주의 사회의 유습으로 볼 수 있는, 전통 한국의 토속신앙을 재구성한 종교로써 동학의 인내천(人內天)사상이 사람은 신(하늘님)이라고 하여 인간 존엄과 남녀평등을 역설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부계사회는 관념이 발달하였지만, 반면 직관은 퇴보함에 따라 인내천사상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 인간의 종교적 심성에 충실했던 모계사회의 원본 종교를 이은 부계사회가 부계 우월종교로 각색했기 때문이다. 즉 부계사회는 신과 인간이 별개이며, 신이 인간을 지배하고 인간은 복종하는 수직적인 관계로 생각한 것이다. 물론 부계사회가 인간으로 육화되는 모성의 태에서 잉태·출산과 양육이라는 생태적 체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날에도 대다수 여성이 종교적 인간형이 많은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의 타고난 종교적 심성을 모성애로 점화함에 따라, 수만 년에 걸쳐 모성을 존경하여 모계사회가 유지할 수 있었던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모성애를 근간으로 한 모계 신본주의 사회가 종교사회로써 순환·진보를 하는 과정에서 실존하는 현재를 진보의 기회로 생각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즉 모계 신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잘못은 타인이 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과 행동의 결과를 받게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최소한 타인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소극적 태도가 아니라, 정성을 다하여 도와주는 적극적 태도로 사는 것을 사람의 도리라고 생각했던 이유로 볼 수 있다.
하여 자본주의사회가 희생을 무능한 자로 인식하거나, 대다수 사람은 이기적 심성을 배양하는 것을 현명한 인생으로 생각하며, ‘소유의 삶’을 행복한 삶으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인류의 어두운 미래를 예상할 수 있다. 따라서 동양적 가치로써 좋은 옛것을 돌이켜 새롭게 한다는 의미인 ‘온고지신’(溫故知新)을 생각한다면, 인간의 선한 심성을 배양하기 위한 태고의 모계적 분배양식이 세계화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물론 자본주의사회에서 인간을 상품화하여 만든 절대적 양극화로 인간성 황폐화가 가속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이 아니라 오늘날 무한경쟁으로 인한 환경파괴는 재앙의 징조인 지구온난화로 나타나고 있으며, 대다수 나라가 경제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1대99라는 절대적 양극화로 인류의 대다수가 빈곤층으로 전락함에 따라 인간의 궁극적 삶의 목적인 행복한 인생과 배치되고 있다. 물론 절대주의 철학자였던 플라톤이 개인소득은 최저 소득자의 5배를 넘지 않도록 소유 제한을 주장한 것도 오늘날 현실적 대안으로써 유효할 것이다.
또한 자본주의가 물질적 풍요를 구현하여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고자 하였지만, 생존경쟁을 넘어 과당경쟁으로 제국주의를 만들거나, 대다수 사람이 빈곤층으로 전락하면서 상실감을 가지게 된 사실 등을 상기해 볼 때, 더욱 힘들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부계사회가 일궈놓은 사상과 제도들은 이미 공고화되어 의식을 지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첨단 과학기술로 인하여 부계적 가치에 대한 확신에 차 있음에 따라 이미 위험한 사회로 되었음에도, 미래를 낙관하고 있는 것은 더욱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이는 오늘날 민주적 생활양식이 보편화되어 있음에 따라 민주주의를 공고화하기 위한 경제민주화로 적극적 복지사회가 구현되어야 함에도, 비복지적인 자유주의 속성에 충실히 하고자 하는 신자유주의가 등장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민주주의의 위기를 만드는 비복지적인 분배양식을 퇴출이 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수한 학문과 첨단 과학기술과 더불어 초고속 정보통신이나 우수한 컴퓨터 등에 의해 신자유주의를 가능케 한 것처럼, 인류가 모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모민주의사회로 적극적 복지사회의 구현하겠다는 사회적 합의를 한다면, 얼마든지 실현 가능함을 알 수 있다.
상대의 성을 존중하며, 쌓아 가는 공공선은 적극적 복지사회를 만드는 원동력이 됩니다. Respect the sex o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