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행복한 인생을 위해 스스로 창조한 문화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자신이 누구인지 궁금하게 생각하며, 사물을 탐구하면서, 선한 존재가 되기 위해 진보를 하고 있다. 이는 동물이 약육강식의 단순한 축생의 삶을 살아가는 반면, 인간은 선악시비분별(善惡是非分別)을 하는 복잡한 인생을 살고 있다는 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인간은 근본적으로 선한 존재이기 때문에 현실 세계에서 겪는 양심과 욕망의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지역 환경에 맞게 생존 양식(문화. 가치)을 설정한 사실로부터 지혜로운 존재임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모계 신본주의 사회가 인간을 신의 후손으로 선한 본성을 수련하기 위해 순환·진보한다고 믿었으며, 악은 일시적이며 선을 위한 악으로 생각하거나, 영혼에서 육화(肉化)되어 현실의 어려움을 통해 인간의 선한 본성을 나눔으로 배양하고 연마하여 인간의 본향으로 되돌아간다고 믿은 사실을 상기해볼 때, 스스로 행복한 인생을 만들어가는 문화적 존재임을 이해할 수 있다.
하여 앞의 사실에 대해서 사실 여부를 떠나 인간이 이룩한 정신문화와 물질문명을 생각해볼 때, 인간은 선한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은 근본적으로 선한 존재임을 인류가 근대사회를 성립한 것이나, 소극적 복지국가를 구현했으며, 이어서 인류의 이상인 적극적 복지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언제나 노력하고 있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여 인간이 문화로 삶을 재창조하며 이룩한 지구촌 시대를 만든 자신들의 노고를 생각한다면, 모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적극적 복지사회로 스스로 자신에게 보상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물론 ‘소유의 삶’을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지구온난화나 생태계 파괴, 절대적 양극화 등 부정적인 여러 징후가 나타남에 따라 ‘관계의 삶’을 살아야 하는 측면도 있다.
하여 지혜로운 인간이 지식을 축적한 결과, 인류가 역사발전하고 있음을 생각해 볼 때, 자본주의가 인류를 위태롭게 한다면 마땅히 퇴출을 시킬 것이다. 그리고 자연계는 제한된 약육강식의 먹이사슬 구조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 반면에 자연계에 속해 있으면서도 주체로써, 먹이사슬의 최고 위치에 있는 인간은 우수한 두뇌로 삶을 재창조하는 문화를 갖고 있다.
그리고 우수한 육체를 갖고 행복한 삶을 위해 도구를 사용하며 각자 맞는 역할에 따라 사회협동으로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잉여 생산을 비축할 수 있음에 따라 인간은 자연계의 먹이사슬과 다른 인간 상호 간의 무한 경쟁으로 불균형을 이루고 있다. 이는 부계사회가 등장하고부터 신분제로 극단적인 양극화를 정당화한 것이나, 근대사회가 성립된 오늘날 1대 99라는 절대적 양극화를 유발한 자본주의 분배양식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
즉 자본주의가 만든 극단적인 불균형으로써 절대적 양극화로 인간 상호 간이나, 다른 생명체와 공존이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는 오늘날 과소비로 인한 부작용을 제거하기 위한 소비자운동이나 자연 친화적인 삶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만들어진 녹색 생명 운동이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각종 사회단체의 활동 등으로 자연계와 균형을 이루려 하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즉 인간은 창조력이 있음에 따라 빵을 위해 살아가는 하이에나 (맹수가 먹다 남은 것과 부패한 동물까지 먹는 맹수)와 같은 미물처럼, ‘소유의 삶’을 살고자 한다면, 공멸하게 됨을 말하는 것이다. 하여 인간의 경우 ‘소유의 삶’을 위해 무엇을 이용하던, 어떤 전략이든, 합법을 가장한 야만이나 부도덕한 짓을 하더라도 결과만 좋다면 된다고 하는 사고방식을 형성하는 자본주의제도는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절대적 양극화를 만들어 인간을 곤경에 빠트리게 하는 자본주의는 인간 상호 간에 대립과 반목으로 성악설적 인간형을 만들기 때문이다. 물론 인류가 양극화를 공고화하는 부자연스러운 제도에서 살아간 구시대나, 근대자본주의사회에서 이전투구로 혹독한 대가를 치른 역사적 경험을 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에게 적합한 새로운 모계적 분배양식을 위한 정치체제가 성립되어야 함을 이해할 수 있다.
사유제를 근간으로 하는 부계사회가 발전을 거듭한 끝에 생성한 자본주의가 인간의 유한한 인생에 비해 지나친 경쟁으로 소모적인 삶을 살아가게 함에 따라 왜 사는가? 라는 회의에 빠지는 경향이 많아졌다. 이는 자본주의가 행복한 삶을 살게 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자본주의가 등장한 지 불과 얼마 되지 않는 짧은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험악한 역사적 경험과 오늘날에는 위험한 사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즉 자본주의가 욕구를 배양함에 따라 인간이 상품화되고, 소외된 결과이다. 다시 말해서 물신주의(배금주의) 사회가 되어 인간이 생산을 위한 소모품이나, 수단이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구시대의 억압에 반동하여 성립한 자본주의가 인간의 이기심(개인성)을 강조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부정부패한 구체제에서 착취를 당한 대다수 민중이 평균적으로 빈곤했던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인권선언에 기초한 근대사회가 성립되었음에도, 초기자본주의 사회는 착취로 인하여 대다수 민중은 빈곤했다. 이는 지나친 착취로 원성을 쌓게 된 결과, 근대정신인 복지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국가개입주의로써, 계획 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사회주의가 등장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자본주의가 근본적으로 인간의 이기심을 자극하고, 배양하는 사회로 발전되는 것을 정당화하였기 때문이다. 즉 자본주의 생활양식이 이기심을 선 순위로 동정심은 후 순위로 설정함에 따라 무한축적 경쟁으로 인한 빈곤층의 양산이나, 환경오염으로 인한 다수에게 피해를 입힐지라도 도덕적 책임을 망각하게 하였다.
이처럼 인간의 경우 이기심과 동정심의 균형이나, 개인성과 사회성 등이 균형을 이루어야 함에도, 자본주의는 개인성을 선 순위로 함에 따라 사회적(정치적) 동물이라는 인간의 특질을 왜곡시켜 인간의 연대성이 무너지게 되는 체제임을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슘페터가 자본주의의 파멸을 예상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 답은 경제학에 있지 않고 사회학에 있다. 즉 분석에 있지 않고 통찰에 있는 것이다. 슘페터는 자본주의의 문화가 가치를 부식시키는 성질을 갖고 있다고 본다.”라고 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114) (하일브루너, 121p)
다시 말해서 태생적으로 종교적 심성을 내재한 인간이 영적 존재임을 부정하는 체제임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서구적가치인 자본주의는 인간은 피조물로써 마치 산업기계의 부품처럼, 단순한 소모적인 존재로 전락하게 한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인간이 삶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스스로 상품화되면서, 상품을 만드는 수단으로써 객체가 되어 소외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부계사회가 하드웨어적인 유한한 것에 머물러 일회적인 소모적인 존재로 생각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여 모계 신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인 내가 신의 후손으로 순환·진보하는 재생의 삶을 사는 영적 존재라고 생각한 것과 근본적으로 다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사회시스템에 의해 형성된 문화와 소프트웨어적인 정신과 하드웨어적인 몸이라는 3가지 요소로 구성된 인간은 스스로 재창조하고 규율하는 문화적 존재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인간은 스스로 재창조한 문화로 행복한 삶을 살게 하는 탁월한 능력이 있음을 생각해 볼 때, 문화적 존재임을 이해할 수 있다.
물질의 풍요를 통해 행복한 인생을 구현코자 했던 자유주의의 의도와 달리, 구시대 신분제 사회의 계급투쟁처럼,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절대적 양극화를 구축하기 위한 과잉경쟁을 하고 있다. 또한 오늘날 신자유주의 이념을 근간으로 하는 레이거노믹스의 ‘공급자 경제’처럼, 첨단 과학기술에 의한 생산성과 우수한 품질이나 가격 등에 의한 우월적 경쟁력으로 인한 소비 확대를 1대 99라는 양극화가 빠르게 공고화되고 있다.
이는 자본주의가 마치 멈추면 넘어지는 두발자전거가 끝없이 달려가야 하는 것처럼, 소비로 유지되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하여 소비를 위한 유혹과 홍보 경쟁으로 인해 유발되는 만성적인 욕구불만을 배양함에 따라 누구나 ‘풍요 속의 빈곤’이라는 현상으로 물신주의가 만연하게 되었고, 절대적 양극화로 대다수 사람은 빈곤층으로 전락하게 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무한한 상상력이 있는 내면세계와 달리 유한한 현실(외면) 세계에서 무한한 축적이 불가능함에도, 무한축적이 가능한 것처럼, 허용한 자본주의가 위험한 사회를 만들게 됨을 알 수 있다. 즉 자본주의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선의의 피해자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짧은 인생살이를 하는 사람이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미지의 긴 여정을 준비할 자기성찰의 여유도 없는 가운데, 인간에게 꼭 필요한 여유를 갖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사실 불행은 끝없이 발생하고 함정도 많아지는 것으로, 자본주의는 유지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의 원형사회로써 내면세계를 탐구하는 기술이 발달한 모계 신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을 신의 후손으로 영원히 불멸하는 나로 믿은 사실은 인간에게 결코 손해가 아니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소유의 ’삶을 살기 위해 성립한 자본주의사회에서 클래식은 우수한 음악임에도 불구하고, 시장원리에만 내버려 둔다면 쇠퇴함으로 장기적인 국가균형발전을 위한 전략으로써, 클래식 음악에 투자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기업은 최대이윤을 위해, 시장의 원리에 의해 수요가 많고 돈벌이가 되는 재즈, 유행가 등에 투자가 집중됨에 따라 메말라가는 정서를 위한 방편으로 비시장적인 필수 불가결의 공공재로써 클래식을 정부가 투자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지구의 물질적 요소가 근본적으로 부족함에 따라 무의식중에 부를 축적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고 앞에서 언급한 것을 상기해볼 때, 주체로써 인간은 부족한 물질을 정신문화로 극복해야 하는 상황에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조선 중기 거상 임상옥의 일대기를 그린 최인호의 소설 ‘상도’(商道)에서 아무리 부어도 7부 내에 머무르는 술잔으로 소개한바 있는, 전통 한국의 계영배(戒盈盃)는 7부 이하만 채울 수 있는 컵으로써, 컵에 가득 채우는 것을 금기로 함을 교훈 삼아 욕망을 항상 자제한 결과 위기를 모면하고, 조선 중기 최고의 대상이 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전통 한국의 삶의 지혜를 알려주고 있는 술잔 내지는 찻잔으로써 계영배(戒盈杯)는 내부에 구멍이 나 있어 술을 아무리 채우려 해도 70% 이상 채울 수 없는 전통 한국의 성배(聖杯)였다. 하여 현실 세계에서 3분의 2 정도가 한계이며, 이성의 한계로 알 수 없는 세계를 위해 3분의 1은 남겨둘 것을 권고하는 선조들의 상징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박애 정신을 내재하고 있는 중용의 실천적, 구체적인 기준을 계영배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할 것이다.
즉 인간의 물욕은 무한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원천적으로 30% 정도 부족함에 따라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과당경쟁을 하여 서로가 곤경에 처하게 되기보다 30% 정도 부족함을 받아들이는 것이 도리라고 믿었다. 다시 말해서 타인이나 다른 생명체와 공존을 해야 하는 주체로써 사회적 책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최근에 영국의 천체물리학자인 호킹 박사가 우주가 만들어질 때부터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물질이 30%가량 부족하다고 하며, 우주는 7차원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가설을 제시한 것과 한민족의 계영배철학과 부합하고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이는 모계 신본주의 사회가 인간이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물질과 정신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 공유제로 순환 진보를 원만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이유가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계영배의 의미를 실천한 거상 임상옥은 사농공상의 가치체계의 상인이었음에도, 후일 고위 관료가 되었던 사실에서, 전통 한국의 반상 제가 개인의 사회공헌도에 따라 결정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계영배는 나눔의 법칙을 무언으로 가르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약점인 탐욕을 스스로 경계하는 상징물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스스로 자신을 닦아 타인에게 본을 보인다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삶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즉 타인에게 관용적이지만 자신에게 엄격한 삶을 사는 것을 인간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하여 동양은 사농공상의 질서에서 살아감에 따라 상업주의에서 진보한 자본주의를 낮은 단계의 경박한 사상으로 생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동양의 경우 인간의 사회성과 개인성이 균형을 이루는 사회를 좋은 사회로 생각했음을 중용을 중시한 사실로부터 이해할 수 있다. 즉 조화를 중시한 동양은 자본주의가 극단적임에 따라, 사람을 경박하게 만들고, 불안정한 사회가 형성된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인간의 강력한 본능으로써 이기심을 구태여 자본주의로 물욕을 배양하는 제도까지 만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인간의 끝없는 지적 욕구로 인류는 인문학적인 성과를 이룰 수 있었고, 질적인 변화를 가져온 사실을 상기한다면, 구태여 탐욕을 배양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생활 태도는 사리사욕으로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경계하는 사자성어로서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라는 ‘과유불급’(過猶不及)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동양은 서구자본주의를 수용할만한 토양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타인에게 인색하고 자신에게 관대하며, 만족할 줄 모르는 상극의 삶으로 극단화하는 자본주의를 경멸했다. 즉 인간은 주체로써 마땅히 공존을 위한 사회적 책임이 있다고 본 동양의 분배문화가 서구의 분배문화에서 만들어진 자본주의와 상충 됨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전통 한국에서는 사회를 개인의 수양(수기치인)을 쌓아 실현하는 곳으로 생각하여 나눔을 최고의 덕목으로 생각함에 따라 타인에게 나누지 못할망정 피해를 주지 않겠다는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청빈한 삶을 근간으로 하는 사회였으며, 개인과 사회가 도덕적 기준에 의해 조화를 이룬 선비가 지배하는 국가로서, 전통 한국은 서구적가치로써 개인주의를 소인배 주의라 하여 배격했던 전통 국가였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조선 중기 거상 임상옥이 상인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신분 변화를 하였던 것은 누구나 ‘수기치인’의 덕을 갖추면, 신분 상승과 아울러 벼슬길을 열었던 사실에서 인격이 지배하는 개방적인 사회였음을 이해할 수 있다. 하여 전통 한국이 도덕성을 근간으로 한 ‘사농공상’의 가치체계와 자본주의와 배치됨을 이해할 수 있다.
자유기업 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는 많은 일자리를 제공하였지만, 중화학 공업을 위한 제2차 산업혁명 이후 공장자동화에 의해 과당경쟁으로 수많은 기업이 몰락되면서, 미국발 세계 대공황을 겪게 되었고, 이후 제3차 산업혁명인 정보화시대를 맞이해 지식정보통신과 첨단 과학기술 등으로 획기적인 생산성 향상과 더불어 고실업 사회로 변모하고 있다.
또한 대자본은 인플레로 인한 자산가치의 감소를 극복하고자 하거나, 무한경쟁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금융투기나 적대적 M&A(기업합병), 고용축소 등을 함에 따라 양극화의 속도는 가파르고, 고비용 저효율사회로 변모하였다. 물론 자본주의사회가 적자생존을 위한 자유경쟁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있음에 따라 무한축적을 위한 과잉경쟁의 결과일 것이다.
이는 구조적으로 자본가, 노동자, 소비자나 다 같이 자신에게만 관대해야 하는 자본주의 정서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자본주의는 인간의 이기심과 동정심이 균형을 이루며 살아야 하는 독특한 존재임을 간과하며 이기심을 편향적으로 배양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즉 자본주의가 인간의 이기적 동기에 의해 물질적 풍요를 이루어 공동선을 이룬다고 하였지만, 실제로는 1대99라는 극단적 양극화로 위험한 사회를 만드는 체제이다. 이는 공동선은 일차적으로 자신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게 어느 정도 양보할 수 있는 관대함이 전제되어 있음에 따라 결과에 있어도 다수가 균형을 이루어야 함에도, 실제로는 극단적 불균형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또한 자본주의가 이기심을 배양함에 따라 치른 혹독한 경험은 인간 상호 간에 동료가 아닌 적대적 먹이사슬의 개체로 각인하게 되었다. 이는 과잉경쟁을 유발케 하여 환경오염과 인간성 황폐화가 가속화되는 원인으로 볼 수 있다. 즉 자본주의를 부분 수정하거나, 사회적 환경의 변화에 따라 부분 개혁 등을 한다고 할지라도, 결과에 있어서 마찬가지이다.
하여 자신에게 관대한 이기적인 삶을 정당화하는 자본주의가 세상 문제를 해결한답시고 부분을 땜질하는 위험을 자초하기보다, 모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체제가 세계화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위기가 자본주의로 인한 결과로 볼 수 있음에 따라 자본주의 분배양식은 퇴출이 되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사람들이 자본주의사회에서 살면서 사회성의 근원인 이타심이 줄어 위험한 사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즉 이기심보다 이타심이 더 많은 인간의 특성을 간과하는 자본주의가 위기를 만들고 있다. 이는 아무도 책임질 수 없는 상황까지 이르게 되는 지속 불능의 사회가 될 수 있음을 과학자들의 예측에 근거하고 있다.
하여 소우주로써 인간이 대우주와 연동되어 순환 진보한다고 생각한 모계 신본주의 사회의 공유제처럼, 모계적 분배양식을 세계화하기 위한 모민주의 사회를 성립되는 것은 시대적 요청임을 알 수 있다.
아무튼 오늘날 자본주의사회에서 인간이 상품화됨에 따라 상품이 주체가 되고 인간은 객체로 소외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삶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물욕을 충족하기 위한 객체로써 살아가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지구촌 시대는 개인이나, 기업, 국가 간에 양극화가 형성되는 가운데, 상호의존성의 증대로 인하여 동시에 세계가 위험에 빠질 수가 있다.
또한 과거와 달리 세계공황의 늪은 깊고 넓어지는 현상이 있음에 따라 무한 경쟁의 다른 의미인 ‘경제전쟁’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에서 살아남기 위해 경제적 동물로 살아야 하는 부담이 있다. 뿐만이 아니라 오직 경제적 억압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무자비한 도축과 무분별한 채취와 채굴 등으로 자연생태계의 질서가 무너져 자정능력을 잃게 되었다.
그리고 신제품 개발 경쟁과 신상품개발이나, 과소비 등으로 유발된 환경오염이나, 지구온난화로 인한 생태계 파괴 등으로 위기를 맞고 있다. 더불어 전 세계가 산성비에 의한 식량 감소, 오염된 농수축산물로 인한 질병 증가 등으로 인한 의료비의 증대, 노동력 상실 등으로 인한 유효수요의 감소 등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사회가 정착되고부터 과거처럼, 지역사회에서 스스로 남획을 방지하는 자율규제에 의한 생존 양식은 의미를 잃었으며, 빈자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 경쟁적으로 남획한 결과, 생태계 파괴와 자원고갈로 인한 피해가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불과 200년 정도에 이르는 자본주의가 제국주의를 비롯해 인재, 천재지변이나 생태계 파괴 등으로 인한 재앙의 규모가 크며, 위험한 사회가 됨에 따라 반자본주의 정서가 확산이 되고 있다. 이는 인간이 살아가는 지구에서 인간의 욕망을 충족할 만큼 충분한 재화도 없을 뿐만 아니라, 수백 년을 장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특수한 물질도 없고, 환경도 그렇지 못함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즉 인류는 과당경쟁으로 인한 공멸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또한 자본주의가 상대주의를 근간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주의적인 양극화를 정당화하거나, 인간을 상품화하는 것 등으로 인하여 유발되는 인간성 황폐화는 도를 넘고 있다. 물론 제삼세계가 자본주의를 악의 축으로 생각하여 퇴출을 선언한 2001년 911테러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선진국과 후진국 간의 자본과 기술의 차이에 대해서 과거 착취의 결과로 보는 제삼세계가 신자유주의를 신제국주의로 이해하고 있다. 하여 기독교와 같은 절대 유일신으로부터 마호메트가 계시를 받아 6세기에 창립한 마호메트교와 기독교 간의 종교전쟁인 7세기경 일명 십자군 전쟁에서부터 제국주의에 이르기까지 피해를 본 중동지역의 경우, 자본주의를 타파하는 것을 이슬람교 신자들의 의무로 생각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하여 지구촌 시대는 부계적 가치를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 체제가 세계통합을 구현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자본축적 경쟁으로 형성되는 1대99라는 절대적 양극화로 인한 고실업과 더불어 유발되는 수만 명의 자살은 전쟁의 규모보다 커지고 있으며, 불안정성에 취약한 여성의 삶이 힘들어지는 등 위기를 맞고 있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여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 세계에서는 원천적으로 물질이 부족하며, 완벽하지 못한 가운데, 누구나 빈손으로 돌아가며 마음만 갖고 간다고 한 사실을 생각해 볼 때, ‘관계의 삶’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게 하는 모계 민주주의 사회를 구현하는 것이 바람직함을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근간으로 하는 적극적 복지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부계적 분배양식을 퇴출하고, 모민주의 사회가 글로벌 (지구촌) 시대에 부합됨을 알 수 있다.
대다수 사람은 생명이 있는 한 재화와 용역의 교환수단으로써 화폐를 갖고 싶어 하며, 부자가 되기를 소망한다. 이는 인간에게 있어서 돈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필요하며, 돈은 원하는 것을 얻거나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돈은 삶의 궁극적인 목적인 행복한 삶을 위한 수단 이상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풍부한 인간성이나 도덕성 등을 갖추기 위한 교양이나, 인격 연마 등을 하고 있지만, 대다수 사람은 돈벌이 자체를 삶의 목적으로 생각하며, 오직 부자로 사는 삶을 행복한 인생으로 생각하고 있다. 물론 행복한 인생을 모계 신본주의 사회에서 공유제로 구현했던 것과 ‘소유의 삶’으로 행복한 인생이 되리라 생각한 자본주의와 사고방식(문화적)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여 인간이 행복한 인생을 위해 태고부터 염원했던 ‘존재의 삶’이 지구촌 시대를 맞아 모계적 분배양식이 가능함에 따라 모민주의가 보편화되어 대다수 사람이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도록 사회협동을 해야 함을 알 수 있다.
모든 생명체는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써 무생물과 동식물 등 다른 생명체와 유기적인 관계를 갖고서 유지계승이 되고 있다는 사실은 경이로운 것이다. 뿐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생명 유지를 위한 자유 본능과 영원히 살고자 하는 본능을 갖고 있다. 더구나 인간은 지역의 환경과 경험으로 형성된 생존 양식으로써 문화에 의해 스스로 복종하는 선한 존재라는 점은 특기할만하다.
물론 인류의 원형사회로써 모계사회가 종교사회였으며, 인간의 종교적 심성이 태고부터 오늘날까지 변치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영적 존재로서 인간은 선한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창조적인 우수한 인간은 삶의 궁극적인 목적을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로 죽음을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 오늘날 문명 세계를 이룩하게 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자유 본능으로 인한 충돌 방지와 안전 등을 위한 전통적 금기사항을 지켜야 하거나, 인간은 집단적 결정인 정치적 이유나 종교적 신념, 강제규범에 의해서 전쟁에 동원되는 등으로 인하여 성악설적 존재로 오해하고 있다. 즉 부계사회의 등장으로 유발된 폭발적인 갈등으로 인하여 선한 면이 위축되고, 성악설적인 측면이 배양되었다.
예를 들어 사람은 생명 유지본능으로 죽음을 두려워하며, 기아와 폭력에 대해서 공포를 지니고 있음에 따라 이를 악용한 부계사회가 수천 년에 걸쳐 생명 경시와 폭력을 정당화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생명의 순환 진보를 믿은 모계 신본주의 사회에서 모성의 재창조 능력을 인류의 구심력으로 신성하게 생각했던 반면, 부계사회가 등장하고부터 출산 양육을 하는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무시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모성은 잉태와 출산으로 인간을 재창조하고 있으며, 오랫동안 수유, 양육, 가정교육 등을 통해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게 하는 실재적인 것을 부계사회가 무시하였다. 예를 들어 모성의 경우 사람다운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한 아이의 보호와 양육의 시기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가장 힘든 시기로서, 외부와의 접촉은 제한적이고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조차 약점으로 변모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부계사회의 등장과 함께 생명 경시 풍조가 만연하면서 인간은 소모적 존재로 전락함에 따라 아이를 낳고 기르는 자체가 약점이 되었다. 하여 모권사회가 공유제 사회로써 정치와 종교를 통합한 미분화된 상태에 있을 때는 자연스럽게 인간을 대모신의 후손으로 믿고, 인간의 생명을 존귀하게 여겼지만, 부권사회의 등장으로 모계는 종교를, 부계가 정치를 전담하면서 생명을 경시하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는 여성의 지위가 어떻게 변천하였는지를 모계 신본주의 사회였던 마고 시대에서 고대 한국으로, 고조선을 이은 삼한시대의 신라로 이어지는 과정을 서술한 종교 편을 참고하기를 바란다. 참고로 일만 년 전 절대 존재로서 모계 유일신을 숭배한 시대를 마고 시대라 하며, 마고(麻姑)는 모계 하나님의 별명이다.
부계사회가 등장하고부터 부계혈통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신분제가 공고화되면서 남녀 차별이 뚜렷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권력과 소유가 비례한 구시대의 절대주의 사회에서 민중은 권력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었던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민중들은 부계 주의의 속성인 권력에 의한 수탈, 횡포, 체벌, 협박 등으로 뼈에 사무치는 억압을 받으면서 과중한 조세나 여러 종류의 준조세 부담으로 항상 빈곤하다. 그리고 부계 주의는 권력자는 모든 것을 소유하는 권력 양극화에서 이해된다.
물론 ‘금권일체시대’의 절대 권력의 횡포에 반동하여 만들어진 자본주의는 ‘금권분리’를 원칙으로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양극화로 금권일체시대가 되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부계혈통주의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구시대의 전제군주의 권력 확장 의지나 자본가의 자본축적 욕구가 절대주의적인 양극화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같음을 말하는 것이다.
즉 구시대의 부계 유일신 주의가 근대사회에서 배금주의로 대체된 것이다. 하여 무제한 소유를 정당화하는 자본주의는 구시대가 권력으로 착취를 했던 것처럼, 자본에 의한 합법적 착취와 흡사함을 알 수 있다. 하여 분권을 근간으로 하는 근대 민주주의 사회가 성립되었음에도, 자본주의가 구시대 권력 양극화처럼, 부의 양극화를 유발하는 것은 근대 시민정신과 배치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무튼 인류는 제1차 산업혁명으로 획기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으며, 이를 뒷받침한 자본주의제도는 오늘날 천문학적 규모의 경제로 발전케 함에 따라 경제가 목적이 되고, 정치는 수단으로 변모하였다. 하여 태고의 모계사회는 종교사회였으며, 부계사회가 정치사회라 한다면, 근대사회는 자본주의사회로써 경제가 중심이 되는 사회로 변모하였다고 할 수 있다.
즉 상업주의에서 연유한 자유주의와 주권재민을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자본주의사회로써 배금주의 사회가 된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돈이 돈을 버는 상황을 특징으로 함에 따라 머니게임으로 발전케 하는 속성으로 실물경제를 불안정하게 만들어 가고 있으며, 물신주의나 배금주의로 인하여 유발되는 1대 99라는 절대적 양극화로 인하여 국내 정치가 무력하게 되는 문제를 낳고 있다.
이는 자본주의가 경제적 자유주의를 근간으로 함에 따라 민주주의는 자유주의를 위한 형식적 민주주의로써 절차적 정의에 지나지 않음에 따라 양극화를 억제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의 속성에 충실해질수록 금력은 절대화됨과 동시에 민주주의의 정치적의무인 사회통합기능이나 국가의 복지기능이 축소되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상대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 정치와 절대주의적인 양극화를 정당화하는 자본주의 분배양식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하여 인류의 이상으로 민주주의는 탈 양극화를 지향함에 따라 모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새로운 체제가 세계화되어야 함을 이해할 수 있다.
뿐만이 아니라 지구촌 시대는 생태적으로 민주적이고, 복지적인 여성이 분배의 중심에서 역할을 하는 적극적 복지사회로 진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자본주의로 유발된 위험한 사회를 극복하기 위해 태고로부터 오늘날까지 인류의 구심력을 이루고 있는 여성이 복지 주체가 되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지구촌 시대를 사는 신인류는 자연법사상과 합치되는 사회로 발전하게끔 생활 정치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모계 신본주의 사회가 일원론적 사회로써 정신노동이나 육체노동을 동일 가치로 생각하여 공유제를 한 것은 참고가 될 것이다. 하여 모권사회에서 모성이 중심이 되어 남여가 균형을 이루었던 것처럼, 지구촌 시대는 모계적인 민주주의와 부계적인 자유주의가 균형을 이루기 위해 온전한 민주주의로써 ‘모계 민주주의’제도가 세계화되는 것이 바람직함을 알 수 있다.
아무튼 성장과 효율을 중시하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여성 자신의 복지 성향으로 인해 불평등하게 되었다고 볼 때, 인류의 반인 여성의 행복한 삶을 위한 체제의 성립으로 역사발전 하는 것이 바람직함을 알 수 있다. 이는 양성평등 원칙을 천명한 자연법사상과도 합치되기 때문이다. 하여 자연법사상을 근간으로 한 근대사회에서, 남녀가 근본적으로 다름을 인정한 기하학적인 평등을 이루기 위한 분배양식이 세계화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모계 신본주의 사회가 양성의 양육을 위해 모성이 분배권을 가지고, 공유제로 물질적 기초를 보장한 사실에서 기하학적인 평등을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부계주의가 주류를 이룬 현실에서 산술적, 양적으로 대등한 관계로 생각한 근대사회에서 실질적 남녀평등이 구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여 부계사회의 등장으로 모성애, 성실성과 인내심, 여성성이나 인간을 재창조하여 현재를 있게 한 사실 등을 재평가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즉 생태적으로 복지적인 우수한 특성이 약점이 되어 남성에게 종속된 사실이나, 가사노동, 보살핌, 출산 양육 등이 저평가되고 있음을 고려할 때, 질적으로 다름을 존중하는 기하학적인 평등으로 관점이 바뀌어야 한다.
하지만 부계 유일신 종교인 기독교는 온순하고 유익한 여성을 10대 1로 차별함에 따라 사람들은 출산 양육의 고통을 형벌로써 믿었으며, 인간은 부계 유일신의 피조물로써 전락하게 되면서 인간을 재창조하는 여성은 성적 노예나, 씨받이로 전락한 사실을 상기해볼 때, 기하학적 평등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는 기독교가 발현된 중동에서 살았던 유목민은 내면세계를 탐구할만한 여유가 없을 만큼, 척박한 환경에서 오직 생존을 위해 형성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인본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근대사회가 성립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여전히 부계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대다수 여성이 경제적 독립을 이루기 어려운 이유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자유주의에서 임금이 없는 가사노동은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는 가운데, 임금노동을 하는 여성의 경우 대다수 보조 노동에 머물러 있으며, 오늘날 양극화의 직접적인 피해를 보고 있다는 사실 등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오랫동안 여성을 소외하고 무시한 서구 부계사회의 사고방식에서 만들어진 자본주의는 남성에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하여 대다수 여성이 자본주의의 내용인 금력을 획득하지 못함에 따라 실질적으로 불평등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자연법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근대사회는 여성에게 사회참여라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계기가 됨에 따라 스스로 유리한 체제를 성립할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어 인권선언에 기초한 근대사회가 성립된 후 20세기 초 여성이 선거권을 쟁취함으로써 생태적으로 복지적이고, 민주적인 여성에게 적합한 복지국가가 이루어진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여 자본주의는 모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적극적 복지사회의 구현을 위한 전 단계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모계적 가치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 정치와 경제적 자유주의와 불 합치함에도, 결합한 자본주의는 지구촌 시대의 도래와 함께 역할이 끝났음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반동으로 생성된 사회주의를 통해서 이해할 수 있다. 즉 모계주의를 내재한 민주주의와 배치되는 자본주의는 모계적 분배양식을 위한 과도기 체제이다.
하여 비복지적인 자본주의가 소극적 복지를 구현하고자 하는 수정자본주의로 진보한 사실을 상기해 볼 때 적극적 복지사회로 역사 발전하는 것이 순리임을 이해할 수 있다. 즉 인간이기 때문에 요구되는 기하학적인 평등을 구현하기 위해 새로운 모계적 분배양식이 보편화되어야 한다.
18세기 말에 시민혁명으로 성립한 근대사회는 민주주의 정치와 경제적 자유주의를 결합한 자본주의 체제를 성립하였다. 물론 아담스미스가 시장기능을 무력화할 수 있는 법인 대기업을 거부하여 제한되기를 주장했으며, 자본가의 양심과 자율을 통한 경쟁을 강조했다. 하지만 법인 대기업으로 대자본을 축적하거나, 근대 시민사회에서 자본가는 국가정책에 지나치게 개입하여 국정을 주도한 것 등을 참고해 볼 때, 아담스미스의 자본주의와 다르다.
그리고 구체제의 정치 권력의 억압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운 경쟁을 통한 풍요한 삶을 생각했던 아담스미스는 자유방임주의의 한계와 조건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자본가는 이러한 점을 간과했을 뿐만 아니라, 전통사회의 도덕적 간섭마저 거부하고 착취를 정당화했다는 점에서 아담스미스의 의도와는 다름을 이해할 수 있다.
즉 아담스미스의 자유방임주의는 중소규모로써 상대주의적이고 소박한 면이 있음에 따라 민주주의의 본질인 모계적 가치에 충실히 하고자 했던 반면, 자본가 중심의 자본주의는 대기업을 지향하고 있음에 따라 절대주의적이고 계급 투쟁적인 면이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물론 절대주의(전체주의)가 권력 양극화를 유발하는 것처럼, 자본주의에서 대 법인을 허용한다면, 부의 양극화로 불안정한 사회가 됨을 알았던 아담스미스의 자유방임주의는 자본가들의 공격으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즉 상생을 위한 분권적인 민주주의와 무정부적이며 집권적인 경제적 자유주의는 근본적으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편의로 결합하여 만든 자본주의가 근대사회의 정신인 분권화와 배치되었다.
하여 아담스미스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시장이 자동으로 조정된다고 주장한 것은 부계적 분배양식에서 불가능함을 알 수 있다. 이는 무제한 소유를 허용하는 부계적 분배양식이 보편화된 세상에서는 이전투구에 몰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가 가치지향적인 사회가 아니라, 자본에 의한 가치를 부여하는 사회로서 가치 전도로 인하여 유발된 혼돈(카오스적 상황)에 빠진 역사적 경험에서 자본주의 속성을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성적 존재인 인간은 동료로서 인간에 대한 연민과 박애 정신이 있는 존재임에 따라 ‘상생의 삶’을 살고자 할 때 행복한 인생을 즐길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근대사회가 성립되어 국가로부터 억압을 벗어났으나, 마치 늑대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 것처럼, 거대 법인기업 간의 자본축적을 위한 착취가 보편화되었으며, 이해관계의 충돌로 만들어진 제국주의에서 사람들의 삶이 고단했던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뿐만이 아니라 중소기업이나, 신생기업의 경우 국가의 간섭과 규제가 많아 시장진입이 곤란했던 반면, 관료 출신과 함께 경영한 대기업의 경우 국가정책과 부합되는 방향으로 자본축적을 함에 따라 패해가 많았다. 즉 국가가 소비하는 비시장적인 부분을 결탁한 정경유착으로 축적한 대자본으로 시장적인 부분을 압도함에 따라, 시장 질서를 왜곡되게 하였다.
그리고 근대사회는 자본가가 주류를 이루게 되면서부터 여성이나 무산층의 민중은 선거권이 없었고, 유산층인 시민에게만 투표권이 있었다. 물론 착취로 인해 민중이 빈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무능으로 전가한 결과 투표권이 없었다. 이처럼 자본주의의 비정함에 반동하여 만들어진 사회주의는 자신들이 진짜 민주주의라고 주장하고 자유민주주의를 반쪽(형식적)민주주의라고 하면서 자본주의의 표리부동함을 역설했던 이유를 알 수 있다.
즉 자본주의가 민주주의의 복지 본질을 왜곡하였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서 모계적 가치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의 본질인 복지에 충실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하여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소위 부계 민주주의로써 불 완전함을 알 수 있다. 이는 자유주의가 내용이 되고 민주주의가 형식적인 절차적 정의로 구조화되어 있는 자유민주주의체제에서는 자유주의가 목적이며, 민주주의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즉 자유주의 원칙을 고수해야 하는 부계 민주주의이다. 하여 자본주의의 가치 전도현상으로 인한 인류의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타심을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가 우선하고, 이기심을 근간으로 하는 자유주의가 한발 양보하는 경제적 민주주의(경제민주화)를 구현할 수 있는 모계 민주주의의 ‘소유상하한제’가 성립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물론 자유민주주의체제에서는 ‘천부소유권’을 보장하는 모계적 분배양식에 근거한 ‘소유상하한제’가 논란의 여지를 갖고 있음에 따라, 새로운 체제인 모계 민주주의(모민주의)의 성립을 위한 풍토조성이 있어야 한다.
한편으로 실질적으로 경제적 평등을 이루어야만 진짜 민주주의라고 주장하는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를 결합한 형태로써, 사회민주주의(사민주의)와 자유민주주의로써 자본주의가 다 같이 편향적이라는 점에서 이분법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개인성에 편향적인 자본주의와 인간의 사회성에 편향적인 사회주의도 극단적이라는 점에서 같음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여 오늘날에 이르러 두 체제를 혼합한 ‘중도주의’(中度主義)를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즉 오늘날 양극화로 인한 경제적 불평등은 심각한 상황에 이르게 한 자본주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정자본주의를 넘어 사회주의 일부를 수용하는 체제수렴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중도주의나, 사회주의, 자본주의 등 각각의 체제가 다 같이 이분법적이며, 부계적 가치를 근간으로 함에 따라 반쪽민주주의로써 한계가 있다. 하여 근대민주주의는 부계 민주주의로써 인간의 개인성과 사회성의 조화를 이루지 못함에 따라 형성된 위험한 사회를 극복하기 위해 온전한 민주주의인 ‘모계민주주의’로 민주주의를 공고화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이는 인간은 독립된 주체로써 ‘존재의 삶’을 염원한 결과로써, 모계적 가치를 근간으로 하는 인류의 이상인 민주주의가 성립되었음을 상기해 볼 때, 민주주의의 복지 본질인 복지사회가 공고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적인 논리로 착취를 정당화하기보다 인간 동료로서 ‘상생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함을 이해할 수 있다.
즉 모계적 분배양식인 ‘소유상하한제’를 성립할 수 있는 모계 민주주의가 적합한 것이다. 예를 들어 나눔으로써 서로가 상생된다는 사실을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는 성경의 마가복음에 있는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당시의 사회는 사람들은 먹을 것을 가지고 다녔으며, 예수의 산상수훈을 듣고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나눔(사랑)에 있다는 사실을 진리로 깨달으면서 실천했다. 하여 탐욕을 합리화하기 위해 문화적 존재인 인간을 편리한 대로 해석하여 상품화하거나, 양극화로 대다수 사람을 빈곤하게 만들어 가는 무한한 탐욕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며,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모성의 미덕의 경우 자본주의의 부의 양극화로 인하여 오늘날 더는 사회적 미덕으로 포장된 착취에 대해서 위로의 구호는 무의미해지고 있으며, 현실적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대다수 여성이 빈곤함에 따라 자긍심이나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여 모성의 보살핌, 출산 양육 등을 사회적 미덕으로 강조하는 만큼, 현실화하기 위해 국가에 의해서 실질적으로 보장되는 적극적 복지사회가 세계화되는 것이 바람직함을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부계주의에 의한 과거의 잘못을 체제변화로 보상을 할 수 있을 만큼, 세상이 문명화되어 있으며, ‘존재의 삶’을 추구하고자 하는 의지와 더불어 첨단과학기술문명으로 실현할 수 있다.
만약에 사회협동으로 이루어진 세상이 공존을 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상극의 삶을 유발하는 부계적 분배양식으로 양극화가 공고화될 때 전쟁, 테러, 민란 등으로 상당한 대가를 치렀던 역사적 경험에서 알 수 있듯이 위기를 넘기기가 힘들 것이다. 예를 들어 로마제국은 과도한 부계 독점의 결과로써 유발된 성문화가 타락하여 쾌락을 위한 부정부패와 천재지변이나, 질병 등으로 인하여 멸망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자본주의가 ‘풍요 속의 빈곤’을 특징으로 하며 양극화를 유발함에 따라 위험한 사회가 되었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개입주의(보호주의)를 허용한 수정자본주의(소극적 복지국가)는 통상마찰의 원인이 됨에 따라 자유방임주의를 세계화한 선진국 중심의 신자유주가 등장하였다.
하지만 세계 경제가 추락하면서 선진국조차 신자유주의 사상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가 점증하고 있다. 즉 서구적 가치인 신자유주의가 동일 문화권에서는 부합될 수 있지만, 이질적 문화권으로써 반서구적인 후발국의 경우, 수천 년에 걸쳐 형성된 각 지역의 독특한 문화(정체성)를 통해 사회통합을 구현하고자 함에 따라 상호 간 문화적 차이로 인한 충돌로 이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이슬람교가 특정한 지도자가 없이 연구한 사람이 집도하며, 생활 자체로서 회교는 수입의 40분의 1을 테러단체나, 주고 싶은 아무에게나 나누는 종교이며, 조직도 자금도 없는 것에 비해 기독교는 십일조를 헌금해야 하며, 조직과 자금이 많다는 점에서 상반됨을 알 수 있다.
이는 서구적 가치로써 발현된 자본주의 생활양식이 보편화되어 있을지라도, 자본주의 후발국의 경우 지난날의 상처로 인하여, 형성된 빈곤과 혼란 등으로 반서구적인 정서를 배양하여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코자 하기 때문이다. 즉 서구적 가치와 자신들의 정체성과 불 합치되는 가운데, 자본주의에 의한 혹독한 역사적 경험과 더불어 현재의 혼돈으로 인한 빈곤한 상황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아울러 유럽의 식민지였던 나라는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로 성립한 제국주의의 혹독함을 상기하면서, 첨단과학 기술로 막강한 생산성이 있는 선진국의 수요개발로 생각하고 있다. 이는 선진국 중심의 신자유주의를 퇴출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한 21세기 2001년 911테러에서 이해할 수 있다.
아무튼 근대사회를 성립한 인류는 자연법사상과 자유주의 사상, 경험주의를 근간으로 한 실증주의, 민주주의 정치, 자본주의, 과학기술의 발달 등을 체험했다. 그리고 지구촌 시대가 된 오늘날 제3차 산업혁명으로 정보화 사회까지 도달했지만, 환경오염이나, 양극화, 인간성 황폐화 등으로 위험한 사회가 됨에 따라 고민이 깊어 가고 있다.
하여 인류는 ‘소유의 삶’으로 인한 결과가 어두움에 따라 ‘존재의 삶’울 위한 ‘관계의 삶’이 인간에게 적합함을 알게 되었다. 즉 인류는 찬란한 문명과 더불어 인문학적 성과나 첨단과학기술문명을 이룩한 사실로부터 소우주 인간임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인류가 사회협동을 이룩한 첨단과학기술문명을 통해 인간은 영적 존재로서 ‘관계의 삶’이 적합함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물론 신자유주의로 지구촌 시대를 살게 된다면, 1대99라는 절대적 양극화의 속도가 빠르게 진행되어 전체주의(절대주의)였던 구시대보다 훨씬 힘들게 될 것이다. 이는 서구가 불학실성의 시대를 겪으면서 만들어진 초기자본주의에서 고도의 착취 방법을 계속 개발하여 마치 양의 탈을 쓴 늑대처럼, 부도덕한 것조차 합리화한 제국주의에서 이미 경험한 바 있다.
이는 서구적 가치가 식민지, 제국주의, 세계 제1차 2차 대전을 비롯해 거대한 무기체계와 냉전체제와 환경문제, 세계적 양극화 등으로 나타난 사실에서 이분법적인 ‘상극의 삶’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구시대 전체주의에 의한 억압을 부정하면서 개인이 없는 국가는 의미가 없다고 등장한 자유주의는 ‘상생의 삶’이 요구되는 지구촌 시대와 불 합치함을 이해할 수 있다.
즉 인간의 개인성을 중심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자유주의(개인주의)가 인간의 사회성과 조화가 중시되는 지구촌 시대와 맞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구촌 시대는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적극적 복지사회가 구현되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무정부적인 속성이 있는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절대적 양극화와 더불어 초국가적인 다자주의적인 새로운 형태의 사회가 만들어지면서 형성된 불안정한 사회를 극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제정일치(祭政一致)의 모계 신본주의 사회를 이은 부계사회에서 모계가 종교를, 부계는 정치로 정교분리를 하였다. 하지만 정치에서 소외된 여성은 부계사회의 공고화로 부계 우월종교가 성립하면서부터 종교에서도 주류를 이룰 수 없었다. 그리고 근대민주주의 시민사회가 성립된 후, 약 100년이 지난 20세기 초에 여성이 결사하여 선거권을 획득함으로써, 정치참여가 가능하게 되었다.
즉 제1차 산업혁명으로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근대 시민사회가 성립되면서, 남성은 획기적인 변화를 했지만, 여성은 완만한 변화를 했다. 이는 준비되지 않았던 자에게 권투 시합에 투입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하여 여성과 남성이 각각 권력의 반을 갖고, 균형을 이루는 모민주의 체제가 성립되어야 함을 이해할 수 있다.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적이익을 추구하는 자유기업이 자신에게 유리한 근시안적인 정치적 결정이나 권력구조에 영향을 끼치는 경향이 없어질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새로운 정치경제 제도인 모민주의의 보편화로 자본주의 발 위험한 사회를 극복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무제한 축적을 정당화하는 자본주의 분배양식으로 유발된 양극화는 수많은 문제를 만드는 원인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에서는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여 여성에게 정치 권력의 반을 보장하는 체제인 모민주의를 성립하여 적극적 복지사회를 구현하는 것은 당연함을 알 수 있다.
또한 지구촌 시대를 맞이한 인류는 환경문제나, 세계적 양극화나, 문화적 충돌 등으로 형성된 위험한 사회를 극복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물론 인류의 구심력으로 변치 않는 모성애를 근간으로 한 모계 신본주의 사회가 수만 년을 평화로운 가운데 원형문화를 창조한 사실을 상기해 볼 때, 모계적 분배양식을 세계화한다면,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부계사회의 등장으로 소외되었던 여성들에게 보상이라는 측면과 ‘천부소유권’을 보장하는 장치로써 ‘소유상하한제’의 세계화를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여성의 경우 부계에 종속된 극단적으로 불공평했던 제도, 사상, 관행, 사회적 정서, 복지본능 등으로 인한 피해에 대한 보상을 의미한다.
즉 오늘날까지 빈곤의 원인이 되었다고 볼 때, 지구촌 시대에 부응하는 정의로운 사회라면, 마땅히 모계적 분배양식인 ‘소유상하한제’로 적극적 복지사회의 구현으로 앞으로는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물론 인간 존엄을 구현코자 성립된 근대사회였지만, 제국주의로 인한 수많은 전쟁, 식민화, 도를 넘은 양극화, 생태계 파괴 등으로 인한 인간 경시라는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 물적 기초를 보장하는 모계적 분배양식이 세계화되어야 하는 측면도 있다.
이는 지구촌 시대를 살아가는 신인류 스스로 ‘경제적 동물’로 살아갈 수 없음을 인식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지구촌 시대는 ‘관계의 삶’을 가능케 하는 모계 민주주의 사회가 보편화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서구사회에서 철저히 소외되어 있었던 여성이 근대민주주의 사회가 성립된 후 형식적으로 해방될 수 있었다. 즉 기독교문화를 근간으로 하는 서구는 중세에 이르러 동서 문화교류와 교역 확대의 영향으로 르네상스 시대를 맞이하면서 절대 존재에 대한 믿음이 불확실하게 되고, 인본주의로써 경험주의가 발달하게 된 결과이다.
다시 말해서 철학적 상대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와 과학의 발달로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이 일어나면서 성립된 근대사회가 여성을 해방케 했다. 그리고 산업혁명으로 여성이 방적공장에 임금노동자로 대거 참여하였으며, 동시에 생성된 자유방임주의는 시민혁명을 유발케 하는 원인이 되었고, 이후 근대 시민사회의 성립으로 여성해방이 가능케 되었다.
하지만 근대사회가 성립되었음에도, 서구사회에서 단지 부계 우월종교에서 설정한 검증되지 않은 전통 가치에 지배받고 있었던 여성들은 오랫동안 소외되어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체, 남성에게 종속되어 살았으며, 20세기 초에 이르러 선거권을 쟁취할 수 있었다. 즉 여성은 기초교육의 부족으로 기술습득이 어려움에 따라 경제적 독립이 어려웠으며, 자신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정조의무라는 사회정서에 의해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대다수 여성은 주로 출산 양육, 가사노동, 가족복지, 사육, 농사일 등의 내부적인 일들로 인해 산업화 시대가 요구하는 기술습득을 할 수 없음에 따라 주로 남성을 보조하거나, 허더래 일을 하였다. 하여 자본주의사회가 되면서 남녀 역할 분담의 경계를 무너뜨림에 따라 여성이 힘든 측면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초기 자본주의사회에서 무지한 여성과 청소년까지 착취하여 가정을 위기에 빠트렸던 사실이 될 것이다. 이어서 오늘날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로 발전되면서 만들어진 절대적 양극화로 인한 위험한 사회가 됨에 따라 여성과 청소년이 불리하게 되고, 가족해체가 점증 되고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불안정하게 되어, 생태적으로 복지적인 여성이 불리해진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남녀평등원칙’에 부합되는 권력의 반을 여성에게 보장하는 새로운 체제가 성립되어야 함을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를 넘어, 생태적으로 복지적인 여성과 부합되는 모민주의가 보편화되어 적극적 복지사회를 구현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선진국의 경우 신자유주의 정책에 의해서 복지축소가 현실화하면서 부유층의 기부로 민간 스스로 의존도를 높여가고 있지만, 소수 부유층의 기부로써는 양극화로 인해 형성되는 절대다수의 빈곤층의 복지 수요를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신자유주의가 국가를 기업경영방식으로 효율성 내지는 성장성에 초점을 맞추고자 하기 때문이다. 즉 상업적으로 하나의 세계가 된 자본주의적 세계화는 다국적 거대기업의 적대적 기업합병(M&A)이나, 국제투기자본의 활동 등으로 인하여 만들어지는 절대적 양극화에 의해 유발되는 폭발적인 복지 수요를 국가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다수의 공룡기업이 생성된 오늘날, 마치 공룡들이 먹이를 위해 각축전을 벌이는 것처럼, 이익집단이나, 자유기업 간의 무한경쟁을 해야 하는 이익집단의 춘추전국시대로 고실업 사회가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하여 무한경쟁으로 인해 유발되는 초고속시대를 인간이 적응하기 어려우며, 아울러 자본주의를 지속하는 한 과소비로 인한 자원고갈과 환경문제 등의 당면한 문제를 극복하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물론 국가별, 기업별, 산업별, 개인별 양극화로 인한 수요 감소로, 넓은 세계시장이 필요하게 된 자체가 새로운 위기라고 할 수 있다. 즉 오늘날 초국가적인 대기업이 등장함에 따라 시장 확대를 위한 자유무역주의의 가속화로, 마치 블랙홀처럼, 세계적 양극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예를 들어 인류의 과소비는 자원의 고갈로 이어지면서, 거대기업군이 형성으로 적자생존의 무한 경쟁을 해야 할 뿐만 아니라, 국제투기자금의 비대화와 다국적 기업의 시장잠식은 국내 산업을 위축하게 하여 양극화가 가속화되면서 갈등이 폭증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여 생존을 위한 무한 경쟁으로 국가권력이 약화 되면서 문제를 해외로 전가함에 따라 국제사회의 긴장 요인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방어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쓰나미 같은 해외의 영향으로 국가가 한계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다국적 기업의 거대자본은 작은 빈국의 규모 정도임에 따라 거대기업이 최대이윤을 획득하기 위해 국제정치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며, 국가를 움직이는 실체로까지 성장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인수합병의 과정에서 대다수 제조업이 위축되고 고용감소로 인하여 실물경제는 위축이 되지만, 자본가는 오히려 자산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는 가운데, 중산층의 몰락을 의미하는 양극화가 형성되면서 불황을 겪게 됨에 따라 국외 자본에 의존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정한 자연 자원을 보유한 국가의 경우 자원 보호주의와 아울러 독점화하려는 경향으로 인하여, 원자재의 국제가격이 상승하게 되면서 유발된 소비감소는 실물경제를 위축하게 함에 따라 경쟁력을 잃은 수많은 기업은 도산되었으며, 동시에 금융투기가 활발하게 되면서 불안정하게 된 세상은 누구에게도 실익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이는 과거 다국적 기업이 원자재를 낮은 가격으로 안정수급을 위한 방편으로 투기적 자본과 함께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충돌이 발생 되기도 하였으며, 전쟁의 경우 패자는 전쟁배상금을 내거나, 승자도 막대한 전쟁 비용을 국민이 부담하면서 역사적 책임까지 떠안은 사실에서 깨달았기 때문이다.
즉 원자재도 시장원리를 적용하여, 자원의 가치를 존중하여 제값을 주고 구매하여 자원이 풍부한 빈국의 유효수요를 발생케 하여 이익을 공유한다면, 상생할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후발국의 추격으로 다국적 기업은 박리다매를 통한 시장점유율을 높이고자 했지만, 실익도 없이 오히려 충돌까지 유발함에 따라 막대한 자본과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 첨단 과학기술과 지적 재산권을 근간으로 하는 공급적인 경제를 통해 문제를 해결코자 했다.
이것이 세계 분업화를 근간으로 하는 신자유주의가 만들어진 이유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는 자연 보호주의를 무너뜨리는 역할을 한다는 점과 더불어 각 지역 간의 양극화뿐만 아니라 기술이나 자원이 없는 나라의 경우에는 고용감소와 더불어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가능해진 국제금융투기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하고 있다.
특히 식민 지배를 받은 지역들이 대체로 자원 부국이지만 산업화를 위해 선진국으로부터 받은 차관이 많으며, 낮은 단계의 기술로 경쟁력이 없는 것 등에 대해서 피해의식이 많음에 따라 보호주의 경향이 있다. 또한 문화적 차이가 엄연히 실재하는 국제사회에서 오랫동안 식민 지배를 받은 나라의 경우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이 되겠느냐’고 의심을 하고 있다.
즉 후진국들은 선진국의 거대기업이 국가 브랜드와 과학기술 등에 힘입어 국가 대신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신자유주의에 대해서, 국민총화로써 자유기업이 앞장서고 국가는 뒤에 있었던 식민시대를 상기함에 따라 신제국주의로 의심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하여 상대의 불행으로 행운을 만들어 오늘날까지 이어졌다고 생각하는 후진국들은 선진국 중심의 신자유주의에 대해서 두 얼굴을 가진 사나이로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자원고갈의 심화로 인해 유발되는 현상을 세계 분업화를 근간으로 하는 신자유주의로 해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양극화를 급가속하여 머니게임을 유발함에 따라 실물경제를 위기에 빠트리고, 세계 경제를 침체케 할 것을 우려하고 있다.
뿐만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세계에서 초국가적인 거대기업 간의 무한경쟁으로 인하여 국제사회가 적자생존(適者生存)의 험악한 이전투구(泥田鬪狗)장으로 변모하여 위험한 사회가 될지라도, 자유기업의 책임이 아닌 국민이 책임져야 하는 점일 것이다.
하여 ‘소유의 삶’을 살게 하는 자본주의가 유한한 자원을 생각하지 않고, 과소비를 부추긴 결과로 지구적 위기를 맞이함에 따라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해 모민주의 분배양식으로 ‘관계의 삶’을 살 수 있는 적극적 복지사회를 구현해야 함을 알 수 있다.
물론 자본주의로는 인간의 궁극적 삶의 목적인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없음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지구촌 시대를 맞이한 인류는 평화와 지속 가능한 삶을 전제로 한 여성이 주류를 이루는 정치문화가 형성되는 전 단계인 생명 운동으로서 녹색 환경운동이 등장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여 행복한 인생을 위해 부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를 넘어 모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적극적 복지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생태적으로 민주적이고, 복지적인 여성들이 권력의 반을 보장하는 모민주의가 적합함을 알 수 있다.
문화적 존재로서 인간은 행복한 인생을 삶의 궁극적 목적으로 둠에 따라 누구나 인간 상호 간에는 인간답게 살도록 사회협동을 할 때, 인간의 도리를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인간이 풍부한 상상력으로 스스로 인생을 개척하는 창조적 존재로서 사회협동의 결과가 축적되어 현재를 살아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성적 존재로서, 꿈 많은 인간은 사회협동으로 살아가는 존재임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인간의 이기적인 면을 지나치게 부각함에 따라, 인간의 선한 심성을 배양하기 위한 사회협동의 결과물로써 인문학은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즉 자본주의가 인간의 선한 면에 의해 형성되는 유대관계를 파괴하여 고독한 삶을 살게 하며, 자신에게 관대하고 타인에게 인색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배금주의가 보편화되어 인간 상호 간에 돈에 의한 관계로 발전함에 따라, 현실적으로 인간 동료로서 유대성이 없어지고 있다. 하여 인간의 유대감이 요구되는 지구촌 시대를 살아야 하는 인류는 모계적 분배양식을 보편화해야 함을 이해할 수 있다. 즉 첨단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신인류에게 적합한 분배양식은 ‘소유의 삶’을 강화하는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모계적 분배양식을 세계화하는 모민주의가 성립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아이가 성장하여 성인이 되었다면. 성인의 옷을 입어야 제격인 것처럼, 첨단시대를 살아가는 신인류는 자본주의를 수정하기보다, 경제민주화를 위한 새로운 체제로써 모민주의가 세계화되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인간은 일상화된 습속과 요령을 터득하여 나름대로 안정을 취할 수가 있음으로 변화를 두려워하는 경향으로 인하여 어려운 점이 있겠지만,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인간의 집념이 문명시대를 열었음을 상기해볼 때 가능한 일들이다.
또한 비복지적인 초기자본주의에서 수정한 소극적 복지국가로 진보하는 것처럼, 적극적 복지사회로 역사 발전하는 것이 순리임에 따라 마땅히 경제민주화를 위한 체제가 성립되어야 한다. 만약에 자본주의로 인하여 불행한 삶을 살았던 역사적 경험을 망각하고, 복지축소를 지향하는 신자유주의를 고집한다면, 이미 소극적 복지를 경험한 인류는 퇴보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기업 편향적이거나, 고용증대도 없는 기술집약적 기업이나 고생산성의 자동화기업 등이 많아지고, 기업의 경쟁력을 강화를 위한 기업 논리에 의해서 복지비용을 감축한다면, 당장은 효율성이 있을지 모르나, 전 세계는 고실업과 소득감소로 인한 실물경제의 위기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마치 소뿔을 빼려다 소를 죽인다는 ‘교각살우’(矯角殺牛)처럼, 신흥공업국이나 중진국의 경우 빈곤층의 확대로 전체가 불행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이는 자유기업이 최대이윤을 위한 과잉생산에 의한 가격하락이 이윤감소로 이어지면서, 수많은 기업의 퇴출로 인해 만들어진 고실업 사회로 소비할 능력이 없어지거나, 미래의 삶을 위해 저축으로 가처분 소득이 증대하거나, 불투명한 경기로 투자를 피하는 등으로 통화의 순환 속도가 급격히 위축되어 공황을 겪게 되기 때문이다.
즉 자본주의의 자본축적 경쟁으로 형성되는 양극화의 결과, 절대다수가 빈곤층으로 전락하여 소득감소에 따른, 급격한 소비둔화로 시장기능이 마비될 때 사회적 약자가 삶을 포기했던 사실일 것이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가 공황을 유발할 뿐만 아니라, 경쟁의 결과로 발생 되는 손실을 보전하기 위한 과정에서 사회적 약자인 여성이나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감당하고 있다는 사실과 오늘날 과소비로 유발하는 환경오염으로 공기, 물, 생태계 등의 파괴로 대다수 빈곤층이 직간접적으로 피해가 발생한다는 사실 등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무제한 소유를 정당화하는 자본주의가 수많은 기업을 퇴출케 하는 패권주의적 공룡기업을 만들면서 형성되는 양극화현상으로 복지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대되고 있다. 이로 인해 만들어진 빈곤층의 복지를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한다는 점에서 비인간적임을 알 수 있다. 하여 지구촌 시대는 인류의 이상으로써 적극적 복지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모민주의 ‘소유상하한제’가 보편화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초국가적인 거대기업들의 출현으로 만들어진 신자유주의가 양극화를 가속하여 복지 수요를 폭발적으로 증대케 함에도, 복지축소를 지향함에 따라 복지가 빈약한 후진국이나, 복지국가를 지향했던 선진국이나 다 같이 혼란을 겪고 있다.
아울러 식민지를 경험한 후진국이 사회통합이 힘들고, 빈곤과 갈등을 겪음으로써 선진국에 대한 불신을 해소하기 위해 복지, 교육, 산업인프라의 구축과 공업화와 실업난 등을 해소하기 위해 원자재가격을 높인 결과, 새로운 형태의 공황으로 빈곤층이 증대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자원이 풍부한 후진국이 원자재 보호주의 정책을 고수하는 경향으로 인하여 국제원자재가격의 상승에 따른 물가상승으로 소비 부진에 의한 기업의 수익구조가 된 것이다. 이는 자원 빈국은 심각한 상황에 이르게 되었고, 자원 부국에서는 원자재 가격하락을 감수해야 하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진 결과이다. 다시 말해서 초국가적인 거대기업 간의 무한경쟁을 주문하는 신자유주의가, 마치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중소기업을 몰락하게 하여 고실업 사회가 됨과 동시에 소비 부진으로 양극화가 뚜렷하게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금융자산가나 대자본가의 경우 세계공황으로 오히려 국공채나 주식을 헐값에 사들였으며, 경쟁업체를 적대적 기업합병을 하여 자산이 기하급수적으로 증대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자사 주식을 매입하여 경영권을 강화하거나, 손쉽게 증여하는 등으로 인하여 오히려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한 경우가 많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여 수정자본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국가자본주의에서 일탈한 세계자본주의로써 신자유주의는 관료제에 의한 개입주의를 원칙적으로 거부한 결과이다.
하지만 초국가적인 다국적 기업이 자유롭게 기업 활동(자유기업주의)을 하고자 하는 것은 얼핏 듣기에는 좋은 것 같지만, ‘경제적 동물’로 살아감으로써 형성되는 위험한 사회에서 살아야 한다. 이는 탐욕을 동기유발로 한 자본주의 발전전략은 소규모 경제였던 초기 자본주의사회에서도 문제가 많았던 것보다, 거대소비사회가 된 오늘날 자원고갈, 환경문제 등을 유발하며 갈등을 폭증하는 위험한 사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즉 우수한 과학기술과 거대자본을 축적한 다국적 기업이 초기자본주의처럼 공급경제가 가능할 것으로 본 신자유주의는 새로운 위기를 만들고 있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 속성에 충실히 하고자 하는 신자유주의가 보편화되면서 자포자기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는 가운데, 제국주의로 제삼세계가 혹독했던 역사적 경험을 잊지 않고 원한을 품고 있음을 냉전 시대를 지난 후, 2001년 자본주의 퇴출을 상징하는 9·11테러로 나타낸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소위 ‘문화적 충돌’의 대표적인 예로써,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같은 절대 유일신을 숭배하지만, 전혀 다르게 형성된 문화에 의해서 유발된 중세 십자군 전쟁을 통한 약탈에서 연유함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아마도 중동에서 발현된 부계 유일신 종교로써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사막유목민의 척박한 환경에서 형성된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문화를 토대로 발현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자원 부국인 중동의 이슬람권 국가들은 연대하여 자원 보호를 명분으로 시작한 70년대에 두 차례 걸친 오일쇼크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이 신자유주의가 생성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종교적 신념을 기초로 한 반자본주의적 테러를 두고, 마치 공공선을 이루기 위한 것처럼, 정당화하는 것은 지구촌 시대정신과 맞지 않는 것이다.
하여 부계 신본주의 사회의 절대주의적인 분배양식에서 벗어난 조화로운 삶을 위한 모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새로운 체제가 성립되어야 함을 이해할 수 있다. 오늘날 인류는 문명화되었으며, 평균적으로 현명해진 만큼, ‘존재의 삶’이 가능해짐에 따라 모계적 분배양식으로 진보해야 함을 이해할 수 있다. 하여 인본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동양을 통해 서구를 해석한다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동서양이 분리되기 전 하나의 세계였던 모계 신본주의 사회에서는 질량으로 인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외면세계와 현실의 근원으로써 시공을 초월하는 내면세계와 합한 것을 현실 세계로 이해를 했다. 즉 영원히 불멸하는 ‘나’는 본래 있었던 실존하지만, 질량이 없는 무(無)의 세계로 되돌아가서, 어떠한 곳이든, 어떠한 종류든, 육화된 유(有)의 세계로 순환된다고 믿었다.
다시 말해서 실존하는 무는 인간에 의해서 설정된 본향으로써 영혼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수만 년 전의 모계사회에서도 UFO(미확인비행물체)도 출현했을 것이라고 가정해 볼 때, 모계 신본주의 사회는 이러한 현상을 통해 인간의 본향으로 돌아간다는 ‘해혹복본’을 이해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물론 생태적으로 종교적 심성이 있는 인간의 경우는 영감에 의해서 이해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눈에 보이지 않는 수증기가 모여 구름이 되기도 하고, 비나 눈이 되기도 하며 흩어지면서 순환되는 자연현상과 흡사한, 고대 동양의 분신술이 다른 차원에서 순간적으로 나타나는 소위 분해와 집합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여성의 체형에서 이해할 수 있듯이, 모계 신본주의 사회는 내면 탐구를 위한 기술로써 좌선(坐禪)이 발달 되었다고 볼 때, 불가지의 세계인 ‘무의 실존’을 영감으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모계 신본주의 사회가 내면세계를 탐구하여 사물의 본질을 이해했으며, 이후 부계사회는 자연법칙을 수학으로 풀이가 가능했을 것이다.
이는 모계 신본주의 사회가 영육을 분리하지 않는 일원론적 사회로써, 직관이 발달한 사실에서 근거하고 있다. 이는 종교 편을 참고하길 바란다. 그리고 모계 신본주의 사회를 이은 동양의 부계사회는 음양론적인 인본주의 사회로써 모계와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어 부계와 조화로운 관계였다.
즉 동양이 인간 이성의 한계를 인정하여 초과학적인 불가지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음을 여지로 남겨놓아 단정적인 것을 경계한 인본주의 사회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민본주의 전제군주가 백성의 뜻을 하늘의 뜻으로 알고, 공평한 분배를 통해 인간으로서 상실감을 잃지 않게 하려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을 구현하기 위한 존재였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입체적 사고를 한 한민족의 모든 건축물이 음양오행의 풍수지리에 의해 조성되어 비교적 자연과 조화로운 다소곳한 면이 특징이다. 아울러 전통 한국의 경우 축성기술이나 건축기술이 발달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늘인 백성을 고달프게 하는 화려한 궁궐이나 석조대형 건축물이 적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뿐만이 아니라 국가 존립의 정당성을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에 둔 동양적 가족주의는 인본주의에 바탕하고 있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불가지(不可知)에 대한 의문은 삶의 주체인 개인의 몫으로 생각하여 ‘존재의 삶’을 근간으로 하는 ‘수기치인’의 삶을 중시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인간은 부계 유일신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로써 생각하여 국가 존립의 정당성을 창조주의 뜻에 둔 것과 백성이 있기에 제왕이 있다는 동양의 민본주의와 차이가 있는 것이다. 물론 동서양이 다 같이 부계사회라는 측면에서 대동소이하지만, 서구는 부계 유일신에 의한 피조물로써 인간을 생각함에 따라 인간을 재창조하는 모성을 씨받이 정도로 무시하였다.
즉 부계가 주체이고 여성은 객체로써 극단적으로 불평등한 10대1의 사회였던 반면, 동양은 민본주의 사회로써 평등 지수가 6대4 정도의 사회였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초기자본주의와 동시대 조선 중기에 이르러 유교적 가치인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에 의해 여성들의 지위가 급전직하하여 사회참여의 기회가 원천적으로 봉쇄되었던 것과 대비가 되고 있다.
즉 고대 한국의 음양 사상에서 역할 분담을 통해 남녀조화를 중시했던 것과 달리 조선 중기부터 종속적인 지위로 전락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산업화로 여성이 사회진출을 했던 서구와 달리 농업을 근간으로 하는 소규모 경제였기 때문에 주로 농사와 바느질 등 가사노동으로 고된 생활을 하는 가운데, 서구적 여권운동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한민족의 모권 유습이 정서적으로 이어진 전통 한국의 대가족제도에서 부성과 다른 역할을 하는 모성의 지위는 존중되었다. 하지만 실제 여성의 지위가 땅에 떨어진 것은 일제강점기부터라고 할 수 있다. (한민족 여성의 지위는 종교 편에서 참고 바란다)
아무튼 인간의 뿌리인 내면을 탐구하여 외면을 지향하는 동양의 입체적 사고와 외면을 통해서 내면을 이해하고자 하는 서구의 분석적 사고가 상호 보완해야 함을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초기자본주의에서 중산층이 다수인 다이아몬드형 사회가 될 것을 예측하였지만, 오늘날 대량소비로 만들어진 세계적 양극화로 위험한 사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무한한 자원이 있다면, 자본주의적인 인간형이 양산되는 것은 상관이 없을 것이다. 특히 소비 촉진을 위한 과도한 경쟁으로 인하여 인간의 선한 본질에서 비롯되는 공공선과 공익을 지키려는 인간 특유의 정의감까지 훼손케 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 할 수 있다.
이는 자본주의가 인간을 상품화하여 소외되게끔 함에 따라 인간성 황폐화를 유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태생적으로 문화적 존재인 인간은 풍부한 상상력으로 예술창작과 더불어 인문학적인 성찰이나 순수과학의 탐구나 스포츠 등을 통해 삶을 재창조하면서 대우주를 개척하는 주체임을 자본주의가 간과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의 부정적인 면을 보완하기 위해서 흥행과 거리가 먼 클래식 음악이나 수익과 관계없는 예체능이나 순수학문, 기초과학, 문학 등에 대해서 적게나마 정부가 투자하여 삶의 질을 향상코자 하고 있다. 이는 태고로부터 있어 온 인간의 종교적 심성에서 발현된 예체능은 정서 안정과 더불어 궁극적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휘 수가 적었던 모계사회가 연극이나 춤, 미술 등 예술을 통해 신과 인간이 교감을 하거나, 대우주와 연동된 소우주 인간의 순환 진보의 과정을 알려주거나, 인간 상호 간의 연대감을 형성하는 등으로 평화를 유지하였던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여 인간은 행복한 인생을 위해 스스로 삶을 재창조하며 살아가는 문화적 존재로서, 스스로 영적 존재임을 알게 하는 수준 높은 예술은 한층 더 발전해야 함을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탐욕을 배양한 결과 대다수를 절망감에 빠지게 하거나, 자본주의 심성이 공고화되는 만큼, 증오심과 인간성 황폐화, 자원고갈이나, 환경오염 등으로 나타나고 있음에 따라, 포스트 자본주의로써 모민주의가 보편화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자본주의가 서구사회에서 영원히 존립할 것으로 생각했던 절대 봉건왕조를 무너뜨리고, 근대사회를 성립하게 하였으며, 과학기술의 발달을 견인차 했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제국주의를 만들어 인류에게 고통을 주었다. 뿐만이 아니라 오늘날에 이르러 초기자본주의 당시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천문학적인 경제 규모로 인한 자원고갈과 환경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리고 거대자본의 축적으로 인한 양극화 등으로 인생에 대한 회의와 인간성 황폐화로 위험한 사회가 되었다. 이는 오늘날 각 분야가 전문화되면서부터 소통이 원활하지 못하며, 무한경쟁으로 가속화되는 양극화로 갈등이 폭발하는 위험한 사회가 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인류가 역사상 단기간에 이룩한 거대한 경제 규모에 의해 형성된 1대 99라는 절대적 양극화의 결과이다.
즉 자본주의가 공고화될수록 자본주의적 인간형이 배양되고 주류를 이루게 됨에 따라 책임지지 않는 금력의 위력은 절대화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치 책임지지 않으며 군림만 하였던 제왕처럼, 무한한 자본축적으로 인한 부정적인 결과에 대해서 무책임한 가운데, 최대이윤을 위해 세계 어디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연고의 무책임한 속성이 오늘날 만연하고 있다.
즉 근본적으로 자본의 이식이나 자산 가치를 유지하고자 하며,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는 무연고 특성으로 인한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의 메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이 세상의 부를 보호하는 세계은행과 같은 역할과 더불어 거대자본은 강대국의 정치적인 힘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세계자본주의가 가능한 것이다.
또한 대자본을 축적한 선진국은 금융자산을 활용하는 기술이 발달하여 해외투자로써 M&A를 하거나, 국제금융투기를 하거나, 상당한 시간과 대규모 투자가 있어야 가능한 첨단 과학기술 등을 독점함으로써, 신자유주의가 필요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초국가적인 공룡기업의 출현은 국가자본주의 시대를 넘어 무한경쟁을 근간으로 하는 세계자본주의 시대로 변화케 함에 따라 내국의 시장기능이 마비되거나, 국가부도 등으로 인하여 유발되는 피해는 국민에게 전가되고 있다. 물론 세계자본주의는 국내 정치를 무력하게 만들고 있음에 따라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부의 사회 환원이라는 논리로 사회통합을 이루려고 하지만, 자본주의의 원칙과는 별개인 문제로 오히려 사회통합이 어려워지고 있다.
이는 자본주의에서 대자본가라 하더라도 원칙적으로 공동체에 대해서 책임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류는 절대 봉건제의 권력 양극화를 거부한 결과 근대사회를 열었던 것처럼, 오늘날 절대적 양극화를 만든 자본주의를 벗어나 한 단계 더 도약하는 새로운 모계적 분배양식의 시대를 열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아담스미스의 자본주의는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임에 따라 욕심과 양심이 조화를 이루며 시장이 자동조율이 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즉 자유방임주의에서 이기심을 동기유발로 한 자유경쟁이 궁극적으로 공동선을 이룰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물론 당시 동일 문화권의 소규모 경제에서 자유경쟁이 시장원리에 의해서 조율이 될 수 있지만, 범위가 넓어지고 규모가 커지게 될수록 인간의 탐욕은 배가됨에 따라 자동조율이 불가능함을 예측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 뉴턴과 같은 훌륭한 과학자나 로크와 같은 비범한 철학자와 스티븐스와 같은 탁월한 발명가나 자본주의 경제학의 창시자인 아담스미스 등의 의도와 다르게 발전한 결과이다.
즉 해외시장의 확대로 대자본을 축적하기 위한 충돌이 제국주의를 만들고, 착취의 정당성을 위한 진화론적 적자생존을 근간으로 인종차별을 정당화하여 약소국을 수탈한 역사적 사실에서 무제한 소유를 정당화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알 수 없었다. 다시 말해서 물질 풍요를 이루어 인간을 해방코자 하는 자유주의가 오히려 위험한 사회를 만들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에 대한 긍정적인 측면으로써 자동차나, 비행기 등의 이동 수단의 발달과 컴퓨터와 정보통신의 발달로 이루어진 지구촌 시대를 만들었다. 그리고 모든 면에서 획기적인 발전을 한 것이나, 노동력의 절감과 생산성 향상을 위한 자동기계의 발달로 인류를 풍요롭게 한 것 등은 긍정적이다.
하지만 인구의 도시집중이나 산업화로 인한 환경문제, 과소비로 인한 자원고갈과 고급화와 과잉경쟁으로 인한 물가 폭등, 이해관계로 인한 폭발적 갈등과 양극화로 인한 어두운 미래로 삶의 의욕 상실, 인간성 황폐화 등으로 다수의 사람이 불행해지고 있다. 뿐만이 아니라 복지 수요의 폭발적인 증가나, 충돌로 인한 사회적 비용부담의 한계 등을 회피하기 위한 체제로써 신자유주의를 만든 점에서 인간에게 자본주의는 해로운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자유기업은 분업화와 규모화, 근로자의 조기 교체, 경쟁 촉진 체제, 근로자의 비정규직화로 고용에 대한 사회적 규제를 피하면서 이윤을 극대화하고, 축적한 자본으로 공장자동화설비의 확대나 고학력이 요구되는 첨단 과학기술 산업으로 투자한 결과, 고용이 없는 성장을 하면서 고실업 사회로 공고화되고 있다.
뿐만이 아니라 오늘날 신자유주의 세상에서 승자독식의 무한경쟁으로 빠른 속도로 실패자가 증가하는 가운데, 세계최강의 패권적 강자들 간의 경쟁은 국내시장까지 심대한 영향을 끼침에 따라, 시장기능이 마비되는 경우가 점증하고 있다. 아울러 사회적 약자의 양산과 더불어 소외계층이 만연하게 되었으며, 계층 간의 폭발적인 갈등으로 불안정한 사회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인간 상호 간에 불신은 전문직 여성의 경우 결혼을 피하거나 청년실업 등으로 인해 결혼 적령기를 놓치고 있음에 따라 출산율 저하라는 새로운 문제를 낳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아담스미스에 의해 창안된 자본주의가 무한히 확대할 수 있는 법인을 경계하여 개인의 규모로 제한을 하였지만, 자본가들이 거부하면서 자본가에 의한 자본주의로 발전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이는 상대주의(민주주의)적인 영국인의 기질을 토대로 만들어진 자본주의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도덕적 책임을 전제한 소유 제한을 내재하고 있지만, 오랫동안 의식을 지배했던 절대주의 풍토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여 오늘날 세계자본주의로 다국적 법인으로 경쟁을 한다는 것은, 소 법인이나, 개인의 소규모거래로 제한되어야 함을 역설한 아담스미스의 뜻과도 배치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아담스미스의 자본주의는 적당한 규모의 거래로 다양한 문화적, 인종적 특징 등으로 인하여 충돌을 완화할 수 있지만, 대규모경제를 위해 만들어진 신자유주의는 ‘경제적 동물’로 살게 함에 따라 문화적 충돌은 피할 수 없음을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지난날 법인기업의 과도한 발전의 결과 제국주의를 형성하여 인종차별이나, 문화적 충돌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던 역사적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개인을 근간으로 한 소규모의 아담스미스의 자유방임주의는 자연스럽게 소유한계가 있음에 따라 가족복지를 스스로 책임질 수 있지만, 자유 기업집단 간의 무한경쟁을 해야 하는 신자유주의에서 가족복지를 가족 스스로 책임지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복지 책임을 전가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하여 문화적 존재로서 인간은 기아와 질병으로부터 해방코자 하는 동기나, 연민의 결과로 위대한 문명을 이룩한 사실을 상기해볼 때, 1대99라는 절대적 양극화로 절대빈곤층을 양산하는 신자유주의를 고집한다는 것은 역사발전과 배치됨을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이익집단으로써 기업 법인이 보편화되고, 다자주의로 발전된 현대자본주의사회에서 자유기업 주의와 함께 ‘소유상하한제’를 정착 병행해야 인류의 삶은 지속 가능함을 이해할 수 있다.
즉 사회적 환경, 사고방식, 경험의 내용, 취향과 노력, 궁극적 삶의 목적, 개체성 등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써, 능력의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는 가운데, 당면한 자원고갈, 환경오염, 양극화 등의 문제를 극복해야 한다.
물론 인류가 스스로 인간 존엄을 천명하였고, 비범한 사람(신인)들에 의해서 인간이 소우주임을 각인케 하였고, 과학기술을 발달케 하여 편리한 생활을 하거나 의문을 풀고자 하거나 행복하고 즐거운 인생을 살기 위해 자본주의를 만들었다 할지라도 오늘날 나쁜 결과로 나타났다면, 퇴출의 용기가 있어야 한다.
즉 인간이 결코 장삿속으로만 살 수 없을 만큼 훌륭한 마음이나 양심을 가진 대다수 사람을 비정하게 변모케 하는 제도를 고집한다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것이다. 하여 모민주의의 ‘소유상하한제’가 성립되어 시장의 자동조절기능이 조화롭게 작동하는 사회로 발전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즉 지구촌 사회는 모계의 공유제처럼 소유의 한계를 설정해야 시장이 자동조율이 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양심과 도덕이 살아나는 모계적 분배양식을 보편화해야 기하학적 평등을 구현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법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근대사회에서 인간을 재창조하는 모성의 사회적 지위가 부성의 수준에 있어야 함에도, 오늘날까지 남녀차별은 여전하며, 대다수 여성이 양극화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를 받고 있다. 즉 인간이라면 남녀노소 누구나 평등하다는 것을 헌법이 보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불평등한 것이다. 이는 복지적인 여성이 부계적 가치를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에서 불리하다는 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부계 주의의 속성인 일회적인 삶, 독점적, 수직적, 집권적, 배타적인 경향, 성장성, 원심력, 절대주의 등을 이은 자본주의가 주류를 이루고 있음에 따라 모계 주의의 속성인 영혼불멸, 순환 진보(윤회, 재생), 분권적, 수평적, 적극적 복지, 구심력, 상대주의, 만물의 주체, 신의 후손, 환경친화적, 나눔의 실천, 평화, 여성성, 존재의 삶 등은 비주류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근대사회에서 질적으로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형식적 평등을 전제로 한 자유경쟁은 결과적 불평등을 전제로 하고 있음에 따라 비주류인 여성들은 불리하게 됨을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부계적인 자유주의와 모계적인 민주주의와 결합된 자본주의는 형식적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민주주의가 인류의 이상임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를 위한 절차적 정의로써, 경제민주화를 이루지 못하는 반쪽민주주의임에 따라 유발되는 위기는 여성에게 불리함을 말하는 것이다. 하여 지구촌 시대가 요구하는 민주주의의 공고화는 모계적 가치를 근간으로 하는 분배양식을 구현하는 것부터 시작됨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모계적 분배양식의 구현을 위해 모계 민주주의가 성립되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오랫동안 서구사회에서 여성은 소외되었고, 이어서 자본주의의 이기심 배양으로 인하여 복지적인 여성이 불리하게 된다는 사실 자체가 지구촌 시대와 불합치하며, 더구나 자본주의는 민주주의 본질인 분권적 성질과 배치되기 때문이다. 물론 기독교의 원죄설로 인하여 여성은 극단적 남녀차별을 받았지만, 근대사회의 성립으로 형식적이나마, 남녀평등으로 자유로운 경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이 아니라 각각 다른 성질을 가진 남녀가 조화를 이루면서 균형 발전되기 위해 부계와 모계가 각각의 축을 형성한 새로운 정치체계가 성립될 수 있는 초석이 마련된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서로 다른 성질을 돕는 상보적 관계가 유지되어 조화로운 삶을 가능케 했던 모계 신본주의 사회처럼, 삶의 궁극적 목표나 취미, 능력 등에 의한 다양성을 보장하는 질적인 평등을 구현하기 위해 물질적 기초가 보장되는 적극적 복지사회가 성립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참고로 동양의 음양 철학을 근간으로 하는 동양적 가족주의에서 부부가 종속적인 관계가 아니라 ‘부부일심동체’(夫婦一心同體)라 하여 각각의 남녀 개인이 아닌 하나의 틀 속에 두 개의 다른 성질을 정(情)이라는 본성에 의해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부성의 원심력과 모성의 구심력이 균형을 이루어 상보(相補)관계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동양의 음양론적인 가족주의는 가족을 각각 다른 성질의 음양의 균형과 조화를 이루기 위한 제3의 기운(사랑)을 만들어내는 하나의 독립체로써, 사회의 기초조직으로써, 복된 사회를 만들어내는 원천(발전소)처럼 생각하였다.
즉 국가 존립의 정당성을 소위 ‘가화만사성’에 둔 것이다. 예를 들어 모성을 가정의 태양, 안주인으로, 부성을 바깥주인으로 표현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여 오늘날 첨단 과학기술로 인간을 더 많이 이해하게 됨에 따라 동양적 가족주의를 참고한다면, 인류의 이상인 적극적 복지사회의 구현이 세계화될 것이다.
자유방임주의 당시에 자유기업이 시장기능을 무시하면서까지 독점하려는 속성으로 인하여 잦은 공황이 유발됨에 따라 성립된 수정자본주의에서는 독점금지법 등으로 시장기능의 유지를 위해 간섭하고 있다. 하지만 자유기업은 살아남기 위해 편법이나 법 개정 등을 위해 금력을 사용하여 유리한 입장이 되도록 하는 경우도 많은 것은 사실이다.
아울러 자유기업 주의는 최대이윤을 목적으로 함에 따라 자신에게 유리한 사회적 환경을 조성하거나, 환경오염이나, 인간성 황폐화 등으로 인한 사회적비용의 폭발적인 증가로 조세부담이 현저히 증대되고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에 충실한 대기업이 파산의 지경에 이를 때 국민경제를 빌미로 정부의 개입을 요청할 때도 많다는 사실 자체가 앞뒤가 맞지 않으며, 도덕적 비난을 받을 만한 끝없는 자기변명과 합리화하는 경우도 많아 문제가 되고 있다.
하여 개인의 능력과 취향에 따라 소유의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오늘날 대규모경제로 인하여 공해, 자원고갈, 양극화 등으로 인해 생존권 차원의 위기를 맞고 있음에 따라 소유 제한을 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소규모경제에서 적합했던 무한소유를 정당화하는 자유주의 분배양식은 대규모경제로 살아가는 지구촌 시대에서는 불합치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이가 성장하여 성인이 되었을 때 성인의 옷을 입어야 함에도, 준비하지 못한 것과 같은 것이다. 즉 문명화된 신인류는 절대적 양극화로 인간을 억압하는 자본주의를 불신하며, 두려워하고 있다. 물론 자본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한 사회민주주의가 자유민주주의를 형식적 민주주의라고 하며 경제적 평등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자신들이 진짜 민주주의라고 하면서 등장하였다.
하지만 인간의 사회성에 편중한 사회주의는 소우주 인간의 개체성을 간과함에 따라 사회주의와 민주주의 결합은 근본적으로 부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즉 근대민주주의가 국민에 의한 정치를 근간으로 함에 따라 결과적 평등만 생각하는 사회주의는 민주주의와 불 합치한 것이다. 예를 들어 국민에 의한 정치라는 민주주의 원칙에서 벗어난 이차적 의미로써 국민을 위한다는 계획적 획일주의와 구시대의 전체주의와 흡사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부계적 가치에서 파생된 사회주의나, 자유주의가 모계적 가치에서 연유한 민주주의와 결합 되는 것은 다 같이 부적합한 것이다. 따라서 주권재민이라는 민주주의 제1의 원칙에 의해 새로운 모계적 분배양식을 성립하여 민주주의를 공고히 할 수 있는 모민주의가 보편화되는 것이 바람직함을 알 수 있다.
이는 20세기 초부터 체제수렴을 한 수정자본주의나 오늘날 좀 더 진보적인 중도주의가 대안으로 등장하여 국민의 선택폭이 넓어졌지만, 민주주의 정치에 대한 회의감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즉 신자유주의의 등장으로 민주주의의 가치인 복지와 분권, 양극화 억제, 균형발전이라는 민주주의의 정치적의무를 다할 수 없는 결과이다.
즉 지구촌 시대는 사회주의나 자본주의를 넘어 민주주의의 본질에 부합되는 모계적 가치에 충실한 새로운 모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체제를 성립하여 모계가 의사결정과 권력의 반을 독자적으로 갖고 복지의 주체가 되는 체제를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구촌 시대는 인류의 이상인 적극적 복지사회로 진보하기 위해 부계 주의와 더불어 엄연히 태고부터 실존하는 모계 주의가 균형을 이루는 온전한 민주주의로써 모계 민주주의가 정치적의무를 다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하여 동양의 민본주의, 서구의 자유주의, 근대민주주의, 사회주의 등을 이어 20세기 초부터 수정자본주의로써 소극적 복지사회인 행정국가로 역사 발전한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생태적으로 민주적이고, 복지적인 여성이 생활 정치의 중심에서 적극적 복지사회를 이끌어가게 됨을 예상할 수 있다.
물론 원심력인 부계의 효율성과 구심력인 모계의 안정성이라는 두 요소가 견제와 균형을 이루면서 역사발전을 하고 있었으며, 여성의 출산과 복지본능은 태고로부터 변함없이 이어져 오고 있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뿐만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만드는 위험한 사회를 더는 방치할 수 없음에 따라 경제민주화를 구현할 수 있는 체제가 성립되어 민주주의를 공고화할 때, 지속 가능한 사회가 되기 때문이다. 즉 역사발전과 민주주의 본질에 부합되는 모계 주의 분배양식으로써, ‘소유상하한제’를 세계화할 수 있는 모계 민주주의가 적합할 것이다.
오늘날 자본주의에 대해서 회의적인 이유는 현실적으로 ‘천부인권’의 의미를 퇴색하게 하는 절대적 양극화를 유발했기 때문이다. 즉 ‘천부인권’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물질적 기초인 ‘천부소유권’이 내재 되어 있음을 간과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유경쟁을 위한 자연법사상임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근대사회의 성립으로 산업화와 더불어 정경분리를 원칙으로 하는 자본주의가 성립된 후, 소규모경제였던 당시의 사회에서는 자유경쟁으로 ‘천부인권’의 내용인 물적 기초를 이룰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즉 당시 초기자본주의가 오늘날처럼 천문학적 경제 규모가 될 줄 몰랐다.
하여 대규모경제가 가능한 화폐경제의 발달과 화폐의 신용창조기능의 획기적인 발전을 하면서 절대적 양극화를 유발하는 자본주의 체제는 자연법사상과 배치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자연법사상을 근간으로 한 시민혁명이 성공하여 근대사회가 성립되었다면, 마땅히 ‘천부인권’의 내용으로써 ‘천부소유권’을 보장해야 함에도, 자본주의는 자유경쟁을 위한 ‘천부인권’일 뿐, 내용으로써 ‘천부소유권’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초기자본주의에서 ‘천부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천부소유권’은 바늘과 실처럼, 별개이면서도 별개가 아닌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몸과 마음은 별개가 아닌 하나인 것처럼, ‘천부인권’의 내용인 ‘천부소유권’은 별개가 아닌 것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가 자연법사상을 근간으로 성립되었음에도, 인명 경시와 도를 넘은 착취의 결과, 사회주의가 등장하면서 20세기 초 자본주의를 수정하여 소극적 복지국가(행정국가)가 성립된 사실로부터 ‘천부소유권’을 이해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만사가 언행일치가 되어야 실효성이 있는 것처럼, 앞으로 사회는 구조적으로 겉과 속이 일치하는 ‘천부인권’을 보증할 수 있는 ‘천부소유권’이 보장되는 적극적 복지사회로 역사 발전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경제 편 참고)
즉 지구촌 시대를 살아야 하는 신인류는 모계 민주주의의 분배양식인 ‘천부소유권’에 근거한 ‘소유상하한제’로 적극적 복지사회를 보편화해야 한다. 이는 인류가 진보할수록 탈 양극화 사회로 변모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모계 신본주의 사회에서 나눔을 인간의 도리라고 믿었던 사실이나, 인간 존엄을 구현하고자 하는 근대사회가 분권에 있다는 점과 일관성이 있음을 생각해 볼 때, 탈 양극화 사회로 역사발전 하는 것이 순리임을 알 수 있다.
뿐만이 아니라 오늘날 첨단 과학기술 시대를 살아가는 신인류는 새로운 모계적 분배양식을 보편적 가치로 세계화할 수 있는 능력이 축적되었다. 따라서 ‘소유의 삶’을 중시한 근대사회를 넘어 삶의 질을 중시하는 지구촌 시대는 생태적으로 민주적이며, 복지적인 여성이 분배의 중심에서 역할을 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이는 과학적 사고방식을 근간으로 하는 근대 민주주의 사회가 성립된 후, 실증주의로 학문과 과학기술이 획기적으로 발달하게 됨에 따라 이러한 결과물을 교육과 여러 경로나 매체 등을 통한 지식의 보급으로 대다수 사람은 무지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결과, 여성에 대한 편견이 해소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첨단 과학기술의 도움으로, 태고로부터 수만 년에 걸쳐 주류를 이룬 수천 년 전의 모계 신본주의 사회가 직관이 발달한 행복 지수가 높은 풍요한 사회였다는 사실은 참고가 될 것이다. 이는 중기모계사회가 인간을 대모신의 후손이라고 믿었던 인간이나 무한한 상상력과 재창조 능력으로 첨단 과학기술 시대를 이룩한 오늘날 인간과 같음에 따라 통찰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모계 신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을 모신의 후손이라고 믿고, ‘해혹복본’의 신념을 실천한 것도 기록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여 모계 신본주의 사회가 행복한 인생을 위해 순환 진보하며 진리를 탐구하고 축적하여 ‘해혹복본’의 진리를 수증하라는 유시와 오늘날 인간이 이룩한 첨단과학 문명과 맥을 같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오늘날 첨단과학 기술에 의해 나눔을 진리로 확신하여 실천하였던 모계사회처럼, 적극적 복지사회가 가능케 된 사실을 생각해볼 때, 인간을 대모신의 후손으로 믿었던 모계사회의 인간관은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여 인류는 모계 유일신의 유시인 ‘해혹복본’을 수증하거나, 인간의 궁극적 삶의 목적을 이해하기 위해 내면세계를 탐구하거나, 실존하는 무의 세계를 알고자 하거나, 우주 천문의 탐구나 개척을 하는 것 등 인류의 위대한 과업을 원만히 수행할 수 있도록 위해, 전 인류가 한뜻으로 힘을 모아 첨단과학 기술을 더욱 발전케 하는 모계 민주주의로 역사발전 해야 함을 알 수 있다.
또한 신자유주의의 무한경쟁으로 만들어진 수요부진과 세계 분업화, 원자재 고갈 등으로 인하여, 자유무역에 의해 유발되는 조그마한 충격에도 상당한 파장을 유발하고 있음을 볼 때, 자본주의 분배양식을 계속 고집한다면, 우려한 일들이 갑자기 나타날 수도 있다.
이는 마치 공룡이 마구잡이로 탐식하며 생존하였지만, 외부충격으로 인한 환경변화로 먹이사슬이 붕괴가 되면서 적응을 할 수 없게 되어 굶어 죽었던 것처럼, 지구촌 시대에 다수의 공룡기업이 세계시장을 종횡하면서 만든 결과를 통해서 예측 가능한 것이다.
예를 들어 다수 대기업의 무한경쟁으로 시장기능이 마비되거나, 이해관계를 둘러싼 수많은 문제로 유발되는 충돌이나, 환경오염으로 인한 천재지변이나, 소수는 엄청난 부를 축적할 뿐 아무도 해결할 수 없는 사회가 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빈곤하게 되는 절대적 양극화에서 힘든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여 공존을 전제로 한 모민주의 분배양식인 ‘소유상하한제’로 시장기능이 자동조절이 되고, 활성화되어야 하는 시대로 역사발전 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즉 자유경쟁과 더불어 ‘소유상하한제’에 의해 잉여가치를 인류의 이상인 적극적 복지사회구현을 위한 물질적 기초나, 첨단과학 문명의 발전을 위해 사용이 가능하도록 지역위원회에서 분배를 결정하는 모민주의 사회의 성립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인류는 제3차 산업혁명으로써 컴퓨터와 정보통신 등의 발달로 하드웨어적인 기반을 갖추게 되면서, 후기 혁명인 지식정보산업의 발달로 네트워크적 인간관계나, 소유상하한제, 적극적 복지사회의 구현 등을 위한 인류의 사회협동이 가능하게 되었다.
아무튼 자본주의는 인류의 장구한 역사에 비해 극히 짧은 기간 동안 수많은 나쁜 경험을 갖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과소비나 양극화 등으로 불안정한 사회를 경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퇴출을 할 수 없는 것은 실존적인 개인을 강조하며, 이기심을 편향적으로 배양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속성을 하일브루너 교수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즉 “일반적으로 케인즈나 슘페터에게서 소유제도의 도덕적 문제는 회피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한번 이단적인 문제를 제기해보자. 자본주의의 장기적 전망에 관한 비관적 합의는 자기들이 살고 있는 사회질서를 직업적으로 정당화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볼 때 도덕적으로 우려되는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이 자본주의를 전망하는 것과 같은, 그 문제가 많은 관점은 어떤 흑심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흑심이 그것을 강력하게 강화시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115) (하일 브루너, 132p)
이는 자본주의가 인간의 본질을 구성하는 사회보다 실존하는 개인을 우선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근대국가 존립의 정당성을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고, 결과에 대해서 책임진다는 것을 전제로 한, 개인주의(자유주의)에 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기능 국가를 말하는 것이다.
하여 주체로써 인간은 실존과 본질을 분리할 수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구시대의 가혹한 억압의 결과로 인간의 사회성과 개인성이 분리되는 것처럼, 생각하며 만들어진 체제가 자본주의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서구의 절대주의 풍토가 잔재하는 가운데, 인간의 개인성을 강조하며 성립한 자본주의가 구시대의 권력 양극화처럼, 경제적 양극화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초기자본주의에서 여성은 혹독한 시련을 겪으면서 한계상황에 있을 때, 등장한 사회주의는 수정자본주의로써 바이마르 헌법을 만들게 하였으며, 이어서 차별금지법과 더불어 노동법에 ‘동일노동의 동일 임금’이 명문화되었음에도, 대다수 여성은 오늘날까지 저임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 있다.
물론 오늘날 소비의 주체가 된 여성들의 힘은 정보화시대를 맞아 예전과 달라짐에 따라 이를 마케팅에 이용하기 위한 기업의 여성 임원이 증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극소수에 불과하여 상징적 의미일 뿐, 여전히 대다수 여성은 저임금에서 머무르고 있다는 점에서 별로 나아진 것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절대적 양극화를 유발함에 따라 만들어지는 절대빈곤층의 여성이 성적 존재로 변모하면서, 인류의 구심력인 모성애가 훼손되고 있다는 점이다. 하여 세상을 끌어가는 원동력으로써 실존적인 모계의 구심력과 가상적(관념적)인 부계의 원심력의 부조화를 형성하는 부계 편도의 사회는 막을 내려야 함을 알 수 있다.
이는 남녀평등을 목표로 스스로 여성해방을 위하여 목숨 걸고 시민혁명에 동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은 여전히 차별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오늘날 생태적으로 복지적인 여성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비복지적인 신자유주의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가 세계 분업화를 추구함에 따라 지역별로 이질적인 문화로 인한 갈등과 충돌로 불안정한 사회가 형성된다면, 충돌이 잦은 시기에 여성의 지위가 낮아졌던 역사적 경험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는 배금주의를 공고화하는 신자유주의가 세계분업으로 형성되는 상호의존성을 증대케 하여 위험한 사회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의존성의 증대는 보호주의를 점증하게 됨에 따라 유발되는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전면전보다 훨씬 강력한 ‘경제전쟁’을 유발하게 하고 있다. 하여 신자유주의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한경쟁을 해야 하는 자유기업은 초국가적인 다국적 거대기업으로 변모하거나, 경쟁력을 위해 유리한 곳으로 이동하는 등으로 형성되는 양극화로 갈등이 증폭될지라도 자본주의로써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무정부적인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상태인 신자유주의 세상에서 현실적으로 정치 무용론까지 등장할 정도로 정치의 사회통합기능과 민주적 통제가 무력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본주의사회는 절박한 이해관계로 예방적 조치가 어려움에 따라, 공황이 발생한 후,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과 같은 정부의 신용창조로 인한 인플레가 유발됨에 따라, 경쟁을 심화케 하고 있다.
뿐만이 아니라 과거와 달리 천문학적인 경제 규모로 발전한 오늘날 치안이나 복지를 위한 사회적 비용이 증가와 동시에 국가의 세수 부족으로 인하여 급격히 통화량을 늘린다고 할지라도, 경기침체가 장기간에 걸쳐 이어짐에 따라 인간의 상품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그리고 복지축소로 인하여 빈곤층이 거리로 내몰리고 있다.
예를 들어 로마가 멸망한 원인이 전쟁경비의 조달을 위한 통화의 남발로 인한 극심한 인플레로 불안정한 사회가 됨에 따라 성적 노예로 전락한 여성이 폭증했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여 빈익빈 부익부를 유발하는 자본주의 분배양식으로 인하여 파생되는 경제문제를 정치가 해결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양극화현상으로 인해서 시간이 갈수록 중산층이 줄어들고 절대다수가 빈곤층으로 전락하여, 인간성 황폐화를 유발하고 있음을 상기해 볼 때, 부계적 분배양식에서는 한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모계적 가치를 내재한 여성 NGO의 활동으로 모계적 분배양식의 구현이 합리적임을 이해할 수 있다.
주기적인 공황을 유발하는 자본주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의 복지지출에 의한 유효수요를 통해 시장기능을 정상화할 것을 주장한 케인즈(Keynes 1883-1946)에 의해 복지국가가 구체화 되면서 공황의 연착륙과 여권신장에 상당한 이바지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계획 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행정국가를 관료의 비대화와 비시장적인 정부부문의 비대화로 대기업이 만들어진 결과, 보호주의 장벽을 해체코자 하는 복지축소와 양극화를 정당화한 선진국 중심의 신자유주의가 세계화하고 있다.
물론 비복지적인 신자유주의와 생태적으로 복지적인 여성과 불합치한 점에서 역사퇴보라고 할 수 있다. 즉 구시대의 권력 양극화에서 여성이 소외되었으며, 근대자본주의에서 여성이 불행함을 이어 오늘날 신인류가 되었음에도, 절대적 양극화로 여성을 불행하게 한다는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또한 세계분업을 지향하는 신자유주의는 상호의존성을 증대케 함에 따라, 석유와 같은 중요원자재가 품귀현상으로 가격이 급등하거나, 어느 한 곳의 선진국의 금융위기나 세계화로 인한 수많은 변수 등에 의한 공황이 유발될 경우, 개별국가가 극복하기 어렵다는 점이 문제가 되고 있다.
이는 선진국 중심의 신자유주의가 복지국가를 위한 계획 주의를 원칙적으로 거부함에 따라 대기업 간의 생존을 위한 경쟁을 한 결과로써 형성된 세계적 양극화로 빈곤층이 양산되고, 과소비로 인한 환경오염, 자원고갈 등으로 인한 위험한 사회가 세계화되었기 때문이다. 즉 세상은 거대자본의 각축장으로 변모함에 따라 불안정한 사회가 공고화된 것이다.
예를 들어 과잉경쟁으로 이해 유발된 생태환경의 큰 변화로 먹이사슬의 붕괴, 기상이변에 의한 식량부족, 환경오염에 의한 질병 유발, 지구 온난화의 심각성, 여타의 불길한 징조 등과 함께 인간의 상품화가 가속화되어 인간성 황폐화가 만연해지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여 자본주의 생산양식으로 유발된 환경파괴라는 부정적인 결과를 볼 때, 자유주의 분배양식은 더는 인류에게 행복한 인생을 보장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역설했던 다이아몬드형의 사회구조를 스스로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이 입증됨에 따라 다이아몬드형 사회구조를 구현하기 위해 새로운 분배양식을 세계화하는 모민주의 체제가 성립되어야 함을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여성이 주류를 이루는 범세계 녹색 생명 운동과 같은 다양한 비정부국제기구(NGO)가 다국적 거대자본과 투쟁한다는 사실 자체가 포스트 자본주의를 준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자본주의에 무력한 민주정치를 더는 믿지 않으며, 스스로 자구책을 위한 방편으로 비정부기구를 만든 자체가 새로운 체제의 성립을 위한 전 단계로 볼 수 있다.
이는 의로운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지역문제를 넘어선 생태계의 보호, 환경오염방지, 자원남용의 방지, 양극화 극복, 빈곤퇴치운동 등을 위한 국제적 NGO의 결사는 초국가적인 공룡기업과 대립하기 때문이다.
뿐만이 아니라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하며 살아가는 글로벌한 지구촌 시대에 초국가적인 다국적 기업은 자금력과 더불어 협력적 중소기업군을 포함한 방대한 조직은, 마치 교황청처럼, 영토 없는 왕국이나 다름이 없음에 따라 국제적 규모의 비정부기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즉 부계주의 종말을 위한 새로운 분배양식을 세계화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물론 오늘날 거대한 다국적 기업 간의 경쟁은 마치 총성 없는 경제전쟁처럼 과격하며, 더불어 전대미문의 천문학적 과소비로 자원고갈과 환경오염으로 인한 생태계 파괴, 산성비와 병충해로 인한 농축산물의 감소, 질병 증가와 더불어 온난화로 빙하가 녹으면서 지구의 지도가 바뀌는 등의 현실을 볼 때, 인류가 감당하기 어려운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원칙적으로 무한축적을 지향함에 따라, 형성된 1대99라는 절대적 양극화를 해결할 수도 없고, 아울러 원칙적으로 사회적 책임도 없다. 하여 양극화를 유발하는 자본주의는 자연법사상과 배치되기도 할 뿐만 아니라, 절대다수가 불행하게 된다는 점에서 인간의 궁극적 삶의 목적인 행복한 인생과 배치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지구촌 시대와 불 합치하는 ‘일인다주식주의’라는 배금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격을 근간으로 하는 ‘일인일표주의’인 민주적 생활양식을 공고화하는 모민주의 분배양식이 세계화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또한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다수의 공룡기업의 치열한 경쟁으로 다수의 중견기업 군은 공룡기업의 하청기업으로 종속되거나 퇴출이 되고 있다. 즉 개발도상국의 중소기업군은 마치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하는 것처럼, 중소기업은 샌드위치의 상황에 있다. 다시 말해서 대기업과 연대한 중소기업군으로 이루어진 거대기업 간의 경쟁으로 무소속의 중소기업이 무너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수많은 기업이 퇴출이 되는 가운데, 살아남은 대기업은 상당한 경영 능력과 기술우위, 비시장적 국가 수요참여, 대자본 등으로 이루어진 초국가적 거대기업 간의 경쟁 과정에서 허약해진 결과, 더 많은 기업을 먹이로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미국의 경우 100년 이상 존속하는 기업이 최근까지 몇 개 정도라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여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냉소적인 태도로 법외노조처럼, 실력집단을 만들어 집단행동을 하거나, 반사회적인 범죄 등이 증가하는 원인이 자본주의의 속성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을 ‘경제적 동물’로 만들어가는 자본주의사회에서 각종 테러가 유발되는 것은 당연함을 알 수 있다.
참고로 현생인류가 나타나기 오래전 지구에서 소멸된 공룡의 경우, 과학적 가설로써 혜성의 충돌로 지구의 환경을 변화시킴으로 해서 굶어 죽거나 병에 걸려 전멸하였던 원인은 아마도 공룡들의 횡포는 위협적이었으며, 먹이사슬의 불균형을 이룸에 따라 멸망한 사실이다.
즉 지구환경의 적은 변화에 의해서도 거대한 공룡이 퇴출이 될 수 있는 것처럼, 거대기업군에 의해 양극화를 공고화할 경우. 조그마한 충격으로도 공룡기업이 무너지면서 유발되는 파장은 엄청남에 따라 위기를 극복하기 힘들 것이다.
예를 들어 오늘날 전 세계의 공룡기업들이 금융위기를 겪으며 혼란에 빠진 최근의 사실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안정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새로운 모계적 분배양식의 세계화를 위한 새로운 정치경제 제도를 성립해야 함을 알 수 있다.
하여 부계사회에서 무의식중에 무능하고 약한 것이라 경시하였던 모계적 가치인 복지, 존재의 삶, 대우주와 소우주로 이어지는 관계의 삶, 배려, 부드러움, 내면세계의 탐구, 비가시적인 다른 차원과의 교류, 분권적, 탈 양극화, 양보, 섬세함, 네트워크적 인간관계, 봉사 등을 근간으로 하는 사회로 역사발전 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즉 공공선을 이루기 위한 사회협동의 결과 오늘날 지구촌 시대가 만들어졌음을 상기해 볼 때, 인류가 역사 발전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선하고 부드러운 본질을 배양하고 성숙하게 하는 제도가 구현되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인간 존엄과 복지, 분권을 본질로 하는 민주주의 이상과 배치되는 부의 양극화가 공고화된다면, 구시대의 권력 양극화보다 위험한 사회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모계 신본주의 사회에서 대모신(대우주)을 창세 유일신으로 믿으면서 인간을 대우주를 의인화한 대모신의 후손으로 선한 심성을 배양하며 나눔을 실천한 사실은 참고가 될 것이다. 이는 지구에서 실제 살아남는 것은 부드럽고 방어적인 개체가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절대 봉건제가 퇴출이 되고 배려와 부드러운 모계적 가치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가 성립된 사실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부계 신본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구시대 토양에서 만들어진 자본주의가 만든 오늘날 절대적 양극화로 발전한 것은 절대주의의 다른 모습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서구의 경우 근대민주주의 사회가 성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지배한 절대주의가 잔재하여 다양한 형태의 전체주의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영육 간의 조화로 이루어진 인간은 문화(가치), 개인과 사회, 영혼, 정신, 육체 등으로 복합적으로 이루어져 어느 하나에 치우칠 수 없는 것처럼, 경제와 비경제적인 것의 조화를 이루는 제도가 있어야 하는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즉 인간은 아무리 많은 재화를 소유하더라도 만족할 수 없는 존재임에 따라, 비경제적인 정치종교와 형이하학적인 경제와 균형을 이루는 제도가 필요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가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마치 소유에 있는 것처럼, 경제에 지나치게 편향적인 것을 계속 유지 발전한다면, 인간성 황폐화로 인간의 궁극적 삶의 목적인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류의 이상인 민주주의 정치가 경제적 자유주의를 위한 절차적 정의에만 머물러 있는 반쪽민주주의가 아니라, ‘천부소유권’을 보장하는 온전한 민주주의로써 모민주의의 보편화로 진보해야 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모성의 재창조, 보살핌, 양육 등의 가사노동이 비록 임금노동은 아니지만, 인류의 구심력으로써 경제의 근간이 됨에 따라 모계적 분배양식으로 보상이 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이는 선택할 수 있는 임금노동과 달리 선택할 수는 없는 가사노동을 담당하는 여성의 경우 임금노동까지 한다면, 자유경쟁에서 남성보다 불리하기 때문이다.
하여 생태구조로 가족복지를 담당해야 하는 대다수 모성은 가족복지, 출산 양육, 노약자복지 등을 위한 가사노동에 대한 보상의 일부를 정부가 분담하는 적극적 복지사회가 세계화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이는 사회의 기초조직으로써 가족의 안정을 위한 가족복지는 사회 안정을 위해 중요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가족복지와 사회복지는 같은 것으로 간주하여 만든, 프랑스의 ‘가족수당제’가 될 것이다. 즉 출산 양육 기간은 바람직한 인간성을 이루는 기본프로그램이 형성되는 중요한 시기로서 조화롭고 안정된 사회를 위해 장기적 안목에서 복지가 필요한 저소득층의 모성에게 정부가 가족수당(사회적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
하여 서구적 가치인 자유주의가 모계적 가치인 민주주의와 결합한 자본주의를 넘어 모계적 분배양식의 세계화를 위한 한 단계 더 진보한 경제적 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적극적 복지사회로 진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제3의 산업혁명인 정보통신의 발달과 함께 프랑스가 가족수당 제도가 있다는 점이나, 스웨덴의 지방자치를 근간으로 하는 복지공동체로 사회적 기업에 의해 현물 지급을 하는 등으로 발전되고 있음을 볼 때, 적극적 복지사회의 세계화가 실현 가능할 것이다.
즉 태고부터 인류의 이상으로 이루어지길 염원했던 적극적 복지사회는 지구촌 시대에 이르러 가능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적극적 복지사회의 세계화는 인간의 사명임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세계 제2차 대전 후 구체화 된 소극적 복지국가(행정국가)에서 적극적 복지사회의 세계화를 구현하지 못하고, 오히려 비복지적인 신자유주의 사회로 역주행하고 있다.
즉 인류의 이상인 적극적 복지사회로 역사 발전하기 위해 민주적 분배양식이 세계화되어야 함에도, 자유주의 분배양식이 공고화되는 자체가 역사발전과 배치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역주행은 다수의 불행한 삶을 전제로 형성된 절대적 양극화나, 더불어 환경오염, 폭발적 갈등, 증오심 등으로 이루어진 위험한 사회로 나타났다.
이는 자연현상인 풍랑을 이겨내는 튼튼하고 큰 배를 건조하여 다 같이 살 수 있게 하는 것처럼, 민주주의 본질과 부합되는 새로운 모계적 분배양식으로 민주주의를 공고화하는 체제가 필요한 시점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이미 수많은 고통을 경험했으며, 앞으로도 계속하여 불행을 만들 수 있는 틀을 고집하기보다, 신속한 퇴출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다시 말해서 인간 상호 간은 상극의 삶을 살기보다. 상생의 삶을 위한 근본적인 제도혁파를 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풍요 속의 빈곤’을 형성하는 자본주의사회에서 마치 유혹에 못 이겨 스스로 타들어 가는 불나비처럼, 무지로 인한 감언이설에 속아 만들어진 빈곤이나, 인간성 황폐화나, 겁 없는 객기, 반사회적 성향 등을 인과응보의 결과로 나무라기보다, 각자의 양보로 이룬 사회적 합의에 의한 ‘소유상하한제‘의 세계화가 바람직할 것이다.
즉 인간 스스로 상품화하는 자본주의에서 벗어날 때, 인간의 궁극적 삶의 목적인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하여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해 민주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온전한 민주주의로써 모계 민주주의가 보편화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Part II. Human Dignity Chapter 1. The Age of Human Dignity The dictionary…
Chapter 4. Conclusion We already knew that the poor Ok-soon, who was introduced earlier,…
Chapter 3. The happy life of a new generation 1. A history of human…
Chapter 2. Beyond capitalism According to the French Declaration of Human Rights, "the principle…
Part 6. The political philosophy of the mother …
Chapter 3. Neoliberalism 1. Neoliberalism contrary to the global zeitgeist 1.1 Capitalism tha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