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여성환경 NGO 활동은 신인류가 겪어야 할 어려움을 완화하거나 제거하기 위한 갈망의 표현임을 우리는 느껴야 합니다.

제4부 신인류

 

제1장 자본주의

 

1. 자본주의의 태동

 

인본주의를 근간으로 성립한 근대사회의 서구자본주의는 오늘날 대다수 나라의 경제 제도로 자리 잡고 있다. 하여 서구적 가치의 역사적 배경의 한 축을 이루는 고대 그리스의 역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는 인류 최초의 대제국을 이룩한 알렉산더대왕(BC 356-323)은 자신을 신으로 숭배하도록 각 도시에 강요한 사실에서 고대 그리스가 인본주의 사회였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대 그리스의 헬레니즘(인본주의)은 로마제국의 성립과 건설까지 유럽, 중동, 인도 등에 300년에 걸쳐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헬레니즘(그리스 인본주의)의 영향을 받아 성립한 로마제국은 후일 헤브라이즘(부계 신본주의)을 수용함에 따라 여성은 소외되었다. 이는 후일 로마가 부계 편도의 타락한 성문화로 부패가 만연하게 되면서 멸망하는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로마제국(BC 2C- AD5C)은 2세기경 부계 유일신을 숭배하는 기독교가 국교가 되면서 유럽은 3세기에서 13세기까지 기독교 제국이 된 소위 ‘중세 암흑시대’를 살게 되었다. 즉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교부 철학자들이 활동한 유일신 절대 봉건제 사회에서 살았다.

또한 5세기경 로마제국이 멸망한 다음 종교제국이 됨에 따라 노예거래와 교역 등을 자유롭게 하여 부를 축적한 대상은 봉건 도시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특히 1517년 마르틴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종교개혁은 자유주의 사상을 가속화 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의 인용문에서 이러한 상황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제국의 몰락이 시작된 지 400년이 지난 9세기 무렵 상인들의 대열이 장원에서 장원으로 이어졌으며 그 뒤에도 강도떼의 공격으로부터 이들을 보존하기 위한 무장 수행원들이 뒤따랐다. 이 상인들은 점점 장원 특히 내분의 일들에 참견하게 되었다……

유럽의 대상인은 14세기경부터 봉건 도시에서 정치적 권위를 가지기 시작하였고 새로운 발전의 시도와 함께 기존 질서와 충돌하면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환경을 확장하였다. 봉건영주는 통치를 위해 돈을 부자 상인에게 빌려야 할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영국에서는 17세기 말 부르조아가 정치 권력을 장악했으며, 프랑스는 브르조아 국가가 되었다. 19C에는 전 세계를 지배하는 정치세력이 되었다.” (90) (로버트 하일브르너, 강철규역, 21C 자본주의,·현대정보문화사, 1993, 48p) 이처럼 부계 유일신을 숭배한 절대주의 토양에서 벗어나고자 한 자유주의는 불확실한 유일신 대신에 확실한 배금주의로 대체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동양에서는 공자(BC 552~479)의 유교가 통치이념으로 확산이 된 가운데, 조나라의 대상인 여불위(呂不韋)의 도움으로 등극한 진시황(秦始皇:BC 247-210)은 로마제국과 비슷한 연대에 중국을 통일하였다.

이어서 동시대에 한나라(BC 206~AD 220)가 통일을 이루고 있었지만 멸망하면서 고대 중국은 분열되었다. 하지만 고대 중국은 여러 나라들로 분열되어 있었으며 민본주의를 근간으로 성립한 동양적 봉건제는 서구와 같은 자유주의적 토양을 조성할 수 없었다.

즉 동시대에 유럽은 기독교 교황체제의 등장과 함께 로마제국의 멸망으로 인하여 봉건 도시국가로 만들어지면서 자유주의가 태동할 수 있었다. 물론 동양에서도 유럽처럼 상단에 무장 수행원을 두었지만, 서양과 달리 동양은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하는 중앙집권제였기 때문에, 낮은 신분의 상인들은 권력의 간섭을 받아야 했다. 이는 모계 신본주의 사회의 ‘신시’(神市)에서 여제사장이 상단의 주체가 되어 상호이익과 함께 문화교류를 한 사실을 종교 편에서 참고하기 바란다.

이어서 동양의 징기스칸(1162-1227)이 아시아, 중동, 북유럽 등 동서양을 아우르는 거대제국을 건설함에 따라 서구는 갈브레이드가 주장한 불확실성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는 헬레니즘(인본주의)에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어 14세기 르네상스(문예부흥기) 시대가 될 수 있었다.

이는 동서양의 교류 확대로 상호 간의 문물에 매료되었고, 유럽의 상인들은 교역으로 부자가 되면서 봉건 영지에서 정치적 권위를 갖게 됨과 아울러 인본주의(상대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과학기술에 대한 믿음이 확실하였기 때문이다.

반면 교황청은 동서 교류의 영향으로 불확실한 존재가 된 절대 존재의 종교적 권위가 약화 됨에 따라 지출은 증대하고, 수입은 감소한 재정적자 상태가 되었다. 이로 인해 면죄부를 팔아야 했다.

이처럼 교권의 추락은 16세기 초엽 마르틴루터에 의해 종교개혁을 부르짖게 된 원인이 되었고, 동시에 대상들의 후원이 중요하게 됨에 따라 대상들은 자연히 권력의 핵심으로 다가설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절대 존재를 불신하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겪으면서 부계 유일신 종교의 권위와 절대 봉건제의 정치 권력이 동시에 약화 되면서, 중상주의가 등장하게 되었고, 이는 국가보다 개인을 우선하는 개인주의(자유주의)가 발현되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유럽의 종교지도자들은 대체로 낮은 계층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관계로 상인이나 생산자에게는 호의적이었던 반면, 정치 권력에 비판적이었던 것이나, 신 아래 만민평등을 설파한 마르틴 루터의 영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 되면서 자유주의가 구체화 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상인들이나 시민의 자유가 확장되어 있었음에도, 여전히 여성은 소외되어 있었다. 하여 종교적으로 뛰어난 수만 명의 여성에게는 마녀라 하여 가혹한 형벌을 가했다는 사실에서 볼 때, 남성들만의 자유주의였음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자유주의는 전체주의에 반동한 절대적 개인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사회성을 간과한 극단적, 편향적인 측면이 있다.

 

 

1.1 자유기업주의

 

서구의 식문화는 동방의 후추나 향신료 등을 선호했다. 하지만 이슬람 제국에 의해 교역이 방해를 받게 됨에 따라 유럽은 새로운 교역로를 열기 위해, 16C 포르투갈의 항해를 시작으로 해서 스페인의 콜롬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하는 등 해양무역 시대를 열게 되었다.

그리고 유럽은 새로운 문물의 교역 확대와 식민개척으로 소비시장의 확대로 공업화를 이룬 결과, 영국은 18세기 후반 방직공업과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산업혁명을 이루었다. 이어서 이에 걸맞은 생산양식인 자본주의 경제 제도를 아담스미스에 의해 창안되었다. 이처럼 자본주의는 자본의 경제적 세력을 가지고, 이득을 위해 이권이나, 상권 등의 패권을 가지려는 주의라고 한 사전적 의미에서도 특성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19세기 후반에 자리 잡은 자본주의라는 용어는 아놀드 토인비에 의해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어떤 학자는 자본주의의 얼룩진 과거와 예측할 수 없는 미래 때문에 산뜻한 의미로 ‘자유로운 사적기업제도’라고 부른다.” (91) (같은 책 50p) 이는 오늘날 ‘자유기업주의’로 이해할 수 있다.

하여 서구의 자유주의는 개인 상호 간의 자유경쟁을 위해 국가의 개입을 거부하며, 자유경쟁을 통해 만들어지는 물질 풍요만이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고 믿는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자유주의 사상이 상업을 발달케 하였다. 그리고 대상인들의 정치후원은 정치참여를 가능케 하면서 사회적 지위를 높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상업주의를 발달케 하였으며, 부의 축적을 위한 해외시장의 교역확대나, 자원 확보와 소비를 위한 식민지 개척 등이 활발하게 될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산업혁명이 태동하였다.

즉 자유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상업주의는 산업혁명을 일으키고 이어서 자본주의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어서 자유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가 구시대의 부패를 눈뜨게 했다. 그리고 산업혁명으로 요구되는 새로운 체제의 필요성에 의해 시민혁명이 일어나게 되었다. 또한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인구 도시집중과 더불어 소득이 발생하는 곳으로 이동함에 따라 각박한 사회를 형성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17세기 영국의 엔클로져 운동으로, 17세기 후반 농업보다 고수익의 양모무역은 농민을 몰아내고 축산을 하게 된 결과로 농민들이 150년간 유랑민 생활을 하여 엄청난 사회문제가 발생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영국에서는 엔클로져(enclosure)운동과 더불어 영국인들이 축산업을 시작하게 되자 많은 농노들이 농토를 잃고 도시로 나가게 되어 그들의 노동력을 팔게 되는, 즉 생산요소로서의 노동이라는 개념이 성립되게 되었다.” (92) (자본주의 성립과 발전, 강강화, 국민경제제도 연구원, 범신사, 1991.7p)

아무튼 자유기업 간의 경쟁은 생산성 향상과 규모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한 대자본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고 해외 교역에서 자연재해 등으로 인한 피해를 부담하기 위한 주식이나 채권 등으로 자본모집을 활성화함에 따라 자본의 이식을 위한 다양한 회사로써 금융과 법률 자문회사 등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우수한 품질의 공산품을 양산하기 위한 공업화는 대자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는 일반시민에게도 투자의 길이 열렸던 놀라운 발전이었다. 하여 돈으로 돈을 버는 것을 귀족에게만 허용되었던 구시대 사고방식으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2. 자본주의의 성립

 

2.1 산업혁명으로 성립한 자본주의

 

중세유럽에서 부는 대부분 권력자의 것이었고, 권력자와 결탁한 대부호의 것이었다. 당시 사회에서 부를 축적한 대상은 정치적 영향력을 갖게 되었던 반면, 소상공인들은 정부의 간섭에 불만이 있었으나, 권력자에게 대항할만한 부를 갖지 못했다.

그리고 식민개척과 해외시장확장으로 폭발적 수요가 만들어낸 산업혁명에 적합한 제도가 필요하게 되었다. 하여 아담스미스는 자신의 저서 ‘국부론’에서 자본주의 경제학을 체계화하였다.

하여 산업혁명이 체제변화를 요구하게 됨에 따라 자본주의를 만들었고 이어서 유발된 시민혁명은 구시대를 퇴출케 하여 근대사회가 성립될 수 있었다. 즉 명분보다 실리를 우선하는 개인주의(자유주의) 사회로, 자유방임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기능 국가 사회로 변모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존 로크의 자유주의(개인주의)로부터 구체화 되기 시작했다. 로크가 ‘시민의 정부에 관해 두 개의 논문(1760)’에서 자신의 노동은 자신의 것임에 따라 재화를 소유하기 위한 자유로운 노동을 할 수 있는 노동 권리의 중요성을 주장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즉 노동이 재화를 소유할 수 있는 근원이기 때문에 개인은 권력으로부터 자유의 확장이 필요하다고 역설한 것이다. 물론 당시 사회가 봉건왕조가 국가자산을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동자산으로써 자연물을 취득하기 위한 자유노동으로 개인소유가 가능하다고 주장한 것은 상당한 충격이었다. 이후 아담스미스가 인간의 자유노동을 신성불가침한 것이라고 하여 개인의 절대성을 근간으로 한 자유방임주의가 성립되었다.

아무튼 자유주의가 중세유럽의 르네상스부터 구체화 되기 시작했다. 이는 르네상스 시대의 중심적 역할을 했던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15~18세기까지 번영했던 대부호 메디치 가문(Medichi Family)의 금융업에서 이해된다.

즉 소유물과 화폐를 위탁받아 보관하고 보관료를 받거나, 자체 신용에 의해서 발행한 증서로써 매매나, 교환의 중개료를 받았다. 이는 당시의 경제 규모가 소규모로써 오늘날 창고업과 유사한 형태였다고 할 수 있다.

하여 대규모경제에서 만들어진 자본주의는 은행에 저축하여 이자를 받거나, 직접투자 방식인 유가증권을 취득하여 이식이나 배당을 받는 등, 돈이 돈을 버는 것을 공식화한 것과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즉 르네상스 당시의 서구는 기독교문화를 근간으로 하였던 까닭에, 돈이 돈을 버는 형태인 이자나 이식을 불로소득이라 하여 금기시했다. 하지만 18세기 말에 산업혁명과 더불어 성립된 자본주의가 돈으로 돈을 벌 수 있게 도덕적 정당성을 갖게 함에 따라 인본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근대사회가 성립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즉 재산을 자본화할 수 있게 되었고, 임대료처럼 차용금에 대한 이자를 주는 현상이나, 직접투자로써 주식이나 채권 등의 유가증권을 통해 배당수익이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해외 교역의 위험부담을 분산하기 위해 투자모집을 하는 등으로 인하여 대규모 경제로 발전하면서 메디치가의 재화 중심사고가 막을 내리게 되었으며, 자연스럽게 자본(금융)이 중심이 되는 사회로 발전되었다.

따라서 공급경제로 유발된 산업혁명은 대량생산을 위한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만들고, 자본모집의 방식이 발달하면서 자연인과 법인의 개념이 확립되었으며, 더불어 과학, 경제학, 법학 등 여타 학문이 발달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산업혁명은 배금주의를 형성하게 됨에 따라 과학기술을 발달케 하면서 인본주의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었고, 상대주의로써 민주주의를 인류의 이상으로 신뢰를 가진 원인으로 볼 수 있다. 뿐만이 아니라 산업혁명은 노동자의 이동이 가능하게 되었고, 다수의 자본가가 실력자로 등장함에 따라 절대주의 체제가 붕괴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중앙집권 현상으로 권력 양극화와 인구의 도시집중 현상으로 인한 인구감소 등을 극복하기 위해 봉건귀족들은 대상인들과 정경유착하면서 투자에 참여하고, 소상공인에 대해서 지나치게 간섭하는 등 부패했기 때문이다.

또한 산업화로 절대 봉건제에서 억압을 받았던 농노가 정치 경제적 자유를 위해 탈출할 수 있게 됨에 따라 형성된 봉건영주의 재정 악화도 원인이었다. 따라서 절대 봉건제가 무너진 것은 봉건귀족과 대자본가의 결합으로 1대 99라는 절대적 양극화가 형성되어 절대빈곤층이 폭넓게 확대된 결과로 볼 수 있다.

 

 

2.2 아담스미스 자본주의

 

산업혁명을 뒷받침하고 발전시킬 이론이 필요한 상황에서 아담스미스(1723-1790)가 당시 산재한 경제이론을 체계화하여 만든 것이 ‘국부론’(1776)이다. 이는 인류 최초의 경제학으로써, 소위 자본주의 이론으로써 중요한 의미가 있다. 즉 개인의 이기적 목적을 위한 자유경쟁을 국가가 간섭하지 않을 때,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자동조절 되면서 전체가 조화롭게 된다고 주창하였다.

이는 ‘보이지 않는 손’의 의미가 시장원리로써 여러 가지의 복합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만, 시장에서 교환수단인 화폐의 힘이 자동조율의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는 의미로 볼 수 있음에 따라 화폐경제가 뚜렷하게 부각이 된다.

하지만 아담스미스가 개인의 중소기업을 역설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가는 법인을 활성화함에 따라 초기자본주의에서 부르주아가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마치 구시대의 귀족처럼, 민중 앞에 등장하였다.

즉 민중들이 예전에는 절대 봉건제라는 전통에 의한 지배를 받았지만, 부르주아의 금력에 의해 지배되고 착취를 당하게 되었다. 하여 자본주의에서 인간은 상품이나, 소모품처럼, 변모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초기자본주의가 착취를 정당화하는 빛 좋은 개살구였음을 하일브로너의 글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은 몇 가지에 불과한 작업을 수행하면서 생애를 보낸다.… 이해력을 발휘할 기회도 갖지 못하고 ······ 더할 수 없이 어리석고 무지한 상태가 되는 것이 보통이다 ······ 19세기 초반까지 작은 규모였던 공장들은 여성과 소년들까지 동원하여 겨우 생존하는데 불과한 임금만을 지급하면서 혹독한 상황에서 노동을 시킨 ‘악마의 공장’에 밀려나기 시작했다.

디킨즈의 묘사를 통해 그러한 영국의 뒤안길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당시의 양심 있는 사람들을 경악케 했던 바로 그 공장들이 대규모 축적의 중심이었을 뿐 더러 해외로까지 손을 뻗치는 1차 기지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별반 언급이 없다.” (93) (R 하일브로너, 57~58p)

이처럼 빈민 여성의 출산은 노동력확보로 생각할 만큼, 혹독하고 부패했던 구시대를 타파하기 위해 쁘띠부르조아(소상공인)의 자금과 자유주의 지식인 및 유산층으로서 시민과 함께 민중이 합류하여 시민혁명을 일으키는 것은 당연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참고로 당시의 신분제 사회에서 시민은 농노와 다른 중산층으로 볼 수 있으며, 일반 민중보다 상위그룹을 의미하지만, 구태여 시민과 민중을 구분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단지 시민혁명 후 정부와 민중 사이의 가교역할을 한 새로운 주체세력으로써 시민단체(정당)를 만들어 여론을 주도한 계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오늘날 의미의 중산층인 시민이 중심이 되고, 하층민과 민중이 연대하여 자유, 평등, 박애라는 구호 아래 구체제를 퇴출케 하였다. 하지만 중산층이 혁명을 주도하여 근대사회를 열었음에도, 민중들은 굶어 죽을 자유밖에 없었다. 하여 경제적 자유주의로써 자본주의와 인간 존엄을 구현하고자 하는 근대 민주주의 사회는 배치됨을 이해할 수 있다. 즉 철학적 상대주의를 근간으로 하여 성립한 근대사회는 모계적 분배양식으로 역사 발전되어야 했다. 왜냐하면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없는 문화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날 인류는 ‘경제적 동물’로써 살고자 하는 사람이 증가하는 만큼, 존재의 삶을 추구한 성현들의 삶을 따르는 사람도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신자유주의가 문화적 존재인 인간에게 ‘경제적 동물’로 변모하도록 강제하는 것은 역사퇴보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시민혁명으로 근대사회가 성립된 지 200년을 넘어 지구촌 시대가 된 오늘날, 시민혁명 정신으로써 자유, 평등, 박애의 인권선언과 부합되는 적극적 복지사회가 성립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자본주의사회가 만들어내는 과소비의 결과로써, 자원고갈과 생태계 파괴, 난개발, 환경오염이나, 인간성 황폐화 등으로 인한 위험한 사회를 벗어나기 위해서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모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체제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오늘날 우리나라를 비롯해 미국 등 세계 일부 지역에 벌들이 폐사함에 따라 식물들이 수정할 수 없어서 유발된 농작물 감소로, 먹이사슬이 무너지고 있는 경우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위험을 예고하는 징조이다. 다시 말해서 부계적 분배양식에서 벗어나야 인간이 살아갈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이 만약에 세상의 벌들이 전부 죽는다면 4년 이내 인류는 멸망한다고 하였던 주장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2011년 3월 일본 후쿠시마에서 있었던 대형 쓰나미, 지진 등으로 인한 원전 사고는 체르노빌보다 피해 범위가 훨씬 넓다.

이러한 현상으로 인하여 유발되는 천문학적 경비의 지출을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과 아울러 인류가 소탐대실한 사실을 깨닫게 될 때쯤, 이미 늦었다고 볼 수 있다. 즉 부계적 분배양식의 종말을 의미하는 적극적 복지사회를 위한 근본적인 변화가 없이 임시방편에만 의존하려는 태만함의 결과를 감당할 수 없게 됨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문화적 존재임에 따라 모계적 분배양식이 생태적으로 적합하다는 사실은 태고모계사회부터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애써 무시하며 탐욕을 배양한다면, 성현의 경고는 실제로 일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여 모계 신본주의 사회가 내면세계와 외면세계의 균형을 이루고자 했던 것이나, 오늘날에도 인간의 사회성과 개인성이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 것처럼, 인간은 언제나 영육의 균형을 이루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지구촌 시대를 살아가는 신인류는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존재의 삶’을 위해 적극적 복지사회가 성립되도록 노력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참고로 모계 신본주의 사회가 대자연의 순환처럼 인간도 영적 존재로서 완숙한 인간이 되기 위해 순환 진보한다고 생각함에 따라 죽음을 삶의 일부분으로 생각하였으며 영혼과 물심양면(物心兩面)의 3박자가 균형을 이루며 무한한 삶을 살아가는 이상적인 사회였다고 전하고 있다.

즉 약간 부족한 삶을 만족하며 살아감으로써 풍요한 생활이 가능했고 행복 지수가 높은 사회였다. 또한 모계사회가 야만적이지 않았음을 모계 신본주의 사회는 모계 유일신을 숭배했다는 사실과 인간 스스로 대모신의 후손으로 믿었다는 점이나, 공유제로 복지사회를 구현한 사실 등으로부터 긍정할 수 있다.

물론 모계 신본주의 사회는 나눔으로 얻어지는 평화와 풍요한 자연에서 행복한 인생을 살았다. 이는 경제학자 하일브르너의 글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전통이 지배하는 사회라 해도 반드시 절망적인 빈곤의 수준에 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인류학자 마샬살린즈는 부족민들의 기대치를 충분히 채우는 방식이 확립되어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서 그러한 사회들을 ‘최초의 풍요한 사회’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94) (하일브르너, 28p) 하여 태고의 모계사회가 원시 부계사회보다 풍요한 사회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부계사회에서도 행복한 삶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한 결과인 자본주의가 인간의 행복한 삶을 위해 봉사하고 있지만, 인간의 상품화로 세상의 반인 여성이 불리할 뿐만 아니라, 1대 99라는 절대적 양극화와 과소비로 인한 위험한 사회를 벗어날 수 있는 체제를 성립해야 함을 알 수 있다.

 

 

3. 자본주의의 공고화

 

절대 봉건제와 배치되는 자연법사상과 철학적 상대주의를 근간으로 경험주의, 자유주의 사상 등과 함께 만들어낸 결과물로써 영국의 산업혁명은 자본주의를 성립하게 했다. 이는 부정부패가 만연했던 프랑스 귀족을 퇴출한 프랑스대혁명(1789년)을 유발케 한 원인으로 볼 수 있다.

즉 산업혁명은 인본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근대민주주의 사회로 진보하게 했다. 물론 17세기 유럽 봉건영주들의 권위는 이탈리아에서 발현된 르네상스를 일으킨 대상(大商)들에 의해 약화 되었다.

그리고 경제적 부르조아가 쁘띠부르조아(정치적 부르조아)를 육성하기 위해 문화와 예술, 학문, 결사, 지적 활동 등을 돕거나, 자유주의(개인주의) 논리의 정당성을 위한 지식인의 집필활동이나, 새로운 정치문화에 대한 활발한 논의 등을 위한 중소 상인들의 후원도 근대사회를 여는 초석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경제적 부르조아들은 정부의 간섭을 싫어했지만, 절대 봉건제에서 달리 방법이 없음에 따라 정경유착을 근간으로 한 중상주의를 추구하였던 결과, 상호 간에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얻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대상들은 이익을 위해 절대 봉건영주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으면서, 정치적 권위도 획득하여 노동자를 착취할 수 있었던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민중의 생활은 곤궁하여 정치 불신이 만연하게 되었고, 아울러 상인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정치적 부르조아를 통해 영주에게 압력을 행사하는 이중적 태도 등에 의해서 권력이 약화 되었다.

그리고 절대 봉건제 국가의 중상주의가 대부호를 만들었으며, 권력 유지를 위해 돈이 필요한 권력자는 대상과 결탁하면서 소상공인의 상행위를 지나치게 간섭하면서부터 시민과 민중은 봉건귀족에 대해서 적대 의식을 가졌다.

즉 경제적 부르조아는 부와 권력과 명예를 독점적으로 차지한 가운데, 대자본을 축적함에 따라, 국가의 부는 총체적으로 향상되었지만, 민중은 궁핍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러한 현상은 정치적 부르조아들과 유산층인 시민의 불만을 자극했고, 특히 유산층의 여성들은 사회의 주요 불만 세력으로, 토론과 좌담의 장소였던 살롱에 참여하여 논변하면서 사교계의 새로운 세력으로 급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서구의 유산층의 여성들이 사교계에 적극적이었던 이유는 중세 때 유산층 여성들조차 소외되어 있었으며, 서구 여성들의 한이 깊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봉건제에서 농기구조차 사지 못할 정도의 극빈 농노가족에 속한 여성은 노예보다 힘든 생활을 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하여 소외된 여성들은 자유주의가 무르익어 가는 사회적 환경에서 여성해방과 더불어 여권신장의 꿈을 이루기 위해 적극적인 참여를 하였다. 물론 중국의 태평천국의 난에서 여성들이 남녀평등의 강령을 갖고, 탁월한 조직력과 맹렬하게 참여한 것만큼, 강력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유산층 여성들의 사회참여는 인류의 위대한 유산인 근대사회를 성립하게 한, 1789년 프랑스대혁명을 일으킨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혁명을 주도하고 전개했던 수많은 여성 지도자들의 생활은 비참했으며, 집권한 남성 지도자 아내들의 질투로 인해서, 탁월한 여성 지도자들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거나 파멸되었다.

즉 여성 지도자들이 토끼사냥을 하고 난 다음 사냥개를 잡아먹는다는 ‘토사구팽’을 당한 것이다. 이는 시민 사회가 성립된 후 여성 상호 간에 불신으로 여성이 여성의 적이 되었던 이유이다. 즉 여성은 남편의 지위가 자신의 지위와 같은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가족이기주의적인 경향으로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는 것을 거부하는 이중성이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여성의 경우 여권신장이라는 공동의 목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양극화로 인한 여성 양극화로 인하여 유산층 여성들이 가족이기주의적이고, 진보로 이룬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보수적으로 변모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참고로 당시에 혁명에 참여한 여성 중의 한 사람인 테로아뉴 드메리클의 삶에서 앞의 사실들을 이해할 수 있다. “그녀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잊지 않았다. 지주와 징세관이 집에 남아 있는 마지막 빵 조각까지도 빼앗아가던 그때의 일들 … 테로아뉴는 그녀에게 돈을 탕진한 금전 숭배자들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매정하게 파산시켰다.

그렇게 해서 그녀는 집과 보석과 훌륭한 마차를 가질 수 있었으며 하인도 부리고 저축도 할 수 있었다. 1789년 불란서 파리에서 그녀는 더 이상 방종한 고급 창녀가 아니었다. 테로아뉴는 가두의 대중과 함께 행진하고 혁명가를 불렀으며 귀족들을 매도했다. … 군중 속에서 그녀는 불행하게 학대받아온 몹시 의기소침한 여자들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 여성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 (95)(김성원 편역, 혁명기의 여성들, 한울림, 1985, 12~13p)

테로아뉴의 연설문에서,

“…프랑스의 여성이여! 다시 한번 되풀이하지만, 우리의 사명은 숭고합니다. 우리의 족쇄를 끊읍시다. 남자들의 불공평한 오만과 무지에 그토록 오랜 세월을 굴종해 온 여성, 그 여자들도 이제야말로 우리 몸을 붙잡고 있는 고정된 보잘 것 없는 세계에서 탈출할 수 있는 때입니다.

우리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는 갈리아족과 자랑스러운 게르만족의 여자들이 공공 집회에 참가하고 남편과 함께 투쟁하여 자유의 적을 격퇴했던 그 시대를 생각해보십시오. … 포용력 있는 여성 여러분, 나의 말을 들어주신 여러분 우리도 무장합시다. 군사훈련을 받고 프랑스여군 명부에 맨 먼저 등록합시다. 조국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모두 모여서 여성부대에 들어갑시다.” (96) (같은 책 20p)

간략히 살펴보자면, 테로아뉴는 1789.7.14 日 바스티유 감옥을 선두 진격했으며 남자들을 설득해서 베르사이유로 진격하여 국왕 루이 16세를 끌어내서 직접 규탄도 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재산을 거의 탕진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천 년간 억압을 받은 여성들은 새로운 변화에 능동적이지 못하여 가정으로 돌아갔다.

이처럼, 테르아뉴는 여성해방운동에 선구적 역할을 하고 공헌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자코뱅 클럽의 회원이 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만든 부인클럽도 여성들이 가정으로 돌아갔으므로 폐쇄하게 되었다.

그 후 자코뱅파의 온건 부르조아였던 지롱드파의 브릿소와 친하게 되었으며 여성해방과 뜻을 둔 그녀는 남성에게도 여성에게도 버림받는 처지가 되었고 자코뱅의 여성들은 그녀를 참혹하게 린치를 가했다. 그 후 그녀는 정신병자가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 시대의 또 다른 부류의 여성으로써 마농 롤랑의 예를 들어 보자. “마농은 자신이 상인의 자녀이면서 평민으로서 있다는 사실을 어릴 때부터 싫어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평민을 싫어했고 자존심이 강한 여성이었다. 하지만 영특한 여성으로서 귀족의 여성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도 귀족들은 그녀를 싫어했다.

그래서 그녀는 신분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부르조아 철학자 늙은 롤랑과 결혼하여 롤랑부인이 된 후 노동자를 혹독히 부려야 한다고 하면서 동시에 귀족의 방만한 생활도 비난했다. 즉 1789년 롤랑은 리용의 공업검찰 장관으로 있으면서 귀족 생활을 하였는데 돈은 있어도 배운 것이 없는 부르조아와 부인들에 대해 경멸하는 듯한 마농의 언동은 분노를 자아내게 했다.

이러한 마농의 권력욕을 이용하기 위해 지롱드파의 브릿소는 살롱을 개설하여 마농을 끌어드리려 했으나, 온건 부르조아적인 자유 기업관을 갖고 있었던 브릿소를 신용할 수 없었던 까닭에 마농은 그를 피해 다녔던 반면 마농은 로비스피에르를 가까이하고 싶었지만 거만한 마농을 멀리하였다.

그녀는 여성해방을 위해 행동하지 않았고 기회주의적인 처신을 하여 1772년 대신으로 임명되었고 소원대로 호화롭게 살게 되었다. 하지만 1789년 혁명과 함께 사임을 하였는데 그녀의 살롱은 상인을 옹호했던 지롱드파의 사령부가 되었으며 여성과 빈천한 자를 무시함에 따라 여성과 빈곤자의 조직이 없었던 마농은 혁명의 말기에 이르러 민중의 적이 되었다.

결국 지롱드파의 배후에서 조종하는 잔재주 많은 여성으로 기록되면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마농은 자유의 여신상을 향하여 ‘아! 자유여, 당신의 이름으로 어찌 이처럼 많은 범죄가 행해질 수 있단 말입니까?’라고 부르짖었다.“ (97) (같은 책 93p)

위의 두 여성만이 아니라 대다수 여성 지도자들은 부계주의를 극복할만한 축적된 지식이나 사상이 정립되지 못한 상태에서 불만을 터뜨리는 정도로 감정에 호소할 뿐, 논리적이지 못함에 따라 한계가 있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신념체계나, 정치적 경험 부재, 훈련 부족 등과 조직화를 위한 핵심 동지가 없는 상태에서 세력을 형성할 수 없었다 할지라도, 이러한 일들로 인하여 여성들은 각성하고 내공을 쌓는 계기가 됨에 따라 후일 여성운동의 초석이 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즉 여성 개인의 고달픈 영혼을 위로받기 위해 투쟁하였던 여성들로 구성되어 여성 인권운동을 전개한 것은, 서구 기독교문화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획기적인 일로써 여성들은 자신감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즉 근대사회가 성립되었음에도, 여성들은 마치 어린이와 같은 무지한 상태임에 따라 분열되었지만, 후일 많은 여성은 여권신장이 인류의 인권신장임을 이해하면서부터 여성의 결사로 사회참여가 본격화하게 된 것이다. 이는 당시의 여성들이 어떠했는가를 알려주는 내용을 메리 울스톤 클라프트가 한 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남자들이 부정하든 긍정하든 권력과 명예를 향해 가는 길은 다양합니다. 그리고 남자들은 서로 충돌이 있을지라도 (왜냐하면 동일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친구인 경우는 좀처럼 없기 때문에) 혹 그럴지라도 결단코 충돌이 없는 사람의 수가 훨씬 많습니다. 그러나 여자들은 여자끼리의 관계에서 완전히 다른 생태에 있습니다. 여자들은 모두가 각각 서로 경쟁자인 것입니다.·······

여자들은 과대망상에 빠지지 않고 서로 질투하지 않는다면 여자들은 초인적인 미덕의 주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복장, 쾌락, 지배권에 대한 지나친 욕망은 미개인들에게는 특유한 정열입니다. 요컨대 이것을 오성의 범위를 넓힐 수 없고 또 주의를 도출하는 수미 일관된 추상적 사상에 이르는데 필요한 사고능력에 아직 익숙지 못한 무지한 인간들을 조정하는 정열입니다.

따라서 여자들이 이러한 교육의 결과 문명사회의 현상에 있어서 다름 아닌 이러한 미개의 상태에 있다는 것은 논의의 여지없이 있을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합니다.”라고 메리는 쓰고 있다. (98) (같은 책 249p)

 

 

3.1 착취의 정당화

 

여성들은 스스로 보호를 받을 수 없음에 따라 모래알 같았던 여성들은 이기심을 배양하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착취의 대상으로 손쉽게 전락 되어 노동의 변두리에서 살아야 했다. 이는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에는 노예나 여성이 별반 차이가 없었으나, 산업혁명 이후 노동시장의 수요급증과 더불어 인구가 도시로 집중함에 따라 말썽 많은 노예제도를 폐지하고, 오히려 빈곤층의 남성이나 여성으로부터 더 많은 착취가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즉 당시 사회에서 자본가들은 물질의 풍요로 세상을 구제할 것처럼, 홍보함에 따라 봉건제에서 살았던 농노는 장밋빛 꿈에 젖어 도시로 도망하면서, 봉건 농노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했고, 동시에 도시인구집중으로 인하여 유발된 높은 실업률로 노동시장이 붕괴가 됨에 따라 아이들까지도 돈벌이에 나서야 했다.

다시 말해서 민중들은 자유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러야 했으며, 도시빈민가에서는 인간성 황폐화로 인한 전대미문의 범죄와 더불어 엄청난 산업재해 등으로 노예보다 못한 비참한 생활을 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하여 초기자본주의의 생활은 노예노동보다 합법적으로 가혹했던 생지옥으로 볼 수 있다.

즉 임신, 출산, 수유, 양육, 가족복지 등의 가사노동과 아울러 임금노동이라야 부업거리 반찬값 정도임에 따라 참담한 생활을 했다. 그리고 가부장들은 노동시장의 경쟁으로 성과에 비해 턱없는 저임금과 열악한 환경으로 인한 많은 산업재해로 사망, 사고를 당한 경우가 많음에 따라 이를 감당하는 여성은 이중 고통을 당하였다. 하여 근대사회가 성립되었음에도, 여성들은 구시대보다 별로 나아진 것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자본가들의 혹독한 착취로 이익을 극대화하고, 자본을 축적하는 만큼, 여성의 삶은 고단했기 때문이다. 물론 근대사회가 성립된 후 자본가의 지나친 착취를 간섭하지 않은 자본주의에 반등한 사회주의가 생성된 사실로 볼 때, 민중의 생활이 생지옥과 같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는 자유주의자들은 자유경쟁으로 물질을 풍요하게 할 때, 인간답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인하여, 인간의 내면세계에서 발현된 종교나, 관념적인 정치의 영역보다 형이하학의 경제적인 부문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하여 실제로는 자유주의자들로서 자본가들만 풍요로웠을 뿐, 민중의 생활이 비참했던 사실로 볼 때, 부자를 위한 사상임을 이해할 수 있다.

 

 

3.2 여성에게 불리한 자본주의

 

시민혁명의 결과로 만들어진, 1804년 공포된 나폴레옹 민법전의 주요 골자인 사적자치(私的自治), 무주물선점(無主物 先占), 과실책임(果實責任), 계약자유원칙(契約自由原則) 등은 자연법사상(自然法思想)과 함께 경제적 자유주의를 근간으로 자유경쟁을 보장하기 위한 법전으로써 의미가 크다.

하지만 프랑스혁명의 인권선언의 핵심인 자유, 평등, 박애와 자유주의 사상은 민법전의 기초가 되었음에도, 가부장권의 강화라는 특이한 면이 있었던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즉 아내가 남편에게 종속됨에 따라 아내는 재산의 취득이나 매매를 할 수 없었다고 명문화한 것은 자연법사상과 배치되는 것이다. 물론 시민혁명을 일으킨 명분이라 할 수 있는 인권선언의 취지와도 부합되지 않았다.

또한 주인이 없는 물건은 먼저 취득한 자가 임자라는 의미인 ‘무주물 선점’이라는 원칙으로 만든 일방적인 법에 근거해 등기함으로써 식민지의 자원을 소유할 수 있었다. 즉 해외식민지를 마치 무인도와 같이 생각하여 서구적 사고로 일방적으로 설정하였다.

예를 들어 인디언의 전통적인 분배양식은 공유제임에 따라 누구나 개척 경작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서구는 경작을 하지 않아도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한 점에서 문화적 차이가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즉 원주민 나름대로 고유한 문화나 생활양식이나, 소유양식 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구는 일방적인 기독교적 세계동포주의로 문화적 차이를 무시하거나, 서구적가치를 원칙으로 하여 지키도록 강제하며, 적자생존을 들먹이며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소유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였다. 이는 수천 년에 걸쳐 공고화된 각 지역의 생존 양식과 전통문화를 무시할 수 있을 만큼, 무기가 발달함과 동시에 지나치게 착취기술이 발달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미개한 지역의 경우 먼저 도착해서 약간의 사례로 등기를 했던 경우도 있다. 하지만 먼저 본 자를 정부에서 기득권을 보장하였던 사실로부터 해외 식민개척을 활성화하기 위한 면이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예를 들어 기독교 유일신의 허락을 받은 우월적 존재처럼,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자신들의 논리로 합리화하여 수탈했음을 묵인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아메리카는 사실상 인디언이 조상 대대로 수천 년에 걸쳐 이루어놓은 삶의 터전으로써, 사실상 공동소유를 근간으로 실효적인 지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인소유를 위한 등기는 의미가 없었으며, 서구적가치인 자유주의 사상을 이해할 필요가 없었던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서구인들이 만든 올무에 걸려서 빼앗겼다.

이는 정복 전쟁을 통해서 지배하였다면, 문제가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경제원칙에 의해 최소의 경비로 최대의 이익을 낼 수 있는 식민지 개척을 하는 방편으로, 자신들도 불확실하게 생각하는 기독교를 내세워, 부계 유일신의 피조물로써 인간 동료를 위한다는 명분인 복음주의로 자연스럽게 접근함으로써, 경계심을 풀게 하였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이미 오래전에 유럽의 기독교 성지를 되찾겠다는 십자군 전쟁의 이면에는 경제적인 이유가 있었다는 사실과 함께 계속 기독교 교리를 명분으로 이익을 취한 이율배반적인 역사적 경험한 나라들이 제삼세계를 형성한 사실에서 그들을 감정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기독교와 대립하거나, 아메리카대륙의 약소 민족으로 전락한 인디언의 경우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역사적 경험으로 형성된 절대 존재의 불확실성은 가치체계에 상당한 변화를 일으킨 결과, 가치 부재로 인한 아노미 현상을 겪은 사람들은 소유를 위해 종교든, 정치든, 무엇을 이용하든 간에 상관없다고 하는 실용주의적인 사고가 팽배해진 결과로 볼 수 있는 제국주의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불확실성의 시대를 겪으면서 만들어진 탐욕을 정당화한 초기자본주의는 부르주아의 탐욕을 양성화하여 착취기술이 도를 넘을 만큼, 발달함에 따라 사람들은 영혼을 팔아서라도 빵을 구해야 하는 상황으로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사람들은 장밋빛으로 보았던 자본주의를 불신하여 사회주의를 창안했으며, 공산당선언까지 한 사실로부터 초기 자유방임주의가 어느 정도였는지 이해할 수 있다. 즉 시민혁명의 명분이었던 인류의 인권선언으로 시민혁명을 성공시킴에 따라 근대사회가 성립되었음에도 시민혁명의 인권선언과 배치되는 당시 자본가의 착취는 횡포 수준으로 도를 넘었으며, 대외적으로는 식민정책을 고수하면서 노동착취를 했다.

예를 들어 나폴레옹 민법전에서 가족의 결속은 국가의 결속이라고 함에 따라 가부장제국가로써 가부장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던 반면, 자연법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시민혁명으로 성립된 근대사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은 종속적이었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나폴레옹은 근대사회를 세계화하기 위해 인접한 절대군주제 국가를 공격해서 빠른 기간 내에 정착시킴에 따라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 발전하였던 것도 사실이다.

아무튼 시민혁명의 성공으로 성립한 근대사회는 국가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공언한 점과 국가권력이 총구에서 나왔던 절대 봉건제의 구시대와는 근본적으로 다름을 이해할 수 있다. 즉 자연법사상을 근간으로 성립된 근대 민주주의 국가는 주권재민의 국가로서 국민에 의해 국민 스스로 꾸려가는 국가임을 말하는 것이다.

하여 인류는 인간 존엄을 구현하기 위해 성립한 근대사회를 스스로 만들면서,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는 토대를 준비했다고 할 수 있다. 즉 서구가 부계 유일신에서 벗어남에 따라 여성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게 한 점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부르주아를 지향하는 자유주의와 복지주의를 내재한 민주주의는 상반됨에도 불구하고, 결합이 될 수 있는 것은 민주주의가 절차적 정의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류의 이상인 적극적 복지사회의 구현을 위해 민주주의가 절차적 정의에 머무르지 않고, 형식과 내용이 일치하는 온전한 민주주의로써 모계 민주주의가 성립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분권을 본질로 하는 민주주의와 부합하는 적극적 복지사회를 구현하는 것이 근대정신으로 시민혁명 정신에 부합됨을 알 수 있다.

 

 

4. 자본주의의 한계

 

4.1 지구촌 시대에 부적합

 

서구의 독특한 역사발전에서 형성된 자유주의 사상은 산업혁명 당시 아담스미스에 의해 자본주의로 구체화 되었다. 이는 갈브레이스 교수(1908-2006)는 자신의 저서 ‘불확실성의 시대’(1977)에서 서구사회는 르네상스를 맞이하여 기독교 유일신에 대한 불신으로 시작해서 기존의 모든 가치를 의심하는 과정을 겪으며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즉 실존하는 자신의 개인성을 중시하는 자유주의(개인주의) 사상이 형성되면서 절대 봉건제를 부정하기에 이르렀다고 논변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면서 가장 확실한 존재로서, 본질보다 앞서는 실존하는 자신의 삶에 의미를 두게 된 것이다.

하여 자본주의는 형이상학적 관념의 세계보다 형이하학적인 현실에 존재하는 물질의 확실성을 통해 인간 문제를 해결코자 하는 경향에 의해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비록 자신이 고립무원의 개인으로 전락할지라도, 과거와 달리 인류가 문명화된 상태에서 실존하는 자신이 미개인으로 퇴보할 수 없을 것이라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하여 이기적 개인의 생존경쟁을 자유롭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체계화한 자본주의 생활양식은 분업과 협동으로 공공선을 이루고자 하는 인간의 심성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은 태고로부터 이기적인 면과 이타적인 면을 균형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음을 상기해 볼 때, 아담스미스 시대의 자본주의가 인간의 이기심을 배양하고, 양성화하여 탐욕을 정당화한 것 등은 경제 규모가 작은 사회에서 유용함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천문학적 경제 규모가 되면서 이기적 편향성으로 형성된 위험한 사회가 됨에 따라 인간의 이타심과 균형을 이루는 탈자본주의적인 정치경제 제도가 필요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오늘날 천문학적 경제 규모로 인하여 인간의 이기심을 극단화하는 자본주의는 신인류에게는 부적합함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류의 대다수가 문명인이 된 지구촌 시대는 인간의 사회성이 우선하며, 개인성과 균형을 이루기 위한 새로운 모계적 분배양식을 세계화(보편화)할 수 있는 체제의 성립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무한 경쟁과 절대적 양극화로 인하여 몰락한 중산층의 부재는 중산층이 감당했던 나눔이나 양보할 의사가 결핍되고, 무의식적으로 적대 의식을 갖게 되는 위험한 사회가 되었으며, 이로 인해 유발되는 사회적 비용의 폭발적으로 증가로 인하여 비효율적인 사회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지구촌 시대의 자본주의 분배양식은 ‘풍요 속의 빈곤’을 만들고 있으며, 절대적 양극화로 대다수 사람은 좌절감과 자포자기 상태가 됨으로써, 공격적 태도로 변모케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유경쟁을 하는 만큼 불안정이라는 대가를 치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경쟁은 증오심과 절대적 양극화로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더는 잃을 것도 없게 됨에 따라 자포자기 상태의 사람들이 점증하고 있다.

하여 자본주의가 상대적인 박탈감을 부추기는 ‘상극의 삶’을 살도록 강제하는 체제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자유경쟁에 의해 사회 전체가 발전했다는 측면도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오늘날에 이르러 거대규모의 경제거래로 인한 충격도 엄청남에 따라 이에 걸맞은 상생의 삶을 살게 하는 새로운 체제가 필요함을 알 수 있다.

즉 자본주의가 지구촌 시대를 살아가는 신인류와 불 합치함에 따라 인류는 모계적 분배양식을 근간으로 하는 적극적 복지사회의 구현을 위한 모민주의 체제가 적합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행복한 인생을 위해 풍부한 상상력으로 만들어내는 창조력을 발휘할 수 있는 ‘관계의 삶’을 살 수 있는 적극적 복지사회를 구현할 수 있는 체제를 말하는 것이다.

 

 

4.2 참담한 역사적 경험

 

“자유주의는 인간 내면생활을 발전시켜 나아가는데 필요한 외형적 전제조건들을 마련해주는 것만을 목표로 하고 있다.” (99)(이지순 역, 루드비히 폰 미제스, 자유주의, 한국경제연구원, 1990, 20p)고 함에 따라 자유주의는 경제적 자유를 통해 물질적 풍요를 이루는 것에 비중을 두며, 내면세계에 대해서는 이차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아마도 오랫동안 부계주의에서 형성된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충돌이 많은 부계사회는 부국강병을 해야 함에 따라 높은 세율이 적용되는 억압적인 사회로써, 대다수 사람은 내면세계를 생각할 여유가 없을 만큼 궁핍이 만성화된 상태였기 때문일 것이다. 하여 전체주의 사회로써 부계사회는 권력 양극화와 신분제로 인한 고통을 받은 민중은 자유주의 사상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는 수천 년에 걸친 전체주의 정치에서 시달려 빈곤했던 사람들은 억압에서 해방되기를 염원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후일 시민혁명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고, 혁명의 성공으로 근대사회가 성립된 후, 무정부적인 수준 정도의 간섭이 없는 기능 국가로서 야경국가를 요구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복지 책임이 개인에게 있음을 전제하는 초기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의 지나친 착취로 민중들은 구시대나 다름없는 빈곤한 생활을 하면서도, 어떤 누구에게도 원망할 수 없었다. 즉 근대민주주의 사회는 자유주의를 위한 형식적 민주주의(반쪽민주주의) 사회였다. 다시 말해서 실질적 민주주의를 위한 경제적 민주주의가 없었다.

이는 자본주의 속성에 충실했던 초기자본주의 사회에서 이해관계의 첨예한 대립과 지나친 경쟁을 유발하여 제국주의를 만들고, 이에 반동한 공산당의 출현과 더불어 세계 1차, 2차 대전이나, 냉전 시대 등이 만들어진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자본주의사회가 되면서 탐욕의 배양과 함께 대규모경제로 인하여 전대미문의 대부호가 등장하면서 더 많은 소유를 위한 의지 작용으로 인한 각축장이 된 것이다. 이는 인간은 문화적 존재임에 따라 사회성과 개인성의 균형을 이루어야 함에도, 이기심을 동기유발로 하는 자본주의에서는 불균형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하여 자본주의는 인간의 이기심으로 인하여 유발되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방지하기 위해 제삼자인 국가의 간섭이 필요하다고 하며 전체주의 사회를 정당화했던 홉스의 논변과 상반됨을 알 수 있다.

물론 자유주의가 이기심을 극대화하는 삶을 정당화하면서 무정부를 이상으로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참담한 역사적 경험과 더불어 오늘날 위험한 사회를 만들어가며 관계를 단절하고 있다는 점에서 민주적 분배양식으로 보완해야 함을 이해할 수 있다.

아무튼 전체주의에 반동하여 생성된 자유주의(개인주의)는 전체의 목적보다 개인이 중요하다는 절대적 개인을 강조한 사상이다. 물론 자유주의자는 인간의 이기심에 의해서 인류의 총체적 이익을 증진케 됨에 따라 결과적으로 공공선을 이루게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자유주의자들은 개인의 이기적 역할이 인류의 물질적 풍요로 이어져서 인류가 번영할 것으로 믿음에 따라 인간성에 대해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헌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자유주의(개인주의)의 심리적 신조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가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 즉 인간을 이기적이고 냉정하게 계산하고, 본질적으로 무기력하고 원자적이다.” (100)(E. K Hunt, 자본주의 전개와 이데올로기, 정연주 역, 비봉출판사, 1986, 55p)

그리고 “자유주의 사고에서 만들어진 자본가적 사회를 자본주의라 한다.”(101)(같은 책 27p) 이처럼 자유주의에 대해서 헌트는 부정적임을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자유주의가 인류의 물질적 풍요를 위한다는 명분일 뿐, 실제로는 선진국의 경우 식민개척으로 형성한 자본축적으로 첨단 과학기술을 발달케 했으며, 이로 형성된 세계적 양극화로 대다수 사람이 빈곤층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자유주의가 인간 존엄을 위해 최소한 물적 기초를 보장하지 않고, 어떠한 개인이 독차지하고자 하는 것을 허용함에 따라 급속한 양극화와 환경오염 등으로 인류가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하여 과거 소규모 경제에서 자유주의가 적합하였지만, 오늘날 천문학적 규모의 경제와 과소비로 인해 만들어진 자원고갈, 환경오염 등의 나쁜 결과를 볼 때, 자본주의가 지구촌 시대와 불합치함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초기자본주의에서 자본가만 풍요로웠을 뿐, 대다수 사람은 빈곤했으며, 오늘날에는 지역 간의 양극화로 인해서 테러가 만연하는 위험한 사회가 되었을 뿐이다.

특히 복지축소를 근간으로 하는 신자유주의는 사회적 약자의 삶은 고단하며, 빈곤 여성은 성적 존재로 전락할 수 있다는 점에서 탈자유주의적인 새로운 분배양식이 세계화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4.3 위험한 사회를 형성

 

자본주의가 등장하고부터 인류는 단기간에 많은 대가를 치렀다. 물론 첨단 과학기술을 만들어 하나의 지구촌으로 만든 원동력이었다는 점이나, 인류를 문명화한 점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자본주의가 지금까지 만든 결과로 만들어진, 앞으로 다가올 더 큰 위험을 극복할 수 없다는 데 있다.

특히 장기적인 안목에서 볼 때, 자본주의의 속성에 의해 유발되는 양극화가 인간성 황폐화로 이어지고 있으며, 여성이 과거처럼 빵을 위해 자유를 버려야 하거나, 성적 존재로 전락하는 등의 상황이 전개되는 경우 회복 불능의 상태로 고착화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는 이미 자본주의 속성에 충실해지고자 하는 신자유주의가 절대적 양극화를 빠르게 가속하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아울러 자유주의 사상과 자본주의제도는 막스 베버가 지적하듯이 의도하지 못한 결과였다고 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대혁명의 정신인 자유, 평등, 박애를 이룩할 수도 없었고, 빈곤의 자유만 있다고 주장한 사실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하여 모계적 가치를 근간으로 하는 새로운 분배양식을 위한 적극적 복지사회가 성립되어야만, 위험한 사회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인류가 탈 양극화를 공존의 법칙으로 지적했던 절대주의 철학자 플라톤의 주장을 실천한다면 가능할 것이다. 즉 “플라톤은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이르기를 어떤 조직에서든지 최고임금이 최저임금의 5배를 넘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102)(고철기, 자본주의 종말, 물병자리, 1998, 88p)

따라서 절대주의 철학자였던 플라톤이 행복한 인생을 살기 위한 법칙으로써 ‘소유상한제’를 제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양극화를 플라톤은 부 정의한 것으로 생각했고, 불행한 인생을 만드는 원인으로 생각하였다.

다시 말해서 플라톤은 동료로서 인간 상호 간에 소유 제한으로 조화를 이루어야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종교사회였던 모계 신본주의 사회의 나눔(박애)을 생활화한 것과 부계 우월종교에서도 자비나, 사랑을 교리의 핵심으로 하는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모계 신본주의 사회에서는 나눔을 진리로 알고, 공유제로 나눔을 실천하였던 반면, 사유제를 근간으로 하는 부계사회의 등장으로 만들어진 부계 우월종교에서 나눔이 명분으로 된 경우가 많다.

아무튼 부계적 가치에 바탕을 둔 경제적 자유주의로써 자본주의가 천재지변, 인간성 황폐화, 자원고갈, 환경문제, 양극화 등을 유발하며 위험한 사회를 고착화하고 있다. 즉 지구촌 시대를 맞이한 인류는 나눔을 실천하라는 성현의 가르침을 상기해서 위기를 극복해야 할 급박한 상황에 있는 것이다.

즉 상상의 자유는 무제한일지 모르나, 행위규범으로써 자유주의는 제한적이어야 할 만큼 위기에 있는 것이다. 물론 오늘날 인류가 행복한 인생을 위한 해답으로써 삶의 질 향상이나, 존재의 삶(관계의 삶)을 위한 방안을 다 각도로 연구를 하지만 자본주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한계를 맞고 있다.

예를 들어 절대주의 철학자였던 플라톤은 행복을 위한 법칙으로써, 상한제를 제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지켜지지 않았던 것은 전체주의로써 부계주의와 상반되었기 때문에 구현하지 못한 사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여 인류가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해 플라톤의 상한제를 수용하고자 한다면, 적극적 복지사회가 성립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즉 부계적 가치를 근간으로 하는 정치경제 제도를 퇴출하여 부계와 모계가 공존하는 탈 자유주의적인 새로운 체제가 성립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한정된 재화의 적정한 분배를 위한 새로운 모계적 분배양식인 ‘소유상하한제’로 적극적 복지사회를 구현할 수 있는 정치경제 제도가 보편화되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