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수난을 극복한 홍익인간
구한말 나라가 위기에 처하게 되자, 가정에만 머물렀던 양반 규수들은 자발적으로 국립 여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찬양회(1898년)를 결성하였습니다. 이는 최초의 여성 구국운동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1907년 진명 부인회가 국채보상운동과 구국운동에 참여하였고, 1913년 여성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비밀결사 조직인 ‘송죽회’를 만들어서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습니다. 물론 3.1독립운동에도 참여하여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또한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상해 애국부인회’와 같은 단체들이 활약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헌장에 남녀평등조항을 명문화시킨 사실은 서구의 여성운동과 다른 국정을 공동운영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근대적 의미의 여성 인권운동을 본격적으로 활동한 것은 1927년 ‘근우회’가 성립되면서부터 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근우회’를 비롯해 여성단체들은 붕괴가 되면서 지하조직으로 활동하게 됨에 따라 1930년대부터 여성 구국 활동은 공개적으로 할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한민족 여성들의 독립운동은 이미 임진왜란 당시 행주산성이나, 논개 등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나라가 위기에 있을 때마다 스스로 일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한민족의 오랜 생활양식인 가족의 태양으로써 모성을 존중한 ‘안의 문화’나 모성의 출산 양육을 고려한 한민족의 온돌문화나, 신선도를 위한 사색과 수행하기 적합한 좌식문화 등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고조선을 ‘동방예의지국’ (東方禮義之國)이라 하여 공자가 흠모하였으며, 군자의 나라라는 의미인 ‘해동성국’(海東聖國)으로 알려진 이유로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녀를 ‘홍익인간’으로 키운, 율곡 선생의 어머니인 신사임당의 삶에서 또렷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한민족 여성의 구국운동은 나보다 가족과 후손이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 행복한 인생을 살기로 염원한 아름다운 마음씨에서 연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불안정한 사회
1.1 일제 상흔의 여파
‘홍익인간’ 한민족의 끝없는 독립투쟁은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가운데, 인간이 만든 것 중 가장 무서운 원폭에 의해 극적으로 일제가 패망하여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일제의 혹독함으로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만든 수많은 인적 희생과 자원고갈, 상공업의 파괴, 식민사관에 의한 역사 왜곡, 일제 특유의 계층 간의 이간질로 분열, 정체성 부정으로 인한 혼란, 인간성 황폐화 등으로 회복 불능의 초토화된 상태였습니다.
즉 노예 사슬에서 풀려났음에도 불구하고, 상처와 식민잔재로 인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처럼 일제는 한민족에게 지나치게 가혹하여 뼈에 사무치는 상처와 원한을 심었으며, 아시아인에게도 깊은 상처를 남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세상에서 가장 혹독한 시련을 겪은 한민족 여성들은 해방 후에도 가정폭력에 시달렸고, 사회는 폭력으로 얼룩져서, 마치 축생의 삶처럼, 비정상적인 삶을 경험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1904년 윤치호 외무대신 때의 일로써 멕시코의 유카탄 반도에서 애니깽(밧줄을 만드는 용설란으로써 억세다)농장으로 팔려 가서 노예 등급 7등급으로 돼지우리 옆에서 잠을 자야 했지만, 여성들은 노예 등급조차 없었던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험악한 삶을 산 모성은 모든 것을 빼앗기고 보릿고개의 지독한 가난과 병마와 싸워가면서도, 구심력을 잃지 않고 아름다운 마음의 씨를 뿌린 결과, 해방을 맞이할 수 있었으며, 다른 나라에서 벤치마킹하는 국가로 가능케 했습니다.
이는 정 비석 선생이 한민족의 특성을 은근과 끈기로 압축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한민족은 모계적 특성인 은근과 끈기를 갖고 조화를 이루는 삶을 중시하며, 극단적인 것을 싫어하는 민족입니다.
이러한 특징이 아름다운 한반도를 지키며 오늘날까지 독립 국가로써 남아 있게 된 이유로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민족 여성들이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스스로 앞장섰던 것처럼, 광복 후 초토화되어 있을 때, 여성들이 주도하여 정당을 만든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안동에서 초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임영신 전 의원은 1945년 ‘대한여자국민당’을 창당하여 여성참정권, 평등권 등 기본권 확대와 여성 생존권 등을 역설하였으며, 2대째는 충청북도 금산에서 지역구의원으로 당선되었습니다.
물론 여성들이 주체가 되어 모계적 가치를 근간으로 하는 여성 정권을 쟁취하기 위한 정당을 만들어 국정의 한 축을 담당하겠다는 의지 자체가 획기적입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세계 어느 국가도 여성이 주체가 되어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정당을 만들어서 활동한 사실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조선이 유학을 근간으로 성립된 가부장제 사회였다 할지라도, 한민족은 음양론의 근간인 도학(신선도)을 중시하였고, 남녀조화로 행복한 삶을 산다고 생각한 ‘안의 문화’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해방을 맞아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극단적 남녀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여성 주도의 정당을 만든 것은 한민족의 특성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1.2 혼돈의 시대
수천 년에 걸쳐 지역 환경에 맞게 형성된 전통적 가치체계에 적응하며 삶을 살았던 한민족은 갑작스러운 일제 식민지배라는 황당하고, 참담한 변화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부정하는 카오스적(혼돈)인 상태로 살아야 했습니다.
즉 한민족의 정체성인 ‘홍익인간사상’이나 ‘선비정신’ 등의 자부심으로 살아가는 문화민족의 긍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전통 가치는 비판의 대상이 됨에 따라 패배 의식으로 자학을 하며 노예처럼 초라한 삶을 산 것입니다. 인도의 시성(詩聖) 타고르가 전통 한국을 동방의 빛(등불),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고 한 것조차 부정하는 정도였습니다.
참고로 태고시대에 반인반수의 괴물의 모습으로 변모했던 사람들을 본래 모습으로 회복하기 위해 동이 틀 무렵 여제사장이 제의를 주관하였다고 부도지는 전하고 있습니다. 즉 동물을 섭취할 때 희생제를 하는 등 천 년간 ‘수증’한 결과, 현생인류처럼, 이목구비(耳目口鼻)나 마음이 반듯한 사람들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여 한민족은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조용한 아침을 여는 ‘홍익인간’으로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고대부터 물고기를 놔두고 새벽 제의를 한 나라라는 의미인 고조선(古朝鮮)이라는 국호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불교가 들어오기 전 여제사장들이 신선도를 하였던 한반도의 명산대찰이 있는 지역에서 오늘날까지 산신각으로 흔적이 남아 있음에 따라 긍정할 수 있습니다. 하여 한반도가 동료 인간들의 ‘해혹복본’을 위한 수도 장소였다고 추정해 볼 때, 시성 타고르의 영감은 적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기독교에서 물고기를 상징물로 한 것이나, 불교에서 목탁을 물고기를 모방하고 있는 것 등과 모계 신본주의를 주도했던 동이족이 물고기로 제의를 한 것과 같다는 점에서 유일신 원형종교의 발원지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여 원본 문화를 가진 한민족과 섬나라로써 여러 지역에서 도래한 문화를 짜깁기하여 중첩된 일본문화와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타인을 해치지 않는 소극적인 태도가 아니라, 타인을 돕겠다는 적극적 태도를 가진 고조선은 ‘동방예의지국’으로 오랫동안 동양에서 알려진 나라였습니다.
하여 타고르와 같은 영적인 사람들은 원본 문화를 인식하고 있음에 따라 일제 식민사관이 허구임을 알고 한민족을 ‘동방의 빛’이라고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식민사관은 오히려 일제의 정당성을 홍보한 내용으로 채워졌음에 따라 서구사람들은 전통 한국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는 미군정하에서도 일제의 잔재가 의식을 지배하였을 뿐만 아니라, 친일 세력은 유지된 가운데, 공산주의와 자유주의라는 이념으로 남과 북이 분단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즉 남에는 좌우익의 남남갈등으로 가난과 혼란은 일상화되어 무법천지였으며, 지독한 일제의 수탈로 산업화할 자본과 기술이 없는 세계 최빈국이었습니다. 하여 강대국들은 일제가 만든 식민사관대로 무능한 민족으로 식탁통치를 받아야 하는 것을 주문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영구지배를 위한 일제의 각본에 의해서 만들어진, 1907년 도쿄박람회에서 우리 속에 갇힌 조선인 남녀가 동물로 묘사되어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고대부터 미개한 민족임을 동물처럼 가두어 홍보한 것을 강대국들은 믿은 것입니다.
하여 당시 일제 식민지 상황에서 핵폭탄이 투하되지 않았다면, 해방을 맞이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아이러니하게도 ‘홍익인간’ 한민족에게는 핵폭탄의 도움을 받은 최초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1.3 난폭한 사회
일제가 영구지배를 위해 만든 식민지법을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이라 하였습니다. 이는 해방 후 자유당 시절에 법을 냉소적으로 보아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고 하는 정서가 만연했던 이유입니다. 즉 총독부가 만든 법은 헌병, 경찰, 관료 등에 의해 집행됨으로 법을 무시하려는 경향이 만연하게 된 것입니다. 다음 인용문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국민의 법의식은 박병호 교수가 지적한 바와 같이, ① 법의 도덕성, 정치성이 강조되고 형법적, 징벌적 측면이 강조되며, ② 법의 공정성, 타당성에 대한 회의로 말미암은 법에 대한 신뢰도가 낮고, ③ 준법정신이 결여되어 있고, 권리의식이 박약하며, ④ 법의 타당성 내지 공정성에 대한 회의로 인하여 재판을 경원하다는 것인 바, 이것은 법이 국민과 유리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80) (김철수 37P)
이처럼 한민족은 전통적으로 높은 도덕적 수준을 요구하는 엄정한 사회로써, 법 없어도 살 수 있을 만큼 온정주의적인 덕치주의로 평화로운 삶을 살았지만, 일제는 식민지법으로 혹독한 헌병통치를 함에 따라 법치주의를 나쁘게 생각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국민과 의사소통을 하면서 형성된 일반의사로 법을 만들거나, 정책 결정을 하거나, 비전을 제시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갖고, 사회통합을 구현하는 정치인의 부재로 인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일제의 일방적 식민통치법이 무자비한 것입니다.
물론 이웃 간에도 겉과 속을 달리하는 비굴한 태도를 형성하였고, 총독부를 불신하는 습속은 해방 후 민주주의 정부가 성립되었음에도, 정부를 총독부 정도로 불신할 만큼 두려워한 시절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식민잔재로 인하여 해방 초기에 법보다 주먹이라는 안하무인의 무질서 천국이었으며, 오늘날까지 사회통합에 어려움을 겪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홍익인간’ 한민족에게 없던 일로써, ‘태평양전쟁강제군위안부’라는, 성적 노예로서 일명 ‘정신대’라기도 하는 이십만 명 이상의 젊은 여성이 희생을 당하였습니다. 이는 해방 후에도 생계 수단으로써 인신매매, 매매춘 등이 만연했고, 여성을 극도로 폄하하는 풍조까지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심각한 상황은 1946년 ‘부녀자의 매매 또는 매매계약 금지법’을 만들게 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일제강점기에서 살아남기 위한 과정에서 유발된 인간성 황폐화의 결과는 여성에게 전가되어 힘든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전쟁, 수탈, 착취, 폭력, 탐욕 등으로 형성된 불안정한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가 낮아졌던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일제 식민통치의 결과 분열과 분단으로, 1950년 6.25라는 동족상잔으로 이어지면서 한반도는 초토화되었고, 과부와 고아의 폭발적인 증가로 나타났습니다. 또한 일제에 의한 역사 왜곡으로 ‘홍익인간’과 ‘선비정신’을 근간으로 하는 정체성이 의미를 잃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유발된 지역감정은 국론분열과 더불어 어진 성품을 잃게 되었으며, 생명을 경시하면서 여성을 무시하는 풍조로 이어졌습니다.
이처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근대국가의 기초를 확립했음에도 불구하고, 원상복구가 되지 못하고, 혼란만 가중되었던 원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후 일제 잔재와 정체성 혼란 등의 혼재로 유발된 3.15부정선거를 자행한 결과, 1960년 대구에서 벌어진 2.28의거를 시작으로 4.19혁명에 의해 이승만 정권이 막을 내렸습니다.
하여 한민족의 저력을 3.1독립운동에 이어 서구시민혁명과 같은 성격의 4.19혁명은 세계만방에 알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일제 식민과 6.25동란으로 인하여 초토화되어 있었던 한국의 잠재력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리고 4월 혁명은 한민족이 민본주의로 ‘홍익인간’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여 4월 혁명은 일제에 의해 훼손된 한민족의 정체성의 복원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분열을 획책하는 식민사관으로 인하여 오늘날까지 사람들을 과거에 살게 함에 따라 사회통합에 어려움을 겪는 것도 사실입니다.
2. 홍익인간의 저력
헌법학자 한상범은 그의 저서 ‘기본적 인권’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한국의 민권, 입헌사상과 그 뿌리 내리기의 운동에서 가장 획기적인 일은 4월 혁명이다. 또 다른 면은 민중의 결집된 의지가 행동으로 나타나서 반민주에 항거하였다고 하는 점에서 민중운동이기도 하다.
이 혁명을 총체적으로 어떻게 규정짓느냐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지만, 여기서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역사의 흐름 속에서 면면히 이어져 오는 민권, 입헌 사상이 구체적, 역사적 사실 속에서 열매를 맺게 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현대사를 419혁명 이전과 이후를 따져서 말하게 되는 것이고 우리의 민권 입헌사상과 그 운동을 앞으로 어떻게 바르게 이어나가느냐 하는 과제도 여기서 비롯되어야 한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81)(한상범, 기본적 인권, 76~77p)
이처럼 한국인의 정체성으로서 ‘홍익인간사상’이나 ‘선비정신’ 등을 잊지 않았기 때문에 1960년 4.19혁명이 가능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여 한국의 4.19혁명은 서구의 시민혁명과 유사하면서 유구한 한민족의 정체성을 되찾는 분깃 점이 된 사실에서 의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한국의 역사가 마고시대를 이어 고대 한국의 범상치 않은 역사를 이해한다면, 419혁명은 우연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즉 4.19혁명이 주권재민의 민주주의 사상을 확실하게 인식하게 된 결과라는 사실과 더불어 혁명을 통해 국민총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일제 잔재를 희석하고, 일제 악몽에서 깨어났으며, 일본과 대등한 국가관계가 정립된 중요한 혁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일본은 6.25동란을 통해서 경제를 회복했던 반면 대한민국은 6.25를 통해 초토화됨에 따라 일본은 과거처럼, 엉뚱한 생각을 품을 수 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일제 식민통치의 결과 자본과 기술이 부족하여 산업화를 이룰 수 없었으며, 더불어 사이비 자본주의로 인한 무원칙적 불안정성, 비민주적 생활양식, 산업인프라의 부족, 전쟁으로 초토화된 상태 등으로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구제 불능의 빈곤국으로 공인된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는 패망한 까닭에 ‘홍익인간’ 한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위대한 문화유산은 의미를 잃고, 스스로 자학하고, 냉소적인 정서가 만연한 자포자기 상태에서 빈곤을 극복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2.1 국운을 열다.
세계 최빈국으로 혼란을 지속하고 있었을 때, 박정희 장군이 주도한 1961년 5.16군사혁명은 부국강병을 기치로 군사정권을 출범시켰습니다. 그리고 박정희 정권은 경제적 기초가 없는 민주주의는 말 잔치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하여 오직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서 경제개발계획을 세워 한국적 산업혁명을 위한 기초를 확립하면서 총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세계에서 전례가 없는 기록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분단 상황과 냉전체제로 있었던 국제정세를 잘 읽어낼 수 있는 통찰력과 아울러 한민족의 정체성을 각성케 하여 잠재력을 일깨워 국민총화를 끌어낼 수 있는 비범한 지도자의 등장으로 가능하였다고 국제적으로 공인되었습니다. 즉 통계로 1973년부터 남한이 북한보다 약간 앞서기 시작함에 따라 공산주의보다 자본주의가 우월하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입증한 중요한 사례가 되면서부터, 세상을 놀라게 한 것입니다.
이는 후덕한 한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저력을 이해했던 혁명정부는 국민을 신뢰했고,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국가가 리더를 하여 ‘하면 된다’라는 긍정적인 태도를 배양하고, 실천한 결과 실제로 단기간에 놀라운 성과를 나타낸 사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즉 전 세계 사람들이 식민지 가운데 가장 혹독한 대우와 초토화된 불모지로 재기불능의 국가로 잊힌 나라였음에도 불구하고, 기사회생과 성장을 동시에 이룬 자체가 감동과 희망을 주기에 충분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수정자본주의보다 더 많은 개입주의를 허용하는 한국적 자본주의는 소위, 중도주의의 원조로써 모방할 가치가 있을 만큼, 성공적이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여 식민통치를 당한 나라치고 온전한 정신을 갖고 사는 나라가 없다는 것은 알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한국이 산업화, 민주화, 정보화를 기적같이 빠르게 성공한 사실을 두고, 식민지 상처를 어떻게 치유하고, 극복하여 인류 역사발전에 동참할 것인가 등에 대해서 참고할 수 있는 나라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모계 신본주의 사회의 중심역할을 이어 신선 사상(도학)의 풍토를 이어온 모성의 끈질긴 저력에서 연유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또한 일제 식민통치를 방해하였던 한민족의 선비정신을 소멸하기 위해, 식민사관은 선비를 사색당파의 주역들로 멸망의 원인으로 평가절하했던 사실도 알게 됩니다.
즉 서구의 시민혁명 후 만들어진 정부와 민중의 중간에서 시민단체로써 정당정치를 한 것보다 앞에 있었던 사실입니다. 물론 고대 한국의 여제사장의 선비정신을 이은 화백회의를 볼 때, 토론문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에 급성장으로 인하여 유발되는 ‘성장통’이라는 부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즉 복지를 전제로 한 국민총화를 이루기 위한 과정에서 인권유린을 당한 피해당사자의 경우에는 큰 상처가 되었습니다. 이는 수정자본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계획경제임에도 불구하고, 저임금으로 자본축적을 이루어 부국강병의 초석을 이루었지만, 양극화로 유발되는 갈등의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국민총화로 일군 성과에 의해 만들어진 국부가 근로자는 복지국가의 구현을 위한 인내의 결과로 생각하는 반면, 자본가는 양극화를 당연하게 생각함에 따라 형성된 불신이 사회통합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획기적인 결과에 적합한 탈 양극화를 위한 새로운 모계적 분배양식에 기초한 적극적 복지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새로운 체제가 성립되어야 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선진자본주의국가가 개인주의(자유주의)를 근간으로 하여 발전하였던 것과 다른, 콩 한 쪽도 나누어 먹는다는 우리들의 정서에 부합된 국민총화 계획경제로 성장을 했기 때문입니다. 즉 한국적 복지사회의 구현이라는 동기유발로 대기업 중심으로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다면, 콩 한 쪽도 나누어 먹는 모계적 분배양식인 적극적 복지사회를 구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개인의 희생을 전제로 하는 국민총화로 이룩한 국부라면, 양극화로 자본가만 유리한 배금주의적인 계급을 형성하게끔 방치하는 것은 일관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일관성의 부재로 유발된 불공평함으로 형성된, ‘자기팔 자기가 흔들어야 한다’라거나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다’라는 냉소적 태도가 만연하게 된 점을 상기해야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일제 식민관료주의와 사이비 자본주의를 뿌리 내려 모든 것이 초토화된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혁명정부가 엘리트주의적인 행정을 펼침으로써 다양성의 결여로 인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일제 망령과 정체성 혼란 등으로 아노미 현상을 겪는 가운데, 절대다수가 빈곤함에 따라 물적인 기초를 확보하기 위한 성과를 중시할 수밖에 없었던 다급한 사회였기 때문입니다.
즉 빵 공급이 최우선임에 따라 일제 잔재인 주종적 노사관계까지 수용한 것입니다. 이는 ‘대동아공영’이라는 구호 아래 아시아의 맹주가 되고자 하는 패권주의로 한민족을 전진 배치하고, 한반도를 영구지배하면서 대륙침략의 발판으로 삼고자 하여 만들어진 뿌리 깊게 박힌 일제 잔재를 제거하기 위한 전 단계가 경제발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제3세계를 상대로 한 서구의 제국주의와 달리, 동일 문화권을 침략한 일제 잔재는 상당한 기간 잔재함으로 묻어두고, 복지 국가구현으로 상처를 치료하기 위한 경제발전에 매진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일제가 동일 문화권에 있는 전통 한국을 일제의 침략과 수탈로 초토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경제개발을 성공시켰기 때문에 국제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경제발전을 통해 일제 망령의 극복이라는 매우 어려운 과정을 벗어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후유증으로써 양극화라는 위기에 봉착해 있습니다.
즉 빵만으로 살 수 없는 인간에게 적합한 분배양식을 위한 새로운 정치경제 제도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대다수 국민은 믿고 따랐으며, 기다려준 결과는 복지로써, 보상이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골고루 잘 살아야 한다는 염원을 이루기 위한 국민총화의 결과는 골고루 잘살 수 있는 분배양식이 성립되어야 합니다. 하여 지구촌 시대에 부합되는 ‘홍익인간’ 한민족의 정체성과 어울리는 새로운 모계적 분배양식을 위한 정치경제 제도로써 모민주의가 세계화되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2.2 한민족 여성의 저력
일제 식민잔재의 망령을 극복하기 위한 우선순위가 경제자립부터라는 슬로건으로 경제부흥에 매진하였습니다. 물론 자본주의사회에서 경제를 둘러싼 수많은 인적, 물적 시스템이 갖추어져야 하고, 법체계와 정치 등이 일정한 수준이 되어야 가능합니다. 하여 신생국으로써 한국의 경우 회생 불능상태로 인해 부작용도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자원 빈국으로서 한국의 산업화는 경공업을 일으키기 위해 수많은 저임의 젊은 여성 노동력이 필요함에 따라 그들의 희생이 상당했습니다. 그리고 60~70년대에 기업의 성장에 비해 저임금과 부당한 처우는 개선되지 않음에 따라 여성 근로자들이 불만을 나타내면서 결사할 때, 좌파로 매도하거나, 남자 노동자를 동원해 성폭력이나 폭력을 행사하는 등 별의별 방법으로 여성 노동자를 탄압하였습니다.
이처럼 인권 사각지대에서 여성 근로자의 춥고 배고픈 삶이 경제성장의 바탕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대다수 한국 여성은 성실하고, 우수함에 따라 산업의 기초를 이룩할 수 있었습니다. 하여 국민총화라는 슬로건 아래 전체주의적인 경향으로 인해 여성 근로자들의 희생에 대한 보상이 미약했던 것을 새로운 모계적 분배양식으로 보상이 되어야 정의 사회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복지사회라는 보상을 전제로 한 국민총화로 이룩한 국부로 인한 양극화의 유발로 오히려 비정규직과 절대빈곤층을 양산한 결과로 보게 됨에 따라 어떠한 비전을 제시해도 불신하는 사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민주적 권위조차 부정하는, 리더십 부재 현상으로 인한 고비용 저효율의 사회가 된 것입니다.
이는 기업의 극열한 노사분규로 나타나고 있는 데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정부 개입주의의 결과가 양극화로 나타나면서 형성된 불신으로 인해 만들어진 분규라 할지라도 방치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여 국가개입주의로 만든 국민총화 역량의 결과물인 부를 적극적 복지사회의 구현으로 분배해야 함이 합리적입니다.
다시 말해서 복지를 전제로 한 국민총화의 약속은 모계적 분배양식을 구현하여 개발독재의 후유증인 ‘제왕적 대통령제’로 인한 정경유착이나, 부정부패로 인한 도덕 불감증, 승자독식 문화로 인한 부패 등을 극복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정권교체가 쉽게 이루어져야 하는 민주주의의 주요특성과 모계적 분배양식은 어울립니다.
따라서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나눔을 위한 홍익인간의 삶, ‘선비정신’, ‘경천애인’ 등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전통적 가치에서 발현되었음을 상기해볼 때, 적극적 복지사회의 성립이 가능한 사회임을 알 수 있습니다.
3. 여권신장 시대
3.1 경제성장과 비례한 여권신장
여성 인권의 신장을 위한 방안으로 1977년에는 한국의 각 대학에서 여성학 강좌가 개설되었으며, 제5공화국 초기 정부 기관으로써 1982년 한국여성개발원의 설립과 여성정책 심의위원회를 설치하였습니다. 1980년대는 여성 권익향상을 위한 여성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어, 1983년 ‘여성평우회’와 ‘여성의 전화’가 개설되어 여권신장의 초석을 이루었습니다.
이어서 87년에는 한국여성단체연합이 6월 대통령직선제를 위한 민주화 투쟁에 참여하면서 남녀평등이 사회적 이슈가 되었습니다. 이어 1989년에는 전국 여성 농민위원회가 설립되어 여권신장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게 되었고, 1995년 국회 여성특위를 설치하여 여성 관련법을 제정하거나 정책을 개발하여 실효성을 갖출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80년대에 소비자운동이나 공해추방운동, 교육민주화운동 등을 통해 자본주의의 무책임과 무절제를 경고하였고, 신자유주의가 공고화된 90년대에 들어서는 무한경쟁으로 유발되는 환경오염이나 비정규직 문제, 복지사회구현, 녹색운동 등 생존권 차원이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여성운동으로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이는 자본주의의 세계화인 신자유주의 무한경쟁시대를 맞이하여 세계적 규모의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 지구온난화 등으로 지속 불가능한 위험한 사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역주의적인 부계주의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됨에 따라 지구촌 시대에 부합하는 개방적인 모계주의가 국제정치의 주류를 이루는 세계로 역사발전을 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1991년 6월 ‘천부인권’의 내용인 ‘천부소유권’을 보장하는 포스트 자본주의로써, 새로운 모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적극적 복지사회의 구현을 위한 정치경제 제도로써, ‘모민주의’(모계민주주의, Maternal Democracy, Maternalism)를 선거를 통해서 공식 선언하였습니다. 즉 모민주의의 ‘소유상하한제’를 주요 골자로 하여, 양성의 균형을 이루는 권력구조로써, 부계와 모계가 각각의 주체로써 권력을 갖는다는 의미인 국회의원의 반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탈 양극화로 위험한 사회를 극복하여 지속 가능한 세상을 만들고, 인간다운 삶을 위한 물질적 기초보장으로 남녀평등과 인종 차별금지의 실효성을 보장한다는 것입니다. 이후 러시아 대통령 고르바쵸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선언으로 세계 냉전 종식과 군사정권의 막이 내려지면서 여성운동의 활발한 전개로 여권신장이 확대되었습니다.
특히 90년대 초에 ‘태평양전쟁일본군종군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발족되어 진상규명과 보상 문제를 거론함에 따라 세상 사람들은 성차별과 여성 인권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즉 세계여성 NGO들은 각 정부에 여성 권익향상을 위한 입법과 실효성을 보장할 제도를 강력하게 요구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물론 일제에 의해서 저질러진 정신대 문제의 고발은 세계를 경악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일제의 혹독함을 세상 사람들이 재인식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90년대의 여성운동의 특징은 주로 가정폭력이나 성폭행, 임금 격차, 고용차별 등을 고발하였고, 성차별을 주요 이슈로 하여 여권신장을 위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면서 남녀평등의 실효성을 보장받기 위해 제도를 만든 시기였습니다.
예를 들어 전두환 정부에서 1982년 한국여성개발원과 여성 정책심의 위원회의 설치를 시작으로, 김영삼 정부에서 혼인한 딸자식에게도 상속권을 보장한 것은 여성에 대한 시각을 바뀌게 하면서, 여권신장이 빠르게 향상되었습니다. 그리고 김대중 정부에서 1998년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를 설치하여 여성 인권의 중요성을 부각함에 따라 남녀평등을 사회의 중요한 이슈로 되게 했습니다.
이어서 2001년 여성부의 설치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위한 정치지도자들의 이해와 노력의 결과로써, 여성 편견에 대한 인식을 획기적으로 바꾸어 호적법을 개정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여 여성운동이 인권신장과 민주주의를 공고화하고 있는 가운데, 오늘날 지구촌 시대에 필요한 녹색 생명 운동을 통해 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2 세계의 중심에 서다.
부계사회가 등장하고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모든 여성은 부계에 종속되어 있으면서 차별을 받았습니다. 물론 첨단 과학기술 시대를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10대 1의 차별지역을 제외하면 지역별로 정도의 차이나 형태는 다를 수 있지만 비슷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서구 여성들은 정치지도자로서 참여 비율이 높고 남녀 모두가 여성 정치지도자를 신뢰하며 지지하는 비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음에 따라 소액기부를 하는 여성 후원자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는 생활 정치의 주역인 여성 지도자들은 사회적 약자에게 생존권적 기본권과 행복추구권을 근간으로 유리한 정책 결정을 위해서, 그리고 입법으로 실효성을 보증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봉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선진국에서조차 부계 독점정치로 여성 지도자들은 권력의 반을 획득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아울러 자본주의 경제 제도에서 경제적 독립이 어려움에 따라 여성을 경시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복지축소를 지향하는 신자유주의시대는 양극화와 더불어 국가 경계 개념이 무의미해지고 있음에 따라 유발되는 불안정함은 생태적으로 복지적인 여성들이 힘들어지고 있다는 점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는 오늘날 고학력을 요구하는 전문적인 수월 주의 사회로 발전케 됨에 따라 실제로 여성이 서비스직으로 몰리는 현상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회적 약자가 비정규직이나 저임금 등 다양한 형태로 살아갈 가능성이 점증하고 있습니다.
이는 환경오염에 의해 질병의 치료, 먹이사슬의 변이, 온난화로 인한 농산물의 감축 등과 1대 99라는 절대적 양극화로 만들어지는 복지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워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무한경쟁과 무한축적을 위해 더 넓은 세계시장을 목표로 하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국가별로 나름대로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진 독특한 생활양식인 정체성의 훼손으로 사회통합을 이루기 어렵게 됩니다.
뿐만이 아니라 복지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여성의 삶이 고단하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비 복지적인 자본주의는 생태적으로 복지적인 여성과 불 합치함에 따라 인류의 반인 여성과 부합되는 탈 자유주의적인 분배양식을 성립해야 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지구촌 시대에 적합한 모계적 분배양식이 세계화되어야 세계 평화유지는 물론 실질적으로 남녀평등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연법사상을 근간으로 성립한 근대사회의 성립 취지와도 부합되는 것입니다.
특히 신자유주의 이념은 복지축소를 전제로 함에 따라 유발되는 폭발적인 복지 수요로 인하여 생태적으로 보살핌의 본능이 있는 여성들이 초기자본주의 때처럼, 지독한 어려움을 겪을 수 있음을 예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양극화로 사회적 약자가 증가함에 따라 요구되는 정치의 역할이 많아짐에도 불구하고, 정치 권력이 축소되는 현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자본주의에서 민주정치가 자유기업을 보조하는 정도의 반쪽민주주의로 인하여 정치적 의무를 다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초기자본주의가 예상과 달리 수많은 시행착오와 함께 인류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었으며, 제국주의로 인하여 유발된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을 겪었으며, 오늘날은 각종 테러가 빠르게 확산이 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자본주의가 발달하는 만큼, 정치 무관심, 민주적 권위의 부정, 냉소적 현상 등 정치 위기가 오래전부터 나타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구촌 시대를 살아가는 신인류에게 온전한 민주주의로써 모민주의 분배양식이 성립해야 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는 무한경쟁으로 인한 천문학적인 사회적 경비의 지출과 민주적 권위의 약화로 인한 사회통합의 리더십이 무너지고, 환경파괴와 자원고갈, 양극화로 인한 절대다수가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등으로 위험한 사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신자유주의가 공고화함에 따라 우려한 것들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는 대표적인 현상으로써, 지구온난화로 인한 생태계의 파괴나 각종 질병, 천재지변 등 재앙의 징조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는 각 지역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들임에 따라 세계가 공조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구촌 사회에서 적합한 정치경제 제도로써 경제적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모민주의가 필연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부계와 모계가 각 각의 한 축으로 존중하여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모계 민주주의가 인간에게 적합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날 헌법에서 명문화한 인권은 인간의 기본권으로써 법 적용의 해석기준이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차별금지법으로 실효성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다수 여성의 경우 빈곤하며, 의사결정의 위치에서 대다수 벗어나 피 지배적 위치에 머물러 있음에 따라 공허함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즉 현실에서 경제적 독립이 없는 여성에게 인권이란 의미가 없으며, 현실에서 불평등을 체감할 때마다, 경제적 기초가 없는 인권이란 말 잔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는 많은 여성이 헌법(국법)을 믿고서 남녀평등이 구현되도록 여성 인권운동을 한 경우 사회적 압력에 의해 개인적으로 희생 내지는 상당한 곤경에 처하게 되거나, 혹자 남성에 대한 적대감으로 인하여 유발된 불행한 삶을 살았던 사실 등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형식적으로 평등할 뿐 현실에서는 차별이 엄연히 존재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남녀평등의 인권선언을 믿고 여성들이 시민혁명에 동참했음에도 불구하고 근대헌법에서 권력의 반을 여성에게 보장한다는 명문이 없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여 남녀가 평등하기 위해서 구조적으로 권력의 반을 여성에게 보장해야 함에도, 지키지 않는 것은 정치적 수사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서구 민중의 실력행사로 쟁취한 근대사회에서 남녀가 인간적인 특성이 다르므로 역할도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여 권력의 반을 보장해야 함에도, 아직도 부계 일변도의 정치독점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근대사회를 열어 남녀평등을 구현코자 했던 서구 여성들이 흘린 피의 대가는 아직도 온전히 보상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여 인류의 반인 여성의 인권신장을 위해 다름을 존중하는 정치문화가 형성되어야 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은 서구자유민주주의 헌법 체계를 답습한 후발국임에도 불구하고, 여권신장운동이 비교적 빠르게 정치력으로 전환될 수 있는 것은, 태고의 모계 신본주의 사회를 이은 한민족의 습속에는 모계 유습이 유전화가 되어있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여 수 만 년에 걸쳐 이어온 한민족 여성이 아름다운 마음씨를 갖고 재창조로 여성의 의무를 다하였다고 볼 때 모민주의 체제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자격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권리에 대한 의무가 지킬 때 권리가 힘이 있는 것처럼, 한민족 여성이 인고의 세월을 선한 마음으로 견뎌온 사실 자체만으로도 권력의 반을 갖고 한민족의 운명을 결정할 자격(권리)이 있는 것입니다.
물론 자격이 있다 할지라도 조직에 참여하지 않은 개인 여성으로서 여권신장을 위한 몸부림은, 마치 바위 위에 달걀 치기처럼, 변화를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개인으로서 여성 인권의 의미보다 마치 노조 활동처럼, 세상의 여권신장과 연동(연대)되어야만, 여성 개인의 인권도 향상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여성 자신이 세상의 주체로써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가를 제대로 확인하고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부계의 틀을 넘은 세계를 어떻게 펼쳐갈 것인가를 연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구촌 시대의 신인류로써 여성은 모계와 부계의 균형으로 이루어지는 적극적 복지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생활 정치의 주역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