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민주주의는 보편적 가치가 되었고, 무한소유를 허용하는 자유주의 분배양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다시 말해서 부계 신본주의 사회였던 서구가 불확실성의 시대를 겪으면서 절대주의가 퇴조하고, 상대주의가 주류를 이루면서 과학기술의 발달과 산업혁명으로 자본주의가 성립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영육의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 문화적 존재임을 간과한 자본주의는 지구촌 시대가 되면서부터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물론 ‘소유의 삶’에 편향적인 자본주의를 넘어 ‘관계의 삶’과 균형을 이루는 새로운 분배양식의 세계화를 위해 결사가 확대되고 있다.
즉 인간의 상품화로 인하여 이해관계가 첨예화됨으로써 법령의 폭발적 증가와 더불어 최대이윤을 위한 상술의 발달이나, 이전투구(泥田鬪狗)의 상업적 태도의 확산이나, 절대적 양극화 등으로 인생에 대한 회의가 일어나고 있다.
또한 자본주의가 ‘풍요 속의 빈곤’을 체감케 하거나, 양극화 등으로 인하여 대다수 사람은 불행한 삶을 산다고 생각하고 있다. 실제는 여러 종류의 자본주의 증후군과 함께 지구자원의 고갈, 환경파괴, 어두운 미래에 대한 중압감 등으로 인류가 감당하기 힘들 만큼 위험한 사회가 되었다.
이는 원초적 본능을 자극하고, 배양하는 자본주의가 주체인 사람을 객체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여 인간이 주체로써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새로운 모계적 분배양식의 세계화를 위한 정치문화가 형성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1. 존재의 삶을 지향
아담스미스의 경제학이 다른 학문에 비해 가장 늦게 만들어진 이유는 구시대의 경제는 종교나 정치의 한 부분으로 소규모였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산업혁명 이후 경제 규모가 커짐과 동시에, 시민혁명으로 근대 시민 사회가 성립된 후, 경제적 자유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사회가 성립되면서 경제 우선의 사회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부계 신본주의 사회였던 서구가 ‘불확실성의 시대’를 겪음으로써 인본주의를 새롭게 인식하였고, 경험주의가 발전하게 되면서 민주주의와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경제가 정치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국가의 간섭을 배제한 자유경쟁을 통해 빈곤과 기아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 경제적 자유주의와 상업주의와 함께 구체화 된 자본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즉 분권을 근간으로 하는 근대 민주주의의 성립으로 종교와 정치, 경제가 분리되면서 사적영역으로써, 경제가 중심이 되는 사회로 진보한 것이다. 하여 태고는 종교를 위한 정치, 고대사회는 정치를 위한 정치, 그리고 근대사회부터 국민에 의한 정치로, 경제를 위한 정치로 변모하였음을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구시대의 경우 권력과 소유가 비례함에 따라 경제학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지만, 근대사회가 성립된 후, 자유경쟁으로 풍요한 물질을 창출코자 함에 따라 경제학이 성립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근대 시민 사회가 성립하고부터 형이하학의 경제가 독립적이며 실질적인 힘으로써, 형식을 변화케 할 능력을 갖추게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근대사회의 특징이 경제가 중심이 되었음을 맑스의 유물론적 변증법에서 경제에 의해 비경제적인 정치나 종교가 변모한다고 주장하였던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근대국가가 자본주의의 속성에 충실히 하고자 하는 기능 국가라는 점에서도 경제 우선 사회임을 이해할 수 있다.
즉 절대 봉건제가 비경제적이고 관념적인 정치와 종교에 의해서 형이하학적인 경제가 통제되었던 것과 달리, 근대사회가 성립된 후 형이하학적인 경제가 목적이 되면서 형이상학의 정치, 종교가 수단이 되는 가치 전도현상인 소위 배금주의가 시대정신이 된 것이다. 즉 태고는 ‘종교적 동물’, 고대는 ‘정치적 동물’, 근대는 정치와 경제가 분리되었으며, 오늘날에는 ‘경제적 동물’로 살아가고 있다.
다시 말해서 문화적 존재로서 인간은 스스로 환경에 맞게 삶을 재창조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중기모계사회였던 모계 신본주의 시대는 인간을 모계 유일신의 후손으로서 재창조 능력이 있는 무궁한 잠재력이 있는 존재라고 믿었던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참고로 태고로부터 오늘날까지 종교, 정치, 경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발전하고 있으며, 필요에 따라 우선하는 것으로 두부 자르듯이 뚜렷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중기 모계 신본주의 사회에서는 행복한 인생을 살기 위해 ‘존재의 삶’에 무게를 두었던 반면, 부계사회가 등장하고부터 오늘날까지 ‘소유의 삶’에서 답을 찾고 있다는 점이나, 영혼 불멸과 왕생을 믿어 공유제를 한 모계 신본주의 사회가 평화적이었던 반면, 일회적 삶으로 사유제를 근간으로 하는 부계사회가 불안정하다는 점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모계 신본주의 사회는 인간을 대모신의 후손으로 수많은 별(행성)중의 하나인 지구에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대모신의 후손으로 익혀야 할 수련 과정으로 믿음에 따라 신앙공동체처럼 ‘존재의 삶’을 살았다. 이는 모계 신본주의 사회가 대모신의 유시(권고)로써 인간 스스로 돕는 여러 형태의 나눔(사랑)을 실천하여 자신의 본향으로 되돌아오라는 ‘해혹복본’을 수증(修證)하여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즉 모계 신본주의 사회는 지구에서 생명의 윤회를 넘어 인간의 본향으로 돌아가기 위한 삶을 살았다. 다시 말해서 마치 자동차는 폐차되지만, 운전자는 새로운 자동차를 선택하여 달려가는 것처럼, 순환·진보하여 어떠한 경지에 이르면 영혼의 고향에 도달할 것으로 믿었다. 이는 지구는 잠깐 머물다가 다시 오는 곳으로 생각하면서 동물을 살육할 경우, 동물 영혼을 위로하거나, 간단한 희생제를 한 전통 한국의 ‘곰신앙’(고마움, 감사)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외에도 고대 한국의 설화에서 다양한 순환 내용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모계 신본주의 사회로부터 전통 한국에 이어 최근까지 유습으로 이어져 온 사례로써, 집안 마당에 뜨거운 물을 식혀서 버려 미생물이나 지렁이 같은 생명체를 죽지 않게 한 것이나, 일명 까치밥이라 하여 나무의 열매를 남겨둠으로써 동물과 공존을 바란 생활 습속 등을 통해서 모계 신본주의 사회를 이해할 수 있다.
뿐만이 아니라 동양의 음양오행 철학에 근거한 풍수지리학은 택지와 건축 등과 아울러 묘지로써 ‘음택’(陰宅)을 중시한 장묘문화에서 순환의 중심에 모성이 있다고 생각한 사실로부터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궁극적으로 자신의 삶보다 후손이 더 행복한 삶을 살기를 염원했던 모계씨족사회의 유습은 면면히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단지 부계사회가 오랫동안 의식을 지배하고 공고화한 결과, 모계적 가치가 부계에 흡수되거나 변용되어 있음에 따라 모계 신본주의 사회의 유습이 이어져 오고 있음을 잘 모르고 있을 뿐이다. 하여 오랫동안 부계적 분배양식으로 인한 위험한 사회를 극복하기 위해 모계의 구심력과 부계의 원심력이 균형을 이루어 조화로운 삶을 살게 하는 민주적(모계적) 분배양식을 세계화하여 사람이 ‘관계의 삶’을 살게끔 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함을 알 수 있다.
물욕을 배양하는 자본주의가 물질은 주체가 되고 인간을 소외케 함에 따라, 위험한 사회를 만들었다. 즉 자본주의가 ‘풍요 속의 빈곤’이라는 모순과 환경오염, 절대적 양극화 등으로 인하여 인간을 주체가 아닌 ‘경제적 동물’로 살아가게 하고 있다. 이러한 자본주의 위험성을 하일브로너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21세기 자본주의를 이야기할 때 주목해야 할 것을 이런 문제들이다. 즉 전쟁의 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 대중적 히스테리, 생명을 위협하는 기술적 진보, 저개발세계의 인구팽창, 기타 말세적인 가능성들이다.” (116)(하일브로너, 133p) 이는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위험한 사회가 될 것을 우려하는 경제학자의 지적이 오늘날 신자유주의에서 실제로 나타나고 있음을 상기해 본다면 이해할 수 있다.
즉 이미 경제는 물질의 영역을 넘어 관념적인 것과 함께 복합적으로 작용함에 따라 경제를 형이하학적으로 만 볼 수 없을 만큼, 비대해져 인간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배금주의라는 형이상학적 관념을 만들어 정치나 종교 등의 비경제적인 부문까지도 경제의 영역으로 포괄되어 졌음을 말하는 것이다. 하여 자본주의는 모든 것이 상품화됨에 따라 공기, 물, 생태계, 인명 등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조차 싸구려로 만들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서 모든 것을 걸어야만 하는 극단적 경쟁으로, 마치 탄광채굴이 줄어들어 점점 깊이 들어가 채산성이 없어지는 것처럼, 기업의 이윤이 감소하게 되면서, 수많은 기업의 퇴출로 이해할 수 있다. 즉 다수 중견기업의 몰락과 함께 고용감축으로 고실업 사회가 되면서, 유효수요의 감소로 인한 소상공인이 몰락하면서 유발된 폭발적인 복지 수요와 동시에 국민의 담세력(擔稅力)한계로 인한 만성적인 재정적자로 허덕이고 있다.
물론 자본주의 정부는 이러한 복합적인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통화 확대라는 고육지책의 정책을 쓰고 있지만, 이로 인해 유발되는 인플레로 양극화를 가속하는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물론 현대국가들이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어느 정도 통화를 팽창하게 하여 경기를 조절하고 있다.
예를 들어 프리드만 교수는 약 4% 정도가 적정하다고 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경기부양을 위한 정부의 투자증대로 화폐 발행이 실물 가치에 선행하여 과대하게 된다면, 일정한 기간이 경과를 한 후 유발되는 인플레로 소비가 위축되면서, 경기침체로 인한 소위 ‘고비용 저효율’의 스태그플레이션을 유발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현상은 부유층의 경우, 자산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한 투자가 좋지만, 물가상승으로 사회적 약자와 빈곤층의 부담이 가중되면서 절대다수가 빈곤층으로 전락하게 되는 원인이다. 즉 전 인류가 불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국채나, 금을 지닌 부유층은 상당한 이식과 더불어 사회가 발달할수록 부를 축적하지만, 빈곤층의 경우 궁핍하여 환금함에 따라 대를 이어 빈곤하게 된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여 자본주의가 ‘소유의 삶’을 통해 행복한 인생을 만들어 줄 것을 역설한 것은 초기자본주의 시대에서 어느 정도 적합했지만, 지구촌 시대에 이르러 부적합함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정부투자나 복지를 확대하여 유효수요를 늘렸던 수정자본주의로써 국가자본주의보다 절대적 양극화가 형성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선진국 중심의 신자유주의가 복지축소와 세계 분업화, 자유무역 강화, 국제금융 활성화 등으로 유효수요를 늘려서 선진국의 고질병인 스태그플레이션을 극복하지도 못하고 있다. 물론 공황의 발생을 완화하거나, 피하고자 ‘문화적 충돌’이라는 명분으로 자국 산업과 경제적 실리를 위해서, 마치 종교전쟁이나 이념분쟁처럼, 꾸며서 자국의 경제문제를 해결하곤 했다.
하지만 냉전체제가 무너진 후, 초국가적인 다국적기업이 최대이윤을 획득하기 위해 무한경쟁을 함에 따라, 경기조절 자체를 불가능케 하고 있다. 더구나 자본주의가 ‘양보는 손해’라는 유아적인 태도로 이전투구에 집착하도록 함에 따라 불행한 인생을 만들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하여 오늘날 세계자본주의에서 무한경쟁을 하는 자유기업은 이전투구 속성에 충실한 공격적 태도로 변모함과 동시에 전 세계가 동시에 실물경제가 침체하고 있음에 따라 모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모민주의의 적극적 복지사회가 보편화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대부분 거대기업은 국가계획과 연동된 비시장적인 불요불급 방위산업이나, 토목건설 등 국책사업을 수행하기 위한 산업체 등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부가 보유한 과학기술이나 정책자금을 지원받아 전쟁이나 대테러에 필요한 군수품을 개발하여 납품하고 있다.
그리고 정부 수요를 위해 관료 출신을 채용함과 동시에 막대한 자본축적과 자유기업 주의의 강화를 위한 정치자금도 공급하면서, 경기부양을 위한 정부투자에 가장 먼저 참여하고 있다. 이는 국가와 밀접한 관련성이 있는 대기업의 경우 상당한 기간과 대자본이 필요한 첨단 과학기술을 정부가 투자함으로써 형성된 자본축적으로 식품이나 생필품, 용역 등 시장적인 부문을 문어발식으로 사업 확장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즉 대기업이 세계시장으로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냉전체제의 붕괴로 제삼세계가 자본주의에 편입되면서 확대된 세계시장에서 무한축적을 위해 신자유주의가 등장하게 된 원인이었다. 이처럼 자본주의가 시간이 경과 할수록 공룡기업을 만들어 가면 퇴출이 되는 무수한 기업으로 인하여 고실업 사회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신자유주의는 초기자본주의에서 부국강병을 이루고자 하는 정부가 대외적으로 도덕적인 이유로 개입하기 곤란한 일을 자유기업이 대리하면서 제국주의가 형성되었던 것과 다른 상황이다. 하지만 오늘날 스스로 존립할 수 있는 초국가적 다국적기업의 무한축적 경쟁으로 인해 양극화가 세계화됨에 따라 자본주의 후진국들은 신제국주의나 패권주의라고 경계하고 있다.
즉 후진국은 선진국이 첨단 과학기술로 고품질의 상품을 자동생산설비의 증대로 고실업 사회가 됨에 따라 소비둔화로 인한 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시장의 확대가 필요해서 신자유주의가 만들어졌다고 의심을 하고 있다.
이는 시장적인 품목을 생산하는 기업은 우수한 기술과 경영 경험이 있는 다국적 거대기업의 적대적 기업합병이나, 투기성 자금에 의한 중소기업의 몰락, 지분투자로 경영간섭을 하는 등으로 중진국이나 후진국의 기업들이 몰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냉전체제에서 선진국의 양보로 이루어진 후진국에 대한 보호주의가 탈냉전 후, 경제적 자유주의에 충실히 하고자 만들어진 신자유주의를 후진국들이 거부하는 정당한 이유를 알 수 있다.
또한 과거 유럽의 국가들은 식민지를 채무국으로 전락하게 하여 각종 이권이나, 자원을 합법적으로 수탈하여 항구적 빈곤 국가로 전락하게 한 사실이나, 개인의 경우 채무변제를 위한 채권확보의 방편으로 연대보증제도에 의해서 식민지 민중을 노예화하였다. 이는 전통적 가치로 이루어진 정체성을 부정하면서 유발된 갈등과 불신으로 연대성이 끓어져 수탈과 착취를 당했던 혹독한 체험은 오늘날까지 후유증으로 남아, 사회통합을 방해하는 원인으로 작용이 되고 있다.
물론 제국주의시대는 국가채무로 인해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유구한 역사가 있는 국가조차 식민지로 전락이 되어 혹독한 체험을 하였다. 즉 자본은 인간을 상품화하고 노예화할 수 있는 강력한 도구임을 알았다. 더불어 개인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가 개인의 책임을 전제로 함에도, 인간의 연대성을 강조한 연좌제로 식민통치를 공고화함에 따라 자본주의의 속성을 이해했다.
즉 마치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것처럼,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자본주의가 일관성이 없음을 뼈저리게 각인하였다. 더구나 오늘날 다민족으로 구성된 다국적 거대기업은 마치 배금주의라는 정체성을 가진 자유주의 왕국처럼, 지구촌에서 존립하게 되었다. 물론 오늘날 다자주의가 형성된 원인으로 볼 수 있다.
즉 첨단과학으로 이루어진 정보통신으로 동시적인 세상이 됨에 따라 거대기업은 물 만난 고기처럼, 세계시장을 압도할 뿐만 아니라, 국제정치에서도 상당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뿐만이 아니라 선진국 중심의 투기성 자금의 운용이나, 적대적 합병으로 기업을 지배하거나, 주식이나 채권으로 이식하는 등으로 세계적 양극화가 가속함에 따라, 개업의 양극화와 더불어 국가별 양극화를 형성하는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과잉경쟁으로 만들어지는 과소비, 자원고갈, 환경오염, 절대적 양극화, 인간성 황폐화 등의 총체적 결과인 위험한 사회를 만드는 체제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오늘날 미국 월가에서 1% 도둑과 99% 위기라는 슬로건으로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하일브로너 교수의 다음 글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자본주의에서만 문제가 발생된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체제에서도 전쟁, 히스테리, 말세기적 증세들이 있다는데 인류가 직면한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 그것들은 소비에트 형 사회주의가 지배적인 세계질서인 곳에서도 일어났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자본주의’ 문제만은 아니다.” 라고 했다. (117) (하일브로너, 133p)
아울러 그는 말세기적 현상에 대한 대책으로 “사회통합의 원리는 참여이다. 즉 모든 시민이 토론과 투표를 통해 경제생활의 모든 국면을 상호 결정한다는 약속에 입각한 사회이다.”라고 했다. (118) (하일브로너, 141p) 즉 인류가 행복한 인생을 위해 포스트 자본주의로써 새로운 분배제도로 살아가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
물론 시민 스스로 새로운 분배양식의 세계화를 위한 정치경제 제도를 성립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를 해야 할 것이다. 이는 자유민주주의 헌법이 집회결사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음에 따라 모계적 분배양식의 세계화를 위한 체제의 성립을 위해 조직적인 힘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구시대를 이은 남녀차별은 오늘날까지도 정서적으로 남아 있음에 따라 여성 정치지도자도 육성되고, 여성이 정치참여를 적극적으로 해야 할 것이다.
이는 오늘날 훌륭한 여성 정치지도자가 있지만, 평균적으로 볼 때 남성과 10대 1 정도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하여 여성들이 주체가 되어 자신들의 논리를 조직 원리로 하여 5대5가 되도록 해야 함을 알 수 있다. 물론 오늘날 여성들이 탈자본주의적인 녹색생명운동을 위한 국제 NGO로 활약을 하고 있다.
또한 70년대 미국 여성들이 부계 주의의 종말과 같은 의미가 있는 ‘남적론’으로 투쟁을 하였다. 물론 사회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꿀만한 이데올로기가 없는 가운데, 철학의 빈곤으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만한 입장이 되지 못함에 따라 남성들이 만든 체제의 주변인이 되어 지엽적인 불만을 표출하는 정도에 머물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남성과 달리 여성이 한 단계 변모하는 모성이 되었을 경우, 출산 양육의 부담으로 실력배양을 이루는 황금기를 놓칠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한 사회참여와 조직 생활이 남성들보다 늦게 참여하기 때문이다. 또한 여성의 지위가 가부장의 지위와 연동됨으로써, 여성 상호 간의 격차로 인해 조직화가 어려운 문제도 있다.
이는 경쟁력에 의해 차별되는 남성과 달리, 여성의 경우 능력의 유무와 관계없이 가부장의 능력에 의해 여성 상호 간에 차이가 실재하기 때문이다. 하여 여성이 주체로써 사회를 이끌어가려면 생태적으로 복지적, 민주적인 여성에게 적합한 체제가 성립되어야 조직의 활성화가 가능하게 되면서, 5대 5로 균형을 이루게 됨을 알 수 있다.
이는 자연법상을 근간으로 하는 자유주의 사상이 구체화 되었던 중세유럽에서 17~18세기에도 ‘초야권’이 있었을 만큼 여성은 소외되어 있었다. 하지만 시민혁명을 통해 근대민주주의가 성립된 후에도 열등한 존재로 푸대접을 받다가 여성들의 투쟁으로 19세기 말에 개선되기 시작했다. 이후 20세기 초에 투표권을 쟁취하여 피선거권과 선거권을 획득하였으며, 최근에 페미니즘(여성 사회주의)이 활동함에도, 남녀차별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소극적 복지사회에서 모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적극적 복지사회로 역사 발전되어야 남녀평등이 이루어짐을 말하는 것이다. 하여 복지적인 여성에게 불리한 신자유주의를 넘어 인류의 이상인 민주주의를 공고화하는 모민주의가 세계화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지구촌 시대는 인류의 이상인 민주주의를 공고화해야 함에 따라 민주주의가 자유주의를 위한 절차적 정의로써만 머무를 수 없으며, 민주주의의 본질인 경제적 민주주의로써 경제민주화를 세계화하여 적극적 복지사회를 구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적극적 복지사회를 구현해야 하는 지구촌 시대는 여성이 생태적으로 복지적, 민주적임에 따라, 생활 정치의 주역이 되어야 할 것이다.
즉 신인류에게 민주주의 본질에 부합되는 모계적 분배양식을 구현하기 위해 모계가 적합함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근대사회에서도 성차별이 있었지만, 소극적 복지국가(수정자본주의)부터 여권신장이 가속화된 것처럼, 여성에게 적합한 적극적 복지사회를 만들고, 이끌어가면서 남녀평등을 이루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생태적으로 복지적인 여성이 복지사회의 구현을 위해 결사함으로써, 소극적 복지국가가 성립되었다고 볼 수 있음에 따라 이미 여성은 모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적극적 복지사회를 세계화할 능력이 갖추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착취를 정당화한 초기자본주의에서 노예보다 저임금의 여성과 청소년 인력이 경제적이었던 까닭에 노예제가 퇴출이 될 만큼, 혹독한 삶을 살면서 지혜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초기자본주의가 경공업 중심의 산업구조임에 따라 여성들은 주로 기술자를 보조하거나 허드렛일을 하는 임금노동자로 있었으며, 자본축적을 한 자본가들이 최대이윤을 위해 낮은 단계의 노동집약적인 공장을 식민지로 이동하였을 경우, 여성들은 허드렛일조차 감소하여 매춘까지도 했던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근대사회가 자유경쟁을 위한 형식적 남녀평등일 뿐, 실제로는 산업화의 필요로 남성의 하부구조로써 참여하였다. 이처럼 오랫동안 10대1의 극단적 차별을 받은 여성들은 세상을 이끌어 갈 수 있을 만큼 저력(내공)이 형성될 수 있었다.
이는 여성의 저임금은 사회참여가 가능하게 되었으며, 산업화는 인구의 도시집중과 핵가족화함에 따라 자신의 힘을 배양하면서 강인하게 되었으며, 비범한 여성들이 많이 배출되어 후일 서구 여성들이 세계 여성운동을 주도하게 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오늘날 인류의 보편적 생활양식으로 된 자본주의가 싫다면, 로빈손 크루소처럼 무인도에서 살거나, 탈자본주의 세상을 구현하기 위한 정치결사체에 참여해야 하는 부담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부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가 여성에게 불리함에 따라 부계 편향의 사회에서 여성들이 복지국가의 정당성을 관철하기 위한 결사의 결과, 자본주의가 수정되었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근대사회가 성립된 후 남성들의 인권은 획기적으로 신장이 되었던 반면, 여권신장이 어느 정도 개선되었을 뿐, 남녀차별이 여전하다. 하여 근대사회가 성립된 후 지구촌 시대가 되었음에도, 형식과 내용이 일치하지 않은 상태로 불평등이 계속된다는 것은 앞으로도 변화가 없다고 볼 수 있음에 따라 남녀평등이 5대 5가 되도록 공개토론과 결사가 있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이는 세상의 한 축으로써 여성은 근대사회가 성립된 후 남성과 대등한 인간임을 선언하였지만, 10대 1수준의 의사결정체 기준임에 따라 소외수준을 벗어났을 정도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인간을 재창조하는 여성의 상품화로 인류의 구심력이 약화 되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는 주체인 인간을 상품화함에 따라 인간 존엄을 근간으로 하여 성립한 근대사회와 배치되는 체제일 뿐만 아니라, 여성이 성적 존재로 전락한 위험한 사회가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자본주의사회는 사회적 책임이 있는 구시대 귀족의 부와 달리, 사회적 책임도 없는 부임에 따라 축적 경쟁이 과열되어 절대적 양극화로 사회적 약자가 절대다수가 되었다.
하여 자본주의사회가 대량소비를 부추긴 결과, 환경오염과 지구온난화로 대가를 치르고 있으며, 인간이 상품화되어 몸과 마음이 병들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초기자본주의에서 이기적 삶이 공공선의 결과로 나타난다고 역설하였지만, 이기심을 동기유발로 하는 자본주의는 결과적으로 공공선과 역행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사회적 책임이 없는 이기적 심성을 배양하는 자본주의가 공공선을 구현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뿐만이 아니라 배금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세계화를 추진한 결과, 양극화나 적대감으로 인한 복잡성의 증대나, 갈등의 폭발과 더불어 인류가 감당하기 힘든 재앙의 징조가 나타나고 있다. 즉 동양적 관점에서 볼 때, 대우주와 연동된 소우주 인간이 지구의 최고 관리자로서, 공존을 위한 책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탐욕에 의해 책무를 망각한 결과로 유발되는 현상이다.
하여 전체로써 공공선과 부분으로써 이기적인 삶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모민주의 분배양식인 ‘소유상하한제’가 세계화되어야 재앙이 사라지고, 지속 가능한 사회가 될 것을 예상할 수 있다. 따라서 인류는 지구촌 시대를 맞아 성선설을 근간으로 하여 적극적 복지사회를 구현했던 모계 신본주의 사회처럼, 민주주의를 공고화할 수 있는 ‘모민주의’(모계민주주의)가 세계화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지구촌 시대는 모계적 가치로써 상생의 삶, 복지적 성향, 생명 존중, 환경 우선, 평화주의, 분권적, 탈 양극화, 생활 정치, 생활의 질 향상, 존재의 삶 등을 구현할 수 있는 생활 정치 시대임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여성들이 국제 NGO로써 연대하여 녹색 생명 운동을 전개하고 있음을 상기해볼 때, 모민주의가 보편화될 것을 예상할 수 있다. 왜냐하면 태고로부터 변함없이 생명을 재창조하는 여성들이 생명을 위협하는 체제를 본능적으로 거부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사회에서 여성의 생명녹색운동은 위험과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고역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이 중심이 되어 자본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환경운동을 실천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여 지속 가능한 사회를 위해 모계적 분배양식이 보편적 가치가 되도록 여성들이 스스로 만든 정당에 적극적 참여로 정부 지원을 독려해야 함을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여성을 억압하고 학대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보상과 같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남성은 돈 버는 기계로, 여성을 기계 부품처럼, 전락하게 함에 따라 고전적 가부장제와 달리 오늘날 가부장제는 권리보다 부양의무만 있는 빛 좋은 개살구 같은 가부장으로 전락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과거 가부장은 가정교육이나 소득확보, 대외관계, 부양책임 등 많은 부분을 부담하면서 권위가 있었지만, 오늘날 가부장은 생활 수준의 향상, 과소비, 양극화, ‘풍요 속의 빈곤’ 등으로 인한 가족의 불만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됨에 따라 권위도 없고 의무만 있는 속 빈 강정이 된 것이다.
예를 들어 오늘날 전통적인 부권을 스스로 포기해야 할 처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구시대의 완장처럼 책임지지 않는 권리를 남용하는 경우나, 욕구불만이 있는 가족이 가부장을 돈 버는 기계처럼 생각하거나, 잘못된 부분만 부각하던지 가족의 의미를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왜곡하는 경우 등을 대처할 수 없는 가부장이 증가가 됨에 따라 가족해체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여 사회가 발달할수록 가부장은 가정과 사회에서 샌드위치가 되어가는 현실을 생각해볼 때, 부계혈통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가부장제는 더는 의미가 없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영적 존재임을 자각하는 신인류에게는 ‘비 혈통주의’로써 가모장제를 혼용하는 새로운 가족제도가 필요함을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신자유주의가 원자적인 개인화와 절대적 양극화를 형성하면서 수많은 가족해체로 인한 모자가정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오늘날 현대한국에서 전통적인 가족법을 개정하여 양성평등의 원칙에 의해서 성씨를 부계든 모계든 선택할 수 있고, 병용한 것은 하나의 예가 될 것이다.
하여 인간의 구심력인 모성에게 필요한 만큼, 수당을 지급하는 새로운 분배양식을 세계화할 수 있는 체제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구촌 시대를 연 것으로 사명을 다한 자본주의를 넘어 모계적 가치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가 형식과 내용이 일치하는 완전한 민주주의로써, 모민주의 체제가 세계화되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로 공고화되면서 민주주의를 위기에 몰아넣음에 따라 인류는 환경파괴에 의한 재앙보다도 더 위력적인 인간성 황폐화에 의해 스스로 함몰될 수가 있는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인간이기를 포기하도록 극한 상황으로 몰거나, 잔혹하게 다루고 시험을 하였던 독선적, 폭력적이었던 부계 신본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절대 봉건제를 혁파한 인류가 민주주의를 이상으로 설정한 사실을 상기한다면, 민주주의를 위기에 몰아넣는 배금주의를 공고화하는 자본주의 분배양식은 퇴출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국가기구의 확대나, 치안, 복지, 행정비용 등 사회적비용이 폭발적으로 증대하고 있으며, 과소비로 인한 자원고갈이나, 환경오염으로 유발되는 식량 감소, 온난화로 인한 천재지변 등으로 유발되는 천문학적 비용 등과 같은 심각한 현상을 더는 방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구촌 시대는 ‘관계의 삶’을 살기 위한 ‘모민주의 소유상하한제’가 보편화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아무튼 현대사회의 복잡성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과거와 달리 습득해야 할 것이 증가하고, 가정교육, 학교 교육, 사회교육, 직업훈련 등이 전문화되어 서로 연동되기 힘든 구조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즉 전인격적인 것과 배치됨에 따라 대다수 사람은 힘겨운 과정을 겪고 있는 가운데, 인생의 궁극적 의미를 사색할 여유도 없는 삶을 살다가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이는 모성에 의해 양육되다가 학교 교육에서부터 우열의 경쟁을 시작으로 전문화 과정을 거치면서, 자본주의적 인간성이 배양됨에 따라 유발되는 과잉경쟁의 결과이다. 특히 자본주의적인 인간성이 가족 간에도 형성되어 가족해체가 많아지고 있으며, 결손가족이나, 가족이기주의적인 경향이 심화가 되거나, 싱글 등이 증가함에 따라 새로운 체제가 필요하게 되었다.
하여 경쟁을 완화하는 모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체제가 성립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즉 가족복지를 통해서 안정된 사회를 구현하고자 하는 적극적 복지사회를 구현할 수 있는 모계민주주의가 성립되어야 한다. 물론 가사노동은 출산, 양육, 보살핌 등 가족의 생로병사와 관련된 일임에 따라 사회의 기본을 이루는 기초노동으로 인정하는 모계적 가치가 보편화되어야 할 것이다.
인간은 자신에 대한 의문을 풀기 위한 진리를 탐구한 결과로써, 과학기술문명을 이룩하였고, 인본주의로써 철학적 상대주의로 민주주의를 만들어 스스로 역사발전의 주체가 되었으며, 지식과 교양을 쌓으면서 획기적인 발전을 하였다.
이는 궁극적으로 풍부한 정신문명을 구현할 수 있는 체제로 역사발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자본주의가 인간의 물욕을 동기유발로 하여 이룩한 물질문명도 정신문명을 위한 과정으로 볼 수 있다. 하여 ‘소유의 삶’에서 지구촌 시대가 요구하는 ‘관계의 삶’으로 진보해야 함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새로운 모계적 분배양식이 보편화되어야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게 됨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는 명분을 중시하는 정치조차 실리를 추구하는 상업주의와 결탁한 정상배(政商輩) 정치를 양성함에 따라 대다수 사람이 불행하게 된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자본가가 정치적 책임을 부담하지 않고, 오로지 정치인은 역사적 책임을 져야 함에 따라 무리한 개혁을 하기보다, 자본주의 속성에 충실한 상인처럼 실리를 추구하며, 사회통합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자본주의사회는 누구나 소득이 있어야 책임지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이다.
즉 자본주의사회는 누구나 잇속(실속)을 위해 살아가는 것을 정당화한 체제이다. 하여 자본주의는 불신과 불안정으로 인해 유발되는 사회적비용의 폭발적 증대와 인간성 상실이라는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힘든 체제임을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초국가적인 거대기업이 하나의 세계에서 무한경쟁을 자유롭게 하고자 하는 신자유주의는 세계적 양극화와 더불어 최근에 잦은 국제금융위기로 세계 경제가 침체국면이 깊고 넓게 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문제는 세계자본주의로 인한 위기는 국가자본주의보다 심각하며 예측 불허의 위기 상황을 장기에 걸쳐 형성된다는 점이다.
이는 자본주의로 형성된 제국주의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유발한 것처럼, 신자유주의는 인간의 끝없는 소유욕을 자극하고, 이기심을 배양한 결과, 위험한 사회가 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이는 자본주의가 얼마나 강력한가를 공산당이 망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이기심을 배양하여 만든 욕망의 틀인 자본주의가 공산당을 퇴출하게 함에 따라 자본주의의 우수성을 홍보하며 자본주의의 공고화를 정당화하고 있다.
하지만 자연법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근대정신과 배치됨에 따라 문명을 가장한 야만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이는 오늘날 세상은 초기자본주의와 달리 첨단 과학기술과 더불어 천문학적인 경제 규모에 의해서 만들어진 신자유주의가 절대적 양극화를 가속하면서 위험한 사회가 됨에 따라 테러가 일상화되고 있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탈자본주의적인 녹색생명운동을 실천하고 있으며, 세계 여러 곳에 ‘관계의 삶’을 위한 각종 새로운 복지공동체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지구촌 시대는 소극적 복지사회를 구현하는 국가자본주의를 넘어 적극적 복지사회로 역사 발전하기 위한 체제가 성립될 것이다.
즉 지구촌 시대는 민주주의의 형식과 내용이 일치하는 온전한 민주주의로써 모계 민주주의가 세상의 보편적 가치가 되어야 한다. 물론 인간은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합리적인 제도를 창안해내어, 스스로 창안한 가치 질서에 복종하고 지키며 살아가는 문화적 존재임에 따라 모민주의를 선택할 것이다.
이는 이미 부계와 모계가 균형을 이루었던 인류 최초의 모계대연합(신앙공동체)이 수천 년간 공유제로 상생의 삶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끝없는 재창조를 하면서 스스로 궁극적 삶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창조적 존재임에 따라 적극적 복지사회로 진보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구촌 시대를 살아가는 모계적 분배양식으로 ‘상생의 삶’을 살아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인간의 구심력으로써 모성애를 근간으로 한 중기모계사회의 원형종교가 오늘날까지 종교의 뿌리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나, 나눔의 수단으로써 공유제를 한 사실 등은 참고가 될 것이다.
이는 태고로부터 인류가 사회협동으로 이룩한 생활양식이나, 물적, 정신적 자산 등 축적된 사회적 자산을 토대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개인주의는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처럼, 살게 함에 따라 인간의 연속성(역사성)을 통해 형성되는 유대감을 훼손케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위험한 사회가 만들어진 것은 개인주의가 사회협동으로 이룬 사회적 자산을 사유화함으로써 유대감을 상실케 하는 것이 원인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의 사회성이 사회적 자산인 교육으로 배양되고 있다는 사실을 1920년 인도 미드나포르의 늑대 굴에서 2살과 8살의 소녀가 발견되어 소위 늑대소녀(Feral Child)로써 카말라와 아말라의 경우, 두 소녀가 구출된 후 1명은 1년 만에 죽고 2살의 카말라는 6년간의 교육을 통해 사람의 말과 행동을 익혔지만, 10살이 되지 않아 죽었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사회적 자산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고 있다. 하여 낮은 단계의 인간관에 의해 형성된 배금주의가 사회협동의 결과물인 사회적 자산을 사유화하여 위험한 사회를 만들었음을 생각해볼 때 역사발전에 역행함을 알 수 있다.
아무튼 서구의 상업주의를 체계화한 자본주의는 ‘소유의 삶’을 중시함에 따라 정치의 사회통합기능을 무력하게 만들고 있다. 예를 들어 오늘날 초국가적인 거대기업은 법과 제도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하려는 경향으로 인하여 법의 안정성을 해치는 경우가 많은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재화를 압축한 관념적인 돈은 혈액처럼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의 연결고리로써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강력한 힘이 있는 돈을 소유한다는 것은 계급투쟁과 같이 심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인간을 생존케 하는 공기와 물 등의 자연 자원을 공유하고 있듯이, 돈을 인간이 만들었다 할지라도 인간의 공존을 위한 교환수단으로써, 행복한 인생을 위한 도구로써, 사회적 성격이 있음에 따라 가능한 적당한 선에서 나눠 갖게 하여 자신들의 궁극적인 삶의 목적을 위해 사용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하여 근대시민사회를 성립하게 한 시민혁명의 인권선언은 인류가 구현해야 할 이상임을 생각해본다면, 인간 존엄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새로운 모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모민주의의 ‘소유상하한제’가 적합함을 알 수 있다.
자유, 평등, 박애를 선언하며 일어난 시민혁명으로 근대사회가 성립된 것은 획기적인 진보로써 인류의 위대한 유산이 되었다. 하지만 자본주의로 인한 절대적 양극화가 형성됨에 따라, 시민혁명의 인권선언 의미는 퇴색되었다. 이는 물적 기초가 보장되지 않는 인권은 ‘앙꼬 없는 찐빵’처럼, 알맹이 없는 정치적 수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민주주의가 자유주의를 위한 절차적 정의로써, 형식적 민주주의라는 점에서 반쪽민주주의이다. 하여 지구촌 시대는 민주주의의 내용인 경제민주화에 의한 복지와 형식으로써 절차적 정의가 갖추어진 온전한 민주주의로써 보편화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과학기술의 발달로 좁아진 지구촌 시대는 오늘날까지 이어진 각 지역의 전통은 삶의 궁극적 목적이면서, 사회통합을 이루게 하는 정체성임에 따라 유발되는 문화적 충돌을 온전한 민주주의로 완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각 지역의 나름대로 생활양식인 다양한 문화를 교류하면서 새로운 문화로 거듭나기 위해 민주주의가 공고화가 필수적이다. 다시 말해서 신인류는 과거처럼 성급하고 배타적이며, 차별을 통해 이익을 얻으려는 사고방식이 위험한 사회를 만들게 되었음을 알게 됨에 따라 경제민주화로써 문화적 차이를 극복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제3차 산업혁명으로써 후기 지식정보화시대를 살아가는 신인류는 첨단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달로 고성능 컴퓨터와 정보통신, 이동 수단, 자동화 설비, 로봇, 생명과학, 나노기술, 우주개발 등 무수한 결과물을 만들고 있으며, 아울러 소프트웨어로써 인터넷이나 무궁한 응용기술에 의한 인프라와 더불어 인문 사회과학, 경제학, 회계학 등의 발달로 모계적(민주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모민주의가 가능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첨단 과학기술과 정보통신의 획기적인 발달로 절대주의 철학자 플라톤이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 소득 상한선을 최저임금의 5배 이하로 해야 한다고 주장을 실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구촌 시대의 첨단 과학기술이 모계적 분배양식인 ‘소유상하한제’가 실현 가능케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소유상하한제’는 욕구 실현의 결과인 개인 자산이 국가 총자산을 총인구로 나누어 한 가족이 전체평균의 5배를 넘지 않게 하며, 10년에 한 번 정리하여 5배 이상의 차액은 관리위원회에 의해 가족복지를 위해 수입이 필요한 모성에게 지급되는 수당의 재원이 된다. 그리고 대자본과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인류의 당면과제나, 우주개발처럼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는 사업에 연대하여 투자하는 제도이다.
그리고 ‘소유상하한제’에 의해 발생되는 잉여가치가 적극적 복지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사회 봉사활동과 연계된 단체나 개인과 문화예술 활동 등은 위원회 결정에 따라 위기의 모성에게 가족 복지수당이나 보조금 등으로 사용하게 된다.
이러한 분배양식이 세계화되어야 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일방주의적인 과격한 자유무역으로 인하여 지역의 독자적인 생존방식에 의한 자원의 자율규제가 의미를 잃게 되었기 때문이다. 뿐만이 아니라 자원고갈이나 남획 등으로 환경오염으로 인한 생태계 파괴를 인간이 해결하기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다.
즉 무한경쟁을 원칙으로 하는 신자유주의는 경쟁력이 있는 선진국은 유리하지만, 반면 무력한 후진국은 불리하게 됨에 따라 이를 극복하기 위한 무분별한 자원개발과 채취로 인한 환경오염으로 전 인류에게 피해를 주게 되는 것이다. 하여 사회협동으로 만들어진 잉여가치를 재분배하기 위해 세계정부로써 동반성장이라는 역사발전의 소명이 있는 UN이 모계적 분배양식의 세계화에 앞장서야 함을 알 수 있다.
참고로 모계 신본주의 사회가 마치 에너지 불변 법칙처럼 영혼이 불멸하면서 생전의 행위 결과에 따라 본향(북두칠성)으로 가거나, 환생하거나, 소수는 차원을 역행하여 동물이 된다거나, 심지어 다른 별로 간다고 믿었다.
아울러 대다수 사람은 지구에 여러 번에 걸쳐 환생하여 수정하면서,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면, 신인에 의해서 검정을 받고 ‘해혹복본’하는 기준이 나눔(공헌. 사랑)이었다는 사실은 인류의 염원으로써, 적극적 복지사회를 구현하고자 하는 방향성은 변화가 없음을 이해할 수 있다. 하여 나눔(사랑)은 인간의 사명으로 의심하지 말고, 믿고 실천하라고 한 ‘해혹복본’의 유시는 오늘날 적극적 복지사회의 구현과 같은 의미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따라서 인류가 ‘소유상하한제’로 만들어지는 잉여가치를 과학의 발전과 적극적 복지사회의 구현에 사용된다면, ‘관계의 삶’으로 역사 발전하게 됨을 예상할 수 있다. 덤으로 인류는 내면세계를 탐구하여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를 이해한 성현들처럼, 또렷하게 알게 될 것이다.
즉 인간의 무한한 상상력과 창조력으로 우주나 생명의 근원, 마음과 영혼 등에 대해서 오늘날 신인류가 탐구한다면, 알 수 있은 문제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대다수 사람이 생로병사의 과정을 통해 천지 만물과 화합하는 방법을 익히며 내면 탐구와 동시에 우주 개척을 하는 과정에서 영원히 불멸하는 ‘나’를 발견하게 됨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대우주와 연동된 소우주 인간의 출생목적은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여 완성도를 높이는 과정에 있음을 태고로부터 비범한 사람들에 의해 잘 알려져 있다. 하여 모계 신본주의 사회가 인간은 대우주의 자손이면서, 대모신의 후손으로서 순환·진보한다고 믿은 사실을 상기해볼 때, 인간의 출생목적인 각자 나름대로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존재의 삶’을 위한 ‘관계의 삶’으로 완만한 성장을 하는 것이 행복한 인생이 됨을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비록 개인 노력의 결과물이라 할지라도, 태고로부터 순환 진보하며 이룩한 사회적 자산에 의한 결과물로 이해하여 한발씩 양보하자는, 인간의 ‘천부소유권’을 존중하여 물적인 기초를 보장하는 적극적 복지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소유상하한제’가 지구촌 시대를 살아가는 신인류에게 적합한 분배양식임을 알 수 있다.
이성적 존재로서 인간은 역사의식이 있으며 스스로 창조한 문화로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재화를 획득하기 위해 도구를 사용하며, 사물의 가치를 설정하는 주체로써 존엄한 존재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까닭에 기원전 5세기경 그리스의 소피스트였던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정의하였다.
또한 인간은 자연법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근대사회를 성립한 후, ‘천부인권’의 내용이라 할 수 있는 ‘천부소유권’을 소극적으로 보장하는 행정국가까지 진보케 하였다. 하여 인간은 오직 자연의 지배를 받는 동물과는 전혀 다른, 스스로 창조한 문화에 의해 스스로 지배 복종을 하며, 운명을 개척하는 문화적 존재로서 영적 존재임을 확신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신자유주의는 인권을 포기할 정도의 절대적 양극화를 유발하고 있으며, 아울러 실질적으로 인권의 근간인 물질적 기초가 보장되지 않음에 따라 ‘천부인권’은 자유경쟁을 위한 명분으로써 선언적 의미에 머무르고 있다. 따라서 인간의 기본권으로써 인권을 스스로 획득한 만큼, 스스로 인간 존엄을 지켜갈 수 있는 체제를 세계화하기 위해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함을 알 수 있다.
물론 ‘천부인권’의 내용인 ‘천부소유권’을 인정하는 모계적 분배양식의 세계화를 위한 정치참여는 좋은 세상을 만드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이는 ‘천부인권’을 보장할 수 있는 수단으로써 자연법사상을 확장한 ‘천부소유권’을 보장하는 제도적 뒷받침이 없다면, ‘천부인권’은 물 없는 오아시스와 마찬가지가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 사회가 현실적으로 자유경쟁을 위한 ‘천부인권’(자유, 평등)일 뿐, 천부인권의 실질적 내용으로써 경제적 기초를 보장하는 ‘천부소유권’을 인정치 않고 있음에 따라, 인류의 이상인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하게 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참고로 모계 신본주의 사회에서 신의 후손으로 인간 존엄을 위한 물적 기초를 보장한 공유제나,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먹을 것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하는 전통 한국의 속담에서 ‘천부소유권’의 의미를 잘 이해할 수 있다.
즉 ‘천부소유권’은 오늘날 자유민주주의 헌법에 인간의 기본권인 생활권(생존권)과 동일한 의미이며, 인격과 별개인 물적 기초를 보장하는 기본권이다. 하여 자연계가 먹이사슬로 이루어져 공존을 할 수 있듯이, 최선을 다하여 재화를 획득할지라도, 타인이 절망에 빠질 만큼 절대빈곤을 만드는 체제는 지구촌 시대의 개막과 함께 퇴출이 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물론 물적 기초를 보장한다는 것은 권리임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의무를 지며, 의무 태만한 자에게까지 무임승차를 가능케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의무 없는 ‘천부인권’과는 다르다.
아무튼 자본주의가 인간의 탐욕을 제도적으로 배양함에 따라, 형성된 부의 양극화는 구시대의 권력 양극화보다, 더 많은 문제를 유발하고 있다. 즉 부계사회가 양극화를 지향하는 절대주의 사회로써 중앙집권제의 특성을 이은 자본주의가 무한소유를 정당화함에 따라 만들어진 1대 99라는 오늘날 절대적 양극화는 인간성 파괴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부계사회가 화폐경제로 무한소유가 가능하게 되면서 무한소유를 염원한 결과이다. 예를 들어 ‘소유의 삶’을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가 탐욕을 배양하면서 발달한 결과, 화폐가 금본위제 시대를 넘어 더 빠르고 더 많이 축적을 할 수 있는 정보 본위제로 변모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무한소유를 정당화하는 자본주의와 부계사회의 전체주의 유습은 같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분권을 근간으로 하는 근대민주주의 정신과 배치되는 것이다. 하여 주체인 인간이 자연계에 속해 있으면서 자연계의 제한된 약육강식에서 벗어난, 무제한적 약육강식을 정당화하는 것은 공존을 거부하는 삶으로 볼 수 있음에 따라 ‘상생의 삶’을 위한 민주적인 통제가 필요함을 이해할 수 있다.
즉 자연계의 경우 서로 다른 생명체가 먹이사슬로 균형을 이루는 것처럼, 문화적 존재로서 인간은 ‘상생의 삶’을 살게끔 제도를 만들어 스스로 규제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선호하는 수산물만을 남획하거나, 과잉사육으로 인한 농경지의 축소, 과소비로 인한 자원고갈, 환경오염으로 인한 생태계 파괴로 먹이사슬이 붕괴 등을 방지하기 위한 ‘소유상하한제’로 규제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대자연은 모든 생명체가 공존할 수 있도록 햇빛, 공기, 물, 땅 등과 유기적인 먹이사슬에 의한 조화로운 구조로 이루어져 생명체를 유지할 수 있게 만들어져 있음에 따라 인간 상호 간의 균형을 깨트리는 것은 자연계에도 영향을 주어 인간에게 위험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이 화폐를 발명하여 무한한 소유욕을 채울 수 있게 됨에 따라, 무한경쟁으로 제한적인 자연계 약육강식의 균형을 파괴하면, 아무도 복원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대자연의 법칙은 선악 시비분별을 벗어나 개체와 전체가 상호 간에 이롭게 되기 위해 제한적임을 상기해 볼 때, 제한적인 분배양식의 세계화가 당연하다. 하여 지구촌 시대는 ‘상극의 삶’을 넘어, ‘상생의 삶’을 살 수 있는 모계적 분배양식이 보편화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화폐는 재화를 압축할 수 있는 기능에 의해 독점적 태도를 현실화할 수 있는 도구로 발전하면서 의식을 지배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탐욕을 현실화할 수 있는 화폐가 주체가 되고 인간이 객체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화폐경제의 발달은 오늘날 소유를 위한 과잉경쟁으로 자원고갈과 더불어 생태계를 파괴하는 환경오염 등으로 나타났다.
물론 신자유주의가 인간을 경제적 동물로 살게끔 하여 양극화를 방치한다면, 인간 상호 간의 연대성 결여로 지구에 닥쳐올 위기를 방치한다면 악순환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첨단정보통신의 발달로 국제적 머니게임을 하는 가운데, 형성되는 양극화와 인간성 황폐화, 과소비로 인한 환경재앙 등으로 유발되는 사회적비용은 천문학적으로 지출되고 있다.
그래도 위험한 사회가 공고화되고 있으며, 환경오염, 자원고갈, 생태계 파괴 등으로 대형자연재해가 많아지고 있지만, 방관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뿐만이 아니라 환경오염 문제는 인류 전체가 비용을 부담하는 세계적 문제임에 따라 소득도 없이 피해자가 된 빈곤층과 소득을 얻고 가해자가 된 부유층 간의 비용부담에 대한 대립 관계가 형성되었다.
즉 인간 상호 간의 피라미드구조와 달리 생태계의 피라미드구조가 한번 파괴된다면, 사실상 인간의 힘으로 복구 불능함에도, 과잉경쟁으로 생존환경이 나빠진 상황에서도, 경쟁에서 탈락한 빈곤층의 경우 살아남기 위해 남획이나 자연훼손을 한 결과를 두고 다투게 되는 것이다.
물론 생태계 파괴와 환경오염 등은 배금주의로 인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가 만든 배금주의는 인간을 소인배로 만들면서 ‘상극의 삶’을 살게 한 결과가 무수한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환경오염임을 말하는 것이다. 참고로 동양에서 소인배 기준은 가까이하면 먹어버리고, 멀리하면 원망하여, 간교하고 절제가 없는 이기적이고, 남의 약점을 이용하거나, 보복을 마음에 두고 상대를 무너지게 할 기술을 체득하여 탐욕을 감추는 자라고 하였다.
예를 들어 상생의 조화를 중시한 동양은 사회공헌도에 의해 이루어진 사농공상의 사회였던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여 주체인 인간을 ‘경제적 동물’로 살아가게 하는 자본주의는 위험한 사회를 만드는 체제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천지 만물과 협력하여 조화를 이루는, 관계의 중심에 있는 인간은 스스로 ‘소유상하한제’를 세계화하여 ‘존재의 삶’을 살아야 할 시점이 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문화적 존재인 인간이 먹이사슬의 최고의 위치에 있으면서 스스로 인간 상호 간에 무한경쟁으로 인해 생태계의 먹이사슬을 파괴한다면, 인간은 조만간 공멸할 수 있음을 석학들이 경고하고 있다. 예를 들어 주체로써 인간과 자연계의 다른 생명체들이 비록 대상이라 할지라도 유기적임에 따라 만약에 과소비를 하여 더는 재생산될 수 없거나, 품귀현상을 유발한다면, 실물 가치를 반영하는 화폐는 의미를 잃게 된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자본주의가 물질의 풍요를 통해 행복할 것이라는 믿음에 의해 생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인간을 상품화하여 소모품처럼 만들어감에 따라, 위험한 사회가 공고화되고 있다. 물론 인간은 정신과 물질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 태고부터 오늘날까지 진보하고 있음을 상기해 볼 때, 지혜로운 인간은 영육의 균형을 이루는 포스트 자본주의를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있다.
이는 자본주의가 매우 짧은 기간 동안 빠르게 천문학적 경제 규모로 발전한 순기능도 있지만, 역기능으로써 양극화나 환경오염, 지구온난화 등으로 인류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위험한 사회로 발전케 하였으며, 앞으로 더욱 위험한 사회로 퇴보할 것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혹자는 부계 유일신의 창조물 중에서 사람이 지구의 관리권을 위임받아 먹이사슬의 최고의 위치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함에 따라 타 생명체나 유일신을 믿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도 배타적인 관계를 설정한 서구사회에서 자본주의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물론 부계 유일신 중심의 부계 신본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절대 봉건제 사회로써, 권력 양극화가 뚜렷한 가운데 자본주의가 만들어졌기 때문으로 보는 측면도 있다. 참고로 부계 유일신은 전지전능하고, 권위와 위용, 절대 존재, 수직적, 창조주 등으로 표현되었지만, 반면에 모계 유일신은 봉사, 헌신, 나눔, 자비, 수평적, 인간을 대모신의 후손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과 상반됨을 알 수 있다.
즉 모계 신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모계 유일신의 후손으로 중간 신(신선)과 함께 주체로써 나눔의 삶을 살았던 것과 정반대임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모계 신본주의 사회의 유습을 이은 원시 음양론과 더불어 불교에서 사람은 태생적으로 부처임에 따라 누구나 계율을 지키면 부처가 될 수 있음을 역설하고, 모범을 보인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인간은 부계 유일신의 피조물이 아니며, 종도 아닌 삼라만상의 주체이면서 자율적인 존재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솔선수범을 중시한 것이다. 따라서 동양은 민본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덕치주의 사회로써, 스스로 사색과 자신을 성찰하기 위해 사농공상의 가치체계를 유지하였던 인본주의 사회로써, 서구와 근본적으로 다름을 알 수 있다.
즉 서구는 인간을 부계 유일신에 의해서 창조된 피조물로 믿음에 따라 조상신의 개념이 없었던 반면, 인본주의의 오랜 전통이 있는 동양은 조상에게 감사의 제의를 하고, 조상 중에서 수범이 되는 훌륭한 조상을 조상신으로 숭배한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즉 모계 신본주의 유습을 이은 전통 한국은 사람이 순환·진보하는 존재임에 따라 행복한 인생을 ‘존재의 삶’에 비중을 두었던 반면, 부계 유일신을 숭배한 서구는 피조물로써 사람은 일회적인 삶을 산다고 생각함에 따라 ‘소유의 삶’에 비중을 두고 있다.
예를 들어 동양은 하늘과 땅 그리고 인식하는 주체로써 인간을 생각하여 출산하는 여성을 존중하였던 것과 서양의 피조물 사상은 부계 유일신이 주인이고, 여성은 마치 로봇을 생산하는 기계처럼, 생각한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동양은 인간의 약점인 죽음과 기아의 공포를 이용한 착취나, 탐욕을 정당화하고, 배양하는 제도를 만드는 것 등을 금기로 하였으며, 인간은 스스로 갈고 닦는 ‘수기치인’을 삶의 궁극적 목적으로 생각함에 따라 인간의 유대감을 헤치는 상업의 발달을 억제케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동양은 자본주의를 수용하기 어려워 산업화가 늦어졌을 뿐만 아니라, 상당히 혼란을 겪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국가자본주의와 달리, 신자유주의를 받아야 하는 동양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즉 동양의 경우 소극적 복지국가로써 국가자본주의는 수용 가능했으나, 선진국 중심의 비복지적인 신자유주의는 동양적 가치와 충돌하고 있다.
예를 들어 동양인은 자본주의적 심성과 소인배와 동격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의식은 최소한 수십 년 내지는 수백 년에 걸쳐서 서서히 변화하기 때문에 언젠가는 서구적 가치와 동양적 가치가 수렴되면서 지구촌 사회에 적합한 제3의 가치가 정립될 것이다.
물론 전통문화를 잇는 유럽의 선진국도 신자유주의로 인하여 사회통합의 어려움을 겪음에 따라 각국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회복하면서 신자유주의와 균형을 이루고자 하고 있다. 이는 영국의 산업혁명으로 인해 만들어졌던 아담스미스의 자본주의는 시민혁명을 통해 유럽으로 확산이 되었다.
하지만 오늘날에 이르러 천문학적 소비로 인한 자원고갈이나 환경오염, 양극화, 인간성 황폐화 등으로 위험한 사회를 형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로 자본주의 속성을 심화함에 따라 사회통합을 구현하기 어렵게 되었다. 하여 배금주의의 사적영역 비대화로 전체가 위험해지는 무관심한 현상과 절대적 양극화 등을 해결할 수 없는 근대사회를 넘기 위해 ‘포스트모더니즘’이 등장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포스트모더니즘’은 ‘포스트 자본주의’와는 다르다. 즉 인간의 이기심을 동기유발로 하는 자본주의는 소비가 삶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게 함으로써 인간이 소외되게 함에 따라 주체로써 삶을 살게 하는 새로운 모계적 분배양식의 세계화를 ‘포스트 자본주의’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없는 존재임에 따라 새로운 분배양식으로 충족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상대의 성을 존중하며, 쌓아 가는 공공선은 적극적 복지사회를 만드는 원동력이 됩니다. Respect the sex o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