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모계사회를 통해 모계적 가치를 알아볼까요.

Ⅰ. 모계사회

 

대지의 저자 펄벅(Pearl Buck: 1982-1973)여사는 인류의 반인 여성들이 남녀차별로 인한 불행한 인생을 산다는 것은 인류 전체가 불행한 일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물론 오랫동안 부계적 가치가 인류의 의식을 지배한 결과일 것입니다. 이는 베벨의 글에서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성이 그릇된 윤리나 교육을 강요받아 왔고 동시에 자유도 제한을 받아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더 큰 이유는 수 세기 동안 이어온 억압적 상황을 진리처럼 받아 드리도록 강조하는 우리의 현실 자체에 있다. 여성들이 요즘에도 자신들이 부당한 지위를 당연시 하면서 그대로 받아 드리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⑴ (아우구스트 베벨, 이순예역, 여성론, 까치 1987, p15)

그리고 베벨경은 “여성은 노예의 일에 종사한 최초의 인간이었다. 즉 노예제도가 존재하기 전부터 이미 노예로 존재했었다. 사회적 억압과 종속은 모두 압제자에 대한 ‘경제적 종속’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여성이 훨씬 오래전부터 이 같은 상태에 빠져있었음을 인류사회 진보의 역사가 증명한다.”라고 했습니다. ⑵ (같은 책 p16) 하여 남녀평등지수 5대 5가 되는 사회로 진보하기 위해 인류문명의 근간이 되는 수만 년간 모계사회를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할 것입니다.

 

 

제1장. 모권사회

 

1. 원시시대의 가족 형태

 

서구 인류학자의 견해에 따르면 원시시대에는 인구가 매우 적었으며, 수렵과 채취로서 생활하면서 일정한 가족의 형태가 없는 혈연공동체로써 원시공산제 생활을 하는 가운데 다산을 중시하여 일반적으로 혼교를 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즉 “모간은 오랜 연구 끝에 야만시대 초기에는 혈족단체 내부에서 성관계가 이루어졌다는 결론을 얻었다. 모든 여자가 모든 남자에게 속하는 일반적인 혼교 즉 난혼의 상태가 실제로 존재했었다고 주장한다. 그때에는 모든 남자는 다처제 속에서 모든 여자는 다부제 속에서 살았다.

모든 남녀가 서로 다 함께 하나의 커다란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으면서 자식들까지도 이 공동체에 속한 공유로 간주하였다. 스트라본(Strabon AD66년)도 아라비아 사람들은 형제가 자매들과 심지어 어머니와도 성관계를 맺었다고 보고한 바 있다. 인간이 종족을 번식시키는 첫 단계에서는 근친 상혼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성서에서처럼 최초의 남녀 한 쌍으로부터 인류가 시작되었다면 더욱 그렇다. ——

모간은 이렇듯 무차별한 일반적인 혼교의 성관계 형태 즉 자신의 ‘혈연가족’이라 명명한 형태로 이행하였음을 밝혀냈다. 여기에서는 성관계 집단이 세대 단위로 구분되었다. 즉 한 친족단체 내에서 조부모들은 서로의 공동부부가 되고, 그 자식들은 그들대로 모두의 아내이며 모두의 남편이 되었다.

그리고 그다음 자식들 또한 적령기가 되면 선친들처럼 서로 공동 집단을 이루어 성관계를 맺었다. 구성원들이 모두 무차별하게 성교를 맺었던 가장 낮은 단계의 혈족단체에서 와는 달리 ‘세대가 다른 남녀가 성관계를 맺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따라서 이후부터는 형제자매들 그리고 같은 항렬인 사촌들 사이에서만 성관계가 이루어졌다. 서로서로 형제자매이면서 동시에 남편이요 아내였던 것이다. —–

모간은 이 혈연가족에 뒤이어 보다 진화된 세 번째 단계의 가족 형태가 발생하였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푸나루나 가족’ (Punaluafamilie) 이라 명명하였다. 여기서 푸나루나란 친애하는 동료라는 뜻이다.” ⑶ (같은 책 p23-p25)

이처럼 모간의 연구 결과로 볼 때 사회조직의 구심점이 모계였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모계사회로써 인간을 재창조하는 능력이 있는 여성은 생로병사를 주관하는 위치였으며 모성이 되면 신성한 존재로 여겨 씨족의 보호와 존경을 받았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모계 유일신’을 숭배한 중기모계사회의 ‘모계 신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이 씨족사회의 제사장 겸 추장으로서 신성적인 지위였다는 사실에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인류의 근간을 이루는 모계사회를 태고로부터 시작된 모계사회를 초기모계사회로 했습니다. 그리고 수만 년에서 1만 년 사이 간빙기가 끝나고 선사시대로써 문명의 시원을 이룩한 모계사회를 중기모계사회로 했습니다. 모계 신본주의 사회로 마고(모계 유일신) 시대입니다. 그리고 신석기와 청동기시대에 걸쳐 부계사회의 등장으로 모계사회는 쇠퇴했습니다.

더불어 형성된 부족국가의 성립과 정교분리가 이루어진 사회(약 5천 년 전)까지를 말기모계사회로 구분하였음을 밝혀둡니다. 그리고 모계 신본주의 사회는 인간 스스로 대모신의 후손으로 믿었던 사회로써 모계 인본주의 사회와 같은 의미입니다.

즉 모계 신본주의는 인간을 신의 후손으로 믿으며, 후일 인간이 만물의 주체라고 한, 동양적 인본주의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상고시대 한국은 마고(삼신)로 일컬어지는 모계 유일신을 숭배한 모계 신본주의 사회였습니다.

이는 삼한시대 초기 신라 눌지왕 때 충신인 박제상(AD363-AD419)에 의해 정리한 고대 역사서인 ‘부도지’(부도지 김은수역 (주)한문화멀티미디어 2002년)에서 근거하고 있음을 밝혀둡니다. 또한 ‘부도지’의 핵심은 마고가 인간에게 당부한 ‘해혹복본’입니다. 즉 마고는 사람들이 나눔을 실천하여 본향으로 되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고 한 것입니다. 이는 종교 편에서 다시 한번 구체적으로 논변이 있을 것입니다.

또한 원시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를 서진영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많은 원시사회에서 여성들이 주술사나 제사장, 주술로 병을 고치는 의사의 역할을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여성은 영적인 세계, 천계, 초월적인 힘의 중재자였다. 이러한 역할을 하는 여성들은 높은 존경을 받았고. 부락의 일에 대해 많은 권한을 가졌다.” ⑷ (서진영, 여자는 왜? 동녘 1991. p15)

아무튼 모간은 씨족사회의 인구가 증가하지 못한 이유를 혼교로 보고 있으며, 이로 인해 푸나루나 가족으로 발달하였을 것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진화론적 인간관으로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태고의 모계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모계 신본주의 사회(중기모계사회)가 인간을 모계 유일신의 후손으로, 영적 존재로서 믿었을 뿐만 아니라, 넓은 범위에 걸쳐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던 사실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즉 불현듯 지구에 나타난 인간은 태생적으로 문화적 존재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당시에도 오늘날처럼 모계 신본주의 사회 같은 문명사회도 있었던 반면, 변방의 미개한 사회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는 서구학자들의 견해와 다른 부분으로써, 종교 편에서 다시 한번 구체적 논변이 있을 것입니다.

 

 

2. 원시사회의 모성

 

원시사회는 모권사회로써 마치 정체된 사회처럼, 수 만 년 동안 출산 양육을 중시하며 완만한 삶을 했습니다. 물론 인류가 빙하기를 거치면서 멸종의 위기도 겪었고, 여타의 환경에서 일부 종족의 경우 혼교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당시의 여성들은 출산 중에 일어났던 수많은 죽음을 통해 삶의 궁극적인 의미나 ‘생로병사’에 관한 의문과 탐구가 있었습니다. 이는 내면세계를 인식할 수 있었으며, 결과물로써 영혼불멸의 순환적인 삶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는 인간이 우주를 넘어 본향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해혹복본’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모계사회는 수만 년에 걸쳐 출산, 양육, 채취기술, 천문학, 의학의 지식이나 농업생산기술 등 거의 모든 분야를 탐구하였습니다. 모성이 존경을 받았던 이유입니다.

이는 인간이 스스로 질서를 만들어가는 문화적 존재이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이는 인간과 동물이 비교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비혈통적이었던 모계씨족사회가 인접한 씨족 간의 교류가 빈번했던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모성은 근친상간이나 혼교를 본능적으로 거부하였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오늘날 일부일처제가 보편적인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혼교를 거부하는 여성의 생태적 본능을 상기해 볼 때 당시 사회에서도 일부일처제가 일반적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는 모계사회에서 혈족 간의 혼교가 없었던 사실을 유대교에서 혈족 간의 혼인을 금지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부계 유일신 종교인 유대교가 모계 유일신 종교를 원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오늘날 유대인들은 이렇듯 혈족 내부의 결혼을 금지 시킨 고대 씨족법률이 정한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 알지 못하며 더욱 이에 대한 자신들의 미신에 대해서도 더 이상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같은 혈족 간의 혼인 금지는 동종생식의 퇴보적 결과를 방지하려는 것이 그 목적이었고, 이를 규정한 유대인들의 씨족법률이 수 세기 전에 이미 폐기되었음에도 그에 관한 전설은 미신이 되어 남아 있다.” ⑸ (같은 책 28p)

또한 구약성경의 창세기에서 여성을 소외한 것은 사실이지만, 일부일처제와 모계 계승의 기록이 있음을 볼 때, 실생활에서는 모계의 유습이 어느 정도 이어졌음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모계 유일신을 원용한 부계 유일신 종교로 변모하였음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모계계승에 관한 기록은 모세 4서 민수기 32장 41절에도 있다. 즉 야이르는 분명히 므낫세의 아들이라고 불리고 그대를 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느혜미아’ 제7장 63절에서도 고대 유대인의 모계계승에 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그 기록에 따르면, 유대의 한 부족 바르질래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인 사제의 아들들이 모두 아버지의 성을 따르지 않고 어머니의 성을 따라 바르질래의 아들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⑹ (같은 책 28-29p)

아무튼 모계 계승에 관한 기록을 볼 때 모계씨족사회는 부계와 비교적 평등한 가운데 평화로운 사회였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계 신본주의 사회에서는 나눔을 실천하면서 진리가 되었고, 성속의 구분이 없는 영적 존재로서 생활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모계 신본주의 사회는 공유제 사회로써 나눔을 삶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믿음에 따라, 행복 지수가 높은 평화로운 사회였습니다.

이는 다음 베벨의 글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권제하에서는 비교적 평화로운 상태가 지속되었다. 사회관계는 대체로 협소하고 일면적이었으며 생활도 단순하고 소박하였다. 종족별로 고유영역을 존중받고 있었으며, 다른 종족의 공격에 대해 남자들은 방어의 의무를 지켰고 여성들은 전력을 다해 그들을 도왔다.”라고 했습니다. ⑺ (같은 책 31p)

하여 모성애를 근간으로 한 모권사회는 봉사, 친절함, 온유함, 관용 등을 중시한 사회이며, 여제사장과 여성사제가 중심을 이루는 모계 동일체 사회였다. 하여 모성의 지위는 부성보다 높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모계 신본주의 사회에서 모계 유일신의 후손인 인간이 지구에 불현듯 나타나 육화되었다고 한 것이나, 후일 서구의 부 유일신에 의해 피조물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나, 근대과학의 진화론적 입장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것 등은 각각 다른 시각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여성들이 정교일치로 수만 년을 지배했던 모계사회가 어떻게 변천되었는가를 종교 편에서 다시 한번 살펴볼 것입니다.

3. 모권사회

 

3.1. 풍요한 사회

모건은 여성 지도자들에 의해 형제자매간의 성의 금지로 인해서 출산율의 증가와 새로운 방식의 사회적 형태였던 혈연집단의 씨족이 발생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모권사회에서 성교권이 여성에게 있었다거나, 식량 사정에 맞추어 수태를 조절한 사실 등과 근본적으로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튼 베벨은 모권에 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씨족별로 한 사람의 종모(Stammutter)가 있었으며 그녀로부터 세대가 내려가면서 여성 후계자가 나온다. 남자들은 처의 혈연집단 다시 말해 처의 씨족에 속하지 않고 여자 동기의 씨족에 속한다. 그렇지만 그 자식들은 어머니 즉 처의 가족에 속한다. 모계에 따라 그 혈통이 계승되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가족의 우두머리로서 ‘모권’(Mutterrecht)이 발생하였고, 이것이 오랜 기간 동안 가족관계와 상속 관계의 기초를 이루었다.

뿐만이 아니라 여성들이, 모계 혈통이라고 인정이 되는 경우, 씨족평의회의 의석과 투표권을 가졌으며 자헴스(Sacheme: 평상시 대표)와 전쟁의 수뇌를 선출하고 파면하였다. 과거 한니발이 로마에 대항하기 위하여 갈리아인과 동맹을 맺었을 때 그는 동맹국들 간의 분쟁에 대한 중재권을 갈리아의 늙은 귀부인에게 위탁을 하였다. 여성의 공평무사함을 깊이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그 당시 사람들은 Patrimonium (재산, 아버지의 재산)이라고 하지 않고 Matrimonium (결혼, 어머니의 재산)이라고 말하였으며, Paterfamilias (아버지의 가족)가 아닌 Materfamilias (어머니의 가족)라는 단어를 쓰고, 출신 국가를 사랑하는 어머니의 나라 (Mutter Land)라고 불렀다. 씨족도 그 이전의 가족 형태에서와 마찬가지로 재산의 공유 즉 공산제적 경제방식에 기초하였다.

여성은 가족 구성원의 지도자, 선도자로서 집안 밖의 일이나 종족에 관계되는 대소사에서 깊은 존경을 받았다. 분쟁의 중재자이며 재판관이었고, 사제로서 예배 의식까지 맡아 보았다. 고대사회에서 여왕과 여 군주가 자주 등장했던 것이나 이집트에서처럼 왕자가 통치하는 경우에도 모후가 두드러진 세력을 떨쳤던 것 등은 모두 모권의 결과라 하겠다.” ⑻ (같은 책 30-31P)

그리고 모계 유습이 확실하게 남아있었던 신라에서는 건국의 시조인 박혁거세를 탄생시킨 신도성모가 모계 유일신을 모시던 신궁(神宮)에서 제사를 주관한 사실과 여성이 국가적인 중요 제의를 한 사실과 초기 신라에서 나이가 든 남성조차 어린 소녀에게도 존대하는 관습과 모성의 출산은 지역에 산재한 신궁에서 하였던 사실 등이 기록으로 전해짐에 따라 모계 신본주의 사회의 정통성을 이은 나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신궁으로 추정되는 장소인 나정을 경주시 탑동에서 2002년에 발견하였습니다.

또한 서진영은 한민족이 모계의 유습을 이은 민족이었음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신라상대의 석씨와 김씨 제왕이 박씨인 혁거세의 제사를 지낸 것은 혁거세가 그들의 외조나 외조의 외조가 되기 때문이었으며, 신라하대의 박씨 왕이 김씨와의 제사를 행한 것도 같은 이유였는데, 이는 모계의 유습이다. 이러한 모계의 유습은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까지 남아 있었으며 거의 완전히 부계로 바뀐 것은 조선 시대의 후기에서였다.” ⑼ (서진영, 동녘 26P)

그리고 전통 한국의 실생활에서는 데릴사위제도가 오랫동안 관습으로 있었다는 사실에서 모계의 유습이 비교적 잘 보존된 사회였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한 모계 신본주의 사회를 이은 고대 한국의 무교를 통해서도 모권사회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모권사회에서 남녀는 비교적 평등하였지만, 남성의 경우 다른 씨족으로 보내지거나, 씨족의 생계와 안위를 위한 노동력을 제공하였던 점에서 여성이 상위였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1909년 오스트리아 빌레도르프에서 고고학자 조셉스좀베시에 의해 발굴한 일명 빌레도르프의 비너스( 25,000-28,000년 전)는 구석기시대의 농경사회의 풍요여신을 형상화한 작품으로써 풍부한 몸매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을 재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존경하고 인간의 출생을 경이로운 것으로 생각하였던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여 모성애를 근간으로 하는 사회로써, 출산 양육을 중시한 행복 지수가 높은 성선설적인 사회였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모계 신본주의 사회 당시의 생존방식은 완전한 농경이 아닌 자연에 의존적인 수렵 채취 수준으로 수확량이 이미 결정된 사회로써 생존환경이나, 식량 사정에 맞추어 출산이 조율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중기모계사회가 ‘성교권’을 독점한 여성에 의해 인구조절이 가능했던 반면, 부계사회의 등장하면서 형성된 부계혈통주의로 인한 무분별한 강제 출산으로 인한 인구폭증은 만성적인 빈곤층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식량과 인구의 불균형이 지속되면서 출산의 신비는 약화 되었고, 약육강식 문화가 공고화되었습니다.

하여 부계혈통주의 사회가 등장하면서 성립된 부족국가와 더불어 폭발적인 인구증가로 인해서 인간은 소모적인 존재로 변모하면서 여성의 지위가 낮추어졌고, 만성적인 재화 부족 현상을 겪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즉 부계사회가 등장하면서부터 기아의 공포가 만연하게 되었고, 생명 경시 풍조로 인해서 출산하는 여성의 지위가 하락하게 되었습니다. 죽기를 각오한 여성의 출산은 무시당했을 뿐만 아니라, 부계에 종속되고 성적 존재로 전락하였습니다. 이는 태고의 모계사회가 수 만 년에 걸쳐서 거의 모든 분야에서 사회적 기초를 이룩했던 결과와 상반되는 배신이라고 할 만큼, 참담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생각할 수 없다는 속담처럼, 모성애로 이룩한 문명에 의해 부계사회가 등장할 수 있었음을 망각했습니다. 하여 사회변화에 능동적으로 적응하면서 자신들의 모든 경험과 지식을 부계에 평화적으로 이전하였던 중기모계사회를 상기한다면, 남녀평등을 이루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3.2 공유제 분배양식

모성애를 근간으로 형성된 모계사회의 신앙이나, 존재의 삶, 공유제 분배양식 등은 인류문화의 원형으로 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생아는 모성을 통해 신의 본질을 체감하며, 모성애를 통해 고마움을 느끼고 인간을 선한 존재로 인식하며 성장합니다.

이는 모계 신본주의 사회의 유습을 이은 고대 한국(단국)의 ‘곰 신앙’ (고맙다, 감사하다는 의미를 내재하고 있는 신앙)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통 한국에서 마고 삼신할미가 생명(태)을 주관하고, 항상 함께하는 친근한 존재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마고 삼신이 태몽으로 신생아의 특성을 알려줌으로 신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마고가 인간에 대해서 관심이 많고 관용적인 사실에서 인간은 스스로 대모신의 후손으로 믿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참고로 ‘곰신앙’은 모성에 의해 재창조되는 생명의 경이로움과 양육에 헌신하는 모성애에 대한 고마움을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전합니다. 이는 태몽을 통해서 알게 된 삼신할매(대모신)를 숭배한 신앙입니다. 그리고 대모신의 점지로 태어남을 고맙게 생각하고, 대모신의 유시로써 ‘해혹복본’을 위한 나눔을 실천하는 신앙이었습니다.

이는 후일 나눔을 진리로 알고 실천한 고조선의 국시인‘홍익인간’으로 이어졌습니다. 하여 고대 한국의 곰은 모신과 모성을 상징하고 있으며, 나눔과 생명 존중을 특징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동양의 창세관에서 모계의 여와와 부계의 복희가 음양의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계 신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순환 진보의 중심에 모성이 있음을 긍정하는 ‘곰 신앙’의 측면에서 볼 때, 출산 된 남녀의 생태학적 특성을 존중하는 분배양식인 공유제가 보편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모권사회의 공유제가 양성 모두 모성의 태 속에서 생명이 구체화 되면서 형성되는 모성애에서 연유하는 것입니다.

이는 모계사회가 네트워크 사회이며 공유제 사회로써 인간을 위한 지식과 기술 등을 나누었던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모계씨족사회는 사람이 불안전하고 인간의 부족한 부분을 인정하면서 만든 공유제로 행복 지수가 높았던 사회였습니다. 그리고 종교 편에서 모계 유일신 ‘대모신 마고’에 관해서 다시 한번 논변이 있을 것입니다.

 

3.3 여 제사장 사회

베벨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그 시대의 신화는 아스타르테 (Astarate), 데메터 (Demeter), 케레스 (Ceres), 라토나 (Latona), 이시스 (Isis), 프리가 (Frigga), 프라이아 (Freia), 게르다 (Gerda) 등 주로 여신의 이야기이다.

여성은 신성불가침하였으며, 더구나 모친살해는 극악의 범죄로써 모든 남자에게 꼭 복수해야만 할 의무로 간주 되었다. 살인자에 대한 복수는 종족 남자들의 공동임무였으며, 모두가 다른 종족이 그의 가족 구성원에 가한 부정에 복수할 의무를 진다.

그리고 여성들이 남자를 옹호하면 남자들은 고무되어 최고의 용기를 가졌다. 고대 민족에게는 이처럼 모권의 영향력이 모든 생활 영역을 지배할 만큼 강력한 것이었다. 그 모습은 바빌로니아인, 아시리아인, 이집트인, 영웅시대 이전의 그리스인, 로마제국 설립 이전의 이태리 민족, 스키타이인, 갈리아인, 이베리아인, 칸타브리인, 게르만인 등의 모든 생활 영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⑽ (베벨 31P)

이 인용문에서 모계 신본주의 사회의 유습을 이은 선사 고대 한국과 연관성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류 최초의 모계 유일신 신앙이 중동을 포함한 유럽까지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여 모계로부터 생성된 모계 유일신 신앙을 바탕으로 한 네트워크적인 대연합이 형성되었음을 통찰할 수 있습니다.

물론 부계혈통주의 중앙집권적인 부족연합국가와 모계적 가치인 분권적이며 네트워크 연합체와는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모계 대연합이라는 용어는 적합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의 NGO나 중세유럽의 부계 신본주의를 근간으로 성립한 카톨릭의 교황제와 유사한 체계였다고 이해하면 된다. 지면 관계상 종교 편에서 논변이 있을 것입니다.

또한 서진영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여성이 제사를 주관하였으며, 무속신앙에서 나오는 산신, 삼신, 풍신, 용신, 태양신 등과 신라의 일급 호국신인 나림(奈林), 혈예(穴禮), 골화(骨火)의 3 산의 신도 여성이었다. 또 삼신할머니, 청실홍실 할머니 등의 이야기는 원시시대에 씨족 내의 대소사에 여성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전해준다. 제주도에 전해오는 한 민담은 당시 사람들이 여성을 우주 창생의 어머니로 생각했음을 보여 준다……

이런 설화들은 모계사회의 지도자로서 어머니에 대한 친근감 있는 경외심을 표현하고 있다. 모계사회의 모권은 가부장제 사회의 부권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어머니는 폭력이나 강제, 부에 기초하지 않은 자연적 권위를 가진 존경과 애정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의 형태에서 여성의 억압과 착취를 가져오는 새로운 힘이 생겨나고 있었다.” ⑾ (서진영. 여자는 왜? 동녘 35p)

또 하나의 예로써 이규보의 동명왕 편에서 “주몽이 위험에 빠져서 남으로 망명을 할 때 신모(神母)가 오곡 종자를 싸주었으나 이별의 슬픔에 잊어버려서 신모는 비둘기를 보내서 주몽에게 주었다.” ⑿ (김철준. 동명왕편에 보이는 신모의 성격. 「한국고대사연구」지식산업사 1975, 37p)

즉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은 신이며 신을 탄생케 한 모성은 신의 어머니였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수만 년에 걸쳐 인간의 의식을 지배했던 모권사회의 여 제사장이 신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였음을 상기해볼 때, 모성은 존경의 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여 태고의 모권사회는 제정일치의 종교사회로써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여 제사장이 중심이 됨에 따라 남성보다 우월한 지위였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성이 성교권을 독점하여 남성은 혼인이나 성행위에 있어서 수동적이었습니다. 물론 부계사회처럼 경제적 이유로 해서 매매혼이 없는 사회였습니다.

이는 아직도 모권사회가 중국의 원남성 루그호의 모소족 등 소수 부족으로 남아서 유습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근거하고 있습니다. 하여 태고의 모계 신본주의 사회가 스스로 수태조절과 심신을 연마하여 인간다운 외모를 만들어갔다고 전하고 있는 것은, 사실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인간의 대상으로써 지구는 과학으로 실체가 밝혀지고 있지만, 주체로써 인간은 어떠한 생명체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걸작이기 때문에 자연사를 통해 인간 창생을 추정하는 데는 한계가 있으며, 오히려 현재의 인류를 통한 통찰력으로 이해함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수 만 년에 걸친 인류 역사는 신화와 상징으로 압축하여 전달된 유습을 현재에 맞게 해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불충분한 고고학적 유물이나 문헌일지라도, 이를 근거로 해서 풍부한 상상력이 보충되어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3.4 직관이 발달한 종교사회

모권사회는 인간을 만물의 주인공으로서, 우주를 해석하는 경이로운 존재로 이해함에 따라 당연히 모성의 사회적 지위가 높았습니다. 이는 인간이 물질적으로는 대자연의 부분이지만, 스스로 삶을 재창조하고, 생명의 경이로움을 감동하는 이성적인 존재로, 우주 전체를 포괄할 수 있는 상상력과 재창조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대자연의 부분이면서도 전체를 느끼는 특성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물적으로는 우주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먼지와 같은 작은 존재이지만 우주를 마음에 담을 수도 있는 영적 존재임에 따라 모성을 존중할 수 있었습니다. 하여 지구의 동물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모권사회가 수만 년간을 지배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모계사회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직관적인 사회이면서, 우수한 여성들이 있었기 때문에, 태고로부터 인류를 이끌어올 수 있었습니다. 이는 모계 신본주의 사회가 나눔으로 풍요하고, 행복한 삶을 살았으며 지구에서 재생되어 진보가 어느 정도 되면, 지구를 떠나 인간의 본향(다른 차원, 다른 별)으로 되돌아간다고 믿었던 사실을 상기해볼 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계 신본주의 사회는 대모신의 후손인 사람이 지구에서 나눔을 익히고, 본향인 낙원으로 되돌아오라고 하는 대모신의 유지인 ‘해혹복본’을 신념으로 한 사회였습니다. 대모신의 ‘해혹복본’은 나눔은 진리로써 의심하지 말고 실천하여 인간의 본향으로 되돌아올 것을 부탁하는 대모신의 유시입니다.

이는 지구에서 인간으로 육화되어 나눔을 배우고 실천하는 단순한 신앙입니다. 나눔을 교리로 한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주체가 되고 조상의 음덕을 감사할 뿐, 잡신은 자연처럼 대상으로써 인간의 필요에 따라 조정한 인본주의 종교였습니다. 인간의 태생적인 종교적 심성이 모성애에 의한 발현된 초기모계사회부터 상상력과 영적 감응에 의한 결과입니다.

이는 태고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성의 태에서 인간은 재창조되고 있으며, 태어나면서 처음 모성을 보고 접촉하는 가운데 모성애를 통해서 사랑을 느끼고 체험하면서 인간의 종교적 심성이 발현되고, 배양되면서 신을 인식한다고 생각한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태고의 여성이 잉태와 출산 양육이라는 특수한 경험으로부터 인간의 깊은 내면의 세계를 어렴풋이나마 깨닫는 것을 체계화하여 만든 종교로써 사람이 주체가 되고, 신이 객체가 된다는 점에서 인본주의 종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여 제사장들은 마치 배우처럼, 여러 제사와 행사에서 인간의 본향의 삶을 상징하는 화려한 복장과 상징적 도구에 의해 인간의 본향인 낙원의 모습을 보여주고, 인간의 고뇌를 위로하는 가무와 행렬 등을 통해 순환 진보의 삶을 보여준 한민족의 고유 신앙인 무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모계 신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을 신의 후손으로 생각함에 따라 삶 자체를 수행으로, 생각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첨단 과학기술 시대를 살고 있음을 상기해볼 때, 인간이 신의 후손이라는 모계 신본주의 사회의 믿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또한 인류학자 모간(Morgan)의 분류대로 인류 역사가 변했다고 할지라도, 모성애는 태고나 현재나 항상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인간의 구심력임에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비록 부계적 가치를 근간으로 하는 제도에서 살아갈지라도, 모성애를 인간의 본질로 이해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아무튼 모계 신본주의 사회에서 모성은 인간 상호 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재판관으로서, 또는 제사장이나 사제로서 역할을 하였으며, 모계 추장의 경우 씨족평의회 의장으로서 관리자를 임명하거나 파면권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마도 영혼이 순환 진보하는 유일한 창구가 모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여 내면세계를 탐구했던 모계 신본주의 사회를 단지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오늘날까지 미개한 사회로 남아있는 오지의 고립된 원시적인 사회와 단순 비교하면서, 미개한 사회로 본다는 것은, 편견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인류의 대부분 역사에서 야만성과 미개함, 문명적인 것이 정도의 차이일 뿐 함께 공존하였던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모간은 직선적인 역사관으로써 인류의 역사를 야만, 미개, 문명의 세 단계로 나누었고, 모간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기초한 변증법적 유물사관의 관점에서 당시의 생활양식과 생활수단의 획득 등을 통해서 이해하려 함에 따라 내면을 탐구하며 인류문명의 기초를 형성했던 모계 신본주의 사회를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참고로 과학의 발달로 생태계나 물질 등의 연구와 활용실적은 상당한 수준에 도달하였으며, 아인슈타인 이후 곡선적인 시간개념을 이해한 것은 사실이지만, 과학은 내면세계의 일부분만 이해할 뿐입니다. 물론 반물질까지 발견하면서 모계 신본주의 사회가 믿은 순환·진보 사상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3.5 여성 우월사회

모권사회는 마치 도교처럼, 자연 친화적 생활로 유유자적하며 자율적인 사회이며, 넓은 범위로 산재한 씨족 상호 간에도 자유롭게 이동한 네트워크 사회였습니다. 모계사회가 직관이 발달한 사회로서 단순하면서도 자기책임의 원리에 의해 스스로 통제하였던 열린 사회였습니다.

이는 인구수가 적었던 이유도 있겠지만, 모성애를 근간으로 하는 모계사회는 공유제 사회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하여 모계사회는 부분의 합보다 더 큰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공유제로 장애인이나, 노약자 등을 부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모계 신본주의 사회처럼 안정된 사회도 있었지만, 당시의 사회에서도 반기를 들고 뛰쳐나온 집단도 있었을 것이며, 변방의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야만 부족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는 아마도 후일 떠돌이로서 주변 지역의 남성들이 세력을 형성한 결과, 부계사회가 등장하게 된 원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모계사회는 씨족 별로 한 사람의 최고의 모성(비혈연의 여 제사장, 여자 추장)에 의해 초경을 하는 소녀들을 모아 대모신께 고하고, 여 제사장과 함께 기거하며, 신화나 제의, 생활양식, 성교육, 몸가짐, 금기사항 등 성인으로서, 필요한 기본적 사항을 일러준 초야 의식(성인식)을 가졌음을 기록이나, 오지의 모계 소수민족에서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인류학자들에 의하면, 종모는 여성과 남성들을 훈육하고 가장 유능한 여성 후계자를 임명하여 씨족사회를 이끌어 갔다고 합니다. 물론 모계사회의 초야 의식과 서구 부계사회가 행했던 초야권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즉 모계사회의 초야 의식은 씨족의 복지를 위해 봉사를 다짐하고, 씨족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여성의 고유한 권리로써 성교권을 주지하는 성문화가 정립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모성이 남녀를 출산함에 따라 남녀의 생태적 특성을 이해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계사회는 생명의 순환(보존본능)을 위한 나눔을 교감하는 의례의 측면이 함축된 절제된 성문화로 평화로웠습니다.

이는 인도에 있는 밀교의 성문화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허락하지 않은 성폭력을 하였을 경우, 처벌로써 씨족으로부터 쫓겨나 떠돌이로 생활하였다고 합니다. 하여 모계사회는 남성에 의한 성추행, 성폭력, 성매매, 초야권 등은 생성될 수 없는 구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튼 모계시대 사람들은 식량 사정과 우수한 사람의 출산을 위한 방편으로 여성이 성을 주도하는 사회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모계사회에서 초경 이후 성인식의 통과의례를 마친 후부터, 성교가 자유로운 가운데 남성을 선택하였던 반면, 남성들은 선택받기 위해 온갖 치장과 힘겨루기나, 귀한 물건을 선물하는 등을 하였던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능해도 부계로 상속된 부계 혈통사회와 달리, 비혈통주의 사회인 모계사회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한 우수한 여성들 가운데, 합의제 민주주의처럼 제사장을 추대하였습니다. 즉 모계사회는 인간의 진보를 구현코자 한 사회입니다.

예를 들어 삼한시대가 성립할 당시에 고주몽이 씨름대회에서 우승한 후, 여 제사장으로 부호였던 연상의 과부 소서노가 고구려를 창건하여 추모왕으로 추대했던 경우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모계씨족사회가 인근의 다른 씨족의 우수한 남성을 자신들의 씨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인 사실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근친혼을 거부하는 여성의 생태적 본능으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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