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 이유는 인간의 독특한 본능에서 연유하고 있습니다. 즉 행복한 삶을 살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 자체가 궁극적인 삶의 목적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고조선의 국시인 인류의 행복을 위한 삶을 살라는 ‘홍익인간’ 정신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당신이 인간답게 살고 싶다면, 상대를 인간답게 대우하고,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일에 동참하라’는 의미입니다.
전통 한국의 도덕 규범을 헌법학자 김철수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한민족의 도덕 사상의 특색은 도덕 이론의 빈곤이었으며 중정불편(中正不偏)이나 이타(利他)를 중심으로 한 실천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상고인(上古人)의 고유 도덕 사상은 ①인본주의 ②효도윤리 ③인의, 예양, 결백, 정절의 윤리 ④충절의 윤리라고 보고 있다. 이러한 고유사상에 유교, 불교 등의 외래사상이 전달되어 한국의 전통 윤리가 확립되었다고 보겠다.” (78) (김철수, 법과 사회정의, 서울대 출판부 24p)
이처럼 전통 한국은 중국의 도덕 규범과는 다소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한민족은 공손하고 공평하여 실천을 중시한 민족이었습니다. 이는 한민족이 모계 신본주의 사회의 중추적 역할을 한 동이족의 정통성을 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모계 신본주의 유습을 이은 초기 신라가 신궁에 여성들만이 제사를 지내고, 출산하는 관습이 있었으며, 비록 나이가 많은 남자라 할지라도 어린 소녀에게도 존댓말을 써야 했던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전통 한국의 무교가 여제사장이 제의를 주도한다는 점이나, 한민족의 기층민에게 일반화되어 있었던 토속신앙을 근간으로 하여 조직화한 동학(천도교)에서 ‘인내천’의 교리와 더불어 남녀평등관이 뚜렷한 사실에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음 인용문에서 앞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민 간에는 같은 중국계의 문화인 불교 및 도교가 북아시아의 샤머니즘의 원류를 발하는 고대의 무속문화와 잘 친화한 까닭에 유교가 침투할 수 없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일면에서는 유교문화가 주로 지배층과 남성에게 큰 영향을 끼쳤는데 대하여 고래의 전통문화는 서민과 여성에 의하여 전래 되었다고 보는 경향도 있다.” (79) (김철수 36p)
따라서 한민족이 무교, 도교, 불교, 유교 등으로 이어오다가 일제강점기에 정체성 말살 정책의 일부로써 기독교를 받아들임에 따라 모계 신본주의 사회의 유습을 이은 한민족의 고유한 풍습이 점차 사라지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고대 한국의 독특한 문화는 중기모계사회(20만 년~1만 년)의 인류문명의 시원을 이룬 모계 신본주의 사회로부터 연유합니다. 즉 1만 년 전후에서 7,000년 사이에 이르는 모계 신본주의 사회는 인간을 모계 유일신의 후손으로 믿고, 연속재생의 순환 진보의 원동력으로써 나눔을 체화한 후, 본향으로 돌아올 것을 믿어 의심하지 말라고 한, 모계 하나님의 유시로써 ‘해혹복본’을 믿은 사회였습니다.
이후 동이족이 중심이 되어 인류 최초의 모계씨족 연합체로써, 소위 12 한국이라는 고대 한국(단국)을 성립하였다고 ‘한단고기’와 ‘부도지’에서 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부계 부족국가가 성립하기 전 사회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동이족과 신념을 같이하는 여러 씨족이 연합한 종교사회였습니다. 물론 ‘한단고기’와‘부도지’에서는 모계 제국으로 표현하지 않지만, 여러 정황이나 기록물과 아울러, 전통 한국의 토속신앙 등을 참고로 할 때, 모계 유일신을 믿은 ‘느슨한 연합체 사회’라는 용어가 적당할 것입니다.
그리고 모계 신본주의 사회의 유습을 이은 단군조선(고조선, BC23~BC2)은 ‘홍익인간 제세이화’를 국시로 하고 ‘8조법금’을 기초질서로 하여 성립하였습니다. 참고로 조선(朝鮮)이라는 국호는 새벽에 물고기를 제단에 올려놓고 제사를 지낸 민족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고조선은 모계 신본주의 유습을 이은 여러 민족이 함께하는 개방적인 다민족국가로써 우수한 농업기술, 천문학 등을 전파한 인류 최초의 종교 대연합체였습니다. 또한 고조선은 삼 조선이라는 포트폴리오 구조를 가진 독특한 체제를 유지하였습니다.
이는 후일 고조선을 이은 삼한도 3개의 국가로 계승되었습니다. 이는 살아남기 위한 전략으로써, 마치 성장성, 안정성, 수익성을 위한 포트폴리오의 삼각형 구조와 매우 흡사합니다. 하여 삼국이 경쟁 보완관계로 홍익인간이 유지될 수 있었던 독특한 체제라 할 수 있습니다.
하여 식민사관에서 한민족은 고조선(삼조선)이나 삼한시대의 3국이 분열을 좋아하는 민족성처럼 부각하였지만, 한민족이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마치 위험 분산을 위한 포트폴리오전략처럼, 생존전략이 뛰어난 끈질긴 생명력을 갖고 진보하는 현명한 민족이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아마도 세상은 이미 부계사회로 공고화함에 따라 1 체제 3국으로 모계 신본주의 사회의 신념인 ‘해혹복본’의 유시를 이어가고자 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는 ‘홍익인간’의 삶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즉 모계 신본주의 사회에서 모계 종교연합체인 12 한국 (아시아 대륙, 유럽 일부와 중동 등)이 위축된 후, 성립한 고조선이 3 조선으로 이어졌습니다. 이후 삼한시대로 이어져서, 고구려는 고대 중국의 한나라와 맞서 싸운 강대한 나라로써 고조선의 일부 지역을 되찾았습니다.
그리고 백제가 일본에 문물을 전하여 상당한 공헌을 하였으며, 고구려와 백제는 고대 중국의 강력한 부계사회를 방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신국(神國)이라 일컫는 신라가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여 고대 한국의 유습인 선교(仙敎)가 유지계승 될 수 있었던 점에서 앞의 사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마고 삼신을 숭배한 모계 신본주의의 발원지였음을, 유럽과 아시아 전역에 걸친 고인돌의 반 이상이 한반도에 분포되어있다는 사실에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한반도의 지형 지세가 바라만 보는 악산보다, 전체적으로 동산이나 무릉도원과 같은 노년기 산이 많아 원만한 생로병사를 할 수 있는 지역 특성에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반도는 신선이 수행하는 지역으로, 특효가 있는 산삼이나 약초 등이 생산되는 곳으로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음을, 진시황이 불로장생하는 불로초를 찾았던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노년기 지역이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았고, 뚜렷한 사계절과 좋은 산수로 인해 생산되는 약초와 더불어 발달한 한의학과 자가 치료가 가능한 침구술이 발달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초기 신라 귀족이었던 박제상이 신라의 정통성이 마고 하나님 시대부터 이어져 오고 있음을 기록한 신라 역사서인 ‘부도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즉 오래전 인간성 황폐화의 과정을 겪으면서 동물과 같은 심성과 외모로 변모함에 따라 이를 수정하기 위해 수도자들이 천년에 걸친 기도와 수행으로 현행 사람과 같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독특한 약효가 있는 산삼과 약제를 채취하여 신시를 통해 물물 교환된 사실을 전하고 있음을 볼 때, 한반도는 이미 오래전부터 몸과 마음의 병을 치료하고 수행하는 수도장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한반도의 산삼이나 인삼의 약효는 유일하며, 침구술이 독보적인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여 아무런 대가도 없이 인간의 행복을 기원했던 신선(신인)의 ‘수증’에 의해 외모도 멋지고, 마음도 선한 유능한 존재로 발전되었다고 한 사실과 ‘홍익인간 사상’은 맥을 같이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진시황(秦始皇)(BC247-BC210)이 고대 중국을 통일하면서, 고조선은 멸망하였습니다. 이를 이은 초기의 삼한은 ‘해혹복본’의 뜻을 같이한 다민족의 고조선처럼, 상호 간에 경쟁 보완하며 한민족을 유지 계승하였습니다. 이는 세계 어느 곳에도 없는 유일한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음, 양, 충기(沖氣, 중간, 공간, 장)라는 3요소가 조화를 이루는 것처럼, 3국의 역할 분담으로 이루어진 사실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여 마고 삼신 사상에서 음, 양, 중을 의미하는 3은 생명을 의미하는 숫자로 한민족에게 숫자 이상의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오래전부터 있었던 한민족종교로써 만물과 화합을 중시한 자연 친화적인 신선도(선교, 도학)가 상당한 수준에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신라 중기의 원효대사는 만사가 마음먹기 달렸다는 ‘일체유심조’를 설파하였으며, 화합을 최고의 덕목으로 하는 사회통합이론인 ‘화쟁사상’(和爭思想)을 설파하는 등으로 해동성국의 해동성자라고 칭송받았던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전통 한국이 중앙집권적 전제군주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백성이 자율적으로 먼저 일어났던 사실이 앞의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일제 식민통치를 거부하여 민족 전체가 목숨을 걸고 저항하며 거국적 민족의 역량을 보여준 3.1독립운동은 세계사에서도 유래를 찾아보기 어렵고, 민본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동양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여 모계 신본주의 문명을 전파한 한민족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적 가치인 ‘홍익인간 제세이화’를 구현하고자 하는 선진 문화민족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고대 중국이 형성되기 전 세상의 중심적 역할을 하였던, 12 한국을 이은 고조선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공자는 고조선을 군자가 사는 도덕적인 나라라고 흠모하여 ‘동방예의지국’이라 칭하였습니다. 이는 고대 중국이 예(禮)를 근간으로 통치하였기 때문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아마도 여제사장이었던 공자의 모친을 통해 모계 신본주의 유습을 이은 고조선의 제례 (제의) 문화와 풍속을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신선도를 생활화하였던 고조선의 위상과 문화를 높이 평가하였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고조선은 남녀가 유별하고 예로써 대하여 남녀의 역할이 다름을 존중한 가운데, 조화로운 관계였다고 전하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안(安)은 내부의 구심력으로써 국가의 정체성과 같은 의미였고, 밖은 외부의 원심력으로 가변적인 성질로 보아 서로가 다름을 존중하여 균형을 이루는 것입니다. 부부는 안주인과 밖의 주인으로 주인을 두 축으로 서로 의지하며 보완하는 관계입니다. 물론 오늘날까지 부성을 바깥주인으로 모성을 안주인이라는 용어로 남아 있습니다.
전통 한국의 경우 여성의 이름과 성을 혼인 후에도 보존하였던 사실에서 모계유습이 남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안팎의 균형을 조화롭게 이루는 선비 집안을 존경하여 양반으로 칭했던 사실로부터 모계적 가치와 부계적 가치가 공존하는 사회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전통 한국이 유교사회가 되었음에도, 도학의 근원인 모계 신본주의 유습이 기층민에게 잔재하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유교가 공고화된 조선 중기부터 여성들이 지위가 추락했을지라도, 여성의 성과 이름은 혼인 후에도 유지된 사실을 볼 때, 모계 신본주의 사회의 유습이 이어졌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민족의 전통사상으로써 ‘경천애인’(敬天愛人)사상과 토속신앙을 체계화한 동학에서 ‘사람 즉 하나님’이라는 ‘인내천사상’을 설파한 사실입니다. 즉 인간을 대모신의 후손으로 천명했던 모계 신본주의 사회의 사상과 같은 것입니다.
하여 동학교주 최시형 선생의 ‘인내천사상’은 마치 인간을 신의 후손으로 믿었던 모계 신본주의 사회를 체험한 것처럼, 일관성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동학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하여 신분제를 타파하고, 남녀평등을 실천하였습니다. 물론 선생은 성현들처럼 몸소 실천하여 솔선수범하였습니다.
하여 인간을 부계 유일신의 피조물로 설정한 기독교나, 동양의 민본주의 등과도 다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1만 년 전후 모계 유일신이 지배한 마고 시대로부터, 12한국이라고 하는 고대 한국(단국)과 고조선, 삼한시대를 이어 고려, 조선으로 오늘날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유구한 한민족의 역사는 모계 신본주의의 쇠퇴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참고로 서구는 중동에서 발현된 유대족의 헤브라이즘(신본주의)과 고대 그리스의 인본주의인 헬레니즘과 융합을 이룬 사회로 발전하였습니다. 이는 BC 4세기경 고대 그리스의 절대주의 철학자 플라톤의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을 사도바울이 신약성서를 집필할 때, 원용하였던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의 헬레니즘(인본주의)은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정의한 프로타고라스 (Protagoras)가 대표적입니다. 또한 상대주의 철학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 존립의 정당성을 개인의 행복을 구현하는 데 있다고 하였으며, 이와 부합되는 정치가 민주주의임을 설파하였습니다. 즉 절대주의와 균형을 이루는 법치주의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또한 ‘에피크로스’ 학파는 쾌락을 최고의 선으로 주장하여 개인주의(자유주의)의 기초를 제공한 사실이나, 소크라테스는 사회의 안정을 위하여 악법도 법이라고 하여 독배를 마셨던 사실 등은 법치주의의 근원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소유권을 중시했던 로마제국의 12표법(BC 450)에서도 법치주의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서구 법치주의는 고대 그리스의 인본주의와 기독교의 율법주의와 습합되어 있으며, 중앙집권의 신성로마제국이 성립하면서 공고화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후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3세기경부터 교황체제의 종교제국으로 변모함에 따라 기독교 율법주의의 공고화로 한층 더 발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 5세기경 로마제국이 멸망함에 따라 유럽은 절대 유일신이 지배하는 절대 봉건영주시대가 되면서 헤브라이즘의 전성기인 중세암흑기(3C~13C)를 겪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13세기 초 칭기스칸의 세계화로 유럽과 아시아 대륙, 중동 등을 아우르는 문물교류가 활발히 전개하면서 절대 존재를 불신하게 됨에 따라 중세 암흑기는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후 유럽은 동양의 민본주의와 더불어 고대 그리스의 헬레니즘(인본주의)을 다시 연구한 결과, 철학적 경험주의가 발달하면서 자유주의를 구체화하기 시작하여 14세기 르네상스 시대를 열게 되었습니다.
이후 유럽은 불확실성의 시대를 겪으면서, 헤브라이즘은 퇴조하고, 헬레니즘이 재등장하는 가운데 자연법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자유주의가 구체화 되었으며, 상업주의는 산업혁명을 일으키게 되었고, 이에 적합한 새로운 경제 제도가 등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즉 아담스미스의 자본주의는 이기심을 동기유발로 무한소유를 정당화하며 불로소득으로써 금융소득을 골자로 하는 자유방임주의를 국부론에서 주장하였습니다. 하여 경험주의를 근간으로 한 과학의 발달로 일어난 산업혁명과 더불어 개인의 권리투쟁을 정당화하는 법치주의가 자본주의사회를 가능케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동양은 자기 자신이 모범을 보이라는 의미인 ‘수기치인’(修己治人)을 시작으로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고 하여 자신을 닦고, 가족이 평안하도록 사회참여를 하는 것을 중시한 사회였습니다. 이는 국가 존립의 정당성을 가족의 안위와 개인의 도덕적 수양에 두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인간 상호 간에 조화로운 삶의 원리를 도덕성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고대 중국의 윤리는 예(禮)라고 할 만큼 예의를 중시하였습니다. 이는 자신을 극기하는 것이 예라고 한 공자의 ‘극기복례’(克己復禮)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례 행사로부터 연유한 것으로써, 자연법칙의 질서와 같은 예는 인간 존중이라는 면과 동시에 불평등한 면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여 고대 한국의 윤리는 효를 모든 행위의 근본으로 보아 최고의 덕목으로 생각한 것과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근대사회가 서구의 법치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음에 따라 오천 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한민족의 전통적 가치와 서구적 가치가 충돌하는 소위 아노미 현상(가치 부재, 가치 혼란)으로 사회통합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즉 서구의 자유주의가 시민혁명을 통해서 정당화되어 성립된 근대사회가 성립되고부터 동양의 덕치는 의미가 약화 될지라도, 의식을 지배하고 있음에 따라 갈등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지역 환경에 의해 형성된 전통문화(가치)임에 따라 서구적 가치를 수용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여 오늘날 위험한 사회를 극복하기 위한 제3의 가치체계가 필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지구촌 사회와 부합되는 동양적 가치로써 덕치주의와 서구 법치주의가 수렴된 ‘모민주의’가 적합할 것입니다.
전통 한국은 사농공상을 근간으로 한 신분제 사회였습니다. 도학과 선비정신이 지배하는 사회로써, 개과천선(改過遷善)하면 신분이 상승하고, 잘못하면 하락했습니다. 하여 인도에서 항구적인 신분제인 카스트제도와는 전혀 다른 성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사회적 공헌도를 근간으로 한 신분제로써 어느 정도 열린 사회였습니다. 이는 한민족의 정체성인 ‘홍익인간사상’이 열린 사회를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한민족의 신선 사상 (도학)에 유학이 습합하여 이루어진 신분제는 선비의 청빈한 삶을 최고의 덕목으로 하여 만든 질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고대 한국의 선비는 모계 신본주의 사회에서 여제사장을 선비(비범한 사람)라고 칭하였습니다. 전통 한국의 선비와 같은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계 신본주의 사회에서 대나무가 반듯하지만, 속은 비어 실속이 없는 것처럼, ‘해혹복본’을 진리로 믿고, 수증(修證)하는 여제사장을 선비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즉 모계 신본주의 사회의 선비는 앞서 순환 진보사상에서 순환을 많이 한 비범한 여제사장을 의미했으며, 진리를 탐구하고, 진실을 위해 목숨까지 버릴 수 있는 대쪽 같은 정신이 선비정신입니다. 하여 유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있었던 선비정신은 태고 한국의 모계 신본주의 사회에서부터 있었으며, 전통 한국의 선비정신과 유사한 것임을 밝혀둡니다.
즉 모계 신본주의 사회의 신선 사상에서 발현된 선비정신은 한민족의 정체성인 것입니다. 따라서 조선 시대 중기까지 남녀가 대체로 평등하였던 이유는 공정한 사회를 위해 자신을 연마한 선비정신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조선의 국법(헌법)이었던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 유언이 없는 경우에 남녀 자녀에게 균등 상속으로 차별이 없었던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즉 모계 신본주의의 남녀평등 유습이 기층민(민중)에 의해 유지 존속된 일반의사로써 국법에 반영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경북 안동지방의 이웅태의 묘에서 출토된(1998년) 한글의 편지에서 조선 중기의 부부관계가 수평적인 사실을 알 수 있었으며, 조선 중기에 경북 안동지역의 어떤 문중에서 균등 재산을 유언으로 한 문서가 매체로 알려진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아마도 모계 신본주의의 정통성을 이은 신국으로써 신라가 개국하기 전에 있었던 안동의 여인국의 유습이 잔재한 지역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지면 관계상 생략하기로 한다. 이는 전통사회가 완만하여 오랜 세월이 흘러도 쉽게 변치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조선이 17세기 전까지 유교가 중앙정부의 의지와는 달리 지방 토호 세력이나 풍속에 그다지 영향력을 갖지 못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조선이 유교적 중앙집권제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초기에는 고려의 지방분권제의 영향이 잔재하였으며, 심지어 신라의 풍속을 유지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조선이 숭유억불 정책을 펴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왕실이나, 기층민들이 토속신앙인 무교에 습합된 도교나, 불교를 믿었던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아마도 한민족 특유의 미륵신앙이 기층민에 의해 유지된 가운데, 영감으로 체험되고 이어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조선 중기 17세기부터 유교 윤리가 공고화됨에 따라 무교, 불교, 도교 등은 쇠퇴하였고, 유교 윤리로써 남녀유별, 부부유별, 남존여비, 여필종부, 칠거지악 등으로 여성의 지위는 추락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허균의 누이인 허난살헌(許蘭雪軒, 1563년-1589년)의 시에서 고려 여성들의 자유분방함이나 신선도를 그리고 있음을 볼 때, 기존의 모계주의적인 도학적 가치와 부계혈통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충, 효라는 유교적 윤리가 서로 갈등을 빚고 있었던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초기 조선 사회에서 조상제사의 주관을 필요에 따라 모계 상속처럼 여성도 할 수 있었던 사실을 상기해 볼 때, 기층민의 경우 부계혈통주의는 큰 의미가 없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일반백성의 경우 조선 말기에 이르러 부계혈통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족보가 등장하기 시작한 사실에서도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비록 조선이 가부장제 나라였지만, 모계 신본주의 유습을 이은 나라였기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모성이 대우를 받았던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모계 대연합이 쇠퇴하는 과정을 겪는 가운데, 모계 신본주의 사회의 유습이라 할 수 있는 무교가 무시당하고 있음에도 유지 계승된 사실에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20세기 초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조선이 멸망하면서, 한민족의 정체성은 빛 좋은 개살구가 되었고, 식민사관으로 인류문명의 시원을 열었던 모계 신본주의 사회까지 허구로 인식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일제는 모계 신본주의 사회였던 마고 시대로부터 고대 한국을 통해 인류에게 공헌한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미개한 민족으로 비하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태고의 역사가 상징으로 무형문화로써 이어짐에 따라 한민족의 정체성을 이루는 전설이나, 수많은 기록물이나, 유무형의 문화 등을 통해 통찰력의 토대가 되는 서책을 일제가 무려 20여만 권을 태워버림에 따라 서로 연결되지 않게 되어 밝혀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상상력이 풍부한 한민족을 미개한 부정직한 민족처럼, 매도하면서 역사 왜곡을 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모계적 가치를 근간으로 한 미풍양속이 조선 중기 임진왜란 이후 서서히 약화가 되기 시작하였으며, 일제 식민통치를 받으면서부터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즉 서구 기독교문화와 일제 식민정책에 의해 모계 신본주의 유습인 전통 신앙체계와 고유한 미풍양속과 음양오행 철학 등은 구시대의 유물처럼 만들어 갔습니다. 예를 들어 1만 년에 이르는 유구한 역사를 갖고 버팀목이 되었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지킬만한 가치가 있는 모계 신본주의 사회와 더불어 6,000년 전 12 한국의 역사를 알 수 있는 4,300년 전 단군조선을 허구 내지는 신화로 폄하를 하는 등입니다.
즉 민족혼인 ‘홍익인간사상’을 하루아침에 무의미하게 만들어 영구지배를 획책하였습니다. 또한 용기가 있는 민족에게 있는 가끔 발생한 민란을 두고, 마치 반사회적 정서를 가진 민족으로 폄하를 하였던 것이나, 고조선에서 알 수 있듯이 삼한의 경쟁 보완관계를 마치 철천지원수처럼, 부각하는 등으로 식민사관으로 역사 왜곡시켜 분열을 조장했습니다.
이는 국가의 정체성이나 체제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탐관오리의 부당함에 대한 결사임에 따라 정부는 백성의 뜻을 비교적 빠르게 수용하여 무마했던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민족의 정체성의 뿌리로 볼 수 있는 모계 신본주의 유습을 이어 성립한 신라가 지방자치를 중시하였던 사실과 더불어 삼국통일 후 지역 차별이 없었던 사실을 고려에서도 지방자치를 중시하였던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삼한 초기와 달리 강력한 부계사회였던 고대 중국으로부터 한민족이 살아남기 위해 통합이 필요했던 후기 통합과정에서 어느 정도 충돌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처럼 일제는 민중을 분열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패망의 원인을 지역색과 사회지도층에 있다고 논리를 펼치면서 이간질하고, 무능하면서 부패한 지배층을 대신하겠다는 명분으로 식민통치를 정당화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일제는 조선의 정치인(사대부)을 착취집단으로 매도하면서, 서구의 식민지를 정당화한 인종차별적 제국주의보다 한 수 높은 헌병통치를 하였습니다.
식민사관으로 역사 왜곡하여 영원히 지배하고자 하는 식민지 정책의 결과, 모계 신본주의 사회로부터 오랫동안 형성된 한민족의 홍익인간사상과 선비정신 등은 식민사관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폄하됨에 따라 한민족의 정체성과 방향성을 잃게 되었습니다.
즉 ‘홍익인간’이라는 공동목표를 구현할 정치지도자는 없는 가운데, 소통이 없는 일방적인 일제의 헌병통치로 혹독한 시련을 겪으면서 패배 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여 동양적 가치와 한민족의 전통적 가치를 부정하는 냉소적인 인격을 형성케 되었습니다.
문제는 무능하고 천박한 민족으로 만들고자 획책한 악의에 찬 사람들도 분명히 죽게 되지만, 식민지의 더러운 찌꺼기를 씻어내는 데는 오랜 세월이 필요한 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식민지 수탈을 당한 제3세계가 국내 갈등으로 인한 충돌로 유발되는 사회적비용의 폭발적 증가와 빈곤의 악순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대자연의 한계 법칙과 상반되는 인간의 무한한 탐욕을 정당화한 부계적 분배양식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생태적으로 유한한 인간은 유한한 자원을 무제한의 소유를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것으로 착각하는 무지의 결과입니다. 이는 오늘날 전 세계에 걸쳐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테러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무튼 일제의 앞잡이가 된 사람들은 동족을 괴롭힘에 따라 한민족의 정체성인 ‘홍익인간사상’을 스스로 부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제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만들어진 왜곡된 식민사관에 의해 한민족 특유의 믿고 의지하는 연대성이 무너짐에 따라 서로 불신과 원망하는 모래알 민족이라고 폄하되거나, 허풍이나 떠는 민족 등으로 수모를 겪었습니다.
즉 식민사관으로 왜곡한 사실을 믿고 유구한 역사와 정체성을 부정하고, 자책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모계 신본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태고의 12한국(단국)에 대해서 고고학적으로 실증이 곤란한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단군 시대는 고고학적 유물로 실증이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문헌으로도 입증되고 있습니다.
하여 역사의 연속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모계 신본주의 사회였던 마고 시대를 통찰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식민사관은 고조선의 단군을 부정함으로써, 한민족의 위대한 상 고대사를 신화로 생각하게끔 한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즉 단군조선이 ‘홍익인간’을 국시로 창업한 사실이나, 모계 신본주의 사회를 이끈 동이족이 위축되어 고조선의 한민족으로 변모한 사실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리고 전통 한국으로 축소되는 과정에서나 1,000여 차례의 침공을 받으면서도 다른 나라를 먼저 공격한 적이 없었으며, 평화적이고 방어적인 사실에서 문화민족임을 긍정할 수 있습니다.
하여 일제는 한민족 스스로 나약한 민족으로 생각하게끔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민족의 특성이 나타나는 신미양요에서 일제의 나쁜 의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조선이 1866년 대동강에서 미국 상선 제너럴샤먼호를 격침 시킴에 따라 1871년 등장한 미국함대가 엄청난 화력으로 공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퇴각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이는 한민족은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으며, 철학적 토대가 튼튼한 문명국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폭력에 의해 굴복되는 민족이 아님을 알 수 있는 사건입니다. 하여 사건을 통해 한민족의 의식을 지배하는 홍익인간정신, 신선 사상이나, 선비정신이 유지된 사회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에 일본은 10세기 정도부터 사무라이 공포통치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미국함대의 단 한 발의 포격으로 무릎을 꿇고, 1854년 3월 31일 미 해군 제독 매튜페리와 일왕과의 ‘미일화친조약’이라는 불평등 조약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일왕이 실권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막부의 쇼군과 대표자들과 함께 페리는 재합의를 하였습니다.
이후 유럽의 각 나라들과 통상조약이 체결됨과 동시에 물가 폭등으로 인한 시민폭동과 무사들의 불만 등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1868년 메이지유신이라는 왕정복고를 하기에 이릅니다. 따라서 미국의 힘에 의한 강제적 개방의 결과 실권자였던 사무라이 막부로부터 왕권이 회복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메이지 유신 전의 사무라이는 전쟁전문가로서 왕이 있었는지도 몰랐으며, 정적 암살이나 패거리로 물려 다니며, 영주에게만 충성하는 집단이었습니다. 이는 유교의 충과도 다르며, 서구의 기사도와도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정황에서 볼 때, ‘홍익인간’, ‘선비문화’를 가진 후덕한 문화민족이기 때문에 나라를 잃어버린 특이한 경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해혹복본사상’을 이은 여러 종족이 ‘홍익인간 제세이화’를 구현하기 위해 성립한 고조선을 이은 전통 한국이 멸망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고대 중국에 흡수되지 않고 비록 약소국으로 전락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예부터 ‘해동성국’(海東聖國)으로 일컬으며, 굳건히 국가의 위상을 갖고 당당하게 세상에 존립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뿐만이 아니라 곰 신앙(고마운, 감사함)을 삶의 본질로 생각하는 한민족의 성향이 오히려 먹이가 된 사실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동양의 주인공이었던 ‘홍익인간’ 한민족의 자부심이 일제의 악의를 이해할 수 없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전통 한국이 자본주의와 배치되는 사농공상의 가치체계를 가진 도덕 국가로서 일제의 음모를 인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당시 조선은 깡패의 간교함을 이해할 수 없는 도덕적 사회였습니다. 따라서 나쁜 사람들이 대를 이어 지금도 잘살고 있는 이유를 부계적 분배양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무튼 왕권의 독주를 견제하고 백성의 권익을 대변한 선비문화와 서구적 가치가 충돌함에 따라 제대로 된 변화를 이루기 위한 쇄국정책과 일제에 대항한 사실 등도 식민사관은 폄하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유교가 공고화된 조선 중기부터 일부 지배층의 탐욕과 당쟁으로 인한 피해가 백성들의 원성을 사게 된 것과 조선 말기에 탐관오리의 횡포가 있었던 사실 등은 일부분일 뿐 전체가 타락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일제는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마치 전 국민의 도덕성이 무너지고 부패가 만연한 국가처럼 침소봉대하여, 정치지도자와 민중을 서로 원망하도록 이간질하였습니다. 그리고 지역갈등을 조장하고 홍보함에 따라 ‘홍익인간’ 한민족의 연대성이 단절되면서 서로 원망하는 과정을 겪게 되었습니다.
또한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이상으로 삼은 선비들은 정직성과 도덕성을 갖춘 지식인으로서, 백성과 의사소통이 원활함에 따라 관료나, 정치지도자가 되었을 때 중앙과 지방이 균형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기치인’(修己治人)하기를 격려하며 민본주의적 리더십으로 인간관계가 이루어졌던 사실 등을 식민사관은 간과하고 있습니다. 특히 선비문화에 의해 남녀의 조화를 통한 균형을 이룰 수 있었지만, 일제의 사이비 자본주의와 50년 정도 정치지도자가 없는 사회가 되면서 여성이 가장 큰 피해자가 되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모성은 후손을 위해 많은 희생을 감수했습니다. 이것이 한민족의 정체성으로 모성(여성)을 존경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조선 말기 전통 가치와 서구적 가치의 충돌로 인하여 안팎으로 곤경에 처해있을 당시, 일본에서는 제2차 산업혁명으로 진입하던 서구열강으로부터 무시당하면서까지 제국주의 악습을 익히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일본이 1876년 무력으로 불평등 조약을 강제한 강화조약으로 인해 조선은 반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이어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일제가 승리함에 따라 조선은 1910년 한일합방에 의한 식민지로 공식화되었습니다. 즉 태고로부터 모계 신본주의 사회의 정통성을 이은 12한국을 이은 삼조선이 멸망한 후, 삼국으로 위축은 되었지만, 한 번도 나라를 잃은 적이 없는 한민족이 일본제국주의에 의해서 멸망했습니다. 하여 모계 신본주의 사회를 이끌면서 존경을 받던 한민족 여성은 최악의 혹독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동양에서는 서구적 가치로써 자본주의를 두고, 중용, 조화, 안정과 배치되는 극단적 사조로 규정하여 방어적이었던 반면, 일본은 서구의 입헌군주제를 모방하여 1889년 ‘대일본제국헌법’을 만들어 자본주의를 수용한 입헌군주국으로 변모하였습니다.
물론 서구의 입헌군주제가 시민혁명의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체험하지 못한 상태에서 성립한 일본식 입헌군주제는 태생적으로 문제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국의 백성조차 사무라이문화로 1,000년에 걸친 억압의 풍토는 공고화되어 있음에 따라 서구제국주의를 쉽게 모방할 수 있었습니다.
하여 일제는 동양에서 자본주의를 가르치는 선진국처럼, 우쭐거리며 제국주의를 펼쳐, 동양의 각 나라를 주변국을 식민화하거나, 수직적인 관계를 형성코자 한, 무모하기 짝이 없는 짓을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국의 3백만 이상의 군인과 민간인이 죽었을 뿐만 아니라, 2천만 명 내외의 중국인과 인도네시아에서 2백만 명, 베트남에서 2백만 명, 필립핀에서도 1백만 명 이상의 인명이 살상된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더불어 한국은 36년간 식민통치로 인하여 한민족 정체성의 훼손과 가혹함으로 인한 인간성 황폐화와 정신질환의 유발, 수탈로 재기불능의 경제 상태 등 정신적, 경제적인 천문학적 손실이 있었습니다. 하여 동양의 이웃을 비롯해 세상 사람 누구에게도 덕을 주지 못하였고, 오히려 잊지 못할 원한을 갖게 했다는 점에서 무모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서구는 일찍이 식민지에 대해서 실익이 없음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일본을 앞세워 아시아에 대해서 엄청난 실리를 취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일제는 실속도 없이 지정학적으로 함께 살아야 할 이웃 나라에 원한만 남긴 꼴이 되었다는 점이 가장 큰 손실로 두고두고 남을 것입니다.
물론 일제가 전통 한국을 식민통치한 사실은 사무라이 정신이 지배하는 섬나라로써 잠시나마 대륙 일부를 지배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을지 모르지만, 철학이 없는 경박함의 대가는 오랫동안 치러야 합니다. 이는 ‘홍익인간’ 한민족이 문화민족으로서 타민족을 해코지하지 않았으며, 인류 역사발전에 공헌한 사실과 비교함으로써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때린 놈은 오므리고 자고, 맞은 놈은 펴고 잔다는 격언과 같은 상황입니다.
또한 서구제국주의는 자본가가 자본축적을 위한 상업적 이유로 미개한 지역을 식민화하였지만, 일제는 국가가 주도하여 동일 문화권의 근원을 공격하면서 식민통치한 우매한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철학의 빈곤으로 인한 근시안적인 사고에서 비롯된 것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여 일본은 민족적 책임이라는 무거운 짐을 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제 강점으로 인하여 한민족의 정체성 붕괴로 혼란한 가운데, 인류의 위대한 유산으로써 1919년 3.1독립운동이 거국적으로 일어나게 됨에 따라 식민 노예로 만들기 위한 민족혼을 말살하는 문화정책으로 전환하였습니다.
물론 일제 강점 초기 선비와 우수한 인물로 구성된 약 12,000여 명에 달했던 애국지사는 1922년을 전후해 거의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했기 때문에 노예화를 위한 혼 빼기 작업이 가능했습니다.
즉 문화 말살 정책으로써, 찬란하고 유구한 역사를 증명했던 20여만 권에 이르는 많은 양의 각종 서적을 소각했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태고로부터 이어온 모계 신본주의를 이은 무교를 미신으로 만들어 선비와의 소통을 차단했고, 이웃 간의 연대를 파괴했습니다.
그리고 나눔을 실천하는 ‘홍익인간정신’과 진리를 탐구하는 선비정신 등을 나약한 허풍 정신으로 폄하를 했습니다. 즉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주입하기 위해, 뚜렷한 민족혼과 우수한 나눔 문화를 지닌 한민족을 천민자본주의보다 못한 사이비 자본주의로 교육하면서 분열을 획책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고조선의 국시로써 한민족의 정체성인 ‘홍익인간’을 어리석은 삶으로 각인케 하면서 노예근성을 의식화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5,000년 이상의 역사를 소각하겠다는 발상은 불가능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일개 가문이나, 대가족을 파괴하는 정도로 생각한 일제의 무모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무식이 용기’였던 셈입니다. 이는 스스로 국가의 품격을 떨어뜨리고, 세상에 해를 끼치는 민족으로 각인되게 한 결과는 후손에게 오랫동안 짐이 됨을 몰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뿐만이 아니라 1920년경 당시 한반도의 인구가 1,200만 명으로서, 1,200 만석이 필요했지만, 수요의 반인 600 만석을 목포항을 통해서 수탈해간 것을 볼 때, 민중들은 하루에 한 끼 정도 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친일 부역자가 세끼를 다 먹거나, 창고에 쌓아두고 고리대금을 하는 다수의 친일자도 있었기 때문에 민중들은 초근목피로 생명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대다수 농민이 농토를 헐값에 넘기고, 유리걸식하거나 소작농으로 전락하였던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000년 전의 불확실한 사건 등을 들추어 각색하거나, 온갖 방법으로 감정을 조장하여 지역 간, 이웃 간, 상하 간, 서로가 원망하는 등의 이간질을 쉽게 구조화할 수 있었습니다.
즉 일제는 불신과 원망으로 갈기갈기 찢어 만신창이가 되도록 홍익인간에게 저주를 심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일제는 오래전 사회통합을 완성한 한민족을 불확실한 과거에 집착케 하여 서로 원수가 되는 모래알 민족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따라서 일제 수탈과 착취로 인한 기아의 공포가 만연한 상황과 함께 철권통치로 인권은 생각할 수도 없었으며, 내면세계 또한 몰락하여 인간성 황폐화로 모든 것이 끝난 상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홍익인간’ 한민족은 유구한 역사에 비해 허물이 작음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사소한 역사적 사건을 침소봉대하여 노예화를 추진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일제가 사무라이 칼 문화를 근간으로 하는 섬나라로써 역사적 경험의 일천 함과 인문학적 역량의 부족으로 인하여 입체적 고찰을 하지 못한 경박함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이 순환 진보를 하면서 완성도를 높여가는 영적 존재임을 체험하지 못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국가상호간의 경우 이웃 나라에 부당함을 강제한 것에 대한 대가를 언젠가 치러야 했던 역사적 경험이 일천 했기 때문입니다.
일제의 철권통치로 인한 참혹한 생활을 겪게 됨에 따라 ‘안의 문화’의 주인공인 모성은 생지옥과 같은 생활로 과거보다 몇 배의 고통을 겪으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즉 동물의 세계에서 먹이사슬의 말단 존재처럼, 여성이 양육과 가사노동뿐만 아니라, 사회노동까지 담당했습니다. 하여 이중삼중으로 중첩된 모성의 고통은 오랫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일제 치하에서 여성들이 당한 고통을 너무나 뼈에 사무치게 경험된 결과, ‘딸을 낳으면 부모가 세번 운다’는 정서가 형성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예가 제2차 세계대전 중 ‘태평양전쟁 일제 강제군 위안부’라 하는 일명 ‘정신대’를 20만 명 이상을 강제로 차출하여 끔찍한 인권유린을 하였던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징병과 징용을 70만 명 이상의 청장년을 강제 동원하여 배고품과 죽음으로 몰고 갔던 것을 당시의 1,200만 명 정도의 인구수를 고려해볼 때, 인종청소나 다름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동일 문화권에 있으면서 문명을 선린우호로 교류했던 이웃 나라 조선에게 제3세계의 나라들이 겪었던 서구 식민통치보다 더 참담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홍익인간’ 한민족은 일본에 대해서 착취를 하거나, 원한을 살만한 사실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작은 잘못을 침소봉대하여 적개심을 고취하였습니다. 즉 한반도를 정복해야 한다는 ‘정한론’이 일제의 신념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한 사람의 사악한 지식인이 만들어 낸 허구를 굳게 믿었습니다. 무지하고 경박한 가짜 애국자가 악의 축이었던 셈입니다. 이는 한민족 문치주의 문화와 일본의 사무라이 문화가 배치됨에 따라 소통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일까요?
이로 인해 한민족은 복수심에 불타는 정한론의 신념을 믿는 어리석은 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함에 따라 일본을 경계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한반도는 오래전부터 왜구의 약탈과 침략이 빈번하여 왜구를 소위 왜인(작은 사람, 소인배)이라 하여 무시하며 경멸한 것도 사실이지만, 한민족이 일본을 약탈한 일이 없습니다.
아무튼 일제는 한반도를 포로수용소처럼, 헌병 통치하면서 온갖 비열한 술수와 과학적 근거를 내세운 진화론적 우생학 등으로 인종차별과 식민지를 합리화하여 양심을 포장한 사실은 성악설을 입증한 사례로 인류 문화사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두려워할 줄 모르는 야만 종족처럼, 인간임을 포기한 온갖 악행을 저지른 것을 자랑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치심(부끄러운 마음)이나 양심이 없는 천인공노할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아웃 나라의 땅을 빼앗기 위한 일제의 인종 말살 정책으로 승리자가 전개한, 우수한 자만이 살아남아야 한다는 우생학, 적자생존 논리, 약육강식의 합리화 등과 폭력, 독선, 위선과 거만함 등에 의해 저질러진 안하무인의 경박함을 국가가 주도하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오늘날 첨단 과학기술 시대에 밝혀지고 있는 초과학적 현상으로 이해되고 있는 인간이 영적 존재임을 이해했다면, 인류가 존재하는 한 악마로 기억되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혹독한 일제 식민통치를 받게 된 것은 조선 중기에 유교가 공고화되면서 모성의 지위 급락으로 인해 형성된 구심력의 훼손으로 인한 국력 약화의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서구는 근대사회가 성립되면서 여성의 지위가 획기적으로 변함과 동시에 국력이 강력하게 되었지만, 전통 한국은 서구와 반대로 조선 중기 임진왜란 이후부터 여성의 지위가 급락했던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남녀의 조화를 중시한 ‘홍익인간’ 한민족의 유구한 전통문화인 ‘안의 문화’가 조선 중기에 약화 됨에 따라 유발된 갈등으로 국력이 감소 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는 수천 년 동안 한민족사회를 안정시켰던, 마고 시대부터 모성을 가족의 태양으로 존중하였던, ‘안의 문화’가 일제에 의한 퇴출로 인해 가정폭력이 증대하게 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일제가 가족 간의 분열과 불화를 조성하기 위해, 퍼뜨린 말로써, ‘조선의 여성은 명태처럼 두들겨야 부드러워진다. ‘라고 한 사실은 참고가 될 것입니다. 이는 해방 후에도 일제의 더러운 찌꺼기로 남아, 때로는 남녀상호간에 적개심을 품거나, 성폭력이 난무하고, 성도덕의 문란과 성추행, 폭력 등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는 식민지를 당한 대다수 나라의 경우, 대다수 여성이 가부장의 폭력에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일제는 전통적 가치를 존중한 것처럼, 전통적인 대가족제를 권고한 것은 왕권을 장악한 후 전체 백성을 노예화할 수 있었던 것처럼, 연좌제로 헌병통치를 원활하게 하도록 하려는 방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일제 헌병통치에서 민중을 포로나 패잔병처럼 대우함에 따라 유발되는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대가족에게 연대책임을 부과하기 위한 수단이 연좌제였습니다. 물론 일제가 핵가족으로 발전케 하는 자본주의를 역행하는 대가족제도를 권장한 것은, 집단이기주의로 대립과 분열이 일어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하여 일제의 대가족제도 권장은 남녀갈등과 세대 갈등을 부추겨 독립운동의 생성을 근본적으로 억제를 위한 방편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일제는 고대 중국에서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이라 한 고조선을 전후한 유구한 역사와 함께 만들어진 전통적 가치를 역사 왜곡 등 온갖 방법으로 무시하면서, 한민족 소멸을 바랐습니다. 즉 서구의 제국주의가 자본축적을 위한 식민지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미개 종족에게 행했던 것과 달리,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일군 문화민족을 영원한 노예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일제에 의해 노예근성을 배양하는 노예화의 과정을 겪으면서, 노예처럼 변모한 한민족은 자신들의 정체성인 ‘홍익인간’ ‘선비사상’ 등 전통적 가치를 스스로 부정하게끔 되었습니다. 즉 일제에 의해 유구한 역사를 가진 ‘홍익인간’ 한민족이 무너진 다음, 일제가 멸망의 원인을 식민사관으로 합리화한 결과입니다.
이는 수탈로 인한 기아와 빈곤으로 인해 아무것도 믿지 않는 타율적, 냉소적 인간형으로 변모하게 된 이유입니다. 이는 방향을 설정하고 감독하는 정치가 없는 일방적 지시와 관리만 있는 식민통치사회에서 노예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환경이 인간성을 변질케 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동고동락을 같이한 역사공동체에 대한 부정, 공중도덕의 실종, 출세주의, 기회주의 등이 만연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일제가 수천 년간 일구어온 땅을 빼앗고, 초과생산을 강제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자신들이 일군 땅에서 만들어진 포로수용소에서 축생의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여 일제 당시 나부터 먼저 살고 보자는 ‘아생연후’라는 신조어가 일반화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노예 정서는 해방 후에도 잔재하였습니다.
한편 이러한 참담한 상황에서 한민족여인은, 시종일관 나보다 가족을 위한 삶을 수행처럼 생각했습니다. 즉 혹독한 삶을 살면서도, 매일 새벽 장독대 한 모퉁이에 정한 수 한 그릇을 떠 놓고 ‘천지신명’(天地神明)과 조상에게 지극정성으로 가족의 행복한 인생을 기원하였습니다.
이처럼 고대로부터 끊임없이 아름다운 마음의 씨를 뿌리고, 가꾸었던 주인공이 모성이었음을 상기해 볼 때, 한민족이 만든 국가는 여성들의 마음씨(여성성)를 근간으로 이루어진 나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아내가 가정의 태양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안의 문화’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여 한민족 여성의 마음씨가 우리들의 구심력으로써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기층민들의 한민족 고유의 토착 신앙을 근간으로 하여 성립한 동학이 사람을 하느님이라 하였으며, 양성평등을 교리로 한 사실과 고대 한국에서 신부의 나이가 신랑보다 위인 경우가 많았던 사실 등에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고의 유시인 ‘해혹복본’(解惑複本)을 구체화한 ‘홍익인간’ 사상이 동학의 교리로 이어지고 있음을 볼 때, 모계 신본주의의 맥을 일관성 있게 이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모성의 새벽기도로 조용한 아침을 열면서 자신이 출산 양육한 자녀가 ‘홍익인간’으로 살아가길 염원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서구에서 여성이 소외되어 있었던 것처럼, 조선 중기 여성도 양육, 가사, 농사일 등으로 험한 삶을 살았습니다. 즉 동서양의 여성들은 사회적 미덕이라는 미명에서 매우 힘든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한민족 여성의 경우 일제 식민기간 동안 세상을 살면서 생지옥을 경험하였습니다. 따라서 일제가 모계 신본주의 유습을 이어온 한민족 여성에게 세상에서 가장 참혹한 삶을 가져다준 가해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제가 전쟁도 없이 국가채무 등을 빌미로 왕조를 축출하여 식민통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백성이 선량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백성을 하늘로 설정한 민본주의를 이해하지 못한 일제의 무지함의 결과입니다. 즉 폭력적인 사무라이는 안빈낙도(安貧樂道)와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삶을 살았던 선비문화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무라이는 농업에서 요구되는 자연 친화적 정직성과 성실함을 나약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하여 일제는 서구의 농노제와 달리 일찍이 농업을 국가의 근본으로 보아 ‘농자천하지대본’라는 구호를 무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튼 조선은 농민에게 사적자치를 허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소유권 충돌이 별로 없었던 사실 등에서 대우를 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여 ‘사농공상’의 가치체계를 유지한 전통 한국은 자본투자의 이식으로 얻는 불로소득을 정당화하는 자본주의를 정서적으로 수용하기 어려웠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탐욕을 배양하여 상극의 삶을 살게 하는 자본주의와 상생의 삶을 인생의 궁극적 목적으로 하는 ‘홍익인간주의’와는 물과 기름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소유권의 절대성을 근간으로 ‘소유의 삶’을 인생의 궁극적 목적으로 하는 자본주의는 ‘존재의 삶’을 중시하는 한민족의 정서와 배치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당시 전통 한국에서는 서구제국주의를 부정적으로 보았습니다.
이는 서구가 식민개척을 하면서 먼저 본 자가 임자로서 기득권을 문서화 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나플레옹 당시의 민법이론으로서 주인이 없는 것은 먼저 차지한 자가 임자라는 의미인 ‘무주물 선점’(無主物 選點)입니다.
하여 나름대로 만들어진 전통적인 생활양식을 부정하여 자신들이 만든 일방적 논리로 강탈할 수 있었습니다. 즉 식민지역의 원주민들은 선조가 일군 땅으로 생각함에 따라 본질적으로 땅을 공유한다는 전제하에 추장이나 권력자가 분배한 것을, 서구는 세상을 창조한 유일신의 것으로 전제하면서 자신들의 방식에 의해 일방적으로 처분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들이 오랫동안 뿌리를 내리고 있음에 따라 서양인들을 이방인으로서 생각했지만 피해는 막대했습니다. 패전으로 빼앗기지 않는 한 자신들의 것이라 믿었던 원주민은 지금도 빈곤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식민지 나름대로 문화를 갖고, 수천 년을 기독교와 상관없이 살아온 지역을 일방적으로 기독교를 믿을 것을 강제하며, 믿지 않으면 악마라고 하며 매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일방적으로 만든 법으로 처분하거나, 간단한 선물로써 소유권을 취득하였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합법화하여 수탈하거나 지켜지지 않을 때는 군사력, 실력행사, 폭력 등으로 강제하였습니다. 이처럼 당시 식민지 사람들은 가치체계가 각각 다르며, 자신들과 역사적 연관성도 없으며, 기여한 바도 없음에 따라 연고권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 결과는 힘든 삶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오늘날 제3세계가 이러한 행위들은 무효임에 따라 배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입니다. 하여 개종을 명분으로 식민통치를 받은 사람들이 오늘날까지 혼란과 빈곤한 삶을 살고 있음에 따라 당시 전통 한국이 서구적 가치를 부정한 것은 옳은 판단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홍익인간과 제국주의는 어울리지 않다는 뜻입니다. 물론 민주주의와 홍익인간은 적합합니다.
제국주의의 발원지인 서구에서조차 자국민의 항구성과 명예를 위해 금기시했던, 토지강탈이라는 수탈적 악성 자본주의를 일제는 실현하였습니다. 즉 총독의 지시로 1909년 ‘동양척칙주식회사’를 설립하여 합법을 가장한 수탈의 예로써, 농민에게 연리 4할 4푼 복리를 기본으로 악성 고리사채업자 수법과 같은 악랄한 여러 방식을 통해서 소유권을 강탈한 것입니다.
또한 친일자들에게는 합법적 소유권을 주어 일제의 수탈을 돕는 앞잡이로 활용한 정보라인을 잘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즉 일제의 호의로 착각을 일으킬 만큼, 용의주도하게 소유현황을 ‘동양척칙주식회사’를 통해 파악한 후 수탈을 본격화한 것입니다.
하여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는 한민족사회는 상호 간에 신뢰를 근간으로 하는 안정된 사회로써 문서 없이 말로 한 약속이라도 지켜진 신용사회임에 따라 일제가 앞잡이의 정보를 통해서 토지와 재산을 쉽게 수탈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조선이 중앙집권제 국가면서도, 변치 않는 지역의 고유한 문화와 지방호족을 존중한 사회였기 때문에, 수탈이 쉽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한민족의 정체성으로서 ‘홍익인간’의 삶을 수천 년에 걸쳐 뿌리내린 토착민의 오랜 전통으로 성립된 불문법적인 향약 등 자치 규범이 있는 안정된 사회로써 일제의 계략을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즉 상호부조를 하며 살았던 까닭에 토지소유권을 문서화할 이유가 별로 없었던 신의성실이 지켜진 사회였습니다.
아무튼 일제는 인류 최초의 모계 대연합체를 만들어 인류의 문명을 연 고대한국(12한국, 단국)이나, 고조선 등은 후일 고대 중국이 BC 2세기 통일되기 전, 세상의 유일한 대국이었음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대륙의 역사에서 수천 년에 걸쳐 중심적인 역할을 한 사실을 상상도 할 수 없음에 따라 허구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대륙을 경영한 경험이 없는 일본이 서구제국주의를 학습하여 조선과 중국을 침공하고 승리하면서 동양의 역사나, 가치관을 무시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한민족의 역사가 대륙역사임에 따라 인류 역사발전의 중심축으로 역할을 한 사실을 섬나라 일본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일제는 한민족의 위대한 역사를 말하는 조선인들은 거짓말을 많이 하는 민족으로 매도하여 실재하는 고조선의 역사조차도 전설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후 일제의 탐욕을 알고부터 사람들은 찬란했던 상고사나, 진실을 말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일제가 믿지 않은 기독교 교리를 이용해서 한민족의 위대한 선조였던 단군성조를 숭배한 것을 우상숭배로 매도하여 ‘홍익인간’ 한민족의 정체성을 파괴하였습니다.
그리고 모계 종교의 원형인 무교를 무속으로, 미신으로 몰았습니다. 이는 한민족의 정체성이면서 민중의 카다르시스를 풀어주었던 유일한 군중 집회인 동제 굿판에서 독립운동의 기운을 갖게 된 사실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하여 한민족이 본래 욕설과 거짓말을 할 줄 모르고,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사회구조로써 어떠한 면에서는 지나치다고 할 만큼, 도덕적인 사회였기 때문에 먹힌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집안 단속을 잘한 도덕 국가였기 때문에 오히려 나쁜 마음만 먹는다면 수탈하기 쉬운 사회인 것입니다.
전통 한국은 오염이 없는 청정지역임으로, 면역력이 없는 사회였습니다. 따라서 일제는 ‘홍익인간’ 한민족으로서 고유한 문화를 갖고 면면히 이어온 사실을 식민사관으로 부정하고, 거짓말쟁이로 폄하하고 불성실한 사람들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일제는 포악한 헌병통치를 하여, 한민족을 이중적인 태도로 살게끔 만들어 놓고, 거짓말쟁이로 몰아붙인 것입니다. 이는 홍익인간 한민족을 노예로 부리고 싶은 사악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여 일제는 한민족을 노예근성이 있는 질 나쁜 민족처럼 각색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일제의 말을 그대로 믿고 앵무새처럼, 전달하는 무지한 민중이 스스로 ‘엽전은 안돼’라고 비하한 것이 오늘날까지 회자가 되고 있음을 볼 때, 일제가 영구지배를 위한 전략이 얼마나 철저하고 지독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인류의 문명을 연 모계 신본주의 사회를 이어 말기모계사회였던 12한국을 이은 고조선을 단군왕검(檀君王儉)이 창업하였습니다. 즉 동이족이 먼저 체험한 모계 하나님의 ‘해혹복본’의 유시를 이은 고조선이 국시로써 ‘홍익인간 제세이화’라고 천명하며 성립한 것입니다.
이는 부계사회의 등장으로 인한 모계 원형종교의 변화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고조선 이전 40대 이상에 이르는 여러 단군이 계승되었다고 하는 고서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여 고조선은 단군이라는 제사장 호칭으로부터 마고를 숭배한 종교 국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오늘날 여러 고고학적 자료로 단군은 실존 인물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하여 인류에게 여신으로만 알려진 비범했던 여제사장을 이해하거나, 유일신 종교원형을 이해할 수 있는 태고의 모계 신본주의의 사회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국가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식민사관에서는 한민족을 이룬 단군성조를 전설의 인물로 부정했지만, 실존했던 고조선까지는 부정할 수 없음에 따라 오늘날에는 모계 유일신 종교의 대제사장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민족의 무형문화재인 토속신앙에서 마고 할매, 삼신 할매(할머니)와 함께 단군할배(할아버지) 등으로 나타나지만, 사실은 위대한 제사장으로 단군들은 해혹복본 사상을 구체화한 인류의 스승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미 조상신으로 숭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실존의 여부에 대해서 의심하게 된 것은 일제 식민사관이나, 서구의 세련된 관념적인 신관이나, 서구의 우수한 과학기술문명의 영향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한민족은 태몽이나, 신생아의 몽고반점이나, 여러 종류 등의 실제 체험을 통해 마고 삼신을 인식하고 있으며, 비범했던 조상을 신으로 숭배한 실증주의적인 신관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서구와 다릅니다.
하지만 천지인 삼신을 믿은 고조선은 고대 중국이 통일되기 수천 년 전부터 동양의 대국이었음에도, 진시황(BC247-BC210)에 의해 멸망하였습니다. 즉 고조선은 모계 신본주의 사회의 유습을 이은 종교 국가로서 방어적임에 따라 중앙집권적인 부계주의에 의해서 몰락한 것입니다. 이처럼 뿌리 깊은 역사를 갖고 인류에 공헌한 ‘홍익인간’ 한민족을 일제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태고의 모계 신본주의 사회의 유습을 이었다고 볼 수 있는 전통 한국의 무교는 한민족의 토속종교이며, 전통문화로써 생활화되어 조직화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아울러 비록 태고의 것이라 할지라도, 각색되지 않은 원형종교로서 완벽함에도, 미신으로 폄하를 하였습니다.
하여 세력을 만들 수 있는 결사의 유일한 방편이었던 무교 제의를 방해하여 자율성의 근원이 되는 민족혼의 파괴로 노예근성을 공고히 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태고로부터 이어지는 모든 종교가 비과학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탈을 위한 책략이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무교가 순환 진보라는 곡선적인 시간개념을 갖고 있음에 따라 무교 제의로 만들어지는 결사의 경우, 일제가 감당할 수 없음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하여 전통 가치를 낡은 것으로 간주하여 파괴를 시도한 것은 수탈을 위한 명분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문화적 존재로서 인간의 삶은 불가지의 비합리적인 부분을 빠트리고는 인간을 절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는 점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것만 옳다고 합리화하면서 공격적이고 배타적인 삶을 통해 조금은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경이로운 소우주 인간이 대우주와 연동되어 순환되고 있다고 믿은 모계 신본주의의 ‘해혹복본’의 신념이 옳다는 사실을 첨단 과학기술 시대를 통해 긍정하게 되었습니다. 하여 일제는 소탐대실의 우를 범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튼 제정일치의 마고 시대는 ‘나눔의 실천’이 일상화된, 나눔을 교리로 한 단순한 종교사회였습니다. 물론 단순한 교리였다고 미개한 신앙으로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오늘날과 같이 매우 분주한 사회에서 적합한 종교입니다. 이는 마고 신앙이 나눔(사랑, 박애)을 실천하는 단순한 신앙이었지만, 진리임을 확신하여 실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계 우월종교는 사후 문제에 비중을 두었던 반면, 시간의 끝을 살아가는 인간이 새로운 세계의 시간에서 살기 위한 준비를 한다고 생각하여 나눔을 중시한 것 자체가 인간의 종교적 심성과 어울리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현실에서 실천하지 않는 진리는 진리가 아니라는 말로 끝맺습니다. 이는 오늘날 복잡하고 거대하게 발전한 기성종교의 관념적인 교리가 번듯하지만, 실천이 빈약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수천 년을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 살았던 한민족은 일제가 의도한 데로 만들어진 식민사관에 의해 무능한 민족으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일제가 지역 간, 지도자와 민중이 서로 원망하는 이간질로 대립하게 하는 등으로 조장함에 따라 서로 미워하며 불신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이는 한민족이 모계 신본주의의 1만 년의 역사를 갖고, 단군성조로부터 시작된 5,000여 년간 ‘홍익인간’으로 살아온 역사를 부정하는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즉 별로 의미 없는 조그마한 사건을 두고, 식민사관으로 침소봉대하고, 폄하를 하면서 미개한 야만 종족처럼 부각한 것입니다.
한민족은 삼국통일로 성씨가 흩어 진지가 오래되어 사회통합을 이룬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천년을 지난 삼국을 들먹이며 분열을 획책한 결과가 오늘날 지역감정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제는 민족성이 더러워 조선이 망했다고 설파하였습니다. 이는 민중이 상호 간에 원망하는 가운데 패배 의식이 공고화되기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즉 일제가 삼한 통합을 이룬지 1,500년이라는 세월에서 융화되어 사라진 것을 마치 현재 있는 것처럼, 역사 퇴보케 하도록 끄집어내어 지역감정을 조장한 결과입니다. 하여 일제는 지도자와 민중, 남녀노소의 갈등, 과거에 발목을 잡히게 하는 등 분열과 불신을 조장하여 모래알 민중으로 만들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모래알 같은 민족이었다면, 단군의 역사와 한민족은 중국에 흡수되어 소멸이 되었을 것입니다. 즉 3.1독립운동이나, 2002년 월드컵에서 나타났듯이 본래 찰떡같이 잘 뭉치면서, 선의의 경쟁을 하는 다이나믹한 민족입니다. 이는 삼 조선에서도 지역 간 경쟁을 하여 이루어진 힘으로 한민족을 유지한 사실을 통해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제는 한민족을 두고, 개인은 우수해도 사회협동을 할 수 없는 민족으로 낙인을 찍어 식민통치를 정당화하였습니다. 즉 일제는 모계 신본주의 사회의 중심역할을 하며 대륙의 역사발전을 이끌었던 동이족은 모계 하나님을 숭배한 민족임을 몰랐습니다.
하여 마고를 숭배한 여러 부족과 동이족이 중심이 된 고조선을 신화로 설정하여 왜곡한 식민사관은 무지의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일본은 대륙을 경영해본 일이 없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일제는 반만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홍익인간’ 한민족을 자국의 막부 정도로 착각하여 몇십 년 정도로 멸망케 할 수 있다고 믿은 무지한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일본이 전통적으로 자신들의 백성에게 칼(무력)로 억압했던 것처럼, 일제에 의해 주도된 사이비 자본주의로 천민화, 노예화하기 위해 일제 식민통치를 거부하는 지주를 소작농으로 전락시키면 되는 줄 착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헌병과 경찰의 비호 아래 노사 간 계약 등을 불공정하고 불평등한 봉건적 주종관계 계약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제가 전통 한국의 문명화를 돕는다고 자화자찬하며 세계만방에 홍보한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어떤 사람들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오늘날에도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지배했다는 사실을 두고 자부심을 느끼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인간의 기본인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는 뜻입니다.
아무튼 선진자본주의국가의 경우, 자본가가 착취의 주체였던 반면, 일제는 국가가 직접 수탈을 주도함으로써 권력자나 몇 사람은 이익을 보았을지 모르지만, 국민에게 엄청난 피해를 유산으로 남겼습니다.
즉 세상 사람들이 나쁜 일제로 기억함에 따라 언제나 일본 국민의 부담으로 남게 된 것입니다. 이는 제국주의시대 식민지에서 자본가의 착취는 오늘날에도 나쁜 이미지로 남겨져 있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더하여 서구와 달리 국가가 직접 수탈을 주도한 일제는 세상 사람들에게 나쁜 이미지로 남아 있습니다.
물론 수탈로 이룬 자본축적으로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지만, 역사발전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궁극적인 삶의 목표와 배치되는 번영은 추락하게 됨을 몰랐을 것입니다. 이는 인류가 선함을 지향하며, 비록 시행착오의 과정을 겪지만, 역사발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제는 주식회사를 허가제로 하여 민족자본의 축적을 막았습니다. 예를 들어 자급자족의 생활이 가능했던 농촌의 경우, 자신들의 상품을 팔기 위해 농촌의 물레를 부수고, 면화 밭을 파괴하여 원천적으로 원사를 조달할 수 없게 만들었으며, 최악의 노동조건으로 만든 원단을 구매토록 강제한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분야에 걸쳐 수탈 방식을 동원함에 따라 세계 최악의 식민지로 파탄하였으며, 5,000년 역사를 통해 유래를 찾을 수 없는 가혹한 삶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남자들의 경우 폭력과 모멸로 사람이기를 포기하도록 강요당한 결과, 유발된 외상 후 스트레스로 인하여 남성들의 폭력과 폭언이 여성에게 그대로 전가됨에 따라 여성들은 이중적인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구한말까지 기층민의 삶의 일부로써 활성화되어 있었던 무교는 배타적이지 않음에 따라 부계 우월적인 외래종교와 병행하였으며, 민중은 굿을 통해 위로를 받았습니다. 하여 사회협동을 이루는 원동력임을 알게 된 일제가 무당을 다시는 회복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한민족사회가 부계사회로 변모한 후에도 무교의 여제사장을 중심으로 여성들 나름대로 비밀정보 조직처럼 유지 존속되었고, 국가적인 제사나 행사, 동제, 제사 등 각종 행사나 제사를 통해서 군중 집회나 여론을 형성함에 따라 일제가 가장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일제가 기독교 논리를 적용해서 전통 한국의 무교를 미신으로 폄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종교인 신교를 미신으로 폄하를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율배반적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일제가 국교인 신교(神敎)에 신사참배를 유지하면서 기독교 신자가 거의 없다는 사실에서도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최근까지도 일본은 기독교인이 거의 없습니다. 하여 한민족의 구심력을 이루었던 모성들의 공식적인 집회로써, 여제사장들이 주도하는 제의로써 굿을 원천봉쇄하여 독립운동을 불가능하게 하려는 의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노사관계도 마치 서구 절대 봉건제의 농노처럼 주종관계로 있었으며, 죽기를 바라는 열악한 환경에서 저임금으로 연명한 노예와 같은 상태였습니다. 이처럼 혹독한 환경은 수천 년을 서로 의지하고 믿었던 ‘홍익인간’ 한민족의 연대성은 하루아침에 붕괴가 되게 했습니다.
그리고 일제의 분열책인 이간질로 유발되는 악의에 찬 경쟁을 통해 자본축적을 하였습니다. 하여 혹독한 착취로 유발되는 노동력의 상실로 인한 노동자의 빠른 교체를 유도한 전대미문의 가혹한 사회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수탈로 인한 기아의 공포는 사람을 비굴하게 만들었고, 심지어 양심까지 저버리고 살아야 하는 자체가 ‘홍익인간’에게 치욕적인 삶이었습니다. 이러한 일제의 헌병통치로 인한 굴욕감은 남녀갈등을 심화케 하여 여성에 대한 폭력이 일상화되는 원인이 되었고, 해방 후에도 여성과 노동자를 폄하하고, 격렬한 노사관계의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전통 한국은 성실성이 요구되는 농업사회로써 노동을 중시했지만, 일제가 노동을 경시한 결과입니다. 이처럼 일제 헌병통치는 한민족이 수천 년에 걸쳐 이룩한 안정된 체계를 무너지게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일제의 탄압과 공작은 한민족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케 하는 식민사관으로부터 시작해서, 원망과 증오를 유발케 하는 이간질 책동을 통해 민중을 모래알과 같이, 자포자기의 무력한 상태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이는 마치 성악설에 근거한 인종청소처럼, 600만 명 이상의 유태인을 학살한 나치의 공포보다 장기적이고, 심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일제의 치안유지법의 ‘예방구금제’는 자신들의 폭압에 대해 저항할 수 없게 했으며, 독립운동을 하는 애국지사들은 범법 사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체포나 구금, 고문 등을 할 수 있었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횡령, 강도, 도둑 등 파렴치범으로도 날조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오늘날까지 보안법 자체를 불신하는 이유입니다. 즉 오늘날 남북대치로 인하여 보안법이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치안유지법과 흡사하다고 생각함에 따라 보안법의 존폐의 가부를 두고 갈등과 논란이 일었습니다. 물론 남용한 사례가 많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여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격언처럼, 일제 망령이 의식을 지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여 일제의 영구지배 의도에 의해서 만들어진 악습의 잔재로 인하여 민주적 권위조차 무시당하거나, 사회협동을 이루는 데 어려움이 있음을 볼 때, 행정편의보다 국민편의가 우선되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혹함으로 만들어진 깊은 상처는 장애로 남아 있음에 따라 국가에 대한 원망이나 불신으로 사회통합을 이루는 데 있어서,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여 일제의 핵심 코드인 이간질, 불신, 패배주의, 노예근성, 성차별, 인간성 황폐화 등을 배양하고 뿌리를 깊게 박아놓은 것이 사회의 각 분야에 걸쳐 광범위하게 작용하고 있음에 따라 ‘홍익인간’ 한민족의 자율성이 배양되어야 일제 잔재를 극복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풍수지리학에 근거해서 한반도 전역에 걸쳐 정기를 끓어 힘을 뺀다고 하며, 쇠말뚝을 박은 것을 최근에 발견하여 제거하였음을 볼 때, 일제의 영구지배집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착하고 순한 우리 한민족이 일제의 혹독한 인간성이 만들어낸 닮은 부분이 오늘날 사회현상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일제의 망령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치 밭에서 잡초를 끓임이 없이 제거하는 것처럼, 지속적인 악성 바이러스를 제거하는 가운데, 모계주의를 근간으로 형성된 ‘홍익인간’ 한민족의 정체성에 부합되는 새로운 모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체제가 성립되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지구촌 사회가 요구하는 적극적 복지사회를 구현할 수 있는 정치경제 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서양의 시민혁명에 버금가는 갑오농민전쟁으로써, 동학란은 3.1독립운동으로 이어가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물론 3.1독립운동을 두고, 중국은 ‘홍익인간’ 한민족의 독립정신을 격찬하였으며, 세계는 한민족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는 전 세계의 식민지국 중에 제국주의에 맞서 거국적 투쟁을 한 나라는 없었을 뿐만 아니라, 민족자결주의를 실천한 유일한 나라로써 세상 사람들에게 감동과 신선한 충격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3.1독립운동은 제국주의가 실익이 없음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탈 제국주의를 준비하게 된 점에서도 의의가 크다 할 것입니다. 그리고 민중이 스스로 참여하고 주도했던 3.1독립운동은 인류의 위대한 유산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일제의 한민족 초토화 정책에서도 살아남아 산업화와 민주화, 정보화를 성공적으로 이룬 모범적인 나라가 되었습니다. 하여 오늘날 한류가 일어나는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튼 서양은 식민지개척이 실익이 없음을 알고부터, 수정자본주의로써 중화학 공업을 근간으로 하는 제2차 산업혁명을 시작할 때, 일제는 초기자본주의를 답습하는 수준에 있으면서도 불구하고, 마치 자본주의 교사처럼 행세하였습니다.
즉 동양은 제국주의의 근원이 되는 자본주의를 거부하였던 반면, 일본은 서구제국주의를 수용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상생을 중시하는 한민족의 ‘홍익인간사상’과 상극의 삶을 살게 하는 서구자본주의는 물과 기름과 같은 것입니다. 이는 전통 한국이 사농공상의 가치체계(질서)로 살아간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여 제국주의로 대륙을 지배하겠다는 대동아공영사상은 유아적 망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일제가 동양을 지배할 운명을 타고난 것처럼, 역설하였기 때문입니다. 즉 아마도 부정적인 과거 역사만 들추어내어 역사 왜곡을 하고, 이간질로 서로가 감정의 골을 깊게 만들어 분열을 조장한다면 가능할 것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하여 인간에 대한 무지와 역사적 경험의 부족이나, 각 나라 간 선린우호의 역사가 더 많았음을 의도적으로 간과하거나, 눈앞의 이익에 현혹된 경박함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무모한 발상의 결과, 태평양전쟁에서 인류 최초의 핵폭탄을 맞고 패전하였습니다.
이는 검은 것은 검고, 흰 것은 희다는 진리를 검은 것을 두고 희다고 우기며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 적반하장(賊反荷杖)의 결과입니다. 그 예로써 일제는 1945년 인류 최초로 2개의 핵폭탄이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투하됨으로써, 인간을 살상하기 위한 원폭 시험장을 감수해야 했고, 그 비참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던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동이족에서 분파된 서이족의 유대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를 근간으로 하여 만든 결과물인 핵폭탄이 유태인 600만 명의 학살과 수천만 명을 죽게 한 나치에 투하하지 않고, 일제를 응징하였다는 점입니다.
즉 세상 사람들에게 일제와 같은 어리석음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말라는 경고와 함께 반면교사로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괴롭힌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된다는 인과응보를 되새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해혹복본’의 유지를 계승한 ‘홍익인간’ 한민족은 스스로 구원을 염원하고 실천한 결과입니다.
동이족이 모계유일신을 숭배한 것은 유대교가 성립한 시기보다 수천 년을 앞서있었습니다. 그리고 유일신 신앙을 가장 먼저 인류에게 전파한 유일신의 원조로써 모계 하나님을 믿은 동이족의 후손 한민족에게 부계 유일신을 근간으로 한 기독교가 한줄기 구원의 빛으로 등장한 것은 아이러니합니다.
물론 힘 있는 미국에서 전도하는 기독교를 일제는 막을 수 없음에 따라 오히려 한민족의 의식과 뿌리 그리고 문화를 송두리째 파괴하는 기회로 생각하여 방치한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일제강점기에 기독교를 수용해야 할 만큼 다급해진 한민족은 서양 문물로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고자 함이 직접적인 이유로 볼 수 있습니다.
아울러 한민족은 태고로부터 모계 유일신으로써 하늘(하느님)을 공경한 민족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즉 한민족은 이미 유일신 신앙체계가 잠재되어 있었기 때문에 부계 유일신 종교를 빠르게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한국 여성들은 일제에 의해 세상에서 가장 혹독한 삶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계적 가치를 내재하고 있는 신약성경의 내용은 상당한 위로가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부계 유일신 종교인 기독교가 모든 종교를 부정하는 배타적인 교리는 한민족 정체성 말살정책과 부합되었습니다.
인내천사상의 천도교, 단군성조, 도교를 근간으로 하는 토속신앙이나, 전통 무교 등은 한민족이 인간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소통을 이루는 도구임에도 불구하고, 미신으로 격하되었습니다.
그리고 불교나 아시아 종교 등을 적 그리스도로 대함에 따라 5,000년 한민족 역사조차 사탄으로 부정하게 된다는 점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무교의 여제사장을 부정하는 것은 종교의 근원을 부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는 근원 자체를 부정함에 따라 사회통합에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서구가 유일신을 부정하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거치면서 형성된 인본주의는 실증주의에 의한 학문과 과학기술이 획기적으로 발달하면서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이 일어나게 된 결과, 근대 민주주의 사회가 성립할 수 있었습니다. 하여 일제가 기독교를 허용한 것은 영구지배목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계 신본주의 사회의 유습을 이은 ‘홍익인간’ 한민족은 온갖 어려움을 견뎌내면서 끝까지 살아남아 수천 년 동안 국가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강한 문화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토인비가 강한 문화가 약한 문화를 흡수하거나, 약한 문화가 강한 문화로 이행한다고 주장한 것을 상기해볼 때, 한민족의 전통문화는 합리적인 문화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여 한민족의 ‘홍익인간’ 사상은 지구촌 시대를 살아가는 신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위험한 사회를 극복할 수 있는 사상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홍익인간사상’은 많이 소유하는 것보다 ‘관계의 삶’을 살 때 행복한 인생이 됨을 깨닫게 하는 사상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여신을 숭배한 중동지역에서 이방인으로, 유목민으로서 동이족에서 분파된 서이족인 유대인이 부계 유일신을 숭배하면서부터 인간은 피조물로 변모하였습니다. 이는 여성이 출산의 도구로 전락하게 되었으며, 여성의 지위가 근대사회가 성립되기 전까지 매우 낮게 된 이유로 볼 수 있습니다.
한편 한민족 여성들은 조선 중기에 이르러 지위가 낮아지다가 일제 식민통치 기간 중 서구 여성보다 갑절의 참혹한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는 일제가 수천 년에 걸쳐 형성된 전통문화를 단절케 하여 단기간에 갑자기 전혀 다른 생활양식을 강요하였기 때문입니다.
즉 폭력과 만행, 가정폭력, 전쟁, 절대빈곤 등이 일시에 겹쳐지는 혼란기를 살면서 생지옥을 경험한 것입니다. 이는 정신병을 유발하였고, 망령으로 남아 사회통합의 걸림돌이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갈등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당시 여성들의 고통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한민족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조화로운 삶을 중시했지만, 일제 식민통치로 극단적이고, 조급함 등이 구조화되면서 상호 간 원망으로 빈정거림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이는 순환론적인 입체적 사고를 하는, 조화로운 연대성을 중시하는 한민족은 일제가 전쟁포로처럼 대우함에 따라 연대성이 분절되면서 냉정한 사회로 변모했기 때문입니다.
즉 일제로 인해 정치가 없는 삶을 살게 된 한민족은 각자가 이방인이 되어 모래알처럼, 인간관계가 극단화되는 이분법적인 관계로 변모하였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정치에 참여할 수 없는 노예로서 삶을 살았습니다. 이는 당시의 신조어였던 자신부터 살고 보자는 ‘아생연후’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홍익인간사상’은 나라가 없어진 상황에서 의미를 잃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고조선의 정통성을 이은 조선은 일제에 의해 국가가 소멸이 됨에 따라 후덕한 홍익인간사상이나 선비정신, 음양철학의 핵심인 중용의 삶 등 인문학적 가치는 구시대의 낡은 사상으로 인식한 것입니다.
하지만 부계사회의 공고화로 인한 멸시와 혹독함을 견디면서 사람을 위로하고 원망하지 않았던 전통 무교의 무당처럼, 한민족의 모성은 태고부터 오늘날까지 자손을 위해 헌신하는 아름다운 마음씨는 변치 않고 있습니다.
하여 인간의 모성애는 인류의 구심력으로, 인간의 본질로써 복지본능을 깨닫게 하는 원천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상적인 사회는 모성이 자녀 양육과 노약자를 위한 복지의 중심에서 역할을 할 수 있는 적극적 복지사회의 성립이 요구됩니다.
물론 지구촌 시대는 모성의 생태적 본질과 부합되는 적극적 복지사회가 세계화될 때 지속 가능한 사회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모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정치문화의 형성을 위한 체제가 세계화되어야 하는 과정이 남아 있습니다.
물론 오늘날 부계적 가치로 편향된 위험한 사회를 극복하기 위해 여성들이 녹색생명운동의 주체로 나서게 되었습니다. 또한 여성을 정치파트너로 인정함에 따라 새로운 모계적 분배양식의 세계화를 위한 정치문화가 형성될 것입니다.
그리고 헌법에서 보장하는 남녀평등권의 실효성을 위해서 노력을 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해 볼 때, 느리지만 역사발전이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여 민주주의 사회는 여성들이 실력을 갖추고 정연한 논리를 확보하고, 인류의 삶에 유익한 제도의 정당성을 관철하기 위한 투쟁을 한다 해도 방해나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는 오늘날 부계주의로 인한 인간성의 황폐화로 유발되는 위험한 사회를 더는 방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난날 부계주의로 인하여 피해를 보았던 여성에게 보상의 의미로 모계적 가치를 근간으로 하는 분배양식을 세계화하는 것이 합리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여 부계와 모계가 공존하는 방식의 분배양식을 성립하기 위해 여성이 권력의 반을 갖고 정부를 이끌어 갈 수 있도록, 일정한 세력을 조직화할 수 있게끔 지지하며 기다려주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물론 1948년 12월 10일 UN에 의해 채택된 ‘세계인권선언’에서 자유,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권리 등 30조에 이르는 규정으로 인류의 이상으로 모계적 분배양식인 적극적 복지사회로 한 단계 더 도약할 기틀도 마련하였습니다.
참고로 지면 관계상 ‘세계인권선언전문’만 인용합니다.
“인류사회의 모든 구성원의 고유한 존엄성과 평등하고 양여할 수 없는 권리를 승인함은 세계에 있어서의 자유, 정의와 세계평화의 기본이 되는 것으로, 인권의 무시와 경멸은 인류의 양심을 유린하는 만행을 초래하였으며,
사람이 언론과 신앙의 자유를 누리고 공포와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를 향유하는 세계의 도래는 모든 사람의 최고의 열망으로 선포되어 왔으므로, 사람이 전제와 탄압에 대항하는 최후의 수단으로 반란을 일으키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인권이 법률에 정한 바에 의하여 보존되어야 함이 절대 긴요함으로,
제국민간에 우호 관계의 발전을 촉진시킴이 절대 긴요하므로, 국제연합의 제 국민은 이 헌장에서 기본적인 인권과 인신의 존엄성과 가치와 남녀동등권에 대한 신념을 재확인하였으며 또한 광대한 자유 안에서 사회를 향상시키고 일층 높은 생활수준을 가져오도록 노력하기로 결의한 바 있으므로,
가맹국은 국제연합과 협력하여 인권과 기본 자유에 대해 세계적인 존경의 신념을 촉진시키고 이를 준수하도록 노력하기로 서약한 바 있으므로, 이러한 권리와 자유에 대한 공통적인 이해는 이 서약을 충실히 이행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므로,
이제 국제연합총회는 모든 사람과 모든 국가가 도달하여야 할 공통된 목표로써 이 인권선언을 항상 염두에 두고 이 권리와 자유에 대한 존경의 뜻을 깊게 하도록 교육하여 국가적 또는 국제적으로 점진적인 방법으로써 가맹국 자신의 국민들과 통치하에 있는 국민으로 하여금 이 권리와 자유를 보편적으로 또 충실히 인식하고 준수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처럼 ‘세계인권선언’은 지난날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반성과 아울러 피해를 보상하고자 하는 굳은 의지가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모계적 가치를 근간으로 하는 새로운 정치로 남녀평등과 더불어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물질적 기초까지 보장하는 ‘모민주의’의 적극적 복지사회의 성립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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